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한 세 번째 이야기를 달포 전에 써 놓고도 신문에 올리지 못한 것은 이를 강의해 본 결과 대중들이 읽기에는 지나치게 전문성이 강조되므로 어렵다는 의견들이 많아서다. 특히 두 번째 이야기의 육기의 흐름과 준위에 대한 보충설명을 요구하므로 이를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해 보기로 한다.
그 중에 하나가 육기(六氣)에서 양(陽)으로, 양명>태양>소양이라고 내경 영추 9편 종시편에 완벽하게 증명까지 해서 준위의 정의가 되어 있는데도 한의학이나 명리에서는 태양>양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이 모르는 잘못된 원인은 첫째로는 황제내경 第六十八 六微旨大論篇에서 주기(主氣)인 화-중심오행의 순환인 (목-화-상화-토-금-수-목)과 객기(客氣)인 육기(六氣)를 대비시켜 생명체가 질병에 대응하는 능력을 알아보는 사천기(司天氣)와 재천기(在泉氣)는 서로 대응해야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객기의 순서가 그들이 알고 있는 토-중심오행(목-화-토-상화-금-수-목)의 순서와 맞지 않으므로 이를 맞추려면 양명>태양>소양을 태양>양명>소양라고 하면 된다는 사실만을 알고는 무조건 바꿔서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육기(六氣)의 순환이 (목-화-토-상화-수-금-목)이고, 토-중심오행의 순환이 (목-화-토-상화-금-수-목)라 중심-오행이 바뀔 때마다 순서가 바뀐다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양명과 태양의 준위가 바뀌면 오행의 수(水)와 금(金)까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잊어버린 것이다.- 명리의 오운육기론을 읽으면 내경 六十八 六微旨大論篇에서 인용해왔다고 설명하는 것을 보면 동양학의 모든 것에서 오류를 발생시키고 있어도 아무도 모르고 있음이다.
다른 하나는 육기의 음양을 태양>양명>소양>궐음>소음>태음이라는 순환될 수없는 직선적 나열법이다. 동양학에서는 음양이란 절대적 가치가 아니고 상대적인 비교 값으로만 음양을 표시하므로 음양은 비교하는 상대보다 더 높은 것을 양이라 하고, 더 낮은 것을 음이라 하여 순환되는 현상을 말함이다. 바꾸어 말하면 두 개 중 어느 것이 음이고 어느 것이 양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고, 어느 것이 더 음인가 혹은 더 양인가? 를 반드시 순환계에서 판별하는 것이다.
육기에 관한 음양의 정의는 위의 그림표에서와 같이
음(陰; 양명을 기준하여)에서
궐음이란 양명보다 더 음이고,
소음이란 궐음보다 더 음이며,
태음은 소음보다 더 음이란 것으로 그 준위는 궐음>소음>태음이고,
양(陽; 태음을 기준하여)에서
소양이란 태음보다 더 양이고,
태양이란 소양보다 더 양이며,
양명이란 태양보다 더 양이란 것으로 그 준위는 양명>태양>소양이다.
(이것은 기상학의 기류의 변화에서도 상세히 설명되어있다.)
이들 둘을 보태는데 현대인들은 산술적인 음양만 생각하고 착각을 하여
양명>태양>소양>궐음>소음>태음이라고 직선배열로 이해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음양을 혼동하고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며, 더하여 양명↔태음, 태양↔소음, 소양↔궐음은 서로 배합괘(配合卦)로서 표리(表裏)관계를 가져야만 하는 조건이다. 가장 기초가 되는 음양에서부터 오류를 깨닫지 못하는 동양학의 연구가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동양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논문에 인용할 때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단순히 이름이 알려진 고서(古書)에 존재한다는 것만 가지고 복사해서 인용한다는 사실이다. 황제내경에는 1-9편까지의 법문을 제외하고는 난해한 것들을 그냥 그대로 두지 않고 세월 따라 개작하거나 빠트려져 각 편마다 1개 이상의 오류가 존재한다.(예; 이제마가 중심오행의 변화로 오행을 해석한 “동의수세보원”을 역해한 모든 이가 자신들이 오행을 모른다 하지 않고 이제마가 오행을 모른다고 하는 것과 같다. 오죽했으면 그가 죽기 전에 100년 후에나 자기를 이해할 것이라고 했겠는가?) 왜 법문에는 오류가 없는가 하면 법문의 마지막에 “이를 바르게 실행한 자는 의술의 온오를 터득할 수 있지만, 만약 되는대로 등한히 하는 자라면 그 의술은 반드시 망할 것이다. 분별없이 사방을 쓰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하늘의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경고성 문구가 있어서 어느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TV에 자주 나오는 예를 들면 동의보감에 기록되어 있다는 자체만을 클로즈 엎 시켜서 좋은 것이라고 인용하는 것은 독(毒)을 선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허준 선생이 만든 동의보감은 한 가지 병에 대해 문헌마다 어떤 약을 사용했는가를 비교 검토할 수 있게 집대성한 훌륭한 데이터베이스이긴 해도 서로 상반된 약품이 나란히 함께하고 있어서 사람마다 특성을 알아 가려먹지 않으면 약이 아닌 독을 먹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즉, 5%밖에 되지 않는다는 태양인에 좋은 약이라면 95%의 다른 사람에게는 독 내지는 효험이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약의 허(虛)와 실(實)을 가려서 밝히지 않으면 사용해서는 안 된다.
지금에 와서 시급한 것은 한시라도 빨리 아직까지도 미비한 음양, 사상, 오행, 육기의 기준을 설정하여 누구나 혼돈하지 않는 동양학의 근본을 세우는 일에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된다. 동양철학 사상의 원리를 개척한 학자들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강의를 받던 어느 한의학 박사님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많은 것이 뒤집어진다.”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아마도 거의 모두가 전통의 권위를 옹호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자기들이 의지해 온 권위가 흔들리기 때문에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그 방어에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이라. 는 어려운 현실에 가로 놓여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 함께 동양학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힘을 합쳐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박용규 입체음양오행 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