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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積善之家 必有餘 慶
(적선지가 필유여경)
積 : 쌓을 적
善 : 착할 선
之 : 갈 지
家 : 집 가
必 : 반드시 필
有 : 있을 유
餘 : 남을 여
慶 : 경사 경
뜻: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
좋은 일을 많이 하면 후손들에게까지 복이 미친다는 말이다.
주막집 장대비 쏟아지던 날
밤 천둥 번개 치고
비가 퍼붓듯 쏟아지는데
주막집의 사립문 앞에서
누군가 울부짓는 사람이 있었다.
“영업 벌써 끝났소.”
자다가 일어난 주모는
안방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 때 열두어살 먹어 보이는
사동이 나와서 사립문을 열어보니
한사람이 흙담에 등을 기댄 채,
질척거리는 흙바닥에
앉아 있었다.
고주망태가 된 술꾼인 줄
알았는데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가시넝쿨 속을 헤맸는지,
옷은 찢어 졌고 삿갓은 벗겨졌고
도롱이는 비에
흠뻑젖어 있으나 마나다.
사동이 그를 부축하며
뒤뜰 굴뚝옆에 붙어있는
자신의 쪽방으로 데려갔다.
내일이 장날이라
장사꾼들이 빼곡하게,
새우잠을 자는 객방에는
자리가 없었을 뿐더러
흙투성이를 방에
들이게 할 수도 없었다.
사동이 반평도 안되는
자기 방으로 그 사람을 대려가
호롱불 빛에 보니
그 사람은 볼품없는 노인이었다.
동창이 밝았을 때
노인이 눈을 떠보니
자신은 발가 벗겨져 있고
옷은 바짝 말라
머리맡에 개어져 있었다.
그때 사동이 문을 열고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아궁이에
옷을 말렸으니 입으세요.”
그 몇일 후,
그 날은 장날이 아니라 일찍
주막문을 닫으려 하는데,
웬 장정이 들어왔다.
주모는 바깥나들이를
나갔고 사동 혼자 있었다.
“너, 나하고 어디 좀 가야 쓰것다.”
장정이 사동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안돼요. 왜요?”
그렇지만,
덩치 큰 장정은 사동을 번쩍 들어
사립문 밖에 매어둔 말에 태웠다.
말은 달리고,
사동은 떨어질세라
장정의 허리를 껴안았다.
수십리를 달려 고래 등 같은
어느 기와집 앞에 멈췄다.
사동이 바들바들 떨면서
장정에게 이끌려
대문 안 사랑방으로 갔다.
유건을 쓴 대주 어른이 빙긋이
웃으며 사동의 두손을 잡았다.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어? 그날 밤 비를 맞고...”
“그래, 그렇다.
내가 어머님 묘소에
갔다가 갑자기 폭우를 만나,
하인은 낭떠러지기에 떨어져 죽고
나혼자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여우고개 아래 너희 주막에서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사동의 얼굴에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놀라움에 벌린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그날 밤비를 맞고
주저앉은 노인을 보고,
"붓장수일까, 갓장수일까,
아니면 비렁뱅이일까?"
온갖 추측을 다 했는데,
이런 큰 기와집 주인이라니...
“너의 바람이 뭐냐?”
“돈을 벌어서 주막을
도로 찾는 것입니다.”
원래 여우고개 아래
주막은 사동네 것이었다.
그런데 이태 전,
7년이나 누워 있던
사동의 아버지가
이승을 하직하자
약값으로 쌓인 빚 때문에
주막은 저잣거리
고리채 영감에게 넘어갔다.
사동의 어머니는 저잣거리
국밥집 찬모로 일하게 됐고
형은 장터에서
지게꾼으로 일하고 있었다.
지금 주막집 주모는
고리채 영감의 사촌 여동생이다.
사동의 내력을 다 듣고
난 대주 어른이 물었다.
“몇년이나 돈을 모으면,
그 주막을 도로 찾을 것 같으냐?”
코흘리개를 겨우 면한
사동이 손가락을 세어 보며 말했다.
“십년 안에는...”
대주 어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동을
말에 태워 돌려 보냈다.
이튿날 대주어른이
저잣거리 고리채 영감을 찾아가,
주막을 사겠다고 흥정을 했다.
이미 주막이 넘어간
가격을 알고 있는데
고리채 영감은
터무니 없는 값을 불렀다.
며칠 후 나루터
옆에 목수들이 모였다.
"뚝딱 뚝딱"...
석달 후 춥지도
덥지도 않은 시월상달에,
널직한 기와집
주막이 완공됐다.
대주 어른은 완공식 날,
땅 문서와 집 문서를
열두살 사동에게 줬다.
積善之家 必有餘慶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선하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넘쳐난다.
남모르는 외지인
불청객이라도 서로 도와가며,
베푸는 인정이 언젠가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의
교훈이 아닌가 싶습니다.
- 세상사는 이야기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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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생 사
세월의 다리를
건너고 건너오니
늙음이 머물고
뚜벅뚜벅 걸어온 세월
참 많이도 걸어왔네.
많은 세월을 걷다 보니
좋은 인연도 만나고
기분 좋은 아침도
맞는다.
우리네 인생사
어디서 멈춤 할지
어느 정류장에서
내릴지 모르지만
안위를 묻는 이가 있으니
일상의 작은 행복이
아닌가 싶다.
🔹️나이가 들어가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
3000만원 짜리 시계를 차거나 30만원짜리 시계를 차거나 모두 똑같은 시간을 알려 준다는 것.
400 만원짜리 위스키를 마시거나
4천원짜리 소주를 마시거나
취하는 효과는 똑같다는 것을.
100평 짜리 집에서 살거나 15평 짜리 집에서 살거나 외로움은 마찬가지라는 것을
진정한 내면의 행복은 세상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1등석을 타건 이코노미석을 타건 비행기가 추락한다면, 똑같이 함께 떨어진다는 것을
그런고로, 배우자건, 동료건, 친구건, 형제 자매건,
함께 채팅을하는 사람이건, 같이 만나서 웃고,
세상 사는 이야기든 정치이야기든 노래방에서 함께 노래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 5가지
1. 아이들에게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지 말고
행복하라고 가르쳐라. 그러면 그들이 자라서
사물을 보는 눈이 가격으로 보지 않고 가치로
보게 될 것이다.
2, 음식을 약처럼 먹어라. 그렇지 않으면 약을 음식처럼 먹게 된다.
3. 너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떠나지 않을지니, 그 이유는 100가지의 포기하게 될 이유가 있더라도 한가지라도 함께 할 이유를 찾아낼 것이다.
4. 당신은 태어날 때 사랑을 받고 태어난다.
당신은 생을 마칠 때 역시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 사이를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은 당신 몫이다.
5. 만약 빨리 걷고 싶을 땐 혼자 걸어라.
그러나 멀리 걷고 싶을 땐 함께 걸어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6명의 명의
1. 햇볕
2. 휴식
3, 운동
4, 식이요법
5. 자신감
6.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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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담 일화
정조(正祖) 임금 때 뛰어난 화가 김홍도는 왕명으로 그림을 그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그는 호탕하기만 하고 내일을 생각지 않는 성미라 살림살이는 궁색함을 면치 못하였다.
어느 봄, 마음에 꼭 드는 매화나무를 본 일이 있었다.
“이 매화나무 파는 것이요?”
“예.”
김홍도는 욕심이 나서 물어본 것이었다.
“그래 그 값이 얼마요?”
“예, 그저 한 2천 냥만 주십시오.”
김홍도는 말이 없었다.
매화나무를 살 돈은 커녕
당장 끼니를 이어가기가 어려운 판에 두 말이 있을 까닭이 없다.
값을 물어만 보고 뒤통수를 긁었으나 미련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 후에 어느 갑부가 김홍도에게 그림을 부탁했다.
“그림 한 폭 잘 그려주시면 수고값으로 3천 냥을 드리겠소이다.”
“그럽시다.”
눈이 번해진 김홍도는 서슴지 않고 승낙하여 그림을 그려 주고 3천 냥을 받았다.
그 돈으로 당장 매화나무를 사고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가까운 지기를 청하여 매화음(梅花飮) / 즉 매화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화가 묘하게 생긴 데도 놀랐거니와
그것을 살 돈이 어디에서 났는지 모두들 궁금해 하였다.
김홍도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누가 그림을 청하기에 그려주고 3천 냥을 받았지.
그 중에서 2천 냥을 주고 이 매화나무를 사고,
또 8백 냥으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이 매화음을 벌였다네 ····
나머지 2백 냥으로는 쌀과 나무를 샀지.
어때 !
사나이 생활이 이만하면 되지 않는가 ?”
결국 김홍도는 끼니를 잇기 어려운 형편이면서도
3천 냥을 하루에 다 써 뿌릿던 것이다.
* 김홍도(1760~?)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 단구 등.
잠시 현감을 지낸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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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반발로 전공의들이 파업, 대형 병원 중심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근무를 중단했다.
이에 따라 의료 현장의 혼란이 가시화되고, 의료 공백 사태가 벌어지고 있어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갑자기 찾아온 심부전증으로 사경을 헤매던 어느 후배의 부친은, 대구 및 경북 소재 여러 종합병원 문을 두루 두드렸으나 치료할 의사가 없다는 이유로 모두 다 거절 당했다.
그래서 부득이 밤 11시에 어느 종합병원 응급실을 막무가내로 쳐들어갔다.
그곳에서도 당장 나가라는 엄청난 구박하에, 부랴부랴 전화로 다른 병원을 물색하던중, 이를 딱하게 여긴 응급실 의사의 따뜻한 배려로
일단 바로 쫓겨나지는 않고 하루를 버틴 사례가 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장기려 박사가 생각나고 그리워진다.
장기려 박사의 꿈은 어린 시절부터 의사였다.
그래서 경성 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의과 대학과 김일성 종합 대학 교수를 지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1950년, 장기려 박사님은 철수하는 군인들의 손에 이끌려 아내와 5남매를 북에 둔 채 둘째 아들만 데리고 월남하였다.
그리고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복음 병원을 세워 행려병자를 치료했다.
장기려 박사님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다짐을 하며 하루에 200명이 넘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럴 뿐만 아니라 1959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간 절제 수술에 성공하는 등, 당시 우리나라 외과 의사 가운데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병원이 커지고 무료 진료가 불가능해지자 장기려는 1968년 한국 최초의 의료 보험 조합인 청십자 의료 보험 조합을 설립하였다.
청십자병원은 가난한 사람을 정성껏 치료해 줄 뿐만 아니라 치료비를 깎아 준다고 소문이 나 늘 많은 환자가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던 농부가 장기려 박사에게 하소연했다.
“선생님, 제가 당장은 돈이 없지만 나중에 꼭 벌어서 갚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사정 좀 봐주세요.
내일 당장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병원에 묶여 있으면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됩니다.”
농부의 말을 들은 장기려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그때 가세요.”
농부가 깜짝 놀라자 장기려는 웃으면서 말했다.
“병원에서는 아마 병원비를 내지 않으면 퇴원을 안 시켜 줄 거예요.
그런데 돈이 없으니 도망을 쳐서라도 일을 해야 가족을 돌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장기려는 그렇게 말하고 농부에게 돈까지 쥐여 주었다.
“얼마 안 되지만 차비나 하세요.”
농부는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평생 자기 집 한 채 가지지 못하고 병원 옥상 사택에서 살았다. 정부에서 이산가족 상봉에 특혜를 주려 했으나 끝끝내 거절하고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1995년 겨울, 그것도 예수가 탄생한 크리스마스 12월 25일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
장기려 기념관 더 나눔센터에는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이 전시돼 있다. 기독교 신앙에 기반해 65년간 인술을 실천한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겠다"
라는 명언도 남겼다. 기념관은 옥상 사택에서 살던 장 박사의 생전 모습을 상상하기에 딱 좋을 만큼 자그마하다.
더 나눔센터 인근에 동구 이바구골목이 있으며, 청마 유치환 우체통도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부산 원도심도 보인다
내 마음이 그러하듯
산속 계곡 창밖에는
새복부텀 겨울비가 추적 추적 내린다.
오늘따라
‘바보 의사 성산 장기려 박사’ 가 그저 그립기만 하다.
소리 한 가락
https://m.youtube.com/watch?v=Sk2yoOY8CTU
첫댓글 참 많은걸 생각하게 하는 글 이네요.
빨리 걷고 싶을 땐 혼자 걷고 멀리 걷고 싶을 땐 함께 걸어라.
좋은글 감사합니다.
새기고 또 새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