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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퇴직을 하고 자유를 찾아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지내며 2년을 보내던 어느 봄날, 조선일보에 나온 기사를 보고 눈이 번쩍 띄어 찬찬히 내용을 살펴보니 문화체육부의 행사로 전국적으로 붐이 일어나고 있던 인문학에 대한 홍보를 하며 독서를 장려하기 위한 행사로 국립중앙도서관이 주관하고 조선일보와 교보문고가 지원하는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전국의 명승지와 역사적인 현장을 찾아다니며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여행을 하는 행사인데 먼저 주제에 맞게 참여하려는 취지와 인적 사항을 기록하여 신청을 하면 추첨을 통해서 참가자를 결정하는 방법으로 독자들의 지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수십 대 일의 경쟁이 되어 참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2010년 4월 첫 여행지는 함양과 산청이었는데 특히 함양은 조선시대의 대 학자이신 조식과 경주 최 씨 시조인 문창공 최치원 선생님의 유적이 있는 곳이요 학자와 선비들이 시문을 논하며 노닐던 정자가 많은 곳으로 나에게는 꿈에도 그리던 곳이라 벅찬 기대를 가지고 신청을 하였는데 그만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너무 서운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중 계획에 따른 5월의 2차 여행지는 정약용 유적지를 찾는 전남 강진이었다. 한 번 떨어진 경험을 살려 나름대로 심혈을 기우려 참가 취지를 써서 신청을 하였더니 내 정성을 알아주었는지 당당하게 선정이 되었다. 아내를 동행인으로 신청을 하였으니 모처럼 안식구와 같이 여행을 하게 되어서 너무나 즐겁고 일석이조의 성과를 올린 것 같아서 떠나기 전부터 설레고 많은 기대가 되었다. 무엇보다 참가비는 문체부 예산이 지원되니 1박2일에 1인당 5만원으로 거의 공짜 수준이니 아무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처음 가는 강진은 정조 때 정약용이 유배되어 지내던 작은 초가인 사의재(四宜齋)와 다산초당, 김영랑 생가가 유명한 곳으로 많은 기대가 되었고 특히 키도 훤칠하고 멋쟁이인 국립중앙도서관 관장인 모철민 씨와 해설을 맡은 한양대 국어국문과 정민 교수, 그리고 출판사 김영사 사장이 동행하였으며 저녁에 강진도서관에서 정민교수의 정약용에 대한 해박한 강의를 듣고 다음날은 다산초당과 김영랑 생가를 답사하면서 지적, 정신적으로 풍성한 혜택을 누리는 시간이었던 기억이 새롭고 참가자들의 수준도 상당히 높아서 같이 여행하는 것 자체가 즐겁기도 하지만 긍지를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정민 교수와~~~
四宜齋란 작은 주막으로 다산이 유배 생활을 하던 곳으로 주모의 호의로 남의 주막에 얹혀살면서도 네 가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다짐하며 살았는데 첫째 생각을 맑게, 둘째 용모는 단정하게, 셋째 말은 적게, 넷째 행동은 무겁게라는 네 가지 덕목을 실천하며 근면 검소하게 생활했던 곳을 돌아보는 동안 짠한 연민의 정과 숙연해지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초당은 숲속의 정자로 깊은 깨달음을 얻기에 적당한 곳이었고 김영랑 생가는 말 그대로 생생하게 보존이 되어 있으며 연모했던 춤꾼 최승희와의 가슴 아픈 사연이 담긴 뒤뜰의 동백나무는 허리를 구부린 채 말이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또 잊을 수 없는 여행은 공주, 부여 여행이었다. 당시 문체부 장관이었던 최광식 장관과 모철민에 이어 부임한 국립중앙도서관 관장이 함께 하였고 공주 공산성과 부여 부소산의 낙화암과 당시 막 착공되었던 공주보와 세종보를 현지 답사하는데 당시 관광공사 사장인 독일에서 귀화한 이참 씨는 자전거를 타고 공주보를 하이킹하는 중 우리 일행과 만나서 사진도 찍고 고마나루를 거닐다가 강변에서 최광식 장관의 창을 직접 듣고는 모두가 박수로 환호하고 부소산성을 답사하면서 백제시대에 묻혔던 새까만 쌀알을 찾기도 하고 낙화암을 지나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부여 시내로 오던 추억도 그립다. 그 외에도 수십 번의 여행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면서 친분을 쌓게 된 분들이 생기면서 충북대 교수로 퇴직한 김*경 교수와 화가 이*세 선생님과는 그 친분으로 종종 만나서 식사도 하고 밀양의 영남루와 위양 못, 함양의 박지원의 물레방아 공원과 신라 사신이 백제로 떠나던 장소인 거창의 수승대, 그리고 허준 기념관과 인왕산 아래 수동 계곡을 함께 다니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며 김 교수의 여행기를 책으로 출판하는 출판기념식에 참여하는 보람도 누렸다. 10년에 걸쳐 전국으로 즐겁고 행복한 여행을 하며 다음 여행에 대한 새로운 꿈을 가꾸던 2020년 봄 갑자기 나타난 코로나19로 여행도 만남도 중단되고 사람과의 관계도 거리두기를 하게 되므로 간간이 전화나 카톡으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는 답답한 3년이 흐르는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다.
먼저 나보다 세 살이 많은 이*세 선생님은 췌장의 혹을 떼는 수술을 한 후로는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밥보다 막걸리를 좋아 하던 술을 입에도 댈 수 없게 되었고 식사를 제대로 못하니 힘이 달려서 여행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스스로 답답해하며 수술한 것을 후회하지만 때는 늦은 걸 어쩔 수 없는 형편이 되었고, 나보다 여섯 살이 많은 김*경 교수는 테니스로 다져진 몸에 80대 노인 답지 않게 건강하던 분이 담도암수술을 하고는 회복 중이라고 하더니 어느 날 카톡방에서도 나가고 문자를 하여도 답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마음이 많이 아프고 답답하다.
그리고 내가 시골의 면소재지에 있는 작은 학교에 처음 부임하였을 때 같이 근무하면서 친하게 되었고 5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정기적으로 만나며 가깝게 지내던 친구 임*빈 선생님은 나보다도 한 살이 적은데 다리가 불편하여 걸음도 시원찮고 귀도 잘 들리지 않아서 보청기를 하고 다니는데 일전에는 목욕탕에서 넘어져 고관절을 다쳐서 치료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치료를 받고 많이 좋아졌다고 하여 위로할 겸 충무로에서 만나니 걸음은 아주 시원찮아서 식당까지 5분 거리를 약 30분이 걸려서 가게 되는 상황에 보청기를 끼었는데도 말을 잘 알아듣지를 못하여 답답하기만 했는데 지금도 그놈의 담배를 끊지 못하더니 일전에 폐암3기라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뭐라고 위로하거나 대답할 말이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그런가 하면 내가 평택에서 1981년 서울의 중학교로 전출이 되어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던 김*천 선생님도 코로나 백신 후유증인지 갑자기 한 쪽 다리를 절게 되어 지팡이를 짚고 다니다가 최근에 수술을 하였다는데 잘 못되어 오히려 힘들어 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평택 시내 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같은 국어과 교사로 근무하던 김*규 선생님은 내가 서울의 우신고등학교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마침 국어 교사를 뽑는 기회에 교장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김*규 선생님을 모셔 와서 부부간 모임도 하고 몇몇 선생님들과 여행도 다니면서 즐겁게 지내다가 어려운 가정 형편이 풀리고 좀 살만 하게 되니까 즐겨 피우던 담배 때문인지 그도 역시 폐암에 걸려서 몇 년간 고생을 하다가 저세상으로 떠나고 또 어떤 분은 나와 같은 개띠로 동갑인 이*규라는 양반은 야간경비근무 중 경비실 문을 열려고 하였는지 모르지만 문 앞에 쓰러져 숨진 것을 아침에 발견했는데 아마도 갑작스런 심정지가 온 것 같고 같이 장로로 섬기던 박*주라는 분은 응접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져서 아들이 가슴을 압박하며 심폐소생술을 하였는데도 무심하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외에도 같이 근무하던 조*섭, 오*근, 황*욱 선생님도 같은 이유로 아직도 할 일이 많고 한참 더 살아야 할 분들이 이승을 떠나는 것을 보고 허무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고, 1966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 우리나라 대표선수로 출전했던 김*덕 선생님은 우리와 같이 골프를 치고 저녁에 용인의 선생님 댁에 가서 저녁을 먹은 다음 고스톱을 치며 즐거운 시간을 함께 했는데 누구보다 건강하던 분이 퇴직하고 얼마 안 되어 암으로 돌아가시고 같은 체육과 교사로 늘 술을 좋아 하고 밤새 고스톱을 치며 같이 놀던 나보다 한 살 아래인 김*균 선생님도 퇴직하고 금방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 분들과의 재미난 일화 한 토막이 생각난다. 김*덕, 김*균, 강*원과 같이 어느 해 봄날 중간고사가 끝난 오후에 학교 근처의 순두부 집 앞 넓은 밭에 친 비닐하우스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히 둘러앉아서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우리도 점심을 시켜놓고 고스톱을 치는 중에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서 모두들 꼼짝하지 말고 그대로 계시라는데 다들 도망을 가고 문 앞에 앉았던 우리 팀과 다른 두 팀, 모두 세 팀이 현장에서 붙잡혀 구로 경찰서로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다음 날 남부지원으로 가서 재판을 받아 벌금 5만원을 물고 풀려났던 일은 두고두고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되곤 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운명을 달리했는데 박* 선생님은 젊은 시절 테니스도 잘 치고 체격이 좋아서 패턴 대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분으로 ‘우산회’라는 우리 등산 팀의 영원한 회장으로 몇 년간 즐겁게 산행을 하였으며 날씨가 춥거나 궂은 날은 상암동 스마트시티역 근처의 자택 아파트에서 하루 종일 놀기도 하였다. 그런데 항상 배가 편치 않다며 화장실을 자주 다니는 편이었는데 결국 진단을 해보니 췌장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입원 치료 중에 어느 봄날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우리 산행 팀들이 문병을 갔을 때 마침 2011년 4월2일 나의 아들 결혼을 앞둔 것을 알고 결혼을 축하한다며 축의금을 주시고 병문안 온 선생님들 가다가 식사를 하라며 얼마를 주어서 맛있게 저녁을 먹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산행 팀 중에 김*목 선생님은 나보다 한 살 위로 일찍이 홀아비가 되어 지내다가 같이 산행을 하면서 늘 즐겁게 놀던 마음이 순수하신 분으로 담배를 끊지 못하더니 결국에는 폐암에 걸려서 수술을 하고 수술이 잘 됐다며 다시 산행에 동참하겠다고 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부음 소식을 듣고 많이 놀라고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었으며 또 한 분 신*호 선생님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현대 시인협회 회장을 지내고 안양 성결대학 교수로 퇴직을 하신 분으로 체격도 좋고 산행도 잘 하고 독실한 기독 신자로 본을 보이던 신앙인이었으며 어느 날 월요 정기산행을 하고 하산하는 길에 문자가 들어와서 보니 신*호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 문자였다. 갑작스런 비보에 너무 놀랍고 그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작은 암 수술을 하고 회복이 되어 산행도 몇 번 같이 하기도 하고 어느 봄날 ‘문학의 숲길 찾기’라는 평론집을 저술하여 산행 팀들에게 한 권씩 주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리고 고향 친구로 앞뒷집에 살면서 밤낮 붙어 다니며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니던 옛 친구 최*도라는 친구는 아버지가 6,25때 전사를 하여 군경 유자녀로 할머니와 살다가 결혼을 하고는 부산에서 살았는데 어쩌다가 소식이 끊어져서 몇 년 째 무심히 지내는 중 근자에 들리는 말로는 죽었다고 하니 죽기 전에 만나보기라도 할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고등학교 친구 박*호는 논산 훈련소에 같이 입소하여 두 주 정도 같이 병영생활을 하며 신체검사를 받고 몸이 좋지 않아서 같이 귀가 조치를 받았고 부산에서 부교역자로 목회를 하던 시절 중매를 한다고 하여 부산까지 내려갔던 기억이 나고 그 후 미국에서 평생 목회를 하고 은퇴하여 작년에 캘리포니아에서 버지니아로 이사를 하여 전원주택의 멋진 새집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사진으로 주고받으며 만나지는 못해도 카톡으로 소식과 정을 나누었는데 지난 4월 이후 갑자기 카톡이 끊어지고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는 것이 분명히 무슨 변고가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많이 언짢고 편치가 않다.
그 외에도 우리 산악회 회원이 15명 정도였는데 세 명은 세상을 떠나고 세 명은 무릎관절이 좋지 않아서, 그리고 다섯 명은 이런 저런 이유로 산행을 포기하여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숨길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며칠 전에 창녕에 계시는 아는 장로님과 통화를 하는 도중에 친한 사람이 10명이 있는데 한동안 연락이 없어서 전화를 했더니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며 친구 절반이 세상을 떠났고 오래 소식이 없으면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며 우리의 나이가 그런 나이라고 하는 말씀을 듣고는 크게 공감을 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하며 세월의 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밤새 안녕‘이라는 옛말이 있다. 사람은 언제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흔히 하는 말로 우리는 만날 때마다 ’안녕하시냐?‘고 안부를 묻고 어린 시절 인사말이 아침나절에 만나면 아침 잡수셨느냐? 오후에 만나면 점심 잡수셨느냐? 라고 하였고 설 명절이 되면 동네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니며 큰 절을 하면서 과세 안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라고 인사를 하던 일들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내가 어린 시절 추억으로 제일 잊을 수 없는 것이 배고픔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등짝에 붙은 배를 어루만지며 먹거리를 찾아 산과 들과 강 그리고 바다를 헤매었고 점심은 굶은 날이 더 많았으며 가을부터는 주식이 고구마였고 보릿고개인 봄에는 매일 개떡으로 배를 채우고 강냉이 죽을 먹으면서도 늘 친구들과는 그저 즐겁기만 하고 이웃사촌과는 정을 나누며 살았는데 지금은 너무 풍성하게 잘 먹고 잘 입고 살게 되니 오리혀 정이 메마르고 이웃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내 집은 아니지만 광장 같은 넓은 아파트에 살다보니 땅에 붙은 움막 같은 초가에서 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고 때로는 그리워지기도 한다. 마음의 평안과 정이 있던 그 시절, 그 때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다보니 내 나이 벌써 팔십을 바라보면서 자꾸만 떠나고 변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사람은 결국에는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