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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우(海隅)의 백합국어사랑방(신문사설&칼럼) 원문보기 글쓴이: 해우(海隅)
2010년 6월 24일 목요일, 오늘의 주요 신문사설&칼럼
* 일러두기 : 이 자료는 교육용으로 쓰기 위해 편집한 것이며 상업적 목적은 일절 없습니다. 선정된 사설의 정치적 성향은 본인의 성향과는 무관함을 알려 드립니다.
* 오늘의 주요 신문사설
[한국일보 사설-20100624목] 이 기세로 월드컵 새 역사를 쓰자
꿈은 이루어졌다. 한국축구가 '월드컵 첫 원정 16강 진출'의 염원을 실현했다. 23일 새벽 B조예선 리그 마지막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 2대 2로 비긴 한국은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신화에 이어 다시 한 번 축구 역사를 새롭게 썼다.
'배수의 진'을 치고 나선 태극전사들은 투지가 불타올랐고, '이긴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강한 압박 수비와 빠른 패스로 초반부터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불의의 일격으로 선제골을 내주었지만, 당황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조직력과 응집력으로 나이지리아를 압박해 이정수와 박주영의 연속골로 역전을 시켰다.
태극전사들은 아르헨티나전 1-4 패배를 실망이 아닌'보약'으로 삼을 줄 알았다. 처음 그리스와 경기할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 상대보다 한 걸음이라도 더 뛰는 기동력과 몸을 사리지 않는 협동작전으로 상대 공격을 차단했다. 태극전사들과 코칭 스태프는 동료의 실수를 진심으로 감싸는 하나된 마음으로 팀 전력을 극대화했다. 박주영이 그림 같은 프리킥 골을 성공시킨 것도, 반칙으로 페널티 킥 동점골을 허용한 김남일이 움츠리지 않고 끝까지 제 기량을 발휘해 상대 공격을 막을 수 있었던 것도 다른 팀에서는 보기 드문 동료애와 신뢰 덕분이었다.
스포츠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첫 원정 16강 진출의 꿈을 이룬 것은 결코 운이나 우연이 아니다. 그 동안 흘린 땀과 정성 덕분이었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의 집중으로 체력과 기술 수준을 높였고, 철저한 상대 분석과 현지적응 훈련으로 다양한 전술을 개발했다. 해외파와 국내파 가릴 것 없이 철저히 '히딩크 식'의 경쟁과 실력으로 선수를 선발해 자연스럽게 세대 교체에 성공한 것도 한국축구가 여기까지 오게 된 원동력이다.
태극전사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26일 '8강 진출'을 위해 우루과이와 일전을 벌인다. 한 번도 이긴 적은 없지만 지금까지 태극전사들이 보여준 투지와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국민 모두 하나 돼 '대~한민국'을 외친다면 또 한 번의 '신화'도 가능하다. 대한민국 파이팅, 한국축구 파이팅!
[한겨레신문 사설-20100624목] 군사주권 포기하는 ‘전작권 환수 연기’ 추진 중단해야
정상적인 나라는 반드시 군대 지휘권을 가져야 한다. 제 나라 군대의 지휘를 외국 군대 사령관한테 맡기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 1994년 북한 핵 위기에서 미국은 북한 폭격을 포함한 전쟁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엄청난 피해가 예상되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대판 싸워” 가까스로 전쟁을 막았다고 뒷날 회고했다. 한국 대통령이 외국 대통령과 싸워야 했던 이유는 작전통제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해 12월 김 대통령은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면서 “자주국방의 기틀을 확고히 했다”고 평가했다. 2012년에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기로 한 2007년 한-미 합의는 때늦었지만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곧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만나 전작권 환수를 재론한다고 한다. 한국 쪽 요청에 따라 환수 시점을 연기한다는 데 사실상 의견 접근이 이뤄졌다는 얘기도 들린다. 군사주권 포기에 해당하는 일을, 그것도 아무런 공론화 과정도 없이 밀실에서 추진해왔다니 놀랍다. 일부 퇴역장성들과 정치권에서 전작권 환수 반대를 외칠 때만 해도 워낙 구시대적 발상에 젖어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정부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한·미 두 나라 사이에는 2012년 전작권 환수 일정을 늦출 아무런 사정 변경이 없다. 1980년대 이래 20여년의 전력 증강에 따라 한국군은 대북 억지·격퇴 능력을 진작에 확보했다. 한국군이 미군과 협력하되 주도적으로 작전을 지휘할 능력을 갖췄음도 2007년에 두 나라가 평가를 마쳤다. 일각에서 천안함 사태로 인한 안보환경 악화를 거론한다. 하지만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하더라도 작전권의 소재와는 무관한 문제다. 단적인 예로 평시작전 총책임자인 합참의장은 사건 발생을 뒤늦게 보고받고 술에 취해 후속 대응도 소홀히 했다고 한다. 한국군 자체의 경계·지휘·대응 체계를 재점검할 일을 두고 외국과의 작전권 문제로 비화시키는 것은 책임 회피다. 이런 논법이라면 평시작전권도 미국에 되넘겨줘야 한다.
전작권 환수를 늦출 경우 우리나라가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가능성도 우려된다. 우리 정부가 매달려 환수 연기를 요청하는 것인 만큼, 미국은 마지못해 응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요구목록을 내밀 것이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 평택 미군기지 확장사업 비용의 한국 쪽 부담 증액, 한국군의 아프간 파병 확대, 미국 주도의 미사일방어체제 참여 등이 그것이다. 밀실협상이 진행돼온 까닭에 부적절한 거래가 이뤄질 우려는 더욱 크다.
군사주권은 그 자체로 최상위 가치다. 한반도 정세에 큰 변화를 줄 사태가 발생할 경우 우리가 전작권을 갖고 있어야 선택 폭을 갖고 안전을 지켜나갈 수 있다. 앞으로 있을 한반도 평화협정 협상에서 우리나라가 당사자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도 전작권 환수는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 들어 여러 안보정책들이 퇴행했지만 전작권 문제는 군사주권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정부는 명분도 실익도 없는 퇴행적 발상을 즉각 거두기 바란다.
[조선일보 사설-20100624목] 6·25에 관한 ‘記憶의 전쟁’
6·25 전쟁 발발(勃發) 60년이 내일로 다가왔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소련과 중공(中共)의 지원을 업은 북(北)의 김일성·박헌영 집단은 북한군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특수 독립연대 등 총 병력 11만1000여명과 소련제 T-34 탱크 등을 앞세워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南侵)했다. 3년여에 걸친 이 전쟁으로 대한민국 국민 37만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38만7000여명이 북에 납치됐거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한국군 13만7000여명, 유엔군 4만여명이 전사했고, 한국군·유엔군 4만여명이 포로로 붙잡히거나 실종됐다. 또 북한 민간인 120여만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 김일성 집단의 6·25 모험은 일제(日帝)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신생 대한민국을 잿더미로 만들고 민족 전체를 절멸(絶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1953년 휴전 직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67달러, 세계 최빈국(最貧國)이었다. 대한민국의 2008년 1인당 국민소득(GNI)은 1만9296달러로 57년 전보다 288배 가까이 올랐다. 북한의 2008년 1인당 국민소득은 대한민국의 5.5% 수준인 1065달러다. 대한민국의 2008년 무역규모는 8572억8000만달러였다. 북한은 38억2000만달러다. 대한민국이 1960~70년대에 산업화를, 1980년대엔 민주화를 달성하는 동안 북한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 독재의 완성을 위해 온 나라를 백성의 수용소로 만들어 버렸다.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문서들은 6·25 전쟁 발발 과정과 경위를 학술적으론 더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게 명확히 정리했다. 그런데도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라 해도 그들 머릿속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6·25는 여전히 '북한이 대한민국을 공격한 민족상잔의 전쟁'이라는 것과 '북한의 주도로 벌어진 통일전쟁'이라는 '두 개의 전쟁'으로 나뉘어 있다. 마음속으로 6·25를 통일전쟁으로 믿는 세력들이 역사적 사실(事實)조차 자신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따라 왜곡하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심어주는 작업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6·25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실재(實在)하는 오늘의 북한을 어떻게 보고 다룰 것이며, 더 나아가선 어떤 방식으로 통일을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연결돼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북한과 관련된 정책만이 아니라 1980년 이후 한국 정치의 현재와 미래를 움직여 나가는 동력(動力)으로 작용해 왔다. 최근 국회에서 '6·25 결의안'과 천안함 폭침(爆沈) 규탄 결의안이 논란을 빚고 있는 것도 6·25를 둘러싼 두 개의 기억이 충돌하는 '기억의 정치'를 떠나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점령군 소련의 일방적 연출로 김일성을 무대 중심에 세운 북한 정권 수립을 자주 독립국가의 출발로 떠받들면서, 이승만이 미군정(美軍政)과 수시로 충돌하고 때로 협력하면서 주도한 대한민국 건국을 미국이 친일(親日) 세력을 내세워 만들어낸 '꼭두각시 정권'으로 폄하(貶下)하는 논리는 일부 세력의 '기억의 정치'가 빚어낸 대표적 산물이다. 나라 전체가 두 진영으로 갈려 대북(對北) 정책과 통일 문제, 한·미 동맹 문제를 놓고 정면 충돌해 온 것 역시 정책의 객관적 정당성과 효율성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심층(深層)에선 여전히 6·25에 대한 두 개의 '기억의 정치'가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6·25에 관한 두 개의 기억이 계속 존재하고 있는 데는 우파(右派) 진영의 역사적 무지(無知)와 현실적 나태(懶怠) 탓도 크다. 우파는 1950년대부터 김대중·노무현 10년을 빼곤 줄곧 현실 권력을 장악했지만 '6·25에 관한 두 개의 기억'을 역사의 정통성에 입각해 정리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사상적 갈등과 균열을 치유하고 통합적 역사상(歷史像)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을 이끌 건전한 보수와 지도자의 상(像), 그리고 그들이 그리는 대한민국의 미래상(未來像)을 오늘의 국민과 내일의 국민에게 확실히 하는 데도 무능(無能)했다.
1950년대부터 현실 권력을 놓치고 잠복(潛伏)해 온 좌파 진영은 1980년대 들어 가장 효과적인 기억 재생산 수단인 문화와 예술과 교육 영역을 장악한 채 자신들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의 정치'를 다음 세대 머리에 이식(移植)해 왔다. 전교조 교사가 중학생들을 데리고 '빨치산 추모제'에 다녀오는 게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이다. 현 집권 세력이 이 같은 사태의 심각성과, 그것이 앞으로 대한민국에 미칠 영향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6·25에 관한 기억의 혼돈조차 실용과 절충의 이름 아래 방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이 6·25를 넘어서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로 나아가려면 먼저 6·25 전쟁 각(各) 국면의 가해자와 피해자들을 모두 보듬어 안을 수 있는 통합된 역사상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한민국 주류 세력이 선택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노선이 오늘의 선진 민주 공화국을 가능하게 했다는 대전제(大前提) 아래서 포용과 화해도 가능하고 그 위에서만 통일로 접근할 올바른 길을 닦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서울신문 사설-20100624목] 세종시 소신 본회의 투표로 기록 남겨야
국회 국토해양위원회는 그제 전체회의를 열어 행정부처 이전을 백지화하는 내용의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 건설 특별법 개정안’을 반대 18표, 찬성 12표, 기권 1표로 부결시켰다. 야당과 한나라당 친박(親朴)계의 반대 때문에 예상된 결과였다. 세종시의 성격을 바꾸는 대표적 수정법안이 부결됨에 따라 개정 이유가 없어진 ‘혁신도시 건설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 ‘산업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 개정안’, ‘기업도시개발 특별법 개정안’ 등 부수법안도 부결됐다. 지난해 9월 이후 최대의 논란거리로 정국을 요동치게 했던 세종시 수정법안은 사실상 폐기되는 쪽으로 결론이 난 셈이다.
국회에서 세종시 수정법안이 폐기되면 세종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확정됐던 원안(原案)인 행정중심복합도시로 건설하게 된다. 원안의 핵심은 9부2처2청을 오는 2014년까지 단계적으로 이전하는 내용이다. 노 전 대통령이 200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발표한 공약이 밑바탕이 됐다. 행정부처 이전 백지화를 전제로 만든 수정법안에 담겨 있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와 대기업 유치는 쉽지 않게 됐다.
한나라당 친이(親李)계는 국회법에 따라 본회의에 상정해 전체 의원들의 의사를 묻는 쪽을 추진하고 있지만, 야당은 반대하고 있다. 본회의에서 투표를 하더라도 야당과 친박계의 반대로 국토해양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부결될 게 확실시된다. 하지만 세종시와 같은 중요한 국책사안에 대해서는 상임위에만 맡길 게 아니라 전체 의원들의 의견을 묻는 것도 방법이다. 의원의 소신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
야당은 본회의 상정을 반대할 게 아니라 소신대로 입장을 밝히면 된다. 상정 반대는 원안대로 추진한 게 잘못됐을 때 책임을 피하려는 뜻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국민들은 누가 찬성했는지, 반대했는지, 눈치를 보다가 기권했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세종시와 관련된 입장은 총선이나 대선에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때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다. 수정안 폐기로 결론이 나면 정부는 속도를 내 세종시를 원안대로 추진해야 한다. 원안대로 하면 부지가 부족해 기업을 유치하는 게 쉽지 않겠지만 자족기능을 갖춘 도시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정치권도 이제 세종시를 둘러싼 정쟁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한국경제신문 사설-20100624목] 부산 신항 동북아 물류거점 도약 계기돼야
부산 신항 시대가 본격 개막됐다. 부산 신항은 1단계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18개 선석에서 연간 600만TEU(1TEU=20피트 컨테이너 1개)를 처리할 수 있는 허브 항만의 면모를 갖추고 22일 공식 개장식을 가졌다. 부산항이 동북아 물류 거점으로 재도약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기대가 크다.
신항은 부산의 새로운 물류 중심으로 자리잡을 게 확실하다. 최첨단 자동 하역 시스템을 도입한데다 142만㎡에 이르는 배후 부지, 진입 철도 등 항만 · 물류 · 배후 수송체계를 함께 갖추고 있는 까닭이다. 지난해의 경우 부산 북항이 929만TEU, 신항은 269만TEU를 각각 처리했지만 올해는 이 비율이 5 대 5에 근접하고 내년부터는 신항의 물동량 처리가 북항을 추월하게 된다. 2015년까지 진행될 예정인 2단계 공사가 끝나면 신항의 접안 시설은 30개 선석으로 확충돼 연간 물동량 처리 능력이 1085만TEU로 늘어나게 된다.
1995년 시작된 신항 공사에는 정부 자금 5조2471억원, 민자 6조5525억원 등 총 11조7996억원이 들어가며 지난해까지 7조1067억원이 투입됐다. 이같이 대규모 자금을 쏟아붓는 것은 갈수록 후퇴하는 부산항의 국제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부산항 물동량은 싱가포르 홍콩은 물론 상하이 선전 등에도 밀리면서 세계 5위 수준까지 내려앉은 게 현실이다. 특히 상하이 양산항이 2020년까지 2500만TEU의 컨테이너 처리 능력을 갖출 예정이고 보면 부산항의 위상이 더욱 움츠러들 우려가 적지 않다.
따라서 부산항이 동북아 물류 거점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기 위해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환적화물을 적극 끌어들이는 등 물동량을 충분히 확보하는 일이다. 특히 중국의 저가 공세에 맞서기 위해선 생산성을 높이고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세계적인 선사들을 많이 유치하고 배후 시설을 서둘러 갖추는 것도 국제항으로서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선 꼭 필요한 과제다.
[서울경제신문 사설-20100624목] 전시·회의산업 지원체계 정비부터
정부가 내놓은 전시ㆍ회의산업 육성방안은 고부가가치산업인 전시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키워나가기 위한 종합적인 청사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2015년까지 수도권의 COEX와 킨텍스, 송도 컨벤시아를 삼각축으로 삼아 우리나라를 동북아 전시ㆍ회의산업의 중심으로 키운다는 전략이다. 또한 외국 바이어 및 국제회의 유치를 위해 범국가적 통합 마케팅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를 통해 600억달러의 수출효과와 함께 지난해 56만명이었던 국제회의 참관객을 100만명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전시ㆍ회의산업은 부가가치가 높아 선진국형 산업으로 불리는 MICE(Meeting, Incentive, Convention, Exhibition)산업이다. 이에 따라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육성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지난해 기준 국내 MICE산업의 총 매출은 약 3조원, 총 경제적 파급효과는 38조원으로 추산되고 있다. 자동차 77만대와 휴대폰 390만개를 수출한 것과 맞먹는 규모다. 전시회의산업은 관광산업의 핵심으로서 서비스 분야의 국가경쟁력 제고는 물론 국가브랜드 가치를 높여 제조업을 포함한 다른 산업에도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는 등 경제적 파급효과가 매우 크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들이 전시회의산업 육성을 위해 세제혜택 등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방안에 그치지 않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이전에도 비슷한 방안이 여러 차례 나왔다. 그런데도 국내 전시ㆍ회의산업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다시 육성책을 내놓은 것은 그동안 대책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았거나 효과가 작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체계적인 지원체제를 구축하고 추진실적을 점검함으로써 이런 전례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전시산업발전법ㆍ국제회의산업육성법 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대책이 겉돈 것은 전시는 지식경제부, 회의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맡는 등 관련부처가 분산돼 유기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런 점에서 관련법규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주무부처를 일원화하는 등의 제도정비가 필요하다. 의료나 한류열기를 활용한 관광 및 전시기획, 비무장지대 등과 연계한 생태관광 등 우리만의 독특하고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개발하는 노력도 강화돼야 한다.
* 오늘의 주요 칼럼 읽기
[동아일보 칼럼-동아광장/허엽(문화부장)-20100624목] SBS 단독 중계의 후유증
“이젠 후유증에 대비해야 한다.”
SBS에서 월드컵이 끝난 뒤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23일 한국팀의 첫 원정 16강 진출로 광고 매출은 나아졌지만, 64경기 중 56경기를 지상파에서 중계하는 탓으로 채널 이미지가 흔들리고 있다. SBS는 ‘스포츠 채널’로 불리고 드라마 예능의 흐름이 끊어졌다. 메인 뉴스도 연일 월드컵 뉴스 비중을 높여 고정 시청자의 혼선을 초래했다.
한국방송광고공사의 양휘부 사장은 국회 상임위 업무보고에서 “21일까지 SBS의 월드컵 광고 매출은 600여억원이며 나이지리아전을 포함하면 650억원 정도”이라며 “16강에 진출하더라도 1000억원은 안될 듯 하다”고 말했다. SBS는 중계권료 750억원, 제작비 100억원 등 1000여억원을 들였고 16강 진출로 추가 중계권료 60여억원을 내야 한다. 협찬 등 방송광고 외 수입을 더해도 손익분기점을 낙관하기 어렵다.
‘스포츠 채널’이라는 별칭은 보이지 않는 손해다. SBS는 11일 월드컵 개막이후 황금시간대는 축구 중계로 채웠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해 북한과 일본의 경기가 같은 시간대 1위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나 대부분의 경기는 10% 안팎에 머물렀다. 오히려 맞편성된 KBS 2 드라마 ‘수상한 삼형제’ ‘제빵왕 김탁구’ MBC ‘동이’는 시청률이 오르는 ‘반사 이익’을 얻었다. SBS 노영환 홍보팀장은 “56경기를 지상파에서 중계하는 게 어려웠지만 단독 중계 논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드라마와 예능의 제작진도 속을 태우고 있다. 다음주 초 일부 정규 편성에 들어가더라도 여러 차례 결방으로 인해 시청자를 다시 모으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간판 드라마인 ‘인생은 아름다워’의 김수현 작가도 트위터에 “(결방은) 월드컵에 당하는 테러”라고 꼬집었다. 이 드라마는 단란한 가정에 아들의 동성애 문제를 던져 화제몰이에 성공했으나 4회 결방이 찬물을 끼얹었다. 월화 드라마 ‘자이언트’도 비슷한 처지여서 토요일인 19일 오후에 기존 방영분을 요약한 특집을 내보냈다.
게다가 SBS가 월드컵 중계와 관련해 ‘공공장소 전시권’을 엄격히 따지겠다고 하자 “전국민적 관심사에 너무 잇속을 챙긴다”는 반감도 일었다. 월드컵 개막과 동시에 시청자 게시판도 문을 닫았다.
이같은 중간 결산서는 적신호이지만 SBS는 8강 진출 시 수익을 기대할 수 있고 무엇보다 이번에 KBS MBC를 눌렀다는 데 만족하는 듯한 분위기다. 지상파 3사의 공동 중계 협상이 결렬된 이유도 SBS는 이번 중계를 후발 채널의 ‘20년 서러움’을 떨쳐내는 전략적 발판으로 여겼고, KBS MBC는 광고가 몰리는 ‘같은 경기’를 동시 중계할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SBS는 겨울올림픽과 월드컵에서 두 차례 독점 중계로 경쟁사에 존재를 각인시켰다. 겨울올림픽은 초반 스피드 스케이팅 부문의 메달과 김연아 효과를 톡톡히 봤고 낮 시간 편성이어서 정규 방송의 차질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은 단일 채널이 감당하기에는 리스크가 컸음이 드러났고, 앞으로 과열 경쟁으로 인한 중계권료의 상승에 대한 비난도 SBS가 감당해야 한다. 자칫하면 승자의 독식이 승자의 저주로 바뀔 수도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SBS가 2016년까지 가진 동·하계 올림픽과 월드컵 중계권을 두고 ‘탈독점’의 방안을 모색해야 할 듯 하다. 영국이나 일본처럼 방송사간 중복 중계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공동 순차 중계가 좋지 않은가.
[중앙일보 칼럼-분수대/진세근(탐사2팀장)-20100624목] 남아공의 꿈
우리 축구가 그리스를 누른 그 시간, 케이프타운에선 남아공과 프랑스의 럭비 A매치가 열렸다. 42-17로 남아공 승. 그날, 남아공은 잠을 잊었다. 이건 약과다. 1995년엔 더했다. 그해 남아공은 럭비 월드컵을 차지했다. 잠시지만 남아공의 흑과 백은 하나가 됐다. 영화 ‘인빅투스’는 여기서 나왔다.
축구는 딴판이다. ‘있는 자의 잔치’라며 대다수 흑인들이 월드컵을 외면한다. 범죄도 기승이다. 취재진과 선수단은 무장 강도의 ‘봉’이다. ‘월드컵보다 개최국 소식이 더 많은 유일한 대회’라는 비아냥도 나왔다. 왜 이렇게 됐을까.
미국 자선단체 글로벌 액션(Global Action)의 경험담을 보자. 액션은 아프리카 아동의 영양 문제에 주목해온 단체다. 첫 무대는 르완다. 비타민 분말을 음식물에 투입해 아동과 임산부의 빈혈·야맹(夜盲)·감염을 줄이는 일을 시작했다. 분말은 식품 회사 하인즈가 무상 제공했다. 무대는 탄자니아로 확대됐다. 유네스코와 클린턴 기금 등이 합세했다.
이때부터 사단이 불거진다. 물자와 자금은 수월하게 모였다. 수혜자가 문제였다. 아프리카 정부의 부패 탓이다. 액션은 이를 ‘지겹도록 끈질긴 탐욕’이라고 표현했다. 스멀스멀 기어드는 손길이다.
미셸 라이든 액션 총재의 경험담이다. 그가 탄자니아에 도착했을 때 관리가 영접했다. 관리는 친절했다. 주택 임대, 차량 수배, 심지어 전화 카드 구입까지 대행했다. 관리는 이 과정에서 두 배 이상의 폭리를 취했다. 몇몇 관리는 호텔 식당에서 배 두드리며 식사한 뒤 계산서를 라이든의 방값에 얹었다. 하인즈가 보낸 물품을 항구에서 탈취해 지하시장에 내다팔았다.
남아공은 한술 더 뜬다. 집권당 전체가 부패다. 집권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2007년, 출처 불명의 수익 1억5000만 랜드를 회계 보고했다.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랬다간 반당 분자로 몰릴 판이다. 넬슨 만델라가 이끌었던 ANC 청년연맹의 줄리우스 마레마 총재는 정부 공사를 한 기업에 몰아주고 커미션을 챙겼다. 제이컵 주마 대통령은 부패와 강간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우리 축구가 원정 첫 16강 진출의 꿈을 이뤘다. 나라 전체가 행복이다. 이 기쁨을 아프리카에 보내자. 월드컵이 행복임을 보여주자. 방법은 간단하다. 월드컵을 계기로 아프리카의 아픔을 아는 거다. 세계가 아프리카를 사랑할 때 흑과 백이 하나 되는 남아공의 꿈도 이뤄질 것이다.
[경향신문 칼럼-여적/박래용(논설위원)-20100624목] 한강 인도교 진혼제
“공병감, 탱크가 시내에 들어왔다. 즉시 한강교를 폭파하라.”
6·25 전쟁 발발 사흘 뒤인 1950년 6월28일 오전 2시30분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이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 인도교 폭파를 지시했다. 다리에는 남쪽으로 무작정 떠나려는 피란 인파들이 몰려 있었다. 공병감은 “지금 사람이 많이 오는데요”라며 주저했으나 총참모장은 “즉시 시행해”라고 명령했다. 30분 뒤 ‘꽝’하는 폭음과 함께 인도교 교각 6개 중 2, 3번 교각이 폭파됐다. 총연장 1005m의 한강 다리가 두동강 났다. 당시 한강 주변에 있던 4000여명의 피란민 가운데 다리를 건너던 500~800여명의 시민들이 물속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국군은 당초 북한군 탱크의 서울 시내 진입 2시간 후 한강 인도교와 경부선·경인선 철교를 동시 폭파한다는 계획이었다. 전황상으로는 당일 오후 4시쯤으로 예측됐다. 폭파가 앞당겨진 이유는 미아리에 정찰 목적으로 먼저 나타난 북한군 탱크 2대를 보고 군 지휘부가 성급한 판단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대전으로 달아난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사수’ 녹음 방송을 내보내며 국민을 기만했다. 피란길을 잃은 150만 서울시민과 퇴로를 차단당한 4만여 장병들은 이후 북한군 치하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결정의 모든 책임은 현장에서 명령을 수행한 공병감 한 사람에게 씌워졌고, 그는 총살형에 처해졌다. 14년 뒤 가족들의 청구로 열린 재심에서 군 재판부는 “상관의 작전명령에 따른 행위”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때 한강 인도교 폭파로 숨진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제가 한강대교 주변에서 열린다는 소식이다. 진혼제는 영정 대신 폭파된 한강 다리 사진을 놓고 진행된다고 한다. 희생자가 누구인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기 때문이다. 대부분 일가족이 한꺼번에 몰사한 바람에 지금까지 군과 정부 어디에도 신고 사례 한 건 없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원혼(怨魂)이다. 예비검속, 보도연맹 등 이런 억울한 떼죽음이 한두 건이 아니다.
거의 모든 전쟁의 특징은 전투원보다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가 더 많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항상 비극적인 일화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사망자는 100만명이 넘는다. 걸핏하면 대북 응징을 주장하며 전쟁불사론을 외치는 세력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매일경제신문 칼럼-장용성 칼럼/장옹설(매일경제신문 주필)-20100624목] 대통령들의 포퓰리즘
세종시 수정안이 국회 상임위에서 사실상 사망선고를 당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포퓰리즘에 뿌리를 둔 세종시는 이명박 대통령과 정운찬 국무총리를 위시한 국가지도층 인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생적인 달콤함에 취해 제 갈 길을 가게 됐다.
매일경제신문은 지난해 3월 청와대, 정치권, 경제계 인사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보고대회 형식을 통해 `국가 백년 대계를 생각할 때 세종시는 과학기술녹색중심도시로 전환해야 한다`는 공식제안을 했다. 매경은 그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종시를 수정하는 게 충청권과 국가 전체가 모두 윈윈하는 최적의 해법이라는 점을 누차 강조했다. 세종시는 작년 가을 이후 정국 최대 현안이 됐다. 그러나 모든 이성과 논리들은 포퓰리즘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포퓰리즘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파괴력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포퓰리즘 때문에 국가가 절단이 난 경우는 무수히 많다. 요즘 유럽경제를 휘청거리게 하고 있는 진원지인 그리스의 경우도 그렇다. 포퓰리즘 때문에 국민에게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주문은 못하고 국가가 빚을 내서 흥청망청 쓰다 보니 재정파탄으로 국가부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20세기 중후반 이후 중남미 국가들이 외채 위기를 비롯한 혹독한 시련을 자주 겪게 된 것도 포퓰리즘적인 경제정책에 큰 원인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중남미 경제 문제를 많이 다뤘던 루디거 돈부시 MIT 교수는 포퓰리스트 정부는 역사적으로 소득불균형 문제를 부각시키고 이 문제를 과도하게 팽창적인 거시경제정책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고 분석했다. 포퓰리스트 정부는 이를 위해 기본적인 경제균형을 무시하고 광범위한 규제, 재정적자, 임금인상 정책을 펴지만 결국은 저소득계층을 더욱 황폐케 한다고 강조했다.
로버트 카우프먼(미 럿거스대학 교수)과 바버라 스톨링스(위스콘신대학 교수)는 `라틴 아메리카 포퓰리즘의 정치적인 경제`에서 권위주의적 정부는 민주주의 정부로 바뀔 수밖에 없는데 그 중간의 과도기적 민주정부가 포퓰리즘에 더 많이 노출된다고 지적했다. 경제적 요구가 많을 수밖에 없는 데다 불확실성 증대 때문에 여야 모두 단기적인 시야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에 이은 노태우 정부는 민주화로 가는 과도기적 정부라고 볼 수 있다. 농어촌 부채 경감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노조설립이 질풍노도처럼 확산되면서 과도한 임금인상을 불러왔다. 포퓰리즘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의 정부`로 이어졌다. 세계 부자클럽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성급한 가입 및 외환 자본시장 대거 개방, 과도한 원화 강세 유지 등은 결국 아시아 외환위기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IMF(국제통화기금) 신세를 지게 만들었다. 지방자치제도 전면 실시됐고 민주노총이 설립됐다.
김대중 정부 때도 또다시 농어업인부채경감특별법이 만들어졌다. 전교조가 합법화 된 것도 이 시점이다. 세종시 수도이전을 기치로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 정부는 소득불균형 시정, 분배정책을 유달리 강조했다. 그러나 돈 부시 교수의 지적대로 2인 이상 도시가구 가처분 소득 기준 5분위 배율은 2002년 4.50에서 2007년 5.08로 더 악화됐다. 공무원노조가 합법화된 것도 노 정부 때다.
그 당시 대통령들은 모두가 그럴듯한 화려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다분히 포퓰리즘적이었고 국가 백년대계의 눈으로 재조명해보면 너무 성급했던 일들이 많았다. 문제는 포퓰리즘의 폐해는 당대에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 다음 수대에 이르도록 두고 두고 고통을 주게 된다는 데 있다. 세종시도 대표적인 사례다. 혁신도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명박 정부 들어서도 포퓰리즘에 대한 경고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포퓰리즘의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면 유권자들이 현명해지는 길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