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를 지탱할 만한 충성 ~ 병산 이관명 선조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8월 5일 양력 5번째기사 1901년 대한 광무(光武) 5년
김성근이 신주에 대한 건의를 하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김성근(金聲根)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보위하고 윤리를 지탱할 만한 충성이 있으며 바른 학문을 밝히고 간사한 주장을 물리칠 만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부조(不祧)의 은전을 적용하여 은덕에 보답하는 원칙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그래서 열성조(列聖朝)에서 세상에 드문 은전을 베푼 전례도 이미 많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 폐하는 즉위하신 이래로 일체 충성을 표창하고 정당함을 내세워 주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지 않은 바가 없으셨지만 아직도 미진한 것이 있기 때문에 감히 공의(公議)에 의거하여 폐하를 모독하니, 굽어 살펴주소서.
고(故) 좌의정(左議政) 문정공(文靖公) 이관명(李觀命)은 바로 고 정승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의 형이며, 고 정승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의 사촌 아우로서, 충성과 효성은 타고났으며 일찍부터 경서(經書)를 공부하여 뜻이 대바르고 행동이 깨끗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숙종(肅宗)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전후하여 올린 글들은 모두 종묘와 사직을 중히 하고 소인들을 멀리하는 내용이었는데, 임금을 무함한 흉악한 역적들을 먼저 침으로써 나라의 법을 엄하게 만들어 윤리와 강상이 어지러워지지 않게 하였으며, 또 어진 선비들과 스승들을 멸시하고 배반한 간사한 주장을 공격함으로써 선비들이 바른 데로 나아가게 되고 성인의 학문이 다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을 없애고 세상의 교화(敎化)를 밝히는 원칙에 있어서도 매우 간절하여 무슨 일이 제기되면 감히 임금에게 바른 말을 올리고 속이지 않았으며, 임금이 진노하여 조정의 신하들이 두려워 떨 때마다 조용히 간함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돌려세웠습니다. 어진 사람을 추천하고 간사한 자를 내리쳤으며 좋은 계책과 정당한 논의는 역사책에 환히 실려 있습니다.
경종(景宗) 때 흉악한 무리들이 끼어들어 네 정승이 모두 절도(絶島)에 찬배(竄配)되었을 때 이관명도 관직을 삭탈당하고 찬배되었으며, 영조(英祖) 을사년(1725)에 흉악한 무리들을 모두 쫓아내고 오랜 신하들을 등용할 때 그도 용서받았으니, 세상 형편에 따라 운수가 막히기도 하고 펼쳐지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상소를 올려 흉악한 우두머리들을 처단함으로써 사람들의 격분을 풀어줄 것을 청하였더니, 간절하고 측은해 하는 비답(批答)을 내려 네 정승의 벼슬을 회복시키고 시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관명을 발탁하여 우의정(右議政)으로 임명하였다가 이어 좌의정(左議政)으로 승급시켰는데, 임금의 정사를 돕고 나라의 규율을 세우는 것을 자신의 직분으로 여겼으며 역적들을 쳐서 복수하는 큰 의리에 더욱 엄하여 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과 함께 당시 주춧돌이 되었으며, 10여 년 동안 경연직(經筵職)에 있으면서 진술한 논의들과 연석(筵席)에서 아뢴 계(啓)는 모두 의리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가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호위한 것으로 말하면 하늘에 물어보아도 의심할 여지가 없고, 백대(百代) 후에도 의혹을 살 것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 때 영의정(領議政)으로 있은 문간공(文簡公) 이의현(李宜顯)은 고 정승 충정공(忠正公) 이세백(李世白)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문간공 김창협(金昌協)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벼슬에 나가고 물러서는 의리와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방도를 낱낱이 터득하고 연마하였습니다. 조정에 나서서는 엄정한 태도를 지녀 아부하지 않아서 청렴하고 높은 명망으로 인하여 선비들이 무수히 그에게로 모여 들었습니다.
만약 의리에 관계되는 일이 있으면 한 몸의 이해관계를 돌보지 않았으며, 네 정승이 자전(慈殿)의 명령을 받고 세자를 정할 때에도 함께 입대(入對)하여 큰 계책을 정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역적 신하가 상소를 올려 현혹시키자 또 그를 토죄할 것을 함께 청하였으며 삼사(三司)에서 토죄하고 복수하는 일로 3년 동안 서로 버틸 때에는 죄인들을 엄하게 치지 않으면 장차 윤리가 없어질 것이며 어물어물 지체하는 사이에 흉악한 모략을 꾸며 헤아릴 수 없는 화가 생길 것이라는 말을 올렸는데, 얼마 못가서 그 말이 과연 증명되었습니다.
여러 흉악한 무리들이 네 대신을 재앙의 원흉으로 몰고, 네 대신이 정청(庭請)을 그만두자고 논의할 때 여러 재상들이 수긍한 것을 죄로 삼자 쫓겨났지만, 충성이 본래부터 임금에게 신뢰를 받았기 때문에 마침내 삼정승에까지 올랐습니다. 그가 벼슬에 나오고 벼슬에서 물러난 일들은 옛 사람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으로서, 이관명과 다르면서도 같습니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부조의 은전을 받았지만 유독 이 두 신하에게만은 미치지 못하였으니 어찌 훌륭한 시대의 법에 흠으로 되지 않으며 여론들이 한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 성명(聖明)께서는 널리 살피시어 종묘와 사직에 공로를 세운 두 신하의 충성을 추념하셔서 여러 신하들에게 이미 베풀어준 대로 모든 부조의 은전을 베풀어 준다면 더없이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을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원본】 45책 41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18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가족-친족(親族) /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풍속-예속(禮俗)
議政府贊政金聲根疏略:
忠可以衛社稷而扶倫彝, 功可以明正學而斥邪說者, 必施不祧之典, 以明崇報之義。 故列聖朝曠世之典, 亦多已例。 而竊伏念皇上陛下, 御極以來, 凡於襃忠扶正之義, 靡不用極, 而尙有所未及者, 玆敢據公議, 冒瀆宗嚴, 伏惟俯垂鑑諒焉。 故左議政文靖公臣李觀命, 卽故相臣忠愍公 健命之兄也; 故相臣忠文公 頣命之從弟也。 忠孝根天, 夙抱經術, 立志正直, 制行峻潔, 嘗受知於肅廟朝, 前後陳章, 無非重宗社遠群小之意, 而先討誣辱聖后之凶逆, 俾王章嚴而倫常不紊, 又斥侮賢背師之異說, 使士趨正而聖學復明。 至於革民瘼、明世敎之義, 切切懇懇, 遇事敢言, 犯顔勿欺, 每於天威遽震, 庭僚戰慄, 而從容諷諫, 感回天心。 推賢詘諂, 嘉猷讜論, 炳朗惇史。 曁乎景廟朝, 群凶闖入, 四相臣竝竄絶島, 觀命亦被削竄。 英祖朝乙巳, 竝黜群凶, 召用舊臣, 觀命蒙宥, 與世道同爲屈伸。 乃疏請夬誅元凶, 以雪輿憤, 批旨懇惻, 乃復官賜諡四相臣。 擢觀命爲右相, 尋陞左相, 以弼君道、扶世紀爲己任, 尤嚴於討復大義, 與文敬公臣鄭澔、文忠公臣閔鎭遠, 俱爲當時柱石, 在經幄十餘年, 箚論筵奏, 皆以義理爲準。 其輸忠衛聖, 可謂質神明而無疑, 俟百世而不惑。 同時有領議政文簡公臣李宜顯, 故相臣忠正公 世白之哲嗣, 早遊文簡公臣金昌協之門, 出處進退之義, 修己治人之方, 靡不講磨。 及其立朝也, 正色不阿, 淸名重望, 蔚然爲士類之所依歸。 而苟有事關義理, 不顧一身之禍福, 及四大臣之稟慈旨定國本也, 亦同入對, 贊定大策。 賊臣投章熒惑, 又同請討, 三司討復之三歲相持也, 進言"討罪不嚴, 倫彝將滅, 舒緩留時, 抑恐生出凶圖, 有不可測者", 未幾果驗。 諸凶徒秉四大臣爲禍首, 以四大臣議掇庭請時, 諸宰唯諾爲罪, 亦被黜, 而忠藎素孚於上, 竟致三事。 其出處, 無愧古人, 而與李觀命, 二而一也。 當時諸臣, 俱蒙不祧之施, 獨未及於此兩臣, 豈非盛典之欠缺而輿論之齎恨者乎? 伏顧聖明淵然垂察, 追念兩相臣勤勞宗社之忠, 依諸臣已施之例, 一體特施不祧之典, 千萬幸甚。
批曰: "疏辭, 令政府稟處。"
【원본】 45책 41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18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가족-친족(親族) /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풍속-예속(禮俗)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8월 12일 양력 2번째기사 1901년 대한 광무(光武) 5년
문정공 이관명과 문간공 이의현의 신주를 모두 들어내지 않도록 하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본부(本府)의 찬정(贊政) 김성근(金聲根)이, 고(故) 좌의정(左議政) 문정공(文靖公) 이관명(李觀命), 고 영의정(領議政)인 문간공(文簡公) 이의현(李宜顯)은 충성을 다하고 의리를 북돋웠으니 응당 부조(不祧)의 은전을 시행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려 글의 내용을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하게 하겠다는 비답을 내리셨습니다.
신이 삼가 상고하여 보건대, 이관명은 바로 고 상신(相臣)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의 형이며 고 상신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의 사촌 아우로서, 뜻이 바르고 행동이 깨끗하였기 때문에 숙종(肅宗)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임금을 무함한 흉악한 역적들을 먼저 쳤으며, 또 어진 선비들과 스승들을 멸시하고 배반한 간사한 주장을 공격하였습니다.
경종(景宗) 때 흉악한 무리들이 끼어들어 네 정승이 모두 절도(絶島)에 찬배(竄配)될 때 이관명도 삭탈되고 찬배되었으며 영조(英祖) 초기에 구 관리들을 등용할 때 이관명도 용서받았는데 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과 함께 모두 당시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10여 년 동안 경연직(經筵職)에 있으면서 진술한 논의들과 연석(筵席)에서 아뢴 계(啓)는 모두 나라의 역적을 치고 의리를 밝히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충성을 다하고 임금을 호위한 것으로 말하면 천지에 내세워도 어긋날 것이 없고 백대 후에도 의혹을 사지 않으리라고 할만 합니다.
이의현(李宜顯)은 충정공(忠貞公) 이세백(李世白)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문간공(文簡公) 김창협(金昌協)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습니다. 원래 엄정한 태도가 있었으며 조정에 나서서는 한 몸의 이해관계를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네 정승이 자전(慈殿)의 명령을 받고 세자(世子)를 정할 때에도 함께 입대(入對)하여 큰 계책을 질정(質定)하였습니다.
그 후 정청(庭請)과 관련하여 수긍한 것 때문에 찬출(竄黜)되어 떠돌아 다녔지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무신년(1728) 역적들의 변고로 나라의 형편이 매우 위태롭게 되었을 때 단신으로 막아 나서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반석같이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두 정승의 공로와 덕을 잊지 않는 큰 은혜에는 오히려 채 미치지 못한 점이 있으니 이렇게 상소를 올려 청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특별히 부조의 은전을 베풂으로써 한껏 보답하는 조정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원본】 45책 41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20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국왕(國王) /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議政府議政尹容善奏:
本府贊政臣金聲根以"故左議政文靖公臣李觀命、故領議政文簡公臣李宜顯盡忠扶義, 合施不祧之典"事。 陳疏奉旨, 疏辭, 令政府稟處矣。 臣謹按李觀命, 旣故相臣忠愍公 健命之兄也, 故相臣忠文公 頣命之從弟也, 立志正直, 制行峻潔, 嘗受知於肅廟朝。 而先討誣辱聖后之凶逆, 又斥侮賢背師之異說。 曁乎景廟朝, 群凶闖入, 四相臣竝竄絶島, 觀命亦被削竄。 英廟朝初服, 舊臣登庸, 觀命蒙宥, 與文敬公臣鄭澔、文忠公臣閔鎭遠, 俱爲當時柱石, 在經幄十餘年, 箚論筵奏, 皆以討國賊、明義理爲己任。 其輸忠衛聖之功, 可謂建不悖而俟不惑矣。 李宜顯卽忠正公臣世白之哲嗣也, 早遊文簡公 金昌協之門。 濡梁有素, 正色立朝, 不顧一身之禍福。 及夫四大臣之稟慈旨定國本也, 同爲入對, 質定大策。 其後坐庭請唯諾, 竄黜流離, 而不以爲悔。 戊申逆變, 國勢危如綴旒, 而隻手擎天, 奠宗社於磐泰之安。 以二相臣之功之德, 曰爲不忘之恩, 猶有所未盡者, 宜乎其有是疏請。 特施不祧之典, 以示朝家崇報之意何如?
允之。
【원본】 45책 41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20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국왕(國王) /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