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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의 역사문화유적
무주군
무주군은 남북으로 뻗은 소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삼한시대 때 동편은 변진, 서편은 마한에 속해 있었고, 삼국시대는 변진의 무풍 땅은 신라에 속하여 무산현이라 했으며, 마한의 주계 땅은 백제에 속하여 적천현이라 했던 것을 통일신라 이후에는 종전의 무산을 무풍으로, 적천을 단천으로 개칭했던 것인데 고려 건국과 함께 무풍의 지명은 그대로 두고 단천을 주계로 바꾸어 사용해 왔다.
그 후 조선 태종 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옛 신라 땅의 무풍과 백제 땅 주계를 합병,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편제하면서 두 고을 이름의 첫 자를 따 무주라는 새로운 지명을 붙여 사용하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풍루
한풍루는 2층 누각으로 1층은 정면 3간 측면 4간이며, 2층은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연건평 154,9㎡, 이익공(二翼工) 팔작(八作)지붕이다.
본래 무주의 관아 앞 천변(현 무주우체국 자리)에 위치했는데,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세조 11년(1465) 전라관찰사를 역임한 성임(成任)이 한풍루를 다녀간 뒤 남긴 시(詩)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한풍루(寒風樓) 재객관전(在客館前)’이라 기록되어 있다.
한풍루에는 수많은 명사와 묵객들이 찾아와 아름다운 경관을 글로 남기며 풍류를 즐겼는데, 조선초기의 학자로 시문에 능했던 성임,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유순(柳洵), 선조 때 시문에 뛰어난 백호(白湖) 임제(林悌), 인조 때 명신 청구(淸滾) 임담, 전라관찰사 목성선(睦性善) 등의 글이 한풍루지에 실려 있다. 특히 임제는 한풍루를 호남지방의 삼한(三寒 : 남원 광한루, 전주 한벽루, 무주 한풍루) 중 으뜸으로 꼽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한풍루는 임진왜란 중 불에 타버렸다. 그 후 왜란이 종결되던 선조 32년(1599) 백호 임제의 동생인 현감 임환(林潁)에 의해 복원이 착수되었는데, 그는 복원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전임되어 후임 남복시(南復始)에 의해 복원되었다. 그 후 인조 24년(1646) 보수, 숙종 4년(1678) 단청, 영조 5년(1729)과 정조 7년(1783) 중수되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불교포교당으로, 무주보통학교 공작실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뒤에 안국사 이철허(李澈虛) 주지가 불하받아 관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지가 곤란해지자 일본인 나까야마(中山)에게 저당잡히게 되었다. 그 뒤 일본인 우수이이또(簿井 誠)가 매입하게 되는데, 그는 1936년 충북 영동군 양산 사람 이명주(李命周)에게 다시 팔았다. 이에 따라 한풍루는 뜯기게 되었고, 목재는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금강변으로 옮겨졌으며, 한풍루 대신 금호루(錦湖樓)라는 현액이 걸리게 되었다.
그 후 1960년대 들어 무주면 읍내리에 거주하던 한기문(韓基文) 옹의 끈질긴 복구운동에 따라 ‘한풍루복구추진위원회’(위원장 金南實)가 결성되었고, 위원회는 1971년 3월 24일 목재를 100만원에 매입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5일 본래 위치했던 곳의 맞은편인 당산리 남산자락 언덕에 복원하였다.
안국사
적상산 오르는 길은 무척이나 힘이 든다. 무주에서 구천동 쪽으로 머리를 돌려 상곡천을 따라 십리정도 올라가면 산성교 앞 삼거리에 표지판이 반긴다. 이곳에서부터 고행의 시작이 된다. 물론 고행은 애마가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4키로 정도를 오르면 이제부터 좌로 우로 잡아 돌리는 라면길이 시작된다. 지루하기도 하고 또 애마 열도 식혀줄 겸 가끔 산아래 경치에 빠져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이곳에서 2.5키로 정도 오르면 천일폭포가 나온다. 이곳도 뒤에 소개해 올릴 것이다.
이곳에서 조금 위 터널을 빠져나가 조금 오르면 시작점 8.5키로 지점에 적상 호수가 시원스레 자리하고 있다. 적상 호수를 한 바퀴 돌아 전망대까지 멋진 드라이브 코스도 있다. 이곳도 뒤에 소개하기로 한다. 적상 호수를 반 정도 돌아서면 우측으로 사찰이 보인다. 이곳에서 가파른 길을 오르면 일주문이 반긴다.
"본래 적상산 분지에 위치했던 이 사찰은 고려 충렬왕 3년(1277), 월인화상이 창건한 것이라고 도하고, 조선 초 무학대사가 국가의 앞날을 위해 성을 쌓고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광해 5년(1613) 사찰을 중수하고 그 다음해에 창건된 적상산 사고를 지키기 위한 승병들의 숙소로 사용해 왔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보경사 또는 상원사 등으로 부르던 것을 영조 47년(1771) 법당을 중창하고 안국사라 했다. 더러는 산성 안에 있는 절이라 하여 산성사라고도 불렀다. 현재의 안국사는 본래의 위치가 양수발전소 상부댐(적상호)에 잠기게 되어 1992년에 옮겨 세운 것이다." 라고 '무주투어'에서 알려준다.
안국사 일주문
적상산 사고 터에서 굽이돌아 오르는 안국사의 초입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목조 맞배건물인 일주문이 있다. 낮은 단층기단 위에 다듬지 않은 2개의 기둥을 일렬로 세운 뒤 창방과 평방을 얹고 그 위에 화려하기 그지없는 다포로 장엄하였다. 일주문에는 1992년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이 쓴 ‘적상산 안국사(赤裳山 安國寺)’라는 편액과 1995년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이 쓴 ‘국중제일정토도장(國中第一淨土道場)’이라는 2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특히 권갑석(權甲石)이 쓴 편액 ‘國中第一淨土道場’은 무학대사가 이곳을 ‘국중제일의 길지’라고 한 설화에서 유래한 편액으로, ‘안국(安國)’과 ‘정토(淨土)’를 바라는 안국사의 염원을 담고 있다.
호국사
안국사 주차장 옆에 있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목조 팔작건물로, 1994년 벽암(碧岩) 스님이 쓴 ‘호국사(護國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호국사는 조선 인조 때 전라감사로 있던 윤명은(尹鳴殷)이 창건한 절로, 적상산성 내에 사고를 지키는 산성수호사찰이었다. 1949년 여순사건 때 전소되어 그 터만이 남아 있던 것을, 1990년 적상호의 수몰로 안국사가 이곳 호국사 터로 이전하면서 옛 가람을 기억하기 위해 호국사라는 편액을 이 건물에 걸어둔 것이다. 현재 호국사 가람은 안국사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그 아래 사고를 수호하던 적산산성의 유구와 호국사비가 전하고 있다.
호국사비는 적상산에 지은 호국사의 창건과정을 기록한 비로, 안국사 가람 축대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이 103㎝로 장방형의 몸돌에 음각으로 기록하였으며, 상부 개석에는 쌍룡을 양각하였다. 1645년에 세워졌으며,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어 팔작건물의 비각 내에 봉안되어 있다. 호국사는 조선 인조 때 전라감사로 있던 윤명은이 창건비용을 부담하여 지은 절이나, 1949년 여순사건 때 불타 버리고 지금은 타만 남았다. 적상산은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 쌓인 천혜의 요새로, 고려 말에 최영장군이 군사를 훈련시키던 곳이라 한다.
안국사 청하루
안국사의 누각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목조 맞배건물이다. 1990년대 적상호의 수몰로 인해 안국사 옛터에 있던 누각을 해체한 후 1992년에 복원한 것으로, 현재 불교용품점과 무주 33경의 비경을 엿볼 수 있는 전망대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 외부는 이중구조로 누각 아래로 출입하며, 건물 내부에는 ‘석실비장(石室秘藏)’ㆍ‘청하루(淸霞樓)’ㆍ‘극락전(極樂殿)’ㆍ‘산신각(山神閣)’ 등 수몰되기 전 안국사에 있던 현판들이 걸려 있다. 특히 이 가운데 현판 ‘淸霞樓’는 송석(松石) 이도익(李都翼)의 글씨로 1859년에 쓴 것으로, 가로 165㎝, 세로 55㎝의 장방형 목판에 활달한 필체로 양각되어 있다.
안국사 극락전
높게 쌓아 올린 축대를 한 걸음 올라서면 누각 위로 구름에 두둥실 떠 있는 듯한 안국사의 큰 법당이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 맞배건물로, 1991년 원행(圓行) 스님이 옛 안국사 터에서 옮겨지은 것이다. 잘 다듬어진 자연석 축대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정면 3칸에는 꽃빗살문을 칸마다 설치하였다. 정면과 좌측은 4분합이나 우측은 2분합으로 협칸의 구조가 특이한 평면을 보여준다. 건물 외부는 정면과 배면에 다포계양식의 공포를 설치하였는데, 외부는 3출목으로 되어 있으나 내부는 4출목으로 쇠서는 연봉으로 장엄한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 건물 외벽은 삼면에 심우도(尋牛圖)를 비롯하여 석가탄생도 등 다양한 설화적 도상을 표현하였으며, 단청은 얼금모로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엄하였으나, 극락전 우측창방 쪽에는 안국사의 설화를 입증하듯 딱 하루만큼 단청할 분량의 목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극락전 목조아미타삼존불
안국사 극락전에는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있다. 불상의 조성기록은 없으나, 고개 숙인 자세에 굵고 짧은 목, 장방형의 얼굴에 오뚝한 코, 자연스런 천의(天衣)의 옷주름, 사실적인 손표현 등에서 17세기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이 보인다. 본존인 아미타여래좌상은 앉은키 67㎝, 무릎 폭 43.5㎝의 중형 불상이다. 전반적으로 고개를 숙여 움츠린 듯한 어깨에 구부정한 자세를 보이며 장방형의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띤 원만한 상호를 가지고 있다. 얼굴은 중앙계주와 정상계주를 가진 나발에 턱이 짧아지고 각이 진 모습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오뚝한 코에 삼도가 표현된 짧은 목을 지니고 있으며, 법의는 통견의로 자연스런 옷주름과 사실적인 손표현에서 아미타불의 원만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좌협시인 관음보살은 본존불과 흡사한 모습으로 짧은 상투 속에 보관을 착용하였으며, 보관(寶冠) 아래쪽으로 자연스럽게 머리칼을 흘러내리고 있어 보살의 오묘함이 느껴진다. 우협시인 세지보살은 관음보살과 대칭적인 구도로 조각수법에 있어 아미타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닮고 있다. 관음과 세지보살은 앉은 키 61㎝, 무릎 폭 36.5㎝로 아미타불상과 함께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은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국사 천불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건물로 극락전 우측 축대 아래에 있다. 1991년 옛 사고(史庫) 터에 있던 선원각을 옮겨 지은 것으로, 전란의 화마를 입지 않은 유일한 사고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건물은 중간에 가로로 방(枋)을 쳐서 중층의 구조를 가진 독특한 모습으로, 하부는 사고를 수장한 창고를 겸하며 상부는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어칸에는 4분합의 빗살문과 강암(剛菴) 선생이 쓴 ‘千佛殿’ 편액이 걸려 있으며, 좌우 측면에는 내부에 채광을 공급하는 특이한 교창이 있다. 건물 내부는 중앙 불단을 중심으로 좌우 보조단이 있으며, 1995년 합성수지로 만든 석가여래좌상과 문수ㆍ보현보살을 비롯하여 석고천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후불탱은 붉은 바탕에 금니로 출초한 홍탱으로 금어 남인식(南仁植)이 1969년에 조성한 것이다.
안국사 삼성각
극락전 뒤편 언덕에 있는 삼성각은 1992년 원행(圓行) 스님이 지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건물이다. 건물외부는 주로 녹청을 사용하여 단청하였으며, 4분합의 어칸 띠살문 상부에는 소남(素南) 이규진(李圭鎭)이 쓴 ‘三聖閣’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 내부는 불단 위로 1899년에 조성된 칠성탱과 근래 조성된 산신탱ㆍ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특히 칠성탱은 금어 우송상수(友松爽洙) 스님이 1899년 김천 봉곡사(鳳谷寺) 극락암에서 조성한 것을 옮겨온 것으로, 장방형의 화폭에 중앙의 치성광여래와 좌우에 일광ㆍ월광보살 및 삼태육성과 이십팔수 등 여러 권속을 배치한 모습이다. 이 탱화는 인근 북고사에도 똑같은 칠성탱이 봉안되어 있어, 지리적으로 가까운 김천지방의 금어인 우송스님이 무주지역의 불화불사에 참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안국사 지장전
1992년에 원행(圓行) 스님이 극락전 아래 세운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낮은 단층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얹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운 주심포계 건물로, 평방 없이 창방 위에 익공식 연화공포가 도출되어 있다. 건물 외부는 2ㆍ4분합의 빗살창호와 4기의 주련이 걸려 있으며, 어칸 상부에는 일중거사(一中居士)가 쓴 지장전 편액이 양각되어 있다. 건물 내부는 육엽연화문으로 단청된 우물천장과 불단으로 구성되며, 목조지장보살좌상과 도명존자ㆍ무독귀왕 및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다.
안국사 범종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팔작건물로 청하루 우측에 있다. 1994년 원행(圓行) 스님이 건립한 것으로, 안국사의 옛 범종과 대화합의 범종을 봉안하기 위한 것이다. 단층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얹고, 사면에 홍살을 세운 범종각은 청하루의 기왓골과 수평을 이루며 안국의 염원과 국민 대화합을 바라는 범음을 전하고 있다. 현재 어칸에 일중(一中) 거사가 쓴 편액과 1996년 조성한 대화합의 범종 및 운판이 있으며, 1788년(정조 12)에 조성된 안국사의 동종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안국사 요사채, 겸 종무소
안국사의 종무를 담당하는 종무소 겸 공양간으로, 지장전 축대 아래에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목조 맞배건물로 1992년에 세워졌으며, 건물 외부에는 주련 4기와 거암(居巖) 김봉관(金奉官)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 전면 4칸은 툇마루를 가진 요사채로, 1칸은 부엌으로 사용되며 그 뒷면에는 가건물을 덧대어 창고로 활용하고 있다.
안국사 성보박물관
정면 3칸 측면 7칸의 목조 팔작건물로, 1998년 세계 각국의 불상들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현재 측면 5칸은 성보박물관으로 활용되며, 내부에 중국ㆍ일본ㆍ네팔ㆍ티베트 등 동남아시아와 파키스탄ㆍ아프가니스탄 등 서남아시아에서 수집한 불상 및 다기류 300점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은 주지 원행(圓行) 스님이 15년간 전 세계의 불교국가를 다니며 수집한 것으로, 무주 유일의 보물인 괘불이 사진으로 모사되어 있어 관람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박물관의 측면 2칸은 안국사를 찾는 이들이 다도를 즐길 수 있는 찻집 ‘운상(雲裳)’으로 이용되고 있어, 지역민들의 문화휴식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찻집에는 항상 구름이 걸려 있어 감미로운 차 한 잔을 들면 절로 마음의 안식을 얻는 것 같아, 이곳이 안국(安國)임을 되새기게 한다.
안국사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7호)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도로, 석가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다보여래ㆍ문수ㆍ보현보살이 있고, 왼쪽에 아미타불ㆍ관음ㆍ대세지보살이 서 있는 군도양식이다. 이와 같은 구도는 조선시대 대형 불전인 대웅전이나 대광명전 등에 3폭의 불화가 배치되는 형식을 한 화면에 담은 것으로, 본존불을 강조하고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기한 것이다. 이 괘불은 길이 10.75m, 폭 7.2m의 대형으로 임금과 왕비ㆍ세자의 만수무강을 위해 발원하였으며, 1750년경 경남 고성의 운흥사(雲興寺)를 중심으로 전국 각처에서 활약한 의겸비구(義謙比丘)가 참여한 것이 주목된다. 주존인 석가모니는 화면 중앙에 서 있는데, 이목구비는 큼직하며 건장하고 각진 어깨, 유난히 길게 늘어진 팔, 짧은 하체 등 이상화된 불상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어, 보는 이를 압도하는 듯하다. 얼굴인상은 원만하지만 다소 불균형한 듯한 신체표현, 통견의를 걸친 어깨에서 느껴지는 묵중하고 건장한 신체와 거신형 광배 등에서 의겸의 화풍을 짐작할 수 있다.채색과 문양은 녹색과 주홍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회색ㆍ황색ㆍ분홍 등 중간색을 배합하여 은은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또 연화문ㆍ모란과 변형된 꽃문양이 단청문양처럼 도안화되어 괘불의 군도형식과 더불어 영축산에서의 설법장면을 환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792년(정조 16)과 1809년(순조 9)에 후배지(後背紙)를 중수한 기록만 전하고 있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화기의 ‘□□ 6년’이라는 기록을 통해 의겸비구가 활약한 옹정(雍正) 6년(1728)과 건륭(乾隆) 6년(1741) 등으로 추정된다. 의겸 등 여러 승려 화가들이 그린 이 그림은 본존불을 강조하여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의도적으로 나타냄과 함께 군도식의 구도를 가지며, 묵중하고 괴량감 있는 신체, 의습에서 보이는 번잡하고 도안화된 문양이 운흥사 괘불탱(1730년) 및 개암사 영산회괘불탱(1749년)과 흡사하다. 현재 극락전 불단 뒤편에 보관되어 있으며, 보물 제126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전 앞 우측 괘불대
안국사 극락전을 오르는 축대 좌우에는 한 쌍의 괘불대가 있다.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의 모습을 갖춘 높이 190㎝의 장방형으로, 중간에 간목(竿木)를 세울 수 있는 구멍이 있다. 괘불대 네 면 중 3면은 자연석을 그대로 치석하고, 지주 앞면은 말끔하게 다듬어 ‘擁正八年四月十五日立’이라는 음각의 명문을 새겨 놓았다. 이 괘불대 역시 본래의 안국사 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1728년 괘불이 조성된 후 1730년에 조성한 것이다.
적상산성
적상산성은 적상면(赤裳面)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창리·포내리·괴목리·사천리 등 4개 리에 걸쳐있는 적상산 위의 분지를 에워싸고 있는 절벽을 이용해서 석성(石城)을 쌓은 대표적인 산성이다.
적상산성의 축성시기에 관해서는 고려 말 또는 조선초기로 정리되어 왔다. 그것은 고려 말 최영(崔塋)의 축성 건의와 조선초기 성곽정리 등에서 연유된다. 그러나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승람≫ 등의 옛 문헌에 따르면, 최소한 고려중엽 거란의 제2차 침입(1010년) 이전에 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나아가 시대적 정황과 축성방식 등을 볼 때 백제에서 축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 멸망 후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까지 방치되었으나, 고려중기 이후 거란과 왜구의 침입에 따라 인근의 여러 고을 백성이 이곳에 의지하여 보전하였던 것이다.
차츰 잊혀져가던 적상산성의 중요성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방어의 중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 광해군 때 북방의 후금이 강성해짐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의 보존문제가 논의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즉, 묘향산에 보관 중이던 실록과 선원록의 보다 안전한 보관을 위해 새로운 장소가 물색 되었는데, 적지로 적상산성이 거론된 것이다.
이처럼 적상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에 축성되어 한 때 방치되기도 하였으나, 고려 시대에는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인근 백성의 피난처가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을 지키는 요지가 되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사고가 폐지되고,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현재는 성벽 일부의 보존과 함께 유지가 남아 있으며 적상산성 안에는 안국사가 이건 되어 있고, 사고가 복원되었으며, 양수발전소 상부댐 등이 있다.
적상산 사고지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조의 족보인 선원록을 보존하기 위해 설치된 적상산 사고지 유구이다. 우리나라의 사고(史庫)는 고려 말기 이후 역대왕조의 실록을 보관하던 곳으로 선원전(璿源殿)과 실록전(實錄殿)을 두었다.
고려는 초기부터 사관을 두고 국사편찬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전란으로 대부분 없어졌고, 조선 초기 ≪고려사≫ 편찬 후에는 종적조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조선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까지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외사고인 충주·성주·전주 사고의 4곳을 두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가 불에 타버렸다. 그 후 실록을 다시 편찬하였는데, 인쇄된 실록은 전주사고본을 저본으로 정본 3부와 교정본 1부 등 모두 5부로 만들었으며, 전화(戰禍)를 피할 수 있도록 깊은 산중이나 섬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였다.
원본인 전주사고본은 강화의 마니산에 두었다가 정족산사고로 옮겨졌으며, 새로 인쇄한 정본 가운데 1본은 예전처럼 서울의 춘추관에 두고 나머지는 태백산사고와 묘향산사고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교정본은 오대산사고에 보관하였다.
그 시기 묘향산사고가 있는 북방에서는 후금(後金)의 세력이 확장되고 있었다. 이에 대비하여 묘향산사고의 실록을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1610년(광해군 2) 조정에서는 사관(史官)을 보내 적상산의 지형을 살피게 하고 산성을 수축하였다.
그 뒤 1614년(광해군 6) 천혜의 요새로 이름난 적상산에 실록전을 창건하고, 1618년(광해 10) ≪선조실록≫을 봉안하였으며, 1634년(인조 12)에는 묘향산에 보관하던 실록을 적상산사고로 이안하였다. 또한 1641년(인조 19)에는 선원전을 세우고 동년 11월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을 봉안함으로써 적상산사고는 완전한 사고가 되었다.
적상산 사고의 설치는 무주현이 무주도호부로 승격되는 계기가 되었다.
위와 같은 정황과 함께 실록과 선원록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들이 계속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도총섭에 임명된 벽암대사 각성(覺性)이 산성에 왔다가 전란 소식을 듣고 승병을 모집하여 전투에 참여하고자 했으며,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승장(僧將) 상훈(尙訓)이 실록 등을 안렴대 아래 석실(石室)로 옮겨 보관한 적이 있다. 이 때의 사정을 알려 주는 편액(扁額) ‘석실비장(石室秘藏)’이 현재 안국사에 소장되어 있다.
적상산사고는 보관이 충실한 관계로 산실(散失)된 마니산본의 보충을 위해 등서(謄書)되었으며, 포쇄와 봉안에 대한 기록인 형지안(形止案)과 사고와 선원각의 보수 등을 기록한 <적상산성선사양각역비명세서(赤裳山城璿史兩閣役費明細書)> 등이 전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적상산사고에 비장되어 있던 실록을 왕실 규장각으로 옮겨감으로써 사고는 폐지되었으며, 건물은 안국사의 불구(佛具)를 옮겨와 법당으로 사용되었다. 후에 선원전 건물은 안국사 경내로 옮겨져 천불전(千佛寶殿)으로 사용되었으며, 실록전과 그 밖의 부속 건물은 모두 훼철되고 주초석만 남게 되었다.
방치되다시피 흩어졌던 유구는 1980년대 후반 한국전력공사에서 시행한 양수발전소 건설에 따른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으나 댐 건설에 따라 수몰되었고, 본래 있던 유구의 위치보다 위쪽에 선사양각이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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