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토요동인회에 관여했던 분들은 수복 후에 거의 군산을 떠났습니다만 홍건직씨는 남아서 미술재료 값을 충당할 수 없어 부인이 보스톤 다방?인가를 하는 가운데 사진에 심취하여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군산에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많이 나오게 하다 작고하여 개정면에 있는 묘지에 쉬고 있습니다.그 아들 딸들은 그 처남이 한국조폐공사 사장을 지낸 연고로 조폐공사에 취직되어 갔다 들었는데 지금 60대 중반쯤 되었을 것입니다.정치를 하던 원상남씨의 아들인 원형갑씨는 구암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원광대학을 마치고 상경하여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서울시립대학 총장을 지내다 서거했고 나병재화가도 그림물감을 감당치 못해 그림 그리기를 잠깐 멈추고 영화 씨나리오를 쓰며 생계를 이어가다 먼저 아내를 보내고 세딸과 의정부에서 살다 1970년 중반 세상을 떴고 세딸들은 그들의 이모가 잘 도와 성장하여 싱가폴에 큰 딸이 살며 수년 전 까지 연락이 닿다가 끊겼고 원용봉은 미국 뉴욕으로 이민 와서 조각등으로 이름을 떨치며 3남매를 두고 살다 역시 좋아하던 술 탓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김신웅은 군산과 금강 하나를 경계로 있는 충남 장항 정의여고에서 교편을 잡다 중앙일보 기자가 되어 상경하여 있다가 1980년 해직기자가 되어 제화업에 종사하다 1990년대 미국으로 이민,Los Angeles에 살고 있으면 뒤늦게 문단 활동을 이어가며 기독문협 회장,이사장 미주시학 편집위원등으로 활동하며 시인교실에 참여 후학을 양성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