懲毖錄卷之一(25)
(모란봉)
平壤陷(평양함)車駕次于嘉山(거가차우가산)
평양이
함락되고, 임금은 가산으로 행차 하시었으며,
東宮奉廟社主(동궁봉묘사주)自博山入山郡(자박산입산군)
동궁은
묘사의 신주를 받들고 박산으로부터 산골의 군으로 들어갔다.
初賊兵(초적병)分駐江沙上(분주강사상)作十餘屯(작십여둔)
처음 적병은
강가 모래 위에 나누어 주둔하여 10여진을 만들고
結草爲幕(결초위막)旣累日不得渡江(기누일부득도강)
풀을 엮어
장막을 지었으며, 여러 날 강을 건너지 못하자,
警備頗怠(경비파태)
경비가
자못 게을러졌다.
金命元等(김명원등)自城上望見(자성상망견)以爲可乘夜掩襲(이위가승야엄습)
김 명원
등이 성 위에서 바라보고 야음을 틈타 엄습하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여겨,
抄擇精兵(초택정병)使高彦伯等領之(사고언백등영지)
정예병사를
뽑아, 그들을 고
언백1)에게 거느리게 하고,
從浮碧樓下綾羅渡(종부벽루하능라도)潛以船渡軍(잠이선도군)
부벽루
아래 능라도로부터 몰래 군사를 배로 건너가게 하였는데,
初約三更擧事(초약삼경거사)失時刻(실시각)旣渡已昧爽矣(기도이매상의)
처음 약속하기를
삼경에 적을 치기로 하였는데, 시간을 놓쳐서, 건너가자 이미
날이 밝아버렸다.
見諸幕中(견제막중)賊猶未起(적유미기)遂前突第一陳(수전돌제일진)
적의 장막을
보니 적이 아직 일어나지 않아, 드디어 앞으로 제일진으로 돌격시키자,
賊驚擾(적경요)我軍多射殺賊(아군다사살적)土兵任旭景(토병임욱경)
적병이
놀라 소란해졌다. 우리 군사들은 많은 화살을 쏘아 적을 죽였으며, 토병
임 경욱은
先登力戰(선등역전)爲賊所害(위적소해)奪賊馬三百餘匹(탈적마삼백여필)
앞장서
힘껏 싸우다가 죽었으며, 적의 말 300필을 빼앗았다.
俄而(아이)列屯賊(열둔적)悉起大至(실기대지)我軍退走(아군퇴주)
잠시 뒤
진의 적병이 모두 일어나 크게 이르자, 우리군사들이 물러나서
還趨船(환추선)船上人(선상인)見賊已追後(견적이추후)
돌아와
배를 타려 하였으나 배위에 있는 사람들은 적병이 이미 바짝
뒤 쫓아
오는 것을 보고,
中流不敢艤船(중류불감의선)淹死者甚衆(엄사자심중)
강 가운데서
감히 강가로 배를 대지 못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 매우 많았다.
餘軍又從王城灘(여군우종왕성탄)亂流而渡(난류이도)賊始知水淺可涉(적시지수천가섭)
나머지
군사들은 왕성탄으로부터 함부로 강을 건너자, 적이 비로소 물이 얕아 건널 수 있는 곳을 알아버렸다.
是日暮(시이모)擧衆由灘以濟(거중유탄이제)
이날 저녁
많은 적군들이 여울을 따라 강을 건너오자,
我軍守灘者(아군수탄자)不敢發一矢(불감발일시)皆散走(개산주)
여울을
지키던 우리 군사들은 감히 화살한발도 쏘지 못하고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賊旣渡(적기도)猶疑城中有備(유의성중유비)遲回不前(지회부전)
적이 이윽고
강을 건넜으나, 성중에 방비가 있을까 의심하여 머뭇거리며 전진하지 않았다.
是夜(시야)尹斗壽金命元(윤두수김명원)開城門(개성문)盡出城中人(진출성중인)
이날 밤
윤 두수, 김 명원이 성문을 열고 성안의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沈軍器火炮于風月樓池水中(침군기화포우풍월루지수중)斗壽等(두수등)
병기와
화포 등은 풍월루 연못에 가라앉히고, 윤 두수 등은
由普通門而出(유보통문이출)至順安(지순안)賊無追躡者(적무추섭자)
보통문으로
나와 순안에 도착하니, 뒤따르는 적이 없었다.
從事官金信元(종사관김신원)獨出大同門(독출대동문)乘船順流向江西(승선순류향강서)
종사관
김 신원2)은 홀로 대동문을 나와 배를 타고 물을 따라 강의 서쪽으로 향하여 갔다.
明日賊至城外(명일적지성외)登牧丹峯(등목단봉)良久觀望(량구관망)
다음날
적병이 성밖에 도착해서 모란봉에 올라가 오래도록 바라 보다가,
知城空無人(지성공무인)乃入城(내입성)
성이 텅
비어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 마침내 성으로 들어갔다.
始車駕至平壤(시거가지평양)廷議皆以糧餉爲憂(정의개이량향위우)
처음에
임금이 평양에 도착하자, 조정의 의론이 모두 군량을 걱정하여,
盡取列邑田稅(진취열읍전세)輸到平壤(수도평양)
여러 고을의
전세를 거두어 평양으로 운송해 두었던 것인데,
及城陷(급성함)幷本倉穀十餘萬石(병본창곡십여만석)
성이 함락되자, 본창의 곡식 10여만석도 함께
皆爲賊所有(개위적소유)時余狀報至博川(시여상보지박천)
모두 적의
소유가 되었다. 이때 내가 올린 장계가 박천에 도착했고,
又巡察使李元翼從事官李好閔亦自平壤來(우순찰사이원익종사관이호민역자평양래)
또 순찰사
이 원익과 종사관 이 호민3)이 또한 평양으로부터 와서,
言賊渡江狀(언적도강상)夜車駕及內殿(야거가급내전)發向嘉山(발향가산)
적군의
도강상황을 말하니, 밤에 임금과 내전이 가산으로 향해 출발하면서,
命世子奉廟社(명세자봉묘사)別由他路(별유타로)
세자에게
명하여 묘사의 신주를 받들고 다른 길을 따라 별도로 가서
使之收召四方(사지수소사방)以圖興復(이도흥복)
사방의
군사들을 불러들여, 그들로 하여금 흥복을 도모하라 하면서,
分臣僚從行(분신료종행)領議政崔興源(영의정최흥원)以命從世子(이명종세자)
신료들을
나누어 따라가게 하고, 영의정 최 흥원이 명을 받고 세자를 따랐는데,
右議政兪泓(우의정유홍)亦自請隨世子上不答(여자청수세자상부답)
우의정
유 홍이 또한 자청하여 세자를 따라가려고 하니,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駕旣出(가기출)泓伏路邊辭去(홍복로변사거)
상의 행차가
이미 출발하였는데, 유 홍은 길가에 엎드려 하직하고 떠나가려 하자,
內官屢啓右相兪泓請辭(내관루계우상유홍청사)上終不答(상종부답)
내관이
여러 번 우상 유 홍이 하직인사를 청한다고 아뢰었으나, 상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泓遂從東宮(홍수종동궁)時尹斗壽(시윤두수)在平壤未還(재평양미환)
유 홍은
마침내 동궁을 따라갔다. 이때 윤 두수는 평양에 있어서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行在無大臣(행재무대신)惟鄭澈以舊相(유정철이구상)
임금이
계신 곳에 대신이라고는 없었고, 다만 정 철만이 구 정승으로써
從駕至嘉山(종가지가산)已五鼓矣(이오고의)
상의 가마를
따라 가산에 도착하자, 시간은 이미 오경이 되었었다.
1)고 언백(高彦伯): ?-광해군 원년(1609).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교동향리(喬桐鄕吏)로서 무과에 급제, 변장, 군관을
역임,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양주목사가 되어 이천에서
왜적을 쳐서 이기고, 경기도 방어사를 역임, 이듬해 명 나라
군사의 향도로서 서울 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어 경상좌도 병사로 승진,
울상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전란이 끝난 후 선무공신 2등에
책정되고 제흥군에 봉해졌으나, 광해군 원년(1609), 광해군에
의해 임해군과 함께 살해되었다.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2)김 신원(金信元): 명종 8년(1553)-광해군 6년(1614).
문신. 자는 수백(守伯) 호는 소암(素庵),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선조 16년(1583) 알성문과에 급제,
26년에 의주목사로 나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30년(1597) 정유재란 때 경기감사가 되어 명군에게 시달림을 받던 도내행정을 바로잡았다.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3)이 호민(李好閔): 명종 8년(1553)-인조 12년(1643).
문신.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峰,南郭),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선조 17년(1584) 별시문과에
급제, 응교(應敎), 전한(典翰) 등을 역임하였다.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조좌랑으로 의주로 왕을 호종, 그 후 요양에 가서 명 나라에 구원을 요청, 명장 이 여송의 군대를 이끌어 들이는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그 당시
명 나라와의 외교문서와 지방관에게 유시하는 문서는 대부분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33년(1600) 대제학을 거쳐 좌찬성에 승진되고, 호성공신 2등에 책정,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희(文僖), 저술은 <오봉집(五峰集)>이 있다. [宣祖實錄], [海東名臣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