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존재하는 동시성 -파멸과 패배-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문학동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 노인은 말했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진 않아.”(p.108)
<노인과 바다>의 유명한 구절이다. 평생 어부로 살아 온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했으면 낙담할 수 있는데 산티아고는 조각배에 정어리와 미끼 두 뭉치를 가지고 다시 바다로 나선다. 드디어 85일 만에 잡은 청새치 한 마리를 두고 사투를 벌이지만 곧 상어떼의 공격을 받는다. 그리고 산티아고가 “인간은 패배하지 않아, 파멸당할 수 있을지언정”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다.
패배는 어떤 대상과 겨루어서 지는 것이라면, 파멸은 파괴되어 없어지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패배는 파멸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파멸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눈으로 보이는 물질적, 육체적 가치를 말하며 패배는 정신적 의미를 말하기도 한다. 산티아고를 두고 운이 다했다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그는 계속 바다로 나갔다. 드디어 코에서 꼬리까지 5.5미터나 되고 몇백 킬로미터 나가는 청새치를 한 마리 잡는다. 손에 상처가 나지만 끝까지 낚싯줄을 놓치지 않으려고 사투를 벌인다. 거의 세 달 만에 물고기를 잡아 항구로 돌아가는 꿈을 꾸는 것도 잠시 계속되는 상어들의 공격을 받기 시작한다.
거대한 상어와의 사투가 시작된다. 꿈과 절망은 동시에 찾아오는 것인가. 평생 가장 큰 청새치를 잡았지만 순조로운 항해가 되지 못한다. 노인은 굳은 결의로 상어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며 “차라리 꿈이었다면 좋았을걸. 노인은 생각했다. 놈이 공격하는 건 못 막겠지만 놈을 죽일 수는 있을지 몰라. 이놈의 덴투소. 노인은 생각했다. 이 망할 놈의 자식(p.105)”
첫번째 덴투소상어를 발견하고 작살을 준비해 공격하지만 물고기의 이십 킬로그램을 살점을 떼어가버렸다. 그렇지만 노인은 덴투소를 죽이고 희열에 찬 말을 내뱉는다. “오래가기에는 너무나 좋은 일이었어. 노인은 생각했다. 차라리 모든 게 다 꿈이라면, 내가 저 물고기를 낚은 일이 전혀 없던 일이고 그저 혼자 침대에 신문지를 깔고 누어 있는 거라면 좋을텐데.(p.107)” 말이다. 두번째 갈라노 상어들이 피냄새를 맡고 흥분해서 공격해온다. 노인의 손은 낚시줄에 다쳐 피가 나고 뻣뻣했지만 노인에 눈엔 협오스러운 상어들일 뿐이다. “이 갈라노 놈들. 어서 덤벼라. 이 갈라노 놈들아.” (p.113) 그리고 상어의 뇌와 눈에 작살을 쑤셔 박았다. 상어들은 입 안에 든 살점을 삼키면서 죽어갔다. 물고기의 사분의 일이 뜯겨 나가버렸다.
“이렇게 까지 멀리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물고기야.” 노인은 말했다. “너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나오질 말았어야 했어. 미안하구나. 물고기야.” (p.115).
계속되는 상어들의 공격. 삽날코 상어 뇌에 칼날을 꽂았다. 이제 노인에게 남은 건 노 두 자루와 키 손잡이. 그리고 짧은 뭉둥이뿐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반쪽짜리 물고기야.” 노인은 말했다. “물고기였던 물고기야. 내가 너무 멀리 나온 게 후회스럽구나. 내가 우리 둘 다 망쳐버렸어. 하지만 너와 난 함께 많은 상어를 죽이거나 박살내버렸지. 넌 이제까지 얼마나 죽였니? 내 머리의 창 같은 그 주둥이는 괜히 달고 있는 건 아닐 테니 말이야.”(p. 121)
그리고 상어들이 또다시 공격해왔을 때 더 이상 싸우진 않는다. 상어들이 물고기를 먹게 두고 노인은 해안선 불빛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만 열중한다. 노인은 자신이 이제 완전히 돌이킬 수 없게 패배했음을 알게 된다. 인간은 파멸할지언정 패배할 수는 없다고 했지만 인간의 힘은 미약하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사실이다. 영원한 생명력도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노인은 최선을 다해 싸웠다. 물고기와의 사투에서는 어부의 삶에 숙고했으며 상어떼를 만나고는 차례차례 자신이 가진 작살, 노, 칼, 뭉둥이를 이용해 끝까지 물고기를 지키고자 했다. 결국, 물고기는 파멸되었고 자신은 상어떼에게 패배했지만 그 과정은 피나는 사투였다.
산티아고는 청새치를 잡으려는 시도는 패배한 것이 아니다. 상어들의 습격을 받고 비록 청새치는 뼈만 남았지만 말이다. “난 놈들한테 졌단다. 마놀린.” 노인이 말하자 “그놈한테는 지지 않았잖아요. 잡아온 물고기한테는 말이에요.”(p.129)라고 말해주는 소년 마놀린이 인상적이다. 헤밍웨이를 두고 실존주의 경향이 강한 작가라고 말하는데 <노인과 바다>에서 실존문학이 빛을 발하고 있다. 산티아고를 통해 결과보다는 과정을, 목표보다는 수단과 방법에 무게를 두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패배할 수 없는 싸움이 곧 인간실존이다.
‘죽음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삶이란 어쩔 수 없이 ’승산없는 투쟁‘일지는 모른다. 패배할 수 뿐이 없는 싸움이 곧 인간실존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백절불굴의 정신이다.’(<노인과 바다> 민음사. p.156)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것, 그리스 신화 시시포스의 끝나지 않는 상황을 보면 비록 힘들게 잡은 청새치를 상어들이 먹을지언정 노인은 끝까지 사투하겠다는 의지가 <노인과 바다>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노인에겐 마지막 희망이 있다. 바로 소년이다. 인간과 인간의 연대, 협동, 사랑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추운 광화문 광장에서 거대한 상어떼와 싸우는 민중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불굴의 노인을 보게 된다. 촛불연대로 꺼져가는 희망을 우리는 살릴 수 있다. 인간은 파멸할지언정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서평-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