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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쉰 여행 5 - 비단 박물관을 구경하고는 나와서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다!
2023년 10월 30일 저장성 후저우시 난쉰전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는 30분을
걸어 강남의 10대 수향 마을이라는 난쉰구전 (南浔古镇 남심고진) 서문으로
입장하는데 여긴 입잘료를 받지 않으며 700년 역사를 가진 부자 동네로 3모작을 합니다.
그리고 실크를 생산하니 사조지부(絲組之府) 에 쌀과 물고기가 풍부해 어미지향 (魚米之鄕)
으로 불리며 남자들이 살림을 하는데, 여자들은 섬세한 손으로 누에에서 생사를
뽑고 비단을 짜니 손가락이 상하면 안되는 지라 설거지와 뻘래등 집안일은 남자들이 한다는...
1840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해 5개 항구를 개항하게 되면서 인근 상하이가 개항되아 생사 수출
이 급증하게 되는데.... 그 생사의 70% 는 난쉰 인근에서 생산되었으니 부자 마을이 되었다고 합니다.
본 운하를 지나서 서북쪽에 길게 이어지는 운하를 찾아가는데 송나 시절의 옷을 빌려주는 가게를 보는데....
옷을 고르면 머리 모양등 메이크업과 부채와 우산등 소도구를 세트로 챙기느라 바쁜 모습을 봅니다.
쑤저우 처럼 여기도 사조(비단) 박물관이 보여 들어가는데..... 비단은 누에나방의 고치에서 나온 실을
가지고 만든 섬유로 영어로는 실크(silk), 한자로는 견(絹) 이라고 하며 비단(緋緞), 명주
(明紬) 라는 명칭으로도 쓰이는데, 양모와 함께 인류 역사상 오랫동안 사용된 동물성 천연 섬유입니다.
비단은 광택이 나며 부드럽고 시원한 감촉이 느껴지면서도 보온성이 뛰어나고, 정전기가 거의 생기지
않지만 알칼리에 약해서 물세탁을 하면 섬유가 손상되므로 유기용매를 이용한 드라이
클리닝을 해야만 하며 자외선에도 약해서, 직사광선에 오래 노출시키면 누렇게 변하거나 손상됩니다.
누에는 성충이 되려면 고치를 뚫고 나와야 하니 실이 끊어지고 누에의 침이 닿은 부분이 변성되어 생산성과
품질이 떨어지므로 그 전에 삶아서 죽이니 번데기이며, 견직물 중에서도 비단은 광택이 나게 짠
것이고 명주는 무늬 없이 성글게 평직으로 짠 직물이며, 벨벳은 짧고 부드러운 솜털이 일어나게 짠 것입니다.
누에나방의 애벌레에게 뽕나무잎을 먹여 기르는데 애벌레가 여러번 탈피를 거쳐 자라서
변태를 위해 고치를 켜면, 고치를 삶아 실을 빼내 그 실로 천을 짜니 삶아버리기에
고치 속 번데기는 죽는데, 세계 각국에서 가축 사료로 쓰이지만 한국에선 식용으로 합니다.
삼베나 모시 등 다른 전통 섬유가 실을 만드는 과정이 어렵다면 견직물은 실을 뽑은
후의 과정이 더 어려운데..... 누에실은 젖은 상태에서 서로 달라붙는 성질이
있으므로 뽑아낸 실은 젖었을 때 가닥가닥 찢은 후 말려 왕채로 다시 감아야 합니다.
베틀에 올라가도 잘 끊어지기 때문에 고운 명주는 짜는 시간이 반, 고치는 시간이 반이라고 하며, 한편
섬유 구조는 7~8할의 피브로인 가닥을 2~3할의 세리신이 감싸고 있는 형태인데, 이대로는
광택이 나지 않으니.... 더운 물이나 초산에 담그는 등 과정을 거쳐서 세리신을 녹여 광택이 나게 합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천을 찾을 수가 없었고, 현재도 세계 최고급 천으로 평가받으니 가볍고,
아름답고 부드러우며 흡습성도 좋고, 상당히 질긴 편이며 방한 성능도 뛰어난데 관리가 어렵다는
점이 거의 유일한 단점으로 물세탁시 강도가 매우 약해져 비단의 아름다움과 질김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비단용 세제로 석유를 썼다는데..... 현대에도 견직물은 기름을 사용하는 드라이
클리닝이 기본이니 사실상 달라진 게 없는데, 이 때문에 현대에도 변함없이 고급의류용
섬유로 통하며..... 원단이라 그런지 비단으로 만드는 옷은 고급스러운 드레스 따위가 많습니다.
과거에 비단은 금에 필적하는 사치품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들만 비단옷을 입을 수가 있었으니
그 중에도 야생 누에인 산누에나방이 짜낸 실로 만든 비단은 천잠사라고 해서.... 일반
비단 보다 훨씬 귀한 취급을 받았으니 노란색을 띄고 일반 비단 보다 곱게 짜기가 더 힘듭니다.
로마 제국으로 들어간 비단은 실제로 같은 무게의 금과 동일한 가치를 지녔던 적이 있었으니 금과 비단의 상대
가치가 계속 바뀌었기 때문에 일정치는 않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재위기간에는 금값이 곧 비단값
이었다는데, 1파운드 비단이 1파운드 금과 동가였고 이 당시 1파운드의 금은 곧 12,000 데나리에 해당 합니다.
비단은 단순히 사치품 용도로만 쓰이지 않았으니..... 상당히 질기고 튼튼하기 때문에 중국과 몽골
에서는 갑옷 안에 입어서 갑옷의 방어력을 높이는 일종의 전투복으로 입었고,
그래서 장수들은 갑옷 아래에 비단옷을 받쳐 입었는데 관우의 상징인 풀빛 비단옷이 대표적입니다.
반면 일반 병사들은 풀솜이라고 해서 비단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 같은 것을 이용한 옷을 입었다고
하는데, 몽골의 비단 전투복은 질긴 재질의 특성상 화살이 박히더라도 옷이 찢어지지 않아
그냥 화살대를 잡아당기면 바로 화살째로 뺄 수 있었다고 하며..... 18세기 서구에 와서도
권총을 이용한 결투를 할 때는 아예 상의를 다 벗어 맨몸으로 싸우거나 실크 셔츠를 입고 싸웠습니다.
당시의 권총 성능상 총탄을 화살촉 처럼 셔츠째 잡아당겨 뺄 수 있어 큰 부상을 막아 줬기 때문
이니.... 적어도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방탄효과도 나쁘지 않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고, 제대로 된 소총탄등은 유효사거리에서 막아주지 못했기 때문에 도태됩니다.
수술용 봉합사로도 사용했다. 쉽게 말해서 수술 부위를 꿰메는 용도. 비단은 섬유가 가늘면서도
질기고 신체의 부작용도 크지 않아서 봉합사에 적합했으니 역시 현대에는 더 튼튼하면서도
유연하고 몸에 흡수까지 되는 특수 섬유로 만든 봉합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용 빈도가 적습니다.
비단은 낙하산으로도 쓰였는데, 미 육군에선 일부 참전용사들은 사용후 회수한 낙하산을 집에 보내 결혼할
여성에게 웨딩 드레스를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으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장교 한명이 본토의 아내
에게 드레스 원단으로 선물하기 위해 보조낙하산을 낙하후에도 영국으로 철수하기전까지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이후 낙하산 재료로 나일론이 개발되고 나서는 누에를 군수용품으로 팔던 곳은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하는데..... 낙하산은 기능적인 면에서 비단을 쓴 것인데, 더
싸면서 기능도 더 좋은 나일론이 나오면서 비단을 낙하산에 쓰는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라?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미국에 비단을 가장 많이 수출하던 나라가 일본이었지만 일본이 만주 사변으로
미국과의 사이가 나빠지자 미국이 일본제 비단의 수입을 규제했으니 1930년대의 Silk Boycott.
당시 일본의 농촌 경제는 양잠업으로 유지되었는데, 안그래도 세계대공황으로 경제가 어려운 판에
실크보이콧으로 농촌 경제가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고, 이는 일본이 군국주의화가 되는 한 원인이 됩니다.
현대에 이르러 필라멘트 섬유 라는 비단의 특성을 활용하여 전자기기와 결합하여 사용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가 스피커. 트위터의 진동판 재질에 실크가 활용됩니다.
비단은 중국의 특산물이니 해외에 팔면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는데 서양으로 가는 교역로
에 실크로드 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그 점을 잘 말해주니..... 중국에서는 대표적
으로 쓰촨성의 비단이 유명했으며 이 지방 비단은 촉금이라고 하여 높은 품질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촉한의 유비가 조조의 조문에 비단을 보냈다든지 또 제갈량의 재산 목록 상당수가 뽕나무
밭이었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남아 있는데 이 지방의 누에고치 생산량은 지금도 중국 전체에서
2위라고 하니 이는 쓰촨성 사람들의 자부심으로도 이어져서, 고우영의 말에 따르면 쓰촨성의
중심지인 청두에서는 앞서 언급한 실크로드의 종착지가 장안이 아닌 청두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답니다.
중국에서는 비단 제조법이 다른 나라로 퍼지는 것을 엄격히 막으려 했지만 몰래몰래 새어나가 결국 여러 나라
에서 제작하게 되었으니.... 서양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시절 이미 비단이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552년에 페르시아인 사제가 중국에서 대나무 지팡이에 누에고치를 숨겨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또한 웬만한 나라 마다 누가 누에나방의 알과 뽕나무 씨앗을 숨겨왔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
인데..... 당나라에서 화번 공주로써 티베트의 왕 송첸감포에게 시집갔던 문성공주
역시 티베트에 누에 농자를 가지고 가서 티베트에 비단 직조를 전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문익점 목화 밀반입 이야기는 후세의 창작인데, 이 일화가 변형되어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삼국지나
역사책을 보면 금, 보석, 쌀 등과 마찬가지로 상대 국가에 대한 귀중한 진상품으로도 많이 사용했습니다.
실크 생산의 시작이 중국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 말하자면 양잠 방법과 품종, 제면 방법이라는
것이 옳을 것이니, 전파 전에도 토착종의 나방 고치를 이용한 직물은 있었으나, 당시에는 필라멘트 섬유가
아닌 스테이플 섬유 취급이었고 고치마다 실의 굵기와 색상이 균일하지 않았으며 직물의 광택도 떨어졌습니다.
한국도 근대 이전까지 옷감 및 중요 문서 기록용으로 비단을 써왔으며, 국가에서 양잠산업을 적극적
으로 육성했으니, 삼국사기에 신라 초대 왕 박혁거세부터 누에치기를 권장 했다고 나오며,
일본 나라시 정창원에서 발견된 민정 문서에 따르면..... 신라는 3년에 한 번씩 뽕나무의 숫자를
구체적으로 기록하면서 관리할 정도로 비단 생산과 관리에 국가적으로 힘을 쏟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 민정문서에 따르면 가령 사해점촌(청주) 마을의 뽕나무는 1004 그루 였는데 3년간 심은 것이 90그루,
그 전부터 있던 것이 914그루 라고 기록되었으니..... 이는 기록된 다른 나무 보다 훨씬 많은 숫자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일본 처럼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는 친잠(親蠶) 의식을 통해 백성들에게 양잠을 장려
하기도 했는데..... 조선 시대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 에 따르면 큰 집에는 뽕나무
300그루, 중간쯤의 집에는 뽕나무 200그루, 제일 작은 집에는 뽕나무 100그루를 심도록 했습니다.
만약에 규정대로 심지 않으면 그 지역의 수령을 파면했다고 하는데... 서울 마포구 절두산 순교
성지는 형세가 누에 머리를 닮았다 하여 옛 지명이 잠두봉(蠶頭峰, 누에 머리
산봉우리) 이었으며, 산 아래에 뽕나무밭을 조성해 누에가 뽕잎을 먹을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절두산 순교성지 아래에 잠원동(蠶院洞) 이란 지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으니.... 지명에 있는 누에
잠(蠶) 자가 그것이고, 조선 시대에 한양에서 양잠을 하던 잠실(蠶室) 이 2군데 있었는데
서울 잠실동과 잠원동 근처였으니 또 잠원역 승강장에는 벽에 타일 모자이크로 누에가 그려져 있습니다.
한편 서울 성북동에는 선잠단 (先蠶壇) 을 세워서 음력 3월 사일(巳日) 중 길한 날을 골라 중국 처럼
서릉(西陵) 씨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당시에는 선농단 제사와 마찬가지로 선잠단 제사도
중사(中社)로 등급을 매겨 순위가 높았으니 조선이 그만큼 양잠산업을 중요히 여겼음을 알수 있습니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방 하나에 누에를 키우고 아이들이 뽕잎을 해와 먹여서는 고치를 공장에
팔았고 부산물로 번데기도 생산되었으나 농약 사용과 가격도 품질도 월등한 중국산 비단으로 인해 국산
비단은 사실상 숨통이 끊겼고, 과거 비단실을 잣던 누에들은 이제는 동충하초 등 건강식품 용도로 전용됩니다.
현대에는 각종 섬유 기술이 매우 발달해서 비단을 재료로 한 옷의 실용적 이점도 덜하고 양 자체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비단 자체의 아름다움과 희소성 때문에 고급 옷감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하긴 했어도, 어찌 살아남은 소수 양잠업체들이 국산이라는 것을 메리트로 버티고 있긴 합니다.
결혼식에 즈음해 혼수를 맞추러 가면 천연 염색한 국산 전통 손명주 한복이라면서.....
추가금을 받는데 전통 베틀은 폭이 좁아 치마 한 단이 35 cm 를 넘길 수 없으니
틀린 말이고, 평생 직조만 해 온 장인도 한벌 분량을 짜려면 최소 열흘이 걸립니다.
실크는 인체의 분비물에 약해서 몇번만 대여해도 폐기해야 하는데 바느질도 합성 섬유보다 훨씬 어려우니,
양심적으로 진짜 견직물을 쓰는 업체가 몇이나 될까? 인간문화재 조옥이 선생이 살던 경상북도 상주시
가 명주로 유명했으며 그 후는 경상남도 진주시가 실크로 유명해 한국 비단의 70~80%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헤르만 괴링은 자기 제복을 비단으로 만들어 입은 것으로 유명하며 현대에 왕실을 포함한 상류사회
에서 음악회, 파티나 공식 행사 등에 입는 턱시도, 연미복 등에는 비단으로 덧대는 부분이
있으며, 최고급 양복 원단에는 울에 비단이 5~10% 정도 포함되기도 하고 비단의 질감과
가벼움 등은 얻고 광택은 줄일 수 있도록 울에 실크(비단)와 리넨을 섞는 등의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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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박물관을 나와서 주변 운하를 구경하다가 운하변에 자리한 멋진 카페로 들어가서는 시원한
맥주 한잔을 들이키면서 카페 창 밖으로 송나라 옷을 입은 처녀들을 보노라니 .....
문득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 교수가 동아일보 '이준식의 한시한수' 에 쓴 “경국지색” 이 떠오릅니다.
북방에 사는 아리따운 여인, 세상에 다시없이 저 홀로 우뚝하다오.
한 번 돌아보면 성이 무너지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가 기울지요.
성 무너지고 나라 기우는 걸 어찌 모르리오만, 그래도 미녀는 다시 얻기 어렵다오.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
―‘미녀의 노래(가인곡·佳人曲)’ 이연년(李延年· ?∼기원전 101년경)
음악가 이연년이 한 무제 앞에서 불렀다는 노래. 미녀가 보내는 눈길 한두 번에 온 성, 온 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 세상 어디에 그런 미녀가 있느냐고 황제가 궁금해하자 곁에 있던 누이
평양(平陽) 공주가 지금 노래하는 저 음악가의 누이가 바로 그 미녀라고 귀띔했다.
그리고 후일 황제는 이연년의 누이를 황궁으로 불러들여 부인(夫人) 으로 책봉하여 총애했다.
‘경국지색(傾國之色)’ 이란 말이 여자의 미모를 최대치로 강조한 건 분명한데 시인이 이런 식
으로 제 누이를 빗댄 게 묘하긴 묘하다. 하(夏) 의 걸왕(桀王), 은(殷) 의 주왕(紂王),
그리고 서주(西周) 의 유왕(幽王), 이 망국의 군주들이 각각 말희(妺喜), 달기(妲己),
포사(褒姒) 라는 미녀에 취해 망국의 비극을 초래했다는 게 엄연한 역사의 진실인데도 말이다.
어쨌든 ‘다시 얻기 어려운 미녀’ 임을 내세우며 나라 기우는 것도 나 몰라라 식으로 치부할 수 있다니
오빠의 배려가 갸륵하다면 갸륵하다. 후일 이 부인은 아들 하나를 남기고 병사했는데
황제가 병문안을 위해 누차 찾아왔지만 자신의 초췌해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끝까지 만나주지 않았다는 일화를 남겼다. 황제도 꺾지 못한 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