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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은혜동산 JESUS - KOREA 원문보기 글쓴이: 영.분별자
칼빈주의 사상
*비키 박사의 글의 특징은 사변적이자 스콜라주의적인 형태를 지양하고, 삶 속에서 발생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정체성과 세계관에 대하여, 칼빈주의적 사상 체계에 입각한 청교도들의 삶의 신학을 통하여 성경적으로 명쾌하게 해답을 주는 방식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청교도 운동의 전문가이자 후기 종교 개혁 시대를 연구한 학자로서, 칼빈주의의 출발을 존 칼빈에 머무르지 않고 신구약성경을 시발점으로 하여 초대교회 성경적 교부들을 중심으로 중세의 왈도파,영국의 존 위클리프, 보헤미아의 얀후스, 토마스 브래드워딘, 리미니의 그레고리 등에서 그 연원을 찾고 있다.
즉 칼빈주의는 칼빈 한 사람의 신학 사상의 총체가 아니라, 성경중심주의이자 개혁신학의 신앙과 사상과 삶의 총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주의라는 이름과는 무관하게 칼빈주의란 칼빈의 사상 이상을 뜻하는 단어이다.
*청교도는 칼빈주의의 심장이다.
청교도들은 칼빈의 제네바학교를 통해 양육된 가장 이상적인 개혁주의 신앙인들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모토로 하는 칼빈의 신학 사상을 기초로 하여 청교도 신학자들은, 구원의 서정 중 소명, 믿음, 회개, 거듭남, 칭의, 양자의 영에 대하여 성경에 입각한 구체적인 설명과 아울러 신자의 사상과 삶의 열매로서의 성화를 강조함으로써, 칼빈주의가 거듭남과 예정에 국한된 사상적 체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삶임을 제시한다.
* 칼빈주의의 핵심 – 하나님 영광, 그리스도의 삶
칼빈주의자들이 수동적이라는 오해가 있다.
그러나 본서는 칼빈주의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광과 아울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삶을 이루고자 성화의 삶을 추구하며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삶을 구현하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 성화를 성도가 이루어감에 있어서 성화의 주체이자 조성자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가장 중요한 수단임을, 성경을 근거로 논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 배제된 인간의 노력, 능력, 수단, 방법으로는 결단코 성화를 이루어 갈 수 없음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주의의 결실- 예배의 갱신과 회복
칼빈주의는 예배를 중요시한다.
마틴 루터가 미사를 수정하여 보완된 예배를 제시하고자 하였음에 반하여, 칼빈주의자들은 초대교회의 공동체 중심적인 예배와 성령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고 삶 속에서 이를 확증하는 역동적인 산 예배를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예배의 일환으로 말씀의 중요성과 설교의 중심적인 예배를 추구하였다.
특히 말씀 사역자는 경험적인 칼빈주의적 설교자가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 중심의 말씀 선포와, 자아 중심이 아닌 삼위일체 중심적인 설교와, 과거의 성경적 사건과 사실을 현재의 삶 속에 적용하는 설교를 구현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함을 논증하고 있다.
청교도였던 리차드 백스터는 적용이 없는 설교를 생명력을 상실한 것으로 일축하였다.
*칼빈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임하도록!
그들의 연애와 결혼관을 엄청난 자료를 통하여 보여 준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자녀들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양육하여 가정과 교회와 지역사회와 전 세계에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키워 낼 수 있는지 그 방법도 상세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노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또한 도덕적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율법폐기론자 또한 비성경적임을 논증한다.
* 한국 교회 성도들을 위시한 성경적 사람들이 꼭 숙독해야 할 필독서!
세계 교회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 등 현대사조에 물들어 죽어가고 있다.
추천의 글: 성경적 신앙 ‘칼빈주의’ 마이클 A.G헤이큰
나는 개혁주의 신앙 또는 칼빈주의 신앙이 기독교회의 역사 가운데 가장 성경에 가까운 신앙이라고 믿는다.
나는 대학 시절 1974년 회심을 경험한 후 7년 동안 은사주의 운동에 깊게 물들어 있었다.
몇몇 교부들과 존 웨슬리, 그리고 18세기 학자들이 표현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환상에 빠지기도 하였다.
나의 신학적 관점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은 어거스틴이었다.
그의 고백록을 처음 읽었을 때, 그 책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조지 휫필드 전기, 이안 머리의 마틴 로이드 존스 전기, 그리고 존 오웬의 신자의 죄죽임 교리 등으로 인하여, 칼빈주의가 성경적 기독교에 대한 최고의 발현이라는 사실에 대해 눈 뜨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칼빈주의가 구원론에 국한되지 않고 예배와 영성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독교 자체가 그러하듯이 실제로 칼빈주의는 정치와 경제와 예술과 건축에 이르는 삶의 모든 국면에 적용된다.
본서의 내용은 충분하게 독자에게 찰빈주의가 모든 영역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칼빈주의를 출간하며 조엘 비키
교회와 일상 생활에 영향을 끼치며 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의미를 함축하는 방식으로 저술된 칼빈주의의 지성적이고도 영적인 강조점을 다루는 책의 필요성을 느꼈다.
칼빈주의를 다루는 책들이 시중에 이미 나와 있으나 칼빈주의의 모든 부분을 다루는 책은 발견하기 힘들었다.
루터주의는 1580년에 그들의 모든 신앙고백을 한 권의 책 안에 보기 좋게 모았고, 그것을 일치서(the book of concord) 라고 불렀다.
그러나 칼빈주의 신앙은 너무나 풍성해서 16,17세기에 걸쳐서 적어도 세 집단의 신앙고백적 진술, 즉 영국-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의 신앙고백으로 발전되었다. 이 세 집단의 신앙고백은 서로 전혀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상호보완적이다. 이러한 칼빈주의의 포괄성은 참되고도 열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청교도주의를 통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된다. 청교도들의 신앙과 삶은, 그들이 어떻게 한쪽 눈으로는 영원을 바라보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세상을 보면서 전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는지에 대해 아주 많은 것들을 교훈해 준다. 제 6부 칼빈주의의 목적(송영적 칼빈주의) 에 관해서는, 사무엘 루터포드의 서간문보다 나를 감동시켰던 책은 없다. 나는 여러분들이 견실하고도 명성 높은 칼빈주의자들의 저작들에 몰두하기를 바란다. 칼빈의 기독교와 같은 16세기 고전을 읽어라, 기독교 강요보다는 좀 더 쉬운 수준으로 50개의 설교를 통하여 성경 교리들을 가르치는 Henry Bullinger의 the Decades 를 읽어보라.또한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존 플라벨의 생명의 근원(the fountain of Life) 과 같은 17세기 고전들을 읽어라. 빌헬무슨 아 브라켈의 함당한 기독교 예배(christian’s reasonable service)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과 정서(religious affections)를 읽으라. 19세기에 들어와서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성령의 사역(work of the holy spirit), 찰스 스펄젼의 다윗의 보고, 20세기 마틴로이드존스의 산상수훈과 존 머리의 조직신학(저작전집 제 2권)을 읽어보라
만일 우리가 우리의 종교 개혁적 유산에 감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의 진정성은 결핍될 것이며, 그 누구도 참된 평강과 기쁨과 겸손이 결핍된 우리를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종교 개혁적 유산대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소금의 역할을 할 수도 없을 것이고 밖에 버려져 세인들에 밟히게 될 것이다.
1장 칼빈주의의 기원
1. 칼빈주의의 태동
칼빈주의는 개신교의 종교 개혁이라고 불리는 유럽의 16세기 종교적 갱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종교적 현상은 어느 특정한 시간이나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한 수도사의 1517년 10월 31일의 한 용기있는 행동 이전 그의 탑의 경험(tower experience) 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루터는 이 경험을 통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라는 종교개혁의 명확한 교리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종교 개혁은 초기에 발생했던 일련의 갱신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갱신 운동을 주도한 주요 인물들로는 Peter Waldo and 알프스 지역에 거주했던 그의 추종자들, 존 위클리프와 영국의 롤라드파, 그리고 존 후스와 보헤미아 지역의 그의 추종자들이 있다. 그리고 토마스 브래드워단과 그레고리 리미니 등과 같은 신학자는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들은 오히려 개신교 신학이라고 알려진 신학에 훨씬 더 근접했던 인물들이다. 이 모든 사람들은 종교 개혁자들이라기보다는 종교 개혁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종교 개혁의 중요성들을 예측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은혜로운 믿음으로 말미암는 중대한 칭의 교리에 대해서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은 도덕적, 교리적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들의 대적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의 폐해에 관해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종교 개혁은 주로 로마 카톨릭교회의 악습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루터가 로마 카톨릭교회를 파괴하고 철저하게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초창기에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악행을 정화하고자 했던 것 뿐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은 교회 내에 존재했던 문제들에 대한 반발이라는 면을 배제하고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발을 일으킨 문제들은 무엇인가?
1) 교황주의적 남용
이 시기의 교황권은 신학적이고도 실제적인 면에서 가장 많이 남용되었다. 그 당시에는 부도덕한 행실들이 난무했는데, 교황은 오히려 그러한 죄악들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었다. 결국 은혜는 값싼 것이 되었고, 교회는 맹세, 금식, 성지 순례 여행, 미사, 유골 숭배, 낭송, 묵주 기도, 그 외의 복잡한 체계를 매개체로 한 상업 종교가 성행하고 말았다. 이것에 대한 교황의 명령은, 회개하라가 아니라, 고행하라는 것이다.
2) 교황주의의 거짓된 권위
개신교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은 성경을 역사적으로 연구하면서, 교황에게 교회의 머리로서의 사도적 권위가 있다는 카톨릭의 주장에 의문을 던지게 되었다.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가 세워지는 반석은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고 결론 내렸다. 처음에 개신교회는 교회를 올바로 섬기는 개혁된 교권 제도에 대해서는 인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개혁을 반대한 교황들의 잔인한 핍박으로 말미암아 많은 개신교회들이 로마의 교황들을 적그리스도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3) 말씀의 속박
교회는 일반 신자들에게서 성경을 빼앗았다. 그것을 교회의 종교 회의와 주교들과 학자들과 교회법학자와 풍유적 해석자들에게 귀속시켜 버렸다. 그래서 개신교회는 이런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계급주의적 속박으로부터 성경을 구출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대하여 Malcolm Watts는 이렇게 기록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정경의 순수성을 자신들이 추가한 가경과 혼합하였으며,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에 위조된 그럴듯한 막대한 전승을 더하였고, ‚신부들의 만장일치적 동의‘와 ‚성모 마리아 교회‘에 따른 해석만을 인정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특히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은 마리아와 성인들과 성상들에 대한 이적적인 이야기를 통해 자학하고, 수많은 정교한 예법과 의식을 동반한 미사의 중요성을 찬미함으로써 설교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성경의 권위를 격하시켰다. 결국 설교는 타락했고, 실상 거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에 강력하게 항거했고,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회복하기 위해 투쟁했다.“
4) 수도원주의의 조장
개신교회는 로마 교회의 종교적 삶의 우월성이라는 개념에 반대하였다. 그들은 수도원주의를 영성으로 가는 유일하고도 최고의 길로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모든 신자들의 만인 제사장직을 강조하였고, 성직과 세속적 삶을 통한 교회안에서 이러한 계급의 구별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5) 중보의 강탈
마리아와 성인들의 중보, 그리고 화체설을 배격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라고 믿었다. 성례는 주의 만찬과 침례로만 제한했다. 이렇게 함으로 교회와 사제들의 중보적 권세를 벗겨내고, 성례를 통한 구원에 반대하였다.
6) 선한 행실의 역할
구원에 있어서 은혜와 행위가 모두 필요하다는 반펠라기우스적 사상을 배격하였다. 로마카톨릭의 남용에 대한 개신교도들의 반응은 점차적으로 „오직“ 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솔루스를 중심으로 한 다섯 가지 종교 개혁의 슬로건으로 정립되었다.
개신교 로마 카톨릭
오직 성경 성경과 전통
오직 믿음 믿음과 행위
오직 은혜 은혜와 공로
오직 그리스도 그리스도,마리아, 성인들
오직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성인들,교회의 성직자들
첫 번째 슬로건은 근본적인 문제인 권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다음의 세 가지는 구원의 기초를 다루고, 마지막 슬로건은 경배와 예배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초기 개신교회, 즉 루터파와 개혁주의 신자들은 이 다섯 가지의 종교 개혁 슬로건을 환영했다.
이후에 유감스럽게도 루터와 울리히 쯔빙글리는 1529년 마부르크 회담 때에 성 만찬에 대해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결론의 차이 때문에 서로 결별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개신교회는 두 가지 전통, 즉 루터주의와 칼빈주의로 나뉘게 되었다. 칼빈주의는 존 칼빈과 그의 동료 개혁자들의 저작들을 통해 표현되고 이해되는 바, 개혁주의 전통이 되었다.
2. 개혁주의(칼빈주의) 신앙의 확산
스위스의 쯔빙글리와 그의 사후 그것을 수립하고 조직했던 하인리히 불링거가 개혁주의 전통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위대한 대표자이며 영향력 있는 해설자인 칼빈(1509-1564) 은 제네바를 개혁주의 도시의 표본으로 삼았다. 제네바는 16세기의 가장 중요한 개신교 중심 도시가 되었는데 그것은 칼빈 자신 뿐 아니라 제네바 신학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제네바는 다양한 언어로 출판할 수 있는 출판사들을 서른 곳 이상이나 가진 도시로, 유럽 개신교 출판의 중심지가 되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와 주석과 설교와 지도력을 통해 개혁주의 개신교를 체계화시켰다.
그의 훌륭한 사역으로 인해 오늘날에 있어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는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게 되었다.
그 후 개혁주의 운동은 독일로 퍼져 갔고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이 시작된 하이델베르그는개혁주의 사상의영향력 있는 중심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대부분은 루터파로 남게 되었다.
칼빈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독일의 소수 루터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Phillp Melanchthon 이다.
그는 루터의 각별한 친구로서 동료들로부터 몰인정하게 „칼빈주의 비밀 당원“ 이라고 불렸으며, 그의 몇몇 추종자들은 루터의 사후 루터파와 사이가 벌어져 독일의 개혁주의 교회에 가입했다.
또한 칼빈주의는 헝가리, 폴란드, 북해 연안의 저지대에도 뿌리를 내렸다.
특히 네덜란드에는 칼빈주의가 관통하였다.
네덜란드의 칼빈주의는 1618- 1619년에 개최된 도르트 종교 회의에 의해 발전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 초반 영국의 청교도 운동과 비슷한 화란 종교개혁에 의해 강화되었다.
개혁주의 운동은 프랑스에도 상륙하여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564년 칼빈이 죽던 해에 프랑스 인구의 약 20퍼센트인 200만명이 개혁주의 신앙을 고백했다.
사실상 귀족들과 중산층의 절반 이상이 개혁주의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성바롤로매 학살 등을 비롯한 잔혹한 박해와 시민전쟁으로 인하여 개혁주의의 확산은 중지되었고 16세기의 박해와 광풍과 공격으로부터 전혀 회복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위그노(Huguenots)라고 알려진 프랑스를 떠난 개혁주의 신자들은, 그들이 정착하는 모든 곳에서 개혁주의 운동의 새로운 영적 생동감과 열정을 불러 넣었다.
종교 개혁 운동은 갤리선의 노예로 19개월을 살았던 존 낙스의 지도 아래 스코틀랜드까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1560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교황의 권위를 배격했고, 이듬해에 스코틀랜드 개혁주의 교회가 재조직되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세대의 수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아일랜드와 웨일즈인들처럼 불굴의 칼빈주의자가 되었다.
헨리 8세는 종교 개혁에 대해서 너그러운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신학을 따랐으며, 자신이 영국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라는 수장령을 선포하였다.
헨리 8세의 어린 아들 에드워즈 6세는 의회와 함께 참된 종교 개혁 운동을 이루고자 하는 숭고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짧은 치세 기간(1547-1533)에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Thomas Cranmer 켄터베리 대주교가 집필한 설교학(Homilies)와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그리고 42개 신앙 조항(42 Articles of Religion) 등을 통해 얻은 유익이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종교 개혁의 유산은 튜더 왕조의 피의 메리가 자신의 치세 기간 동안 카톨릭 미사를 다시 행하고 300여명의 개신교인을 죽이면서까지 하며 로마 교황권에 충성함으로써 완전히 역전되었다.
그러나 크래머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피는 영국 개신교 운동의 거름과 씨앗이 되었다.
이후에 메리의 이복 자매였던 엘리자베스가 메리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자, 많은 개신교인들은 에드워드 6세가 시작했던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행될 것이라는 열렬한 소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당시 국교의 현상 유지에 만족했고 비국교도들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그녀의 관심은 부국강병이었고,국론의 통일이었지 신앙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예배와 경건과 정치와 문화에 있어서 많은 것을 개혁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박해를 받았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이런 엘리자베스의 미지근한 개혁은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고, 결국 경멸조로 청교도라 불리는 좀 더 철저하고도 용감한 칼빈주의가 탄생하게 되었다.
청교도주의는 1560부터 시작되어 170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청교도들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예배의 정결함, 그리고 주교의 통치를 장로회주의라는 방식으로 대치하는 교회 정치의 정결함을 요구하였다.
또한 그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 삶의 위대한 거룩과 정결함을 요구했다.
James Packer는 이러한 청교도 운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청교도 운동은, 교회와 나라와 가정과 교육과 전도와 경제와 개인적 훈련과 헌신과 목회적 돌봄과 권한에 있어서 국가적이고도 개인적인 영적 갱신이라는 비전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복음주의 거룩 운동이었다.“
청교도주의는 교리적으로는 매우 단호한 칼빈주의였으며, 경험적으로 볼 때는 따뜻하고 전달력이 강하였다.
복음적으로는 매우 공격적이고 과감하면서도 매우 부드러웠다.
교회적으로는 하나님 중심적이고 경건했으며, 정치적으로 볼 때는 왕과 의회와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성경적이고도 균형 있게, 양심에 따라 조정했다.
장로교도들과 감독주의자와 회중주의자들 모두가 칼빈주의 운동의 한 부분이었다. 그 중 일부는 제임스 1세의 치세(1603-1625)에 영국국교회로부터 탈퇴하기도 했다.
그들은 분리주의자, 비국교도라고 알려졌으며, 대개 회중교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청교회 국교회주의자들은 대부분 영국국교회 조직 안에 남아 있었다.
결국 칼빈주의는 신대륙으로 건너간다.
메세추세츠만 식민지역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어느 정도 영국국교회의 법률을 계속해서 허용했지만,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이주하여 플리머스에 정착한(1620) 청교도들은 주로 분리주의자들, 즉 비국교도들이었다. 1620년 플리머스가 설립된 때부터 18세기 말엽까지 뉴잉글랜드는 철저하게 칼빈주의적이었다.
이 밖에도 1620년대부터 네덜란드 칼빈주의자들은 뉴욕에 정착했고, 17세기 말엽에는 수천 명의 위그노들이 뉴욕과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에 도착했다.
1690년부터 1777년까지, 대부분 개혁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던 이십만명이 넘는 독일인들이 중부 식민지역에 정착했다.
마지막 지류는 장로교도였던 스코틀랜드인과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이었다.
광범위한 이민과 내적 성장의 결과로 1776년에는 이 지역의 인구는 300만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이들 중 적어도 3분의 2는 명목상으로는 칼빈주의자였다.
독립 전쟁이 발발할 당시의 교파들은 가장 큰 순서대로 나열해 보자면, 회중교회, 국교회,장로교회,침례교회,루터교회, 독일개혁주의교회, 네덜란드 개혁주의 개혁순이다.
그 규모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교회는 열 번째였고, 감리교회는 열두 번째였다.
개혁주의 운동이 가장 광범위하고도 강력하게 나타났던 곳은 네덜란드, 영국,독일,헝가리, 북미였다.
개혁주의 운동은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도르트 신조라는 세 가지 공통적인 신조를 교리적 신앙고백으로 삼고 있는, 대륙의 개혁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웨스트민스트 표준 문서, 즉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와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에 잘 표현된 영국-미국의 장로교주의이다.
그러나 이 두 체계가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고,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도 않았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운동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아계 스위스인이었던 프란시스 튜레틴(1623-1687)은 미국의 장로교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는 1870년대까지 그의 조직신학을 가르쳤으며 이 후에는 이것이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으로 대체되었다.
3. 칼빈주의와 루터파의 차이점
1) 성찬에 대한 이해
루터파는 그리스도께서 성찬 안에(in), 함께(with), 아래(under) 물질적으로 현존한다는 성체공존설(공재설)을 주장
오직 실재하는 역사적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고자 했던 것이다.
반면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성육신하신 역사적 그리스도는 부활하고 승천하셨으므로 이제 그분이 승천하기 이전의 방식으로 성찬에 임재하시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영적 실재의 개념은 그의 영을 통하여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칭한다고 말했다.
2) 율법의 주요 기능
루터는 일반적으로 율법을 부정적이며 주로 죄와 사망 또는 마귀와 관계된 것으로 간주했다. 율법의 주요 기능은 죄인에게 죄를 선교함으로써 그를 비하시키고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하는 것 뿐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을 신자의 안내자로 간주했다.
신자는 반드시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감사에 대한 순종의 반응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따라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신자에게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표현하는 길을 제공하는 것이다.
3) 구원에 대한 이해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리고 그의 대속적 속죄 사역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루터파는 칭의 교리를 강조하는 것에 머무르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고 반면에 칼빈은 칭의교리를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루터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성화교리를 강조했다. 즉 칼빈주의는 구원이 신자의 삶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설명함에 있어 루터주의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었다.
4) 예정론에 대한 이해
16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루터주의자들은, 오직 선택교리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유기라는 이중 예정 교리를 주장했던 루터와 칼빈주의자들로부터 떠났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와같이 예정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루터파가 포괄적인 하나님의 주권 뿐만 아니라 로마서 9장의 내용과도 배치된다고 말하였다.
칼빈주의자들은 선택이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확신했고,유기 역시 주권적이며 정당한 것이라고 믿었다. 천국에 들어가는 그 어떤 사람도 결코 그럴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지옥에 떨어지는 사람 역시 어떤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구원을 찬미하는 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인 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에 대한 책임은 자기 자신을 그곳으로 가도록 허용한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5) 예배에 대한 이해
루터의 개혁은 중세 교회의 예전을 존속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칼빈보다 훨씬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루터주의자들과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이 예배를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루터주의자는 성경에서 금지하지 않은 모든 요소를 예배 안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신약성경이 명령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예배에 포함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4. 오늘날의 칼빈주의
종교 개혁으로 인하여 생겨난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 유파들은 <39개 신앙조항> 국교회, <도르트 신조> 개혁주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장로교주의, <사보이 선언> 회중주의, 그리고 1689년의 <침례교 신앙고백서> 침례교주의라는 칼빈주의적 신앙 고백에 기초해 있다.
이 모든 신앙고백서들은 유아세례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종교 개혁의 신앙은 수십 년 동안 개신교 복음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칼빈주의 신학은 유럽의 계몽주의나 미국의 피니주의(Finneyism)와 같은 여러 가지 영향들로 인하여 혼합되고 희미해졌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에 접어들어서는 19세기에 일어난 자유주의 신학과 다시 출현한 알미니안주의로 인하여 서구 세계의 칼빈주의 신학이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에 다시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의미심장한 수준으로 칼빈주의적 교회와 교파들이 태동되었다.
또한 1960년대 이후로 칼빈주의 작품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나고 있으며, 여러 나라에서 칼빈주의 컨퍼런스가 개최되고 있다.
칼빈주의의 미래는 아주 밝다. 왜냐하면 칼빈주의가 하나님의 전체 경륜을 믿고 실천에 옮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많은 것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는 명민한 신앙과 따뜻한 마음의 영성을 가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칼빈주의자들은 이렇게 바울처럼 고백한다.
„이는 만물이 그분께로부터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께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분께 영원히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
결국 이것이 성경과 칼빈주의와 삶 그 자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