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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리태근
30년 전만해도 연변 시골의 화장실은 살풍경이었다. 도시에는 공동변소가 있는데 농촌에는 공동변소가 없었다. 화룡시두도진은 평강벌의 정치 문화 중심이라 ‘변소혁명 (시골에서는 화장실을 변소라 함)’을 억세게 틀어 쥐였다. 궁둥이 들여다보이는 공동변소는 겨울이면 오물이 뾰족산처럼 치솟아서 궁둥이를 찌른다. 새벽부터 변소 앞에 늘어선 사람들이 배를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구르는데 전쟁이 따로 없다.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골목에 줄줄이 늘어선 개인변소마다 자물쇠를 놓았다. 그래서인가 애들과 늙은이들의 목에는 변소열쇠가 금목걸인양 걸려있었다.
변소대권을 틀어쥔 사람은 정권이나 잡은 듯 우쭐했다. 변소규율도 엄격했다. 대낮에 혹간 지나가던 사람들이 급한 일부터 처리하자고 사정하면 전혀 안하무인이디. 더구나 아침시간에 ‘면목’을 내는 건 도무지 용서할 수 없단다. 동네 노인들이 딱한 사정을 봐주다가 봉변을 당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또다시 착오를 범하면 열쇠를 몰수한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런데 인정사정 모르는 아이들이 변소문을 잠그지 않은 잠간 사이 사람들이 몰려들어 공동변소로 변했다. 며칠 사이에 오물이 넘쳐나서 발 들여놓을 자리가 없다. 뉘 집에서 잘못했으면 부모가 책임지고 오물을 쳐내야 한다. 만약 거절하면 열쇠를 몰수당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변소를 치는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동네 사람들은 사정하다 못해서 변소요금을 내겠다고 자진했다. 결국 줄집에 사는 이들의 딱한 처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수익은 줄집 노인들의 복리로 쓰기로 했다.. 처음 며칠은 그런대로 질서가 잡히는 듯 했는데 보름도 안돼서 외상이 생기면서 말썽이 일어났다. 오전짜리 두부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딱한 형편을 봐서라도 월말에 계산하면 안 되는가? 그런데 이상하다. 외상 고기 값은 싫은 대로 갚는데 밀린 변소장부는 제때에 청산하지 않는다. 당장 바지에다 쏠때깥아서는 금목걸이도 주겠다던 사람들이 바쁜목을 지나면 까많게 잊어버리는게 문제다.
아무 때든 변소치기가 말썽이였다. 진정부 위생담당자는 날마다 오물을 제때에 처리하지 않는 변소를 폐쇄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더구나 진벙부 대문옆에 술취힌 나그내처럼 빼딱하게 서있는 우리동네 변소가 늘쌍 말썽거리였다. 지나오고 자나가는 사람마다 오물이 넘쳐나는 우리 동네 변소를 눈에 든 가시로 보았다. 주민들이 무작정 없애라고 고발이 대단하단다. 핏박에 량산에 오른다고 동네 남성들이 나서서 청소를 하기시작했다. 식사 때마다 변소문제 때문에 말썽이 일어나서 다들 삼켰던 음식물이 올라온다고 야단이다. . 변소 때문에 귀찮아서 이사 가는 집들도 있었다…
향진은 그런대로 공동변소가 있어서 억지로 뻗치는데 내가 나서자란 시골은 살풍경이다. 여기 저기 서 있는 변소들은 술에 취한 나그네처럼 바자굽에 쓰러질듯 기대여 있었다. 변소는 하반신을 가리울정도로 가마니를 쳐놓았다. 아예 문짝도 없었다. 변소 벽은 가마니로 대강 걸쳐 놓았는데 바람에 기발처럼 펄럭인다. 화장지야 더 말해서 뭘 하랴. 아이들이 쓰다 남은 공책이면 고급이요, 옥수수속갱이 가랑잎이었다. 때도 시도 없이 달려가던 아낙네들이 망짝 같은 엉덩이를 그대로 휘둘러서 눈부신 광경이 펼쳐졌다. 아낙네들의 하얀 엉덩이는 총각들의 눈뿌리를 뺀다.. 어떤홀아비들은 전문 아낙네들의 엉덩이를 실컷 눈요기하다가 민병들에게 걸려 들어서 구류당하는 일도 있었다.
오죽했으면 술취한 홀아비가 뉘집 아낙네의 엉덩이에 거미가 있다고 폭로 해서 부부간에 이혼소리까지 나왔겠는가 하긴 달밤이면 생산대 회의실밖에서 보초를 서다가 얼굴이 반반한 아낙네들의 오줌자리를 뒤쫒아서 둥굴소처럼 냄새를 맡는 숫총각이 있었다는게 실말인지도 모른다. 전간(논밭)에서는 광활한 천지가 공동변소라 웃기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유리알 같은 논판에서 남정들은 돌아서면 변소인데 여자들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마을로 들어 갈 수도 없고 하여 엉덩이나 가릴 수 있는 논도랑과 밭머리에 머리를 틀어 밖은 까투리 상을 하고 뒷일을 보았다. 모짐 펴던 홀아비가 한눈을 팔다가 혼뜨검을 당한 일이 잊혀 지지 않는다…하여간 민공판 목재판에서 중간에 당원아바이를 눞혀놓고 남여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전레는 있었지만 남여변소만은 꼭 갈라놓는 게 현명한 처사였다.
나는 처음으로 한국에 가면서 중국사람의 깨끗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고급 세면도구와 새하얀 화장지까지 갖춰가지고 떠났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비누며 크림이며 화장지까지 알뜰하게 갖춰져 있을 줄이야, 그리고 웬만한 호텔마다 일회용 치솔, 면도기가 갖춰져 있고 음식상마다 음료수와 위생종이가 준비되어 있었다. 결국 가지고 갔던 소지품을 그대로 휴지통에 버리고 말았다. 언제면 우리도 한국처럼 환한모습을 하고 살까? 유리알같은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만 펄펄 내쉬던 일이 어제 같다.
자가용이 얼마나 많은지 서울거리에 주차할 곳이 앖어서 쩔쩔 맨단다. 여북했으면 자가용을 버리고 전차로 출근한다고 서울복판에 세워놓은 십층짜리 주차장 건물을 자랑하던 사장님이 얼굴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무슨말인지 미처 알수도 없었는데 오늘 내가 자가용을 몰고 모아산에 올라가 보니 태양에너지 조명등을 즐비하게 늘여 세운 휘넓은 주차장에 외제차가 꽉 박아 들어서서 주차할 곳이 없다는게 믿겹지않다. 아깔너무 참나무, 잣나무 우거진 관목림 속에 시원스레 뻗어간 조약돌 반짝이는 유보도에 ‘연변사람’들의 낭만이 물결친다.
모아산 기슭에 정가롭게 자리 잡은 화장실은 궁전이냐, 별장이냐, 새하얀 타일로 깔끔하게 꾸며놓은 화장실에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조약돌 반짝이는 유보도를 지나서 대리석이 깔린 18층 계단을 굽이굽이 감돌아 모아산 정상에 오르니 산기슭에 사과배 향기 넘쳐나고 무연한 옥토벌에 황금물결이 하늘가로 물결쳐간다. 무릉도원이 웬 말이냐, 금수강산 예로구나, 그 옛날 석탄연기에 그을리던 국자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즐비한 층집들이 땅을 차고 일어섰다. 날 따라 몰라보게 변하는 도시 한복판을 헤가르며 출렁이는 부르하통하도 좋지만 행복의 노래소리 싣고 내달리는 뽀트에 넘쳐나는 노래소리 아! 예가 바로 살기 좋은 내 고향 연변이다.
평범한 화장실에서 나라의 정신문명과 가정의 행복한 현주소를 읽을 수 있었다. 화장실은 우리 모두의 마음의 창문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화장실문화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엮어나갈 것이다.
2008년 11월 5일
싸리나무
글 리태근
모진 세월에 돈잎이 그리워서 목숨 걸고 매달리던 부업이 있다. 햇싸리를 팔아서 옷견지 해입고 묵은 싸리를 팔아서 소비돈을 마련하였다. 탈곡이 끝나기 바쁘게 ‘줴기밥’을 허리에 차고 대북골(大北沟) 십리 골짜기를 오르내린다. 햇싸리보다 사람이 더 많아서 햇싸리는 보고 죽자 해도 없다. 할 수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속의 묵은 싸리 밭을 개척한다. 묵은 싸리를 베어내고 두해를 기다려야 햇싸리기 자란다. 키가 츨츨한 묵은 싸리밭을 만나면 금전판을 만난 기분이다. 누가 볼세라 욕심스레 해 놓았건만 나무할때기분이지 운반할 근심이 태산같다. 땔나무 중에 싸리나무는 양반너무었다. 반찬으로 말하면 고기반찬이요, 천으로 말하면 비단천이요, 오곡으로 말하면 이밥이다. 천신만고 끝에 앞마당에 태산 같이 쌓아놓으면 온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싱싱한 싸리나무 냄새는 나무꾼이 아니면 알 수 없는 특이한 냄새가 풍긴다. 싸리나무는 시골총각의 자존심이었다. 어머니는 대견한 아들의 성품을 자랑하느라고 눈보라에 물독이 얼어튀는 긴긴 겨울에도 검불을 때면서도 싸리나무 낟가리를 허물지 않는다. 결국 몇년 묵어서 손이 가면 부서질지경이 되여서야 야금야금 하물기 시작한다.
싸리부업도 아무나 하는게 아니였다. 미립이 있어야 한다. 남들이 약산에서 햇싸리를 찾을때 나는 동네 어른들을 따라서 깊은 산속에서 싸리 밭을 개척하였다. 햇싸리 부업은 요구조건이 높았다. 2년생으로 키가 1메터 20센치를 넘어야 하고 그루가 갓쯘하고 츨츨해야 한다. 햇싸리는 나뭇단은 작아도 어찌나 무거운지 돌덩이 같았다. 망돌 같은 나뭇단을 지고서 망창 몇 십리 넘는 가파른 산발을 헤치노라면 온몸이 물자루가 된다. 난도질하는 칼바람에 솜옷은 땀에 젖어서 김이 물물 나고 가냘픈 어께는 짐바에 조여들어 숨이 넘어갈지경이다. 그때겨울은 왜서 그렇개 매섭게추었을가? 배는 고푸고 갈길은 멀었는데 지는해는 무서운 적막을 몰고온다. 배고플수록 등짐이 태산처럼 무거워진다.. 그 세월 햇싸리부업을 하다가 어둠이 밀려오는 산속에서 곰에게 뜯겨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온 하루 ‘줴기밥’ 한 덩어리로 버틴다는 게 죽지않으면 까무러치기다. 너무 지쳐서 싸리단을 눈 속지에 파묻었다. 내일 다시 온다고 떠나는데 갓난애를 눈 속에 묻은 어머니의 심정이랄까. 버리지 말라고 떼쓰는 ‘애꾼’을 다시 지고서 일어서는데 눈앞에 오각별이 번쩍인다. 죽는한이 있더래도 피를 물고 가야한다. 술 취한 사람처럼 혀를 깨물고 간신히 일어선다. 전진이다! 물앉으면 끝장이다. 눈앞에 주름투성이인 어머니의 얼굴이 비껴온다. 눈으로 얼굴을 비비고 결연히 일어선다! 젖 먹던 기운을 다 내서 한 발작, 두 발작 간신히 옮기는데 어둠속에서 아버지의 부름소리가 들린다. 캄캄한 야밤에 초롱불 켜들고 아들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햇싸리는 이렇게 우리집 명줄을 이어놓은 ‘돈나무’로 되였다.
아버지는 해마다 목재판을 믿고서 선금을 내다가 새끼돼지를 사놓았다. 하지만 정성이 모자랐던가? 사료가 부족했던가? 한해 여름 내내 키워도 고슴도치를 빼닮은 돼지새끼는 늘어날 줄 모른다. 사놓은지 돐이 넘었지만 <고슴도치>는 늘어날줄 모른다. ‘쫑발돼지’를 바치고 나면 본전도 못 찾는 게 별일이다. 하지만 해마다 반쇼량返销粮)을 먹는 세월에 돈잎을 구경하자면 돼지치기밖에 없어다. 죽으나 사나 돼지치기를 해야 한다. 몇푼안되는 돼지판돈은 몇푼안되지만 그대신 보조로 내려오는 돼지사료는 설중송탄이라 집집마다 한몫 막았다. 해마다 대채를 따라배우고 소근장을 따라배운다고 생땅을 뚜지건만 웬일이요 흉년은 떠날줄모른다. 흉년세월에 돼지까지 치지 않으면 굶어 죽은지 열번도 넘었을것이다. 해마다 목돈은 못 만져도 돼지사료에 의해서 겨우 목숨을 연명해 나갔다. 농사는 믿기 어려워도 돼지치기는 밑져야 본전이요 싸리부업은 하늘에서 떨어진 공짜 돈이라 집체일이라면 잔뀌를 부리다가도 탈곡이 끝나기 바뿌게 낫을 들고 나선다. 햇싸리 부업에는 병신이 없단다. 호각을 불고 종을 치며 동원하지않아도 장밤 끙끙 앓다가도 날이 밝기 바쁘게 퉁퉁 붓긴 다리를 질질 끌며 또 다시 줴기밥을 허리에 차고 나선다...
아! 동년의 꿈을 키워주던 싸리나무여, 너는 정녕 부모님들의 가슴에 한이 맺힌 꿈나무였다.
자가용
한 세기를 두고 오매불망 바라던 꿈이 현실로 펼쳐졌다. 까마반지르한 ‘도요다’표 자가용을 몰고서 고향으로 달려가는 내 마음은 나래 돋쳤는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손짓하고 햇솜 같은 함박눈이 내 앞길에 꽃보라 날린다. 한평생 변변한 달구지 한대 갖추지못했던 전주 이 씨 가문에서 ‘도요다’표 하이야가 웬일이요 공산주의란 이런것인가? 도요다를 몰고서 고향으로 달리는 내마음은 장가 가는 기분이다. 지금은 명절이 따로없다. 날마다 사는 게 꿈 같은 세월이다. 어릴 때는 <손잡이뜨락또르>를 몰아보는 게 꿈이었다. 그때는 고향을 멀리 떠날수록 <영웅>의 접대를 받았다. 청명, 추석이면 고향을 떠났던 ‘영웅’들이 자가용에 처자식을 싣고 와서 우쭐하는 게 얼마나 부럽던지? 나도 언제면 하이야에 처자를 싣고 고향으로 찾아올가? 과연 그런날이 있을가? 그런데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던게 반세기가 지나서야 그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 내가 자가용을 몰고서 고향으로 간다는 게 꿈인가? 생시인가?
코 빨던 시절, 해바라기 대를 곤두세우고 꼬불꼬불 고향길에서 ‘앵앵’ 엔진소리를 내던 ‘자가용’이 오늘 따라 한없이 그립다. 쇠똥을 걷어차며 맨발바람으로 학교로 달려갈 때는 자동차만 보면 꽃 본 나비처럼 정신없이 달려갔지. 흙먼지와 더불어 풍겨오는 휘발유 냄새가 얼마나 향기로웠던가? 싱그러운 휘발유냄새가 오래도록 코 안에 남아있게 하려고 빨간 입술을 코밑에 잔뜩 올리며 날숨도 바로 쉬지 못했지, 민들레 노랗게 피여나는 시골 길에 ‘2.8’ 트럭이 달리는 게 한없이 부러웠다. 저녁에 달구지를 몰고 오는데 팔가자 장거리 구경갔던 처녀들을 싣고서 기적소리 빵빵 울리며 달려오는 ‘떡메골”이 얼마나 멋있고 부러웠던가? 공부는 못했어도 촌의 회계아버지의 인맥으로 2.8운전수로 벼락출한게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세월에 운전대만 잡으면 (사급간부司机干部)’>였다.
영화구경 갔다가 한 밤중에 돌아오는 길에서 와룡강철공장으로 돌아오는 자동차를 세워보려고 물에 빠진 사람처럼 손을 허우적거린다. 괘씸한 운전수는 여자들은 태워도 남자라면 똥 묻은 돼지를 피하듯 씽씽 스쳐 지난다. 제기랄, 남자로 태어난 게 죄란 말인가? 궁리하던 끝에 여자로 분장하고 스카프로 얼굴을 감싸고 짐짓 애교를 부리느라 허리를 새끼처럼 꼬면서 손을 흔든다. 아닌게 아니라 멸물같은 운전수는 멈춰섰다. 순간, 길옆에 숨어있던 사내들이 벌떼처럼 달려든다. 자동차 운전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숫말같은 사내놈들을 가득 태우고 죽어라고 달린다. 바람에 날려서 떨어지라고 혼자 말처럼 시부렁거리며 달리던 운전수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모진 세월에 공부를 못해도 운전대만 쥐면 팔자를 고치는 세월이었다. ‘사급간부‘떡메골’가 되면 향장 현장이 부럽지않는 특수향수를 누리던 세월이었다, 내가 자가용을 몰아보니 트럭은 개발에 처매줘도 몰 수 있는 죽은기계였다. 달구지를 모는 사람이면 누구나 몰수있는 별거 아닌 기술이었다. 그런데도 대단한 기술이라고 누구도 운전대를 만지지 못하게 허세를 떨어댄 게 그럴만한 원인이 있었다. 그 세월에 군대오빠와 운전기사라면 처녀들이 코신을 거꾸로 신고 치마폭을 걷어올리고 따라 나서리만큼 인기다. 민들레꽃 노랗게 피여나는 고향길로 백마 타고 오는 왕자님처럼 휘바람을 휘휘호호 불며 2.8뜨락또르를 몰고 오던 떡메골이가 오늘따라 한없이 보고싶다. 가을이면 갈단이며 햇싸리를 적재함에 넘처나게 싣고서 옆에다 처녀까지 앉히고 씽씽 달리던 “떡메골”이게 본때를 보이고 싶었는데 꽃본 나비처럼 “딱메골이”만 따르던 옥이 순희 영숙이 분님이 햇님같은 처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해외 나들이문이 열려서 처음으로 한국에 갔다가 깜짝놀랐다. 자가용이 얼마나 많은지 차를 대기할 곳이 없어서 10층짜리 주차장까지 만들어놓고 렐레베터로 든 차를 올려가는 정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중국은 언제면 저 정도가 될까? 하필이면 내가 왜서 못사는 나라에서 태여났을가? 어달가나 궁전같은 나라 숲처럼 일어선 고층빌딩이 번쩍거리는 사울거리를 바라보며 한숨만 쉬였다. 그런데 이게웬일이요 등소평이 남해바다에서 새로운 설계도를 펼치더니 몇년사이 연길시도 기지개를 쭉 펴고 일어설줄을 누가 알았으랴 가로세로 아스팔트길이 엿가락처럼 뻗어가더니 인제는 주차장이 없어서 아우성 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날마다 설날이요 환갑결혼 생일잔치에 아들딸들이 세계 방방곳곳에서 비행기 타고 모여든다.
옛날에는 아버지가 집앞에 둥굴소 달구지를 갖추는게 꿈이였는데 오늘은 내가 자가용에 너친 손자를 태우고 태우고 북경 상해 어디론지 가고싶다. 자가용을 갖추면 제일 먼저 태우고 싶은사람이 소꿉시절 실랑각시하던 순녀였는데 달밤에 싣걱질할때 달구지에 꼴독 싣고 다니던 춘희 옥희 미자 영옥이는 어딜갔을가? 자가용이 차레지면 그리운 고향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연길구경 시카려던 꿈이 산산쪼각 날줄이야 오매불망 기다던 자가용을 몰고 나섰지만 태울사람은 허나도 없다는 게 비애스럽다. 오늘 따라 ‘2.8’를 몰던 ‘떡메골’ 이가 한없이 그리워난다.. 해지는 저녁이면 ‘2.8’에 앉아서 코스모스 한들거리는 논둑 넘어 벼파도 설레던 해란강 벌을 지나서 팔가자로 영화구경 가던 그 때가 좋았는데…
2014년 1월 16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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