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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이준형 제공) |
저는 광운대학교 후문에서 “광운대학교 인문대학 수석 졸업자의 집”(광인수의집)이라는 토스트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장사를 하다 보니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분들의 고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희 가게를 찾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는 둥, ‘답답한 것은 없느냐’는 둥, 툭툭 문제를 건드리다 보니 사람들도 저희 가게에 오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기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물론 제가 인문학을 공부한 것, 이 학교 선배였다는 것, 회사를 잘 다니다가 갑자기 퇴사하고 장사를 시작했다는 것들이 다른 여러 가게 중에 굳이 저희 가게에 와서 고민을 털어놓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친한 후배들은 1~6시간, 길게는 8시간까지도 앉아서 자기 고민들을 실컷 풀어놓고 가곤 합니다.
‘핵노답’ 시대
청년들과 얘기하다 보면 진짜 ‘노답’(No答)이라는 말 밖에 안 나옵니다. 노답은 답이 없다는 뜻의 신조어입니다. 헬조선, 지옥불반도라는 말처럼 암담한 요즘 시대를 보며 답답할 때 자주 쓰이는 말 중에 하나지요. 고등학교 때 자기 나름대로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에 들어왔는데, 대학은 ‘부실대학’이 되지 않기 위해 학생들에게 과도한 열심을 강요합니다. 항상 과제에 치여 사는 대학생들이 자주 하는 말은 ‘내 공부가 하고 싶다’입니다. 과제 말고 진짜 공부를 하고 싶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과제를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면 결국 졸업 후, 대학을 떠나 취업을 하든, 대학원을 가든, 학점이 좋아야 합격할 수 있기 때문이죠. 결국 과제가 끝날 때쯤엔 시험이 돌아오고, 시험이 끝날 때쯤엔 과제가 찾아옵니다. 과제와 시험이 모두 끝나면 방학이 오고, 방학에는 다음 학기 학자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 하죠.
아침 일찍 30대 후반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공공기관에서 무기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데, 야간 근무를 끝내자마자 저희 가게를 찾아온 겁니다. 인터넷에서 저희 가게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어떤 가게인지 궁금해서 왔다고 합니다. 평소보다 더 정성스럽게 토스트를 만드는 동안, 그 형의 한숨 섞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은 오랫동안 연애한 애인과 결혼하고 싶었는데, 현실을 살펴보면 도무지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형의 애인 역시 계약직 교사를 하고 있다 보니, 서로의 월급과 지금까지 모아둔 돈으로는 집을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말이었죠. 서울 전세 아파트가 2억 원이 넘으니 도무지 결혼할 엄두가 안 나고, 그렇다고 거주 수준을 낮추자니 애인이 싫어하고, 지방으로 내려가기엔 둘 다 직장을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형에겐 돌봐드릴 홀어머니까지 있었지요. 진짜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 가게를 자주 찾아주는 한 여자후배는 이제 학교를 졸업하는 25살 취업준비생입니다. 저희 학과에서 일도 잘하고, 누구와도 금방 친해질 수 있는 싹싹한 성격으로도 유명해서 인기도 꽤 있었죠. 이 친구가 취업하고 싶은 곳을 여기저기 알아보는데 도무지 취업이 안 된다는 거예요. 저는 솔직히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내가 보기엔 이 후배가 회사에 들어가면 득이 되면 됐지, 실이 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왜 안 뽑는 걸까? 나 같은 사람과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보는 눈이 정말 다를까? 왜 이런 인재를 알아보질 못하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단순히 이 후배뿐이 아닙니다. 제 주변에는 제가 돈만 많았으면 월 300만 원에 4대 보험까지 보장할 테니 같이 일하자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회사는 뭐가 그리 잘나서 청년들을 이렇게 홀대하나요? 기업들은 뭐가 그리 잘나서 청년들이 일만 시켜준다면 영혼이라도 바치겠다고 말할 때까지 이토록 자존심 상하게 만드는 건가요?
아침마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시는 한 어머니는 오후에 다시 아이를 데리러 오십니다. 육아에 대해 몇 가지 여쭤봤는데요. 세상에, 요즘은 유치원 대기번호가 600번까지 밀려있다더군요! 저출산 시대에 웬 600번인가 싶은데, 좋은 시설과 선생님들이 있는 유치원으로 신청자가 몰리니 특정 유치원의 대기번호만 자꾸 올라간다고 하더라고요. 신문을 보니, 어느 엄마는 대학교 합격만큼이나 유치원 합격을 감격해하시더라고요. 신기하면서도, 뭔가 이런 힘겨움이, 경쟁이,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로, 초등학교에서 상급학교로. 그렇게 계속 이어져가는 게 아닌가 해요. 뭐가 이렇게 힘겨울까요. 그냥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좀 안전하고 멀쩡한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그리 큰 욕심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탈조선이 답일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저를 비롯한 많은 청년들의 꿈은 좋은 가정을 이루는 일인 것 같아요.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가끔 좋은 레스토랑 가서 맛있는 것 좀 먹고, 휴가 때는 비싼 해외여행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남아라도 잠깐 갔다 올 수 있는 정도의 가정을 이루는 일 말입니다. 요즘 사람들의 행복은 맛집과 여행을 얼마나 마음대로 갈 수 있는가에 달린 것처럼 보여요. 블로그도 맛집과 여행 블로그가 제일 많잖아요. SNS도 맛집과 여행에 대한 이야기로 넘쳐나고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계층 간 ‘욕망의 격차’가 가장 근소한 시대라고요. SNS 덕분에 ‘남들만큼만 사는 것’의 기준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거죠. 정보는 개방됐고, 내 초등학교 동창이 무슨 차를 타는지, 결혼을 어디서 하고, 어디에 집을 구했는지도 금방 알 수 있는 시대에 현실의 한계는 더 명백하게 드러나고야 말죠. 그러니 한숨이 쌓이고, 포기가 산처럼 커지고, 결국 절망으로 굳어져 버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헬조선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탈(脫)조선밖에 없다’는 말이 나오긴 하지만, 솔직히 그렇다고 탈조선이 정말 답은 아니라는 것은 알아요. 저는 소위 금수저라는 부의 대물림, 부정과 부패로 점철된 정치판, 아직도 실력보다는 그 외의 요소들로 좌우되는 중대한 결정들을 보고 있자면 속에서 열불이 터지는 것 같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진짜 이건 뭐하는 짓들인지….
그래도 이런 현실 덕분에 절망이 우리에게 준 유익한 점도 있죠. 사람들이 이제 쉽게 정부의 청색 선전을 믿지 않잖아요. 조금 더 주체적인 눈을 갖게 된 것이죠. 우리 눈을 흐리게 하는 구조의 놀음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롭게 됐달까요? 그 덕분에 저도 사람들이 각종 이슈에 달아놓은 댓글을 보며 더 균형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됐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사람들이 너무 절망해버려서인지 아예 냉소적으로 변해버렸어요. 무서운 일이죠. 모든 문제에 절망하고, 모든 문제를 비관하죠. 자기와 다르다 싶으면 배척하고 공격하고 진영논리로 다 싸잡아서 혐오하죠.
‘좋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
저도 가게를 하면서 답답할 때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한 것 같은데, 결국 버는 돈은 별로 없는 것 같을 때가 있거든요. 물론 이익을 많이 취하려고 장사를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어차피 많이 남지도 않고요. 그래도 저 하나 먹고살면서 조금씩은 저축도 할 줄 알았거든요. 그래야 다음에 좀 더 안정적으로 장사를 하든, 사업을 하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이건 뭐, 딱 먹고살 만큼만 벌게 되는 거예요. 때 되면 월세 나가고, 전기세 나가고, 가스비 나가고 하면 남는 게 없어요, 남는 게. 그럼 돈을 많이 쓰나? 근데 그런 것도 아니거든요. 돈을 쓸 데도 없어요. 심지어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었는데도 맨날 부족해요. 그리고 가끔은 후배들 맛있는 것도 사주고 싶고, 여자친구에게 멋있는 선물도 사주고 싶고, 부모님 외식이라도 시켜드리고 싶은데…. 쉽지 않아요, 그냥 근근이 먹고살 정도로만 벌게 됩니다. 이게 어느 순간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하나님한테 막 따졌어요.
‘하나님, 하나님이 이 가게가 하나님 나라의 땅이라고 하셨잖아요. 하나님 나라의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려라, 네 힘으로 웅덩이를 파지 말고 내가 주는 비로 열매를 맺어라, 하셨잖아요? 근데 그렇게 내 힘으로 만드는 미래에 대한 대비 하나 없이 산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인 것 아세요? 그래도 다른 붙잡을 만한 게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매일의 매출이 일정한 것도 아니고, 미래가 명확히 보이는 것도 아닌데, 제가 어떻게 하나님만 믿고 살아요. 나는 인간이에요, 하나님. 이렇게 모자란 나를 왜 이렇게 혹사시키세요? 부족한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히세요?’
이렇게 부르짖으면서 막 울었어요. 답답하고 속상했거든요. 그런데 기도를 하는 중에 제 마음속에 ‘가깝게 있는 네가 더 사랑해주어라’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어요. 힘들다고, 왜 이렇게 혹사시키느냐고 따져 묻는데 더 사랑해달라니요. 그런데 그때, 우리 가게를 찾았던 현우라는 아이와의 에피소드가 생각났어요. 현우는 초등학교 3학년 남학생인데, 제가 구워주는 식빵 끝 부분을 먹으러 매일 와요. 저도 어차피 팔지 않는 부분이라 초등학생들에게 공짜로 구워주거든요.
그 날도 현우는 태빈이랑 같이 우리 가게에 놀러 왔어요. 저는 그때 한참 손님이 없어서 우울했거든요. 그래서 풀이 죽은 채로 현우랑 태빈이에게 빵을 구워주고 있었죠. 그러다가 문득, 아이들에게 너희는 나중에 뭐하고 싶으냐고 물어봤어요. 태빈이는 레고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말했어요. 태빈이 손에는 레고 박스가 들려 있었어요. 구체적인 대답이 조금은 대견하게 보였어요. 그리고 저는 옆에 있는 현우에게 물어봤어요. 현우의 말은 사실 의외였어요. 현우는 저한테 ‘인문대 수석 졸업자’가 되겠다고 말했거든요. 조금 호기심이 생겨서 왜 인문대 수석 졸업을 하고 싶으냐 물어보니까 요놈이 저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때는 진짜 기분 좋았어요. 그런데 더 기분 좋았던 건 다음 말이었어요. “형이 어떤 사람인데?” 하고 물어보니까 현우가 “형이요? 형, 좋은 사람이요!”라고 말했거든요.
기도하면서 그때 생각이 드는데, 아, 좋은 사람으로 좋은 스토리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굶어 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명히 저는 비루하고 가난하고 구차한 상황이었어요. 돈이 많아서 멋있게 누군가를 도와준다거나, 기업이나 나라의 높은 위치에서 후배들을 쉽게 취업시킬 수 있는 능력과는 거리가 멀었죠. 그 뒤로 저는 좋은 사람으로 살기로 마음먹고 그렇게 살아보려고 했어요. 그때부터 여기저기서 제가 살아가는 방식에 관심을 가져주고 제 힘이 되어주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물어봤어요. 대부분 희생할 줄 아는 사람, 죽을 때도 생각나는 사람,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나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 등등의 말이 나오더라고요. 그리고 제 주변에 좋은 사람을 찾았을 때, 제가 여태껏 만났던 사람 중에 제일 좋은 분이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결국 성화를 향한 길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어요. 그렇다면 성화를 위한 길을 걷는 것, 즉, 예수님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예수님처럼 좋은 이야기를 남기는 것만으로도 굶어 죽지 않을 수 있구나, 먹고살 수 있는 거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어요. 믿기 어렵지만,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 사는 방법이구나 하고 말이에요.
저는 20대 초반부터 저를 ‘이 시대의 희망’이라고 부르고 다녔어요. 처음에는 친구들을 웃기고, 발표할 때 사람들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막 던진 멘트였는데, 최근에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제가 살아가는 모습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된다는 말을 많이 듣곤 해요. 도무지 붙잡을 것이 하나도 없는 시대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 분만 붙잡을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눈에 띄는 희망이 있는 시대는 분명 아닌 것 같아요. 뭔가를 희망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시대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사는 거죠. 이게 맞으니까요.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며 살다 보면 결국 답이 나타나겠죠. 쉽진… 않겠지만요.
이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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