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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호는 본업인 약국 운영을 소홀히 한 채 우석 이후락씨의 사조직인 청수회 회장으로 우석을 돕는데 앞장섰지만 어설프게 정치권을 맴돌다가 가산만 탕진하고 말았다. 1966년 8월 공식적으로 처음 청수회 모임을 가졌던 학성동의 시민관 자리에 지금은 흥국생명 건물이 들어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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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초반 울산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 성남동에서 태화약국을 운영했던 김영호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1958년 성균관대 약대를 졸업했던 김씨는 태화동 부자집에서 태어나 사람 좋기로 소문이 났다. 그러나 본업인 약국을 멀리한 채 서툴게 정치권을 맴돌다가 약국 운영으로 모았던 돈을 모두 날린 것은 물론이고 나중에는 가정을 지키지 못해 부인과 이혼까지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김씨가 우석 이후락과 인연을 맺은 것은 60년대 초반이었다. 이 무렵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우석은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울산청년들이 중심이 되는 사조직 운영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때 눈에 든 사람이 울산의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던 김씨였다.
김씨가 우석의 사조직인 청수회(淸水會) 회장을 맡게 된 것은 그의 부드러운 심성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울산에는 오원근씨가 운영했던 울산약국과 태화약국 뿐이었다. 태화약국은 정식 약사가 운영한 울산의 제2호 약국이었다. 태화약국은 성남동 5일장 입구에 자리잡아 장사가 잘되었다.
그러나 김씨는 돈에는 관심이 없어 약국 운영을 가족들에게 맡겨 놓고 오토바이를 타고 울산 인근을 여행하는 등 취미생활을 즐겼다. 김씨와 함께 오토바이를 자주 탔던 이용호(78·전 서울신문 기자)씨는 “당시 약대로 진학한 젊은이 대부분이 졸업 후 약국을 차려 돈을 많이 벌었는데 김씨는 약국은 가족들에게 맡겨 놓은 채 친구들과 함께 놀러가는 시간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울산광역시 약사회 50년사>를 보면 초기 울산에서 약국을 차렸던 오원근과 김규형씨 등 약사들이 모두 약사회 회장이 되었는데 반해 김씨는 회장을 맡지 않아 그가 처음부터 약국운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약대 졸업 후 태화약국 개업했지만 운영 관심 없어 가족에 맡긴 채 취미생활 선거 대비 사조직 필요성 느낀 이후락이 모임 조직하자 회장으로 인연 맺어 1968년 청수회 발족 후 조직적 활동 없이 어설프게 정치권 맴돌다 가산 탕진
청수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것은 1966년 8월로 중구 학성동에 있었던 시민관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현 흥국생명 자리에 있었던 시민관은 당시 울산시 프레스센터 역할을 했다. 울산은 1962년 공업단지로 지정된 후 정부 고위 인사들이 자주 방문했지만 당시 옥교동 시청 건물이 좁아 이들에게 공업단지 현황을 브리핑할 적당한 장소가 없어 급히 건축했던 건물이 시민관이었다. 울산역에서 멀지 않은 미나리 꽝 위에 건립되었던 이 건물은 나중에 시민극장이 되었다.
시민관 행사에는 천 여 명이 넘는 울산 청년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이날 모임에 청년들이 많이 모인 것은 이 모임을 우석이 후원하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이 행사가 있은 일주일 뒤 동아일보는 ‘울산에서 여당이 이끄는 청수회가 지난 8월28일 발족했는데 이들 회원들이 농촌의 각 마을에 침투되어 청년당원 배가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청수회 회원들은 시민관 행사에서 김영호씨를 회장으로, 최종두(전 경상일보 사장)씨를 총무로 각각 선출했다. 그러나 최씨의 경우 곧 총무직을 배정호씨에게 물려주게 된다.
최씨는 시민관 행사가 있기 전부터 우석과는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시민관 행사가 있기 전 최씨와 함께 나중에 청수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는 이용호, 김종학, 윤종명이 우석의 초청을 받아 서울로 가 우석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이용호씨는 당시 우석이 울산에 올 때면 “앞으로 울산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청년들이 지역 발전에 앞장서야 한다”면서 “울산청년들이 지역 발전을 위해 일을 하면 내가 뒤에서 적극 지원하겠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회상한다.
이렇게 해 울산청년들이 자주 모이게 되는데 이때 이들 4명은 자신들이 우석을 돕기 위해서는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취직이 되어야 한다면서 직장을 부탁하기 위해 우석을 찾았다.
이들이 우석을 서울에서 만났던 곳이 반도호텔 302호실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우석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는 직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우석이 이들에게 처음 추천했던 곳이 중앙정보부였다. 우석은 이들에게 “힘이 들기는 하지만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보름 정도 기초 훈련만 받으면 중정의 부이사관급 자리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나중에 울주군수가 되는 김종학씨가 “아직 우리들은 젊은데 젊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정보부에서 일하면 주위 사람들의 인식이 좋지 않다”고 말해 우석이 다음으로 권한 직장이 서울 시청이었다.
당시 서울시청에는 범서읍 출신으로 우석의 울산농고 한 해 선배인 김정호씨가 부시장으로 있었다. 따라서 우석은 이들이 원한다면 서울시청에서 함께 일 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이 역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취소가 되었다.
대신 이들이 모두 다른 직장을 원해 이용호씨는 서울신문으로, 김종학은 청와대 민원실로, 최종두씨는 유공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윤종명씨는 자신은 취직에 별관심이 없다고 말해 직장을 얻지 못했는데 윤씨가 우석의 권유를 뿌리 친 것은 당시 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취직할 입장이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용호씨의 경우 우석이 그 자리에서 바로 장태화 당시 서울신문 사장에게 전화해 서울신문으로 갈 수 있었다.
김종학씨의 경우도 우석이 여러 직장을 권했지만 “저는 죽어도 선배님 곁에서 일하고 싶다”고 고집 해 청와대 민원실로 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민원관련 문서를 정리하는 일을 했다.
우석은 이들과 헤어질 때 봉투를 주었는데 봉투에는 10만 원 권 쿠폰 3장이 들어 있었다. 이들이 이 쿠폰을 바꾸기 위해 찾았던 곳이 반도호텔에서 가까웠던 상업은행 남대문 지점이었다. 그런데 쿠폰을 바꾸기 위해 창구에 갔더니 은행 직원이 “이 쿠폰은 청와대 발행 쿠폰이기 때문에 지점장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면서 지점장실로 갖고 들어갔다. 한참 있으니 지점장이 나왔는데 그가 바로 울산 출신으로 우석과 절친했던 고태진씨였다.
고씨는 이들을 본 후 “너희들이 지금 실장님을 만나고 오는 길이구나”하면서 지점장실로 불러들인 후 쿠폰을 바꾼 돈 외에도 용돈을 듬뿍 주어 이들이 그 돈으로 서울에서 일주일 동안 잘 놀다가 내려왔다는 후문이다.
이후 최종두씨가 다시 우석을 찾은 것은 시민관에서 청수회 모임이 있고 난 후였다. 시민관 행사를 할 때 청수회 취지문을 최씨가 썼는데 이 글을 서울에서 본 우석이 최씨를 부른 것이었다.
최씨를 만난 우석은 취지문을 잘썼다고 칭찬한 후 청수회 이름을 ‘푸를 청자(靑)’로 하지 말고 ‘맑을 청자(淸)’로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해 이를 고쳤다.
최씨가 김영호와 함께 청수회 이름을 지을 때는 청년들이 모이는 단체이기 때문에 젊은 청자를 썼지만 우석이 회원들이 젊은 것도 좋지만 기백 있는 젊은이들이 맑은 정신으로 모여야 한다고 말해 회의 이름을 고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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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 우석은 서울에 있으면서도 울산 청년들에 대한 배려가 컸다. 우석은 울산 청년들이 자신을 찾아오면 항상 ‘울산에서 서울까지 와 밥도 먹지 못하고 돌아다녀서는 안된다’면서 청진동으로 데리고 가 식사 대접을 했다. 당시 우석이 울산 청년들을 데리고 자주 갔던 청진동 식당이 경주 할매집이었다. 우석은 이 식당의 추어탕을 좋아했다.
이용호씨는 “청수회가 1968년 조직되긴 했지만 이후 선거에 동원되어 조직적인 활동을 한 적이 없고 특히 우석을 위해 따로 한 일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김영호 회장만 해도 7대 총선에서는 우석이 울산에서 출마할 것에 대비해 자신의 경비를 써가면서 조직 관리에 힘썼으나 이 선거에서 우석이 설두화씨를 대리 후보로 내세우는 바람에 가산만 탕진하고 말았다.
이후 우석이 중앙정보부장으로 갔을 때는 김씨도 약국을 부인에게 맡긴 후 서울로 가 6국에서 일했다. 10월 유신이 일어났을 때는 심완구씨가 운영했던 무교동의 ‘치술령’ 식당 등을 찾아다니면서 유신을 비방한 후 서울로 피신한 이일성과 김형식씨 등 야당 인사들을 체포하는데 앞장섰다. 우석이 중정을 그만 둘 때 다시 울산으로 와 약국을 운영했던 그는 나중에 부산으로 가 약국을 차렸지만 큰 돈을 벌지 못하고 뇌경색으로 쓰러져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돌아갔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