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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물리학의 선두에 있는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자역학이 지금까지 해놓은 것은 동양철학의 기본개념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The findings of quantum physics has done nothing more than validate the fundamental concepts of Eastern philosophy.”
블라코트 베드럴은 암호해독의 저자이자 옥스퍼드와 싱가포르 대학의 양자정보이론 분야 교수이다. 그가 양자론에 대해 한 말이다.
“양자역학은 정말이지 불교의 공 개념과 상당히 유사하다.”
공(空shunyata)은 근본적으로 실체가 없이 비어있는 잠재력의 바탕을 설명하는 불교적 개념으로, 인식활동이 전개되면서 발생한 주관/객관의 이원적인 경험영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실재(물질&현상)가 전개되어 드러나는 모습이기도 한데, 베드럴은 양자론을 통해 이 부분이 입증될 수 있다고 간주한다.
“우주는 비어 있지만 잠재적인 거대한 양의 정보를 가지고 시작된다. 여기서 최초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대칭성의 붕괴(완벽한 조화와 질서의 깨짐, 빅뱅이전)라고 하는 첫 번째 활동이다.”
다음은 11세기 티베트 불교의 <카담파의 서>에서 인용한 글이다.
“지금부터는 질량을 가진 고체 덩어리라는 개념을 완전히 잊어버릴 것이다.
이 기만적인 관습의 세상은 하나의 거짓이다.
실재하는 듯이 보이는 모든 것들은 알맹이가 없는 것이다.
삼라만상은 단지 환영일 뿐이다.
세상사람들이 나를 에워싸며, 현상이 실재라고 주장하면서 내게 대항한다해도 나는 그들이 언젠가 큰 웃음거리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글에서는 불교 수행자 똠뙨빠(Dromdronpa)의 힘찬 주장이 눈에 띄는데 그는 마음과는 독립적이며 독자적으로 자체적인 힘을 지니면서 실재하는 견고하고 고유한 물체들이 궁극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11세기의 불교 사상가들은 완전히 독립적이고, 물질적인 실재(분명하게 고체의 질량을 지닌 물질인 의식구조의 외형인)라는 환영들이 알맹이가 없는 것을 즉 본질적으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이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것은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소 정신 나간 주장처럼 보이지만 지금은 현대 물리학자들에 의해 그 내용의 타당성이 완전히 입증되었다. 노벨상 수상자인 프랭크 윌첵은 그의 걸작인 존재의 빛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물질은 보이는 대로가 아니다. 일반물질의 질량은 스스로는 질량을 가지지 않은 더욱 기본적인 덩어리들이 구현된 에너지이다.”
또한 안톤 자일링거 교수는 최첨단 양자역학 분야의 최신 연구 성과들을 모은 공동 에세이 <과학과 궁극적 실재>에서 양자역학 이전의 관점들은 우리들과 독립적인 실재에 대한 명백한 착각이라고 간주한다. 이 에세이에 헌사를 쓴 물리학자 존 훨러 교수는 ‘양자역학의 증거들이 알려주는 것은 바로 우주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여해온 관찰자들의 인식활동의 결과인 자기조합성에 다름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 관점은 확실히 형이상학적 정신론인 불교의 핵심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불교에서는 물질 환경이란 우주에 존재하는 중생(衆生)이 만들어낸 카르마 혹은 의도된 행동들의 집합에 의해 창조된, 집합적인 구성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용수(나가르주나, 중관학파의 개조, 3세기)의 사상을 통해 알 수 있는 대승불교의 공 개념과 현대 물리학 간에는 분명한 공명이 존재한다. 만약 양자 수준에서 물질이 보이는 것보다 덜 견고하고 확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내겐 과학이 空과 상호의존(상의상관성, 연기)이라는 불교의 심오한 통찰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선 것처럼 보인다. - 달라이 라마
세상이 인간 의식에 따라 구성되었다(유식학파, 일체유심조)는 사상은 양자역학과는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험에 의한 결과들은 그 사실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 베르나르 데스파냐
사실상 우리가 전환해 나가야할 관습적인 생각들이 지닌 제한성을 원자론의 교훈에 따라 차근히 재정립해 나가려고 할 때 존재라는 거대한 연극에서 관객이자 배우라는 우리의 위치를 조화롭게 하려면 붓다나 노자와 같은 사상가들도 이미 부딪혔던 문제들을 우리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 닐스 보어(상보성 원리)
양자적 실체는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이고 이 두 가지 속성이 (동시에) 관찰되기 전까지는 완전히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이것은 동시에 두 개의 장소에 존재할 수 있고,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맴돌고 있다. 이 내용이 바로 양자 영역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양자역학의 기묘한 특성들의 요점이다.
양자적 관점에서는 실재의 존재론적 기초는 바로 의식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의식이 물질세계란 덩어리를 창조하는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로 꼽히는 존 흴러는 말했다.
“자기조직성이라고 하는 우주 개념은 우주가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 기계라는 견해에 전적으로 반하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비록 본래 음표가 지닌 박자가 있다고 해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여 관찰자들에 의해 연주되어온 음표만이 공간과 시간과 모든 것을 이루는 광대한 세상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캠브리지 대학 교수이자 왕실천문학자인 마틴 리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단지 가능성만이 존재한다. 단지 누군가가 그것을 관찰할 때만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우주는 우리들이 그것을 인식하고 있기에 존재한다.”
헨리 스텝은 시대착오적인 물질주의적 존재론을 비판한다.
“우리는 물질 같은 세상이 아니라 관념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물질 양상들은 놀랍게도 특정한 수학적 결과 안에서 사라지게 되고, 이들 수학적 결과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 사실상 양자 우주에서는 어떠한 자연스런 물질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결과는 고전역학적 우주관에서 어떠한 정신적인 면을 고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가정과는 상반되는 결론이다.”
그동안 제기되어왔던 핵심적인 이슈들 또한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데 대립점은 바로 양자 수준에서 의식이 함축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함의이다. 이러한 함의(의식이 물질에 영향을 주는)는 20세기 초의 물리학자들에게는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과학은 순수하게 외형적인 물질세계의 본성에만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물질은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인 관점이 견고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또한 산업혁명이후에 의식이란 일반적으로 물질세계(뇌)의 산물이라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양자실험을 통해 실재가 드러내는 방식은 실험자의 의도적인 결정에 좌우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것에 대한 가장 광범위하게 알려진 사례는 바로 물질에 대한 파동-입자의 이중성을 입증한 실험들(이중슬릿 실험)이 될 것이다. 어떤 실험에서는 실재가 파동처럼 보이고, 어떤 실험에서는 실재가 입자로 관측되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어떻게 물질적인 실재가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일 수 있는가하는 문제와 어떻게 의식적인 결정이라는 간섭이 의식과 분리된 실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돼 왔다.
예를 들어 슈뢰딩거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역설을 말했다. 슈뢰딩거의 상자에 들어있는 고양이는 살아있을 수도 있고, 죽었을 수도 있다. 관측자가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상자를 열면 고양이는 살아 있을 것이고, 죽었다고 가정하고 열면 죽은 고양이를 관측하게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양자적 관점인데, 이것이 우리의 현실에는 어떤 의미를 주는가?
그리고 막스 플랑크(플랑크 상수, 양자 물리학 선도)도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다
“모든 물질은 단지 힘의 미덕에 의해 유래되고 존재한다. 우리들은 이 힘의 배후에 어떤 의식적이면서도 지적인 정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가정해야만 할 것이다. 이 정신이 바로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매트릭스가 될 것이다.”
최근 New Scientist(2007년 6월 23일자) 기사에서 마이클 브룩스는 오스트리아 과학 아카데미의 마커스 아스펠마이어와 비엔나 대학의 안톤 차일링거에 의한 양자 얽힘(유령의 원거리 작용, 비분리성, 비국소성) 실험에 대해 논평하며 실험에 참여한 물리학자들이 도출한 결론을 전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측정하고 있는 대상의 속성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내재하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빈공간이다)는 가능성에 직면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속성을 측정하는 행위 자체가 대상에게 존재성(물질화/입자화)을 가져오는 것이다.”
리즈 대학에서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블라트코 베드럴 교수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실재에 대한 적극적인 논평이라기보다는 실제로 실재를 창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또한 블라트코 교수는 논평 머리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
“대통일 이론을 찾기 위해서는 우주란 단지 우리가 우주를 찾고 있을 때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여러 중요한 실험결과를 통해 양자적 실체의 특징들은 모두 참여 관찰자의 관찰의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양자물리학자들은 이러한 양자 특징들이 고유한 실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고유한 실재나 고유한 존재가 없다(무자성)는 통찰은 불교 철학자들이 실재의 내적인 본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해 온 공(空)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이란 무라기보다는 오히려 중도(中道)를 표방하는 불교의 중심개념인 연기(緣起, 상의상관성, 상호 의존성)를 나타낸다.
불교의 형이상학적인 인식론인 유가행파의 유식론(唯識論)은 의식이 현상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려준다.
각양각색으로 보이는 모든 현상들은 의식과는 별개의 감각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의 발생은 지식적 경험에서 생기는 것이다.
[원담 논평]
이상의 기술은 현대물리학의 성과이다.
1. 보이는 것처럼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실재란 무엇인가?
쪼개고 쪼개 보았더니 원자-소립자-양자-에너지-장場까지 이론이 천착되었다.
그 너머 초끈(수퍼스트링)이론도 가정된다.
결론: 무언가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이 다양한 물질우주를 구성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만 발견하면 '한 방에' 삼라만상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줄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적취설(積聚說)이다. 사견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보다 더 기본적인 것보다 더 기본적인 것보다....더 기본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끝이 없이 돌고돈다. 순환론적 오류에 빠진다.
2. 물질과 에너지가 서로 호환된다. 아인슈타인의 에너지등가법칙이다.
그러면 의식과 물질과의 관계는 어떤가?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원리에 의하면 전자는 그 운동속도가 너무 빨라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 두 가지를 동시에 알 수 없고, 다만 한 가지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임의의 시간에 전자가 어디에 위치할런지는 확률적으로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관측자가 전자의 위치를 정해주면 전자는 그 지점에서의 운동량을 알려줄 것이며, 시간을 정해주면 그 시간에 전자는 자기의 위치에 대한 확률론적인 정보를 알려줄 것이다. 이것으로 관측자의 관점이 전자의 운동양태를 결정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관측하려는 인간의 의도가 물질의 운동을 결정한다. 빛의 파동-입자 이중성 문제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결론: 관측하고자 하는 대로 관측된다. 보고자 하는 대로 보인다. 미리 정해진 사실은 없다. 관측자의 의도가 관측하려는 입자의 활동을 결정한다. 관측자의 의도가 입자를 교란시킨다. 교란된 입자가 관측될 뿐이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의 입자’란 관측될 수 없다. 칸트의 '물자체'는 관측될 수 없다. 과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무엇인가? 과학자들이 물질 대상에 대해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은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베르나르 데스파냐는 이것을 ‘베일에 가린 실재’라 했다.
나는 말한다. 과학자가 말하는 ‘베일에 가린 실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과학자들의 의식이 ‘세계와 몸’이란 베일에 가리어 있기에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의 관점은 욕계에 갇혀있다. '베일에 가린 실재'가 문제가 아니라 '베일에 가린 의식'이 문제가 된다. 욕계중생에게 보이는 물질(色)은 모두 욕에 물들어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물질을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고, 아무리 심오하게 관찰하고 치밀하게 궁구한다 해도 욕계를 벗어난 관점을 가질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 과학자들은 먼저 자기 마음에서 물질세계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도를 내려놓아야한다. 보려고 설치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제가 던진 그림자만 볼 뿐이다. 자기가 쌓은 지식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내면에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걷어내야 한다.
어떻게? 세상의 것에 대한 욕심과 악의를 내려놓고 적정처를 찾아 계를 지키며 평범한 일상에 만족해야 한다. 그리고 고요히 앉아 호흡을 관해야 한다. 마음에 뿌리박힌 다섯 가지 장애와 열 가지 오염원을 차례로 제거한다면, 실재가 드러난다. 선정의 세계가 경험된다. 사선정에서 의식은 물질의 장애를 벗어나 무한한 시공간과 의식을 관조하게 된다. 그리고 우주를 관통하는 눈이 열리어 무한 시공에 대한 지식을 모두 알게 된다.
3. 물질을 천착함에 따라 물질의 종적이 묘연해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관측자의 의도하는 대로 대상이 관측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물질과 의식 사이에는 모종의 상관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궁구하던 물리학자들이 동양의 사상을 이리저리 뒤져보았다. 그래서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공’이라든지, ‘일체유심조’, ‘만법유식’, 노자의 도, 화엄종의 ‘사사무애법계’와 ‘십현연기’를 들먹이면서 아는 체를 한다.
결론: 일체유심조, 유식설은 모두 전변설이다. 사견이다. 일견 불교 같이 보이지만 변질된 불교이다.
사사무애법계와 화엄연기는 일리가 있다. 그것은 근본불교의 연기설의 변형이지만, 인연법과 인과법을 확대해석한 이론이다.
공을 무아, 무자성으로 받아들인다면 일리가 있다.
그러나 공, 유식, 화엄연기, 이런 교리들이 화려하고 무언가 심오해 보이지만 부처님의 근본교설을 철저하게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지어낸 교리이다. 확실히 알았다면 그런 것들을 지어낼 필요가 없었다. 일체법(모든 현상과 사물 및 진리)은 12입처(인간 내부의 정신영역)라는 것이 부처님 말씀의 원전인 5부 니까야에 나오니까.
삼라만상 일체의 현상과 사물이 인간의 의식공간(데이터 베이스=12입처)에 입력되어있는 대로 경험된다(受想). 새로운 것을 경험하려는 의도(行)를 내면 전5근을 작동하여 전5경을 감지한다. 새롭게 감지된 전5경의 정보(감성물질)는 외입처에 수용된다. 그러면 새로 수용된 정보를 외입처에 저장된 기존의 정보와 비교 분별하는 의식작용(識)이 발생한다. 이렇게 분별된 식이 인식주관의 데이터 베이스(내입처)와 접촉하여 受가 생겨나고, 다시 인식객관의 데이터 베이스(외입처)와 접촉하여 想이 일어난다. 눈앞에 보이는 대상이 실재하는가? 무엇이 실재인가? 눈앞에 보이는 대상이란 과거에 경험에 축적되어 있는 너의 12입처(인식경험이 담겨있는 데이터 베이스)에서 발생한 안식(眼識 무엇을 보았다 시각정보)이다. 안식은 그 즉시 안수(眼受 보아서 느껴진 좋고 싫은 감정)와 안상(眼想 보아서 느껴진 이미지와 언어화한 개념)을 발생시킨다.
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너의 욕(欲desire)이 보고자 하는 대로 보인다. 네 눈에 그렇게 보이게끔 되어있는 대로 보인다. 너의 관점은 너의 기억에 의해 구속되어있다. 너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네 눈이 대상을 보는 방식은 네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네 눈을 작동하여 대상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 또 네 눈은 세뇌되고, 학습되는 대로 볼 뿐이다.
한 마디로 너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부림을 당할 뿐이다. 너에게는 자유가 없다. 너는 욕계의 노예이다. 너의 감각기관은 너를 노예로 삼아 부리는 정교한 도구이다. 네가 감각기관에 휘둘리는 한 너는 매트릭스가 심어놓은 칩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기계이다. 그래서 네가 진정 욕계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먼저 너의 12입처를 정화하라. 어떻게? ‘알아차림 正念’을 수행하라. 이것이 ‘일체 법은 12입처이다’가 주는 교훈이다.
유식학파는 12입처를 몰라서 제7말라식과 제8아뢰야식으로 상정했다. 의내입처와 법외입처가 상촉하여 식을 생산한다. 상일주재하는 자아동일성을 주장하는 의식(아뢰야식)이란 사실상 의내입처와 법외입처가 접촉하여 만들어낸 하나의 관념(법)에 불과하다. 태초에 아뢰야식이란 게 있어 거기에서부터 의식주관(識能變/見分)과 객관대상(識所變/相分)이 갈라져 나왔다(識轉變)고 설명한다. 그래서 두 쪽으로 갈라진 견분과 상분이란 미망을 깨달아 원래의 아뢰야식으로 환원하면 독존하는 초월지(kevala jnana 상키야학파의 주장과 똑 같다)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본래 청정한 한 물건이 있어 그것이 쪼개지고 물들어서 현재의 우리가 고통 속에 사는 것이 아니다. 본래청정, 천지미분전의 한 물건, 독존지, 브라만, 하나님, 한얼... 이런 것들은 모두 너의 12입처에서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다. 관념은 일어났다 사라진다. 그것뿐이다. 거기에 힘을 부여하여 무언가 후광을 입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영적인, 종교적인 마피아이다.
소위 ‘아뢰야식’이란 단지 또 너의 입처에서 또 하나의 개념이 만들어 졌을 뿐이다. 제7말나식도 마찬가지이다. 일체법은 12입처라는 것으로 인간의 정신심리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모르니까 제7식, 제8식이란 개념을 도입한 유식학파는 인도의 상키야학파의 전변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래서 불교가 힌두화하는 것이다.
첫댓글 요즘 공부는 제 의식의 대반란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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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혼란스러워하던 부분인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일체법은 12입처이다' 정말 간결하고 명확한 가르침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히 정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