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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경주 불국사와 팔만 대장경 외...
불국사 일주문
불국사 다보탑
불국사 다보탑 기단 위 돌사자
불국사 다보탑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불국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석탑.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0.4m, 기단 폭 4.4m이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서쪽의 석가탑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탑으로, 전형적인 쌍탑가람의 배치이다. 두 탑을 현재와 같이 동서로 나란히 세운 까닭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法華經)》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기단부에는 사방에 보계(寶階)를 마련하였고, 보계에는 난간을 가설하였던 석주가 남아 있다. 그 위에는 네 모퉁이와 중앙에 사각 석주(石柱)를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갑석(甲石)을 받고 있다. 또 이 기단에는 원래 네 모퉁이에 돌사자를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1구만 남아 있다.
갑석 위에는 사각형 난간 속에 8각 신부(身部)를 두었으며, 다시 8각 갑석을 덮고 8각 난간을 돌린 다음, 그 안에 8개의 죽절형(竹節形) 석주를 돌려 8각 연화석(蓮花石)을 받치고 있다. 연화석 위에는 8개의 주두(柱頭) 모양의 받침으로 옥개석(屋蓋石)을 받고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8각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가 거의 완전하다.
한국의 석탑 중 일반형을 따르지 않고 특이한 형태를 가진 예로, 이만큼 기발한 의장(意匠)으로 이루어진 걸작은 그 유례가 없다. 건립연대는 서쪽의 석가탑과 마찬가지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김대성(金大城)이 중창한 당시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증장천왕과 광목천왕
불국사 삼층석탑
귀면 문고리
불국사 관음전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수구장치
불국사
불국사
경북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기슭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본사(敎區本寺)의 하나로 그
경내(境內)는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경내면적은 11만
7541평이다.
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그 중 하나는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로, 여기에 보면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고,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한편, 《불국사 사적(事蹟)》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 )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에 있는 이
기록을 보면, 글씨도 일정하지 않고 크기도 달라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측되므로 여기에 나열된 건물들이 당시 한꺼번에 창건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며
오히려 임진왜란 때까지 조금씩 건립된 것으로 추정함이 옳을 것 같다. 1593년 5월 임진왜란의 병화로 2,000여 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리자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그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8 ·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大役事)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유지(遣址)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經樓) ·회랑(廻廊)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泛影樓) ·자하문(紫霞門)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불국사 경내에는 다보탑(多寶塔, 국보
20), 3층석탑(국보 21), 연화교 ·칠보교(蓮華橋 ·七寶橋, 국보 22), 청운교 ·백운교(靑雲橋 ·白雲橋, 국보 23),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 국보 26),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27), 사리탑(舍利塔, 보물 61) 기타 많은
문화재가 잔존한다.
모든 사찰이 그러하듯이 여기에 다듬어진 돌들, 나무들, 그리고 적절히 꾸며진 공간(空間)들은 모두 사람의
정성이 깃든 곳이며, 그 정성은 우선 연약한 인간의 비원(悲願)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구원(救援), 부모의 명복(冥福), 국가와 민족의 안녕,
부처의 가호(加護), 그 모든 것을 비는 절실한 염원(念願)이 이곳 돌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 하겠으며 이러한 정성으로 이룩된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佛國), 즉 이상적 피안(彼岸)의 세계 그 자체라 하겠다. 이 불국을 향한 염원은 대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
《법화경(法華經)》에 근거한 석가여래의 사바세계(娑婆世界) 불국이요,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 또는 《아미타경》에 근거한 아마타불의 극락세계
불국이요, 또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불국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一廓)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 놓았다.
이곳에 정성을 바친
승려와 선현(先賢)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주요한 인물만을 열거하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 영제부인(법명 法流), 절을 중건한
지소부인, 헌강왕비(憲康王妃) 권씨(법명 秀圓), 의상의 제자 표훈(表訓), 불국사의 개조로 불리는 김대성, 탑을 조성한 백제의 예술가
아사달(阿斯達), 그에 대한 애정을 자비(慈悲)로 승화시킨 아내 아사녀(阿斯女), 지금은 불타 없어졌지만 광학장강실(光學藏講室) 벽에 석가상을
수놓았던 경문왕(景文王)의 공주로서 비구니가 되었던 원해(圓海) 등은 모두 이 절에 염원을 건 사람들이다. 고려시대에는 지율(持律)이 엄하기로
이름난 유가학승(瑜伽學僧) 해원(海圓)이 이곳에 살았으며, 조선시대에는 효령(孝寧) ·안평(安平) ·영응(永膺) 등의 대군(大君)과 세종
·노산군(魯山君), 왕실의 대비(大妃) ·상궁(尙宮) 등의 지성(至誠)이 끊임없이 불국사로 쏠렸다.
불국사 범영루
불국사 석단
불국사 연화교칠보교
불국사 연화교칠보교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불국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석교.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연화교 높이 2.31m·너비 1.48m, 칠보교 높이 4.06m·너비 1.6m이다. 불국사 앞,
대석단(大石壇) 동쪽의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맞은편 서쪽에 있다. 가구(架構) 수법은 동쪽의 청운교·백운교와 거의 비슷하다. 밑에
있는 연화교는 10단의 층계에 계단식 등형(登
)을 만들어 양분하였고, 양쪽 끝의 등형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석주(石柱)만 남아 있다. 다리 아래는 호형(弧形)으로
가공한 석재를 사용하여 궁륭형(穹 形)
통로를 만들었으며, 이 석계(石階)에서 특이한 것은 각 계층에 미려한 연판(蓮瓣)이 양각되어 있는 점이다.
칠보교는 8단의 보계(寶階)로 이루어졌고 한 장의 장석(長石)으로 된 등형으로 양분된 점은 연화교와 다르나, 석주가 남아 있어 석난(石欄) 설치의 흔적을 남긴 점은 같은 형식이다. 다만 규모가 작아진 관계로 다리 아래 통로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보계에 특별한 조식(彫飾)도 없다. 칠보교를 올라서면 안양문(安養門)을 지나 극락전을 대하게 되는데, 이 석계는 동석계(東石階)의 장엄함에 비해 우미수려하여 조화와 변화를 주고 있다. 이 석계 또한 동석계와 마찬가지로 경덕왕(景德王) 때 김대성(金大城) 중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경덕왕릉
문무대왕릉
문무대왕릉
경북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봉길리(奉吉里)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
사적 제158호.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屍身)을 불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동해의 대석(大石)에 장사지낸 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이 바위에는 사방으로 수로(水路)를 냈는데, 특히 바다 쪽인 동쪽 수로에서 파도를 따라 항상 맑은 물이 흘러들어와 서쪽의 수로를 통해 빠지게 되어 있다. 인공을 가한 것이 분명하며, 그 안에는 넓은 공간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대석을 놓았는데, 바다의 수면은 그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다. 유골은 이 돌 밑에 안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신문왕(神文王)은 부왕의 뜻을 이어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여 불력(佛力)으로 동해의 왜구를 막으려 하였고, 감은사 금당(金堂) 밑에서 동해를 향해 구멍을 뚫어 조수가 금당 밑까지 들어오게 하여, 용이 된 문무왕이 조수를 따라 금당까지 드나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또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북쪽 언덕 위에는 이견대지(利見臺址)가 있는데, 신문왕은 이곳에서 대왕암을 망배(望拜)하였다.
대석 밑에 어떤 시설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중앙의 장골처(藏骨處)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수로를 설치한 것은, 석가의 사리(舍利)를 안치한 탑의 형식을 적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경주 석빙고
경주 석빙고
1738년(영조 14)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仁旺洞) 월성(月城)의 북쪽에 축조한 조선시대의 화강석제
얼음창고.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66호로 지정되었다. 길이 18.8m, 홍예(紅霓) 높이 4.97m, 너비
5.94m이다. 남북으로 길게 조영하고, 출입구는 남쪽에 있는데 너비 2.01m, 높이 1.78m이다. 여기에서 계단을 따라 실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빙실의 밑면도 외부의 형태와 같은 직사각형으로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바닥 중앙에 배수구가 있어 내부의
물이 이 경사를 따라 외부로 배출된다.
내부는 연석(鍊石)으로 5개의 홍예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길쭉한 네모 돌을 얹어
천장을 삼았다. 벽은 직사각형의 작은 석재로 정연하게 쌓아올렸고, 밑부분은 장대석을 연결하여 지대석(址臺石)을 삼아 견실하게 축조하였다.
천장에는 3곳에 환기 구멍을 마련하여 외기와 통하게 하였는데, 조각한 돌로 구멍을 덮어 비와 이슬을 막고 있어 다른 석빙고와는 달리 정연한
양식과 축조를 보여 주목을 끈다. 환기 구멍은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시설하였는데, 이것은 입구가 남쪽에 있으므로 안으로 내려가는 층계가 몇
단 있어서 그만큼 자리[房]를 차지하고 얼음창고의 주실(主室)은 좀더 깊이 들어간 내부의 북쪽에 있는 까닭이다.
석빙고 옆에는
석비가 있어 축조연대를 알 수 있는데, ‘崇禎紀元後再戊午’는 1738년(영조 14)에 해당하고, 다시 입구의 미석(楣石)에
‘崇禎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 새겨져 있어, 축조한 지 4년 만에 현위치에 옮겨 개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서쪽으로 약 100m 되는 곳에
옛터로 전하는 자리가 있다. 조선 후기에 몇몇 석빙고를 축조하였으나, 그 규모나 기법에서 이 석빙고가 가장 정연한 걸작으로 꼽힌다.
석빙고 내부
석굴암 일주문
석굴암
석굴암 석불
석굴암
신라 때 오악(五岳)의 하나인 토함산(吐含山)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石窟寺刹).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지만,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신라의
기명(記名)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십일면관음
금강역사
첨성대
첨성대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소재하며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밑에서부터 4.16m 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이 달려 있다.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다. 30cm 높이의 돌 362개로 27단을 쌓아
만들었다.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이 걸쳐 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 제27단 내부의 반원(半圓)에는 판석(板石)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板木)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판석은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이다.
꼭대기에는 정자석(井字石)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첨성대가 제단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마총
천마총 내부
안압지안압지
경북 경주시 인교동(仁校洞)에 있는 신라 때의 연못.
월성(月城)의 북동쪽에 인접하였다. 《삼국사기》 674년(문무왕 14) 조(條)를 보면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花草)를 기르고 진금이수(珍禽異獸)를 양육하였다고 하였는데, 안압지는 바로 그때 판 못이며 임해전(臨海殿)에 딸린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 이래의 준설공사와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여 주목할 만한 유구(遺構)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동서 200m, 남북 180m의 구형(鉤形)으로 조성되었는데, 크고 작은 3개의 섬이 배치되었다.
연못 기슭과 섬에 실시된 호안공사(護岸工事)는 정교하고 도수로(導水路)와 배수로의 시설도 또한 교묘하다. 연못 바닥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와전류(瓦塼類)로서는 신라 특유의 우미(優美)한 무늬가 있는 것이 많은데, ‘儀鳳四年(679)’ 또는 ‘調露二年(680)’의 당나라 연호명(年號銘)이 있는 와전은 중요한 자료이다. 불교 예술품으로서 판상(板狀)의 금동여래삼존상(金銅如來三尊像)과 금동보살상(金銅菩薩像) 등의 우수한 작품이 있고, 유존(遺存)하는 예가 드문 목조의 배, 건축 부재, 목간(木簡) 등의 채취와 그 보존에 성공한 일은 귀중한 공적이다.
안압지
안압지 조감도
황룡사 구층목탑터
팔만대장경 八萬大藏經 (1998, 삼성뮤직)
첫댓글 우리의 유산 불국사 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