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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피앗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지구인
1669년은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빛의 화가’라 불리는 렘브란트(1606-1669년)가 속세의 영욕으로 얼룩진 질곡의 삶을 마감한 해이다. 한때 성공한 화가로서 부를 누리다가 아내와 자식을 비롯해 모든 것을 잃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파산한 채, 한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지키는 이도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한 것이다. 이런 고독과 궁핍한 생의 말년에 임한 화가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완성한위대한 종교화가 있으니, 바로 ‘돌아온 탕자’이다.
(글:권용준 안토니오 l 미술비평가 ) 그림의 주제는 루카 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다. 술과 여자 등 정욕을 좇다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돼지 먹이로 연명하다 결국 아버지에게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돌아온 아들을 환대하는 떠들썩한 잔치나, 탕아를 통해 방종한 삶의 파국을 경고하는 메시지 따위의 극적인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을 탕진한 아들을 감싸 안은 아버지의 따스한 온정만이 느껴질 뿐이다. 아버지를 떠날 때의 화려했던 옷은 낡았고, 멋지고 탐스러웠을 머리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아들이 아버지 앞에 죄를 뉘우치며 무릎 꿇은 채로 울고 있고, 그를 그윽하게 포옹하는 아버지의 모습만이 있다. 렘브란트가 이 성경 이야기를 표현하면서 삼은 주제는 돌아온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손에 끼워주고 새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춤과 풍류가 있는 잔치를 베푸는 장면이 아니다. 오히려 죄수같이 박박 깎은 머리에, 거지처럼 다 해진 옷, 다 떨어진 신발을 한 짝만 걸치고 무릎 꿇고 사죄하는 아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이를 용서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용서와 포옹, 화해가 있는 감동적인 순간이다. 너그러운 아버지의 표정은 자애롭고 거룩한 성자의 모습이며, 돌아온 탕자는 왜소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것이, 예수님이 인간에게 베푸는 속죄와 구원의 역사를 떠올리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먼저 그림을 보면 아버지와 돌아온 아들의 모습이 있고, 오른편으로는 이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큰아들이 있다. 그리고 그림 뒤편의 어둠 속에는 이 모습을 온화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다른 이들이 존재한다. 아버지의 시선을 보자. 아버지의 눈은 초점이 맺히질 않았다. 늘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올 길을 목을 빼고 바라보고, 날마다 눈물로 지새우다 짓물러 버린 눈이다. 이런 부정(父情)의 이미지에서 눈이 멀도록 우리를 기다리는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이 연상되지 않는가?
그 무한한 아버지의 사랑은 탕자의 어깨를
더듬더듬 어루만지는 두 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여운 아들을 크게 환대하지 못한 채 조용히 포옹하는
그 손은 물론 사랑과 용서의 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두 손의 모습이 서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왼손은 힘줄이 두드러진 강인한 남성의 손이며,
오른손은 가녀리고 매끈한 여인의 손이다.
이는 아버지의 강인함과 어머니의 온화함을 동시에 표현한 것으로,
아버지의 손과 손가락은 아들의 등과 어깨를 굳게 감싸고 있으나,
어머니의 손은 아들의 등에 부드럽게 얹혀 있을 뿐이다.
마치 위로와 안도의 온유한 손길처럼 말이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은 강인함과 부드러움이라는
조화의 이중주에서 비롯되는가보다.
그리고 이런 조화로운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렘브란트가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 그림 전체로 보아 바로 이 두 손에
렘브란트 특유의 빛이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세상의 진정한 빛은 용서와 화해, 심적 고통을 치유하는
사랑에 있음을 우리 마음에 각인시키는 것 같다.
이런 사랑의 치유를 받고 있는 탕자의 찢어진 옷과 닳아서 해진 신발,
상처투성이의 발은 방종이 가져온 죄를 의미하며,
그렇기에 그의 머리는 삭발한 죄수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탕자는 실상 그 참담한 죄의 심판만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를 깊이 뉘우치고 속죄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이 탕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눈도 뜨지 못한 채
평화로운 얼굴이 어미 배 속에서 보호받는 평온한 태아의 얼굴 아닌가?
이는 바로 하느님 사랑의 비호를 받는 우리의 모습이며,
그 얼굴이 묻힌 아버지의 품은 우리가 온 곳이기에
돌아가야 할 하느님의 품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런 따스한 용서의 장면 옆으로는
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큰아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아우의 귀향을 바라보면서 아무런 기쁨의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는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서로 다른 심정에도, 큰아들의 모습은 아버지와 너무도 닮았다.
두 사람 모두 수염을 길렀고 붉은 옷을 입고 있다.
그럼에도 작은아들에게 몸을 굽힌 아버지와 꼿꼿하게 선 큰아들의
서로 다른 모습에서, 용서와 화해의 감응은 그만큼 삶의 시련을
겪은 자에게서 우러나오는 너그러움, 신앙의 깊이에 들어선 이한테서만
우러나오는 어려운 마음임을 간접적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전혀 다른 이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마음만이 온화한
하느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길임을 우리 신앙인들에게 경고하는 듯하다.
이렇듯 이 그림에서 인자한 얼굴과 흰 수염, 온화하고 부드러운 손길의
아버지는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는 하느님의 모습이며, 죄수의 머리에
누더기를 걸친 상처투성이의 탕자는 죄 많은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고 옆의 큰아들과 어둠 속에서 이 광경을 보는
구경꾼들은 시기와 무정과 죄악을 뜻한다.
그래서인지 열정과 열망을 의미하는 붉은색 가운데서도
아버지가 걸친 붉은 옷은 간절한 신앙의 열정이며,
아들의 붉은색은 세속의 욕망을 향한 열망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나의 붉은색은 어느 편일까? 내 주변에서 오늘 이 순간도
벌어지고 있을지 모를 시기와 갈등을 보며 일어나는
내 마음의 색을 가늠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그리고 이 그림을 그린 렘브란트의 심정을 헤아려보자.
인생에서 실패했지만 예술적으로는 점점 더 열정적인
내면의 에너지를 발산시킨 렘브란트는 자신을 탕자로 그리면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속세의 모든 욕망에서 초탈하여 자신의 내적 욕구에
충실할 수 있었으며, 가난과 고독조차도 하느님이 계셨기에
오히려 예술의 혼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든 삶의 여정 끝에서,
그 힘듦까지도 예술의 붓에 창작의 열정으로 녹여
물감으로 탄생시킨 가장 위대한 종교 그림이 바로
돌아온 탕자’이다. 그림 속의 탕자는 렘브란트일 뿐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마음에 새긴 우리 자신이 아닐까?
첫댓글 지칠줄 모르는 사랑을 배푸시는 하느님 아버지,
부족하고 나약한 저를 자비로이 안아주시고 사랑으로 이끌어주심에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