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은 항복 문서에 조인(1945년 9월 2일)하기 이전의 15년전쟁(1931년~1945년)에서 이미 260만명~310만명
의 병사들을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항복할 당시인 1945년 8월 14일 당시만 해도 일본 군사정부는 일본인
'1억명 옥쇄작전' 을 독려했고,결사항전을 외칠때만 해도 본토에만 지상군 225만명,해군 125만명,전투기가 6천대
나 있었다.그러나 8월 17일 전군에 무장해제가 선언되자 수많은 군인들과 함정과 비행기는 무용지물이 됐다.결사
항전과 동시에 옥이 깨지고 부셔질때 산산 조각나듯 일본인 전체가 산화 한다는 '1억 옥쇄작전' 이란 것은 그야
말로 허울좋은 구호였을 뿐이었다.
2, 1941년 12월 이후 일본인들의 구호들을 살펴보면,일본을 동아시아의 자본주의 선진국으로 만들어준 영국과
미국을 귀신과 가축 같은 놈 들이라고 비하하는 '귀축영미(鬼畜英米)' 이라 부르며 항전했다.그러던 일본이 하루
아침에 서리맞은 고구마 싹이 됐다.방금 전까지 1억옥쇄를 외치던 일본인들이 '미국과 민주주의'를 다시 외치면서
생존을 위한 재빠른 변신을 한다.귀축영미를 선동하던 지도층들이 미군이 일본 점령군으로 들어 온다니까 미군
들을 위한 '위안부'를 모집하는등 난리를 피운다.당시의 경찰서장들이 앞장서서 국가(일본)를 위해 매춘을 권장
하고 요구하는 교활함을 보인 것이다.아마 역사 대대로 작은 권력은 강자들을 만날 때마다 변신과 교활의 요람인
기회주의자들로 변신을 했다.그러면서도 힘없는 백성들이나 서민들에겐 국가와 민족을 팔면서 늘 복종과 충성을
요구했다.
3, 1945년 8월 28일 필리핀 마닐라에 있던 연합군(미군)사령부 선발대 1진이 일본의 가네가와 야스키 비행장에
도착해 사전 정리를 마친후인 8월 30일엔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가 일본의 도착한다.맥아더의 아버지가 오랫
동안 마닐라 총독을 지내 동양에 대해 잘알고 있었던 맥아더는 9월 2일에 항복 조인식을 거행 한후 곧바로 일본
의 군국 해체및 정비에 들어간다.항복하기 이전의 일본 사정에 대해 말해 둘것은 원폭이 떨어진 히로시마나 나가사끼
2곳은 말할것도 없고 '동경,오사카,나고야,고베,요코하마' 등 일본이 자랑하는 5대 도시는 물론,42개의 현청 소재지를
비롯해 일본의 90여 개의 도시가 네이팜 탄을 비롯한 무차별 폭격으로 불탔다.
4, 미군의 B29기의 무차별 폭격이 얼마나 심했는가는 폭격의 열기로 인해 각 도시의 상공에는 강제 상승기류가
생겨났을 정도 였다고 미공군 조종사들은 증언한다.결과는 236만호의 집이 소실됐고,이재민은 800만명을 웃돌았다.
이어서 패전과 함께온 처절한 식량부족에 허덕여야 했다.패전국이라 어디에서 식량을 구할 처지도 못되었다.눈물을
머금고 일본을 초토화시킨 승전국이자 점령군인 미국(미군)에 머리를 조아리고 매달릴수 밖에 없었다.식량부족
앞에서는 군국주의도 이념도,사무라이 정신은 없었다.대일본 제국의 승리를 밤낮으로 외치던 지도 세력들은 하루
아침에 노예가 된 형국이다.일반인으로 돌아온 일본왕이 맥아더를 총 11번을 만났는데 그때마다 '식량원조' 만 을
반복했다고 하니 당시의 식량 사정이 어떠했는가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5, 1945년 11월의 동경도 인구가 277만 7천명 정도였다고 하는데,중국,만주,조선,대만,사할린,남양군도 등지에서
복귀한 군인과 군속,일반인이 900만명이나 모여들어 일본과 동경은 그야 말로 아비규환의 형국을 이루고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식량난으로 일본인들의 굶주림은 1949년 까지 계속되어 영양실조로 아사한 사망자가 1천만명을
상회했다.일본과 미국 수뇌부들의 만남에서의 주요 안건은 항상 '식량원조' 였다.만약에 냉전을 실험하기 위해
누구나 알수있는 누군가에 의한 한반도 전쟁을 만들지 않았다면,일본의 전후사정은 더 나빠 졌을 것이고 영양실조에
의한 아사자는 더 폭발했을 것이다.그리고 일본은 패전의 후유증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냉전 구도속에
미국이 일본을 자본주의 진영의 동아시아 보루(본부)로 키우려 하지 않았다면.아마 한국 내전시 병참기지를 일본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그래서 일본인들은 한국의 내전을 '신이 일본에준 절호의 기회'라고 호들갑을 떨었다(남의 불행
은 나의 행복을 외쳤다).그러나 한반도 내전과 이에 따른 일본의 부흥은 자본주의 진영의 두목인 미국의 고도 전략에
의한 의도적 행위 였다는 것도 배제 할수는 없다.
6, 맥아더의 미군 사령부(말은 연합군 총사령부라고 했다)는 항복 조인식이 있은 직후 곧바로 잔존 일본군을 해체해
269 만명을 고향 앞으로 보내고,1945년 9월 11일 일본인 39 명 에게만 전범 체포 명령을 내린다.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 2000만명 이상을 살인한 전쟁 범죄자들 처리에 있어 수백 수천명도 아닌 단 39명 체포란 것은 어리둥절한
일이 벌어진다.이때 이미 냉전 대결에 써먹으려고 일본을 미국의 태평양(동아시아)지역 본부중대 쯤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전범 설정이다.특히 전범의 최고봉인 일본왕을 살려준 것도 이해 할수없는 일이다.이어서
9월 22일에는 '황국사관 교육을 중단' 시키고,10월 2일에는 각 지역에 설치된 '식민지은행'들을 폐쇄케 한다.그리고
마침내 전비 조달의 핵이자 전쟁군수물자를 생산했던 미쓰이와 미쓰비시를 비롯한 83개의 재벌들을 해체한다.
7, 그리고는 또하나의 전비 조달 조직이었던 각지의 지주(地主)들을 해체하기 위해 '농지개혁'을 단행한다.사실상 점령군
으로 전권을 휘두르던 맥아더 사령부가 아니였으면 아주 견고했던 일본의 봉건지주제도의 농지개혁은 힘들었을 것이고,
일본인 스스로는 엄두도 못낼일 이었다.이때의 일본인들은 맥아더를 천황보다 더 높은 하느님이라고 까지 했다.맥아더는
어떤 지주든 5정보(15000평) 이상 소유를 용인하지 않고,나머지는 아주 싼값이나 꽁짜에 가까운 후불 배상으로 소작인
들에게 넘겨 주라고 했다.말할것도 없이 불응하는자는 추방했다.그러나 5정보라 해도 과거 지주들이 농지의 60%를 차지
한다는 문제점을 발견하고는 1946년 10월에 2차 농지개혁을 단행해 지주는 홋가이도(북해도)만 4정보 소유를 인정하고,
나머지 지역은 지주몫으로 1정보만 소유케 했다.이러한 농지개혁은 곧바로 일본 농촌경제를 살리고 일본의 하층조직의
부활과 농촌경제를 통한 비축의 길로 들어서 일본 경제를 살리는 시금석이 됐다.
첫댓글 결국 남한으 지주들이 아시아의 정세를 만든 겁니다. 이들이 6.25 때 버티었기 때문에 일본의 기득권도 부활하였고. 현재 세계가 이렇게 된 것이지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