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나바위성당 김대건 소나무
익산은 삼한 시대의 유적 유물이 있는 2천여 년의 유구한 역사의 고을이다, 북으로 금강 남으로 만경강이 품어주는 풍요의 땅이다. ‘나’는 강이고 ‘나라’는 강과 강 사이의 땅이니, 이곳에 터를 일군 백성에게 하늘이 내려준 천혜의 땅이다.
금강은 전북 장수 신무산 뜬봉샘에서 나와 북으로 치닫다 대전을 감싸고는 비단 옷자락을 남서쪽으로 틀어 공주, 부여를 지나 군산에서 서해가 된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사탄(沙灘)’, 김정호가 ‘대동지지’에서 ‘사수강(泗水江)’이라고 한 만경강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만경강(萬頃江)’이 되었다. ‘경(頃)’이 ‘100이랑’을 뜻하는데 ‘100이랑’이 만 개이니 ‘100만 이랑’이라는 뜻이다. ‘이 너른 땅이 다 내 땅이다’는 왜인들의 식민지배, 수탈과 학정의 탐욕스런 웃음이 이름 속에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러니까 힘센 자의 자랑이기도 하다, 백제가 역사를 승자에게 내준 것처럼 여기 금강을 끼고 있는 강경과 논산은 전라북도 땅이 충청남도가 된 곳이다. 박정희 군사 정권이 들어선 1963년 11월 21일이다. 전라북도 금산군과 논산, 역시 강경이 있는 전라북도 익산시 황화면이 충청남도가 되었다. 과거 나라와 지역의 경계가 산줄기나 강이었고, 금강 물줄기 아래가 모두 호남이던 것을 하루아침에 바꾸어버린 것이다. 강이 한 지역 모둠살이의 경계이던 시대에 그 경계를 무너뜨린 어이없음이나, 그나마 왜가 한 일이 아니어서 그저 쓴웃음이다.
아무튼, 금강이 강경에 이르러 둥그스름하게 휘돌며 아래쪽에 너른 들을 만드는데, 그 들머리에 산이기보다 나지막한 40.4m의 언덕이 우뚝 있으니 바로 화산이다. 화산(華山)은 우암 송시열이 이곳을 지나다니며 계절에 따라 변하는 아름다움에 붙여준 이름이다. 이곳에 수탉이 황금알을 낳았다는 수탉바위, 마애삼존불 바위, 십자 바위 등 여러 바위가 있는데 그중 한 바위에 송시열이 쓴 ‘화산바위’가 있다. 또 여기 이름이 된 너르고 납작한 너럭바위가 산 끝자락에 있으니 ‘나바위’이다.
1845년 4월 30일이다.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 제물포항에서 중국 상해로 가서 그곳 금가항 성당에서 8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금강을 거슬러 오른 뒤 10월 12일 밤 8시경 첫발을 내디뎠으니, 바로 이곳 화산 나바위 선착장이다.
당시 무동력 목선은 ‘길을 인도하는 대천사 성 라파엘’의 이름을 딴 ‘라파엘호’였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고 페레올 주교, 안 다블뤼 신부 그리고 11명의 신자가 타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자 순교자이다.
1906년이다. 김대건 신부를 기리기 위해 베르모넬 신부가 동학혁명 때 활동했던 김여산의 집을 1,000냥에 사들여 성당으로 개조하였다. 1907년 완공하였으니, 서양 고딕과 한국 전통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성당이었다. 베르모넬 신부가 첫 주임신부였던 이 화산성당은 1989년에 나바위성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김대건 신부가 라파엘호에서 내린 나암포 나루 가까이의 화산 기슭에 어린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백여 살 나이가 되었다.
이제 금강은 저만큼 물러나고, 나암포 나루 일대는 기름진 들녘이 되어 곡식이 풍요롭다. 김대건 신부가 우리 마음에 안식과 생명의 양식을 줬다면, 이 들녘은 우리 몸에 평화와 번영의 양식을 준다. 그날 김대건 신부를 맞이한 소나무 앞에서 그날의 김대건 신부를 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