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가 익어가고 꿀풀이 피고 지니 유월 망종이다. 감나무에 꽃 피고 산에 인동꽃, 다래꽃 달래꽃 핀다. 모내기도 끝내고, 얼추 알곡 씨를 넣었는가! 한고비는 넘겼지만 또 한고비 남았구나. 뻐꾸기 뻐뻐꾹 뻐뻐꾹 울어 농사일을 재촉하니 식구들 일 년 양식 빠짐없이 씨 뿌리자.
햇살이 따가우니 한여름에 접어든다. 망종하면 가뭄부터 생각난다. 비 소식 없나? 목마르게 기다린다. 2001년 가뭄. 논과 밭 모두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옹달샘 물마저 끊겨 먹을 물도 안 나오던 그해는 가뭄이 정말 대단했다. 이맘때면 그러려니, 며칠 참으면 되겠지 했는데 하루 이틀……. 오월 중순부터 시작한 가뭄이 유월 중순이 되도록 이어졌지. 노할머니가 시집 와서 겪어본 가운데 가장 심한 가뭄이라 했다니까. 물을 길어 먹고 개울에 가서 빨래하고, 밭 옆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나중엔 소방차가 물을 실어다 주기도 했다.
물이 끊기면 목이 더 마르다. 목 타는 건 사람만이 아니다. 논 물길도 마른다. 모두 마른다. 사람도 들판의 곡식도. 논바닥이 드러나고, 고추야 콩 싹이야 하나 둘 타서 시들어간다. 사람들은 경운기로 물을 퍼 밭에 주고. 강물을 퍼서 논에 댄다. 그래도 모두 자라지 못하고 목숨 줄만 부여잡고 견딘다. 이렇게 가무니 젊은 사람들 입에서 기우제 지내자는 소리가 나온다. 동네 어르신은 기우제는 하지 지나서 지내는 거란다. 다행히 하지 전 18일에 비가 왔다. 40여 일만에 비님! 한번 비구름이 끼니 비는 이어오신다. 어느새 장마 걱정으로 넘어간다.
알 낳는 왕우렁이
논에는 모내기 끝에 애벌 김매기를 할 때다. 오리나 우렁이를 넣어도 이들이 다 잡지 못하는 풀이 있다. 논에 들어가 손으로 김을 맨다. 벼가 어찌 지내나, 논에 들어가 벼포기 사이를 돌아다녀 보면 논둑에서 볼 때하고 또 다르다. 벼하고 한식구가 되어 부대끼는 맛이다.
6월 벼는 포기가 벌어진다. 모내기를 하면 벼는 먼저 뿌리를 뻗는다. 그리고 새가지를 낸다. 이 가지에서 이삭이 나올 터이니 가지가 많이 나오면 좋다. 벼에서 새 가지가 나오는 걸 '포기가 벌어진다'고 한다. 부챗살 펴지듯 벌어지기 때문이다. 포기가 잘 벌어지려면 뿌리 힘이 좋아야 한다. 뿌리 힘이 좋으면 잎은 점점 짙푸른 빛을 띠고 부챗살 펴지듯 떡 벌어진다. 그렇지 못한 벼는 포기당 겨우 두세 개 벌어지다 만다.
밭마다 곡식들이 한창 자라고 있다. 고추·가지·토마토는 벌써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하니 자주 돌봐 주어야 한다. 콩싹·깨싹·옥수수싹은 아직 여리다. 이 어린 싹들이 풀과 벌레를 이겨내게 도와 주어야 한다. 김을 매고 돌아서 보면 그 사이 또 풀이 올라와 있다.
보리까락이 잔뜩 벌어져
고추꽃 떨어지면
보리·밀·양파·마늘·감자가 차례차례 익어 거두어들인다. 거두지 못하고 아차 하는 사이, 장마가 밀어닥치면 어쩌랴. 보리 밀농사는 집에서 먹을 만큼 하기가 쉽지 않다. 규모가 있어 콤바인으로 베면서 그 자리에서 털어내어 건조기에 넣고 말리면 모를까, 사람 손으로 밀을 베고 도리깨로 털어 바람에 말리려면 장마하고 경주를 해야 한다. 이맘때는 하루에도 몇 번 131 날씨 안내 전화를 누른다. 비 오실 기미가 보이면 모종을 옮겨 붙이고, 날이 맑으면 거두어 말려야 하니까.
왼쪽 논은 기계논 오른쪽 논은 손모 논
마늘종
농사일은 망종에서 하지까지 고비다. 망종에서 하지까지 부지런히 움직여, 풀을 잡고 작물마다 제자리 잡도록 도와주고, 겨울 작물들 거두어 갈무리해야 하기에. 밭마다 비닐을 씌우고, 그러지 못할 곳은 풀약(제초제)을 치고, 밀 보리농사는 기계화하고. 서툰 일손을 빌릴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오디
보리 고개 막바지인 망종에 즐거움은 뽕나무에 달려 있다. 오디가 익으니 달디 단 오디 먹고, 뽕잎도 따 먹는다. 오디가 얼마나 좋은 음식인지는 새를 보면 알 수 있다. 해마다 오디가 익은 건 새가 알려 준다. 길을 가다 새똥이 검붉은 오디 똥이면 오디 철이 돌아온 줄 안다. 이때 콩을 심으면 새가 오디 따 먹느라 콩밭을 해치지 않는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 뽕나무 품에 안겨 입과 뱃속이 까매지도록 오디를 따 먹으며 보릿고개를 넘는다.
밀 그을음도 좋다. 밀을 이삭 채 군불에 까맣게 그슬린다. 뜨거우니 두 손을 바꿔가며 살살 비벼, 껍질을 후후 불어내고, 따끈한 밀알을 추려 한 입 씹으면 톡톡 터지는 밀알의 맛. 아궁이에 모여 앉은 식구들 입 언저리가 시커멓다. 하루 일을 마치고 고단한 몸이지만 시커먼 서로의 얼굴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망종(芒種) 공부
24절기 중 아홉 번째로 소만과 하지 사이다. 양력으로 6월 6일경부터 15일간.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의 종자를 뿌리기 좋은 때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모내기와 보리 베기가 이뤄진다.
초후에는 사마귀가 생기고,
중후에는 왜가리가 울기 시작하며,
말후에는 개똥지빠귀가 울음을 멈춘다 하였다.
밀·보리 농사를 지어보니 이때가 '발등에 오줌 싼다'고 할 정도로 1년 중에서 가장 바쁜 때다. '보리(밀) 그스름'이라 하여 풋보리 (풋밀)를 베어다 그슬려 먹는 풍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