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현장을 둘러본 두 사람은 임 부장 부부를 남겨 둔 채 다시 햇빛 내려 쬐는 시골길 위로 걸어나왔다. 한 때 부랑자들이 황무지를 일구어 논,밭으로 만든 땅이 바로 이 동네였다. 지금은 그 사람들도 한 몫 잡고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겠지 싶었다. 온천이 들어서고, 콘도가 들어서면서 땅값 좀 올랐겠거니 싶었다. 뭐 대부분은 땅값 오를 줄도 모르고 10 원 20 원에 팔아 넘긴 사람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디까지 알아냈냐?”
김순경은 윗주머니에서 솔담배를 하나 꺼내서 입에 물었다. 성냥을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지만 성냥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여기요.”
조 순경이 비사표 성냥을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자 김 순경은 금붕어처럼 뻐끔뻐끔거리며 불을 당겼다. 숨을 들이킬 때마다 볼이 쏙 쏙 들어가는 것이 그의 요즘 생활이 많이 피곤하고 동시에 빈곤하구나 싶었다.
“쪽문이 있는 걸 알았다는 걸로 봐서는 내부 구조를 잘 아는 사람이었고, 비디오 테이프가 바닥에 어지럽혀져 있었다는 건 몸싸움이 있었다는 거지요. 즉 면식범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 반은 맞췄네.” “근데 궁금한 게 있어요. 형님은 쪽문을 보기도 전에 이 사실을 알아냈잖아요. 그건 어떻게 알아낸거예요?”
그 물음에 답하기 전 김 순경은 담배연기 한모금을 가슴 깊이 빨아들였다. 현상을 토대로 진실을 알아내는 것, 그 것을 과학이라고 이른다. 그렇다면 수사관은 증거를 토대로 진실을 들여다본다. 이 것도 마찬가지의 작업이다. 하지만 학문으로서의 진실과는 달리 강력 사건의 진실들은 너무나도 추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김 순경이 현장에서 본 것도 그런 것이었다.
“자물쇠” “네?” “비싼 집일 수록 잠금장치가 여러개잖아. 그 집에도 네 개 정도 되더군. 문손잡이에 하나 그 위에 보조잠금장치 하나 그 위로 체인걸이 하나에, 마지막으로 제일 꼭대기에 걸림쇠가 있더라고.” “걸림쇠요?” “문과 문틀을 고정시켜주는 자물쇠 말이야.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어린아이가 손으로 열 수 있는 높이가 아니잖아. 만약 그게 열려 있었다면 아이는 집안에서 저항하지 않았을 거야. 비디오테이프를 집어던질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문을 열고 밖으로 도망쳐 나오는 게 더 안전했을테니까.” “그럼 아이는 안에 가둬졌다는 건가요?” “상황을 정리해보자고. 아이가 계속 울어서 근처 병원에 의사를 데리러 임 부장과 그 마누라가 집을 나갔어. 그 동안 아이가 어디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집 문을 잠궜던거지. 아이는 이제 완전히 갇혀 있어. 이 것은 완전한 밀실인 듯 하지만 한가지 가능성으로 인해 침입이 가능해지는 거야.” “쪽문이죠?” “그래, 누군가가 쪽문으로 들어온 거지. 그 때 이방인을 만난 꼬맹이는 어떻게 했겠어? 두려움에 차서 도망치려했겠지. 부모라면 가스통이 있는 장소를 아이가 돌아다니도록 가르치진 않았을 거야. 이 집에 이사온지 얼마 안되는 꼬마가 알고 있는 출입구는 단 한군데. 말 그대로 출입문이지. 그런데 그게 잠겼던 거야. 이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겠어?” “손에 잡히는 걸 집어 던졌다?” “그래서 비디오 테이프가 바닥에 어지럽혀져 있었던 거야. 멍청한 부모는 그 현장을 정리해버렸고, 운 좋게도 우린 그 걸 알아낸 거지.”
그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두눈을 감은 김 순경은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으로부터 쫓기는 약하디 약한 소녀의 모습을 떠 올렸다. 소름끼치기 그지 없었다. 그 아이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불안, 초조, 공포… 공포. 김순경으로서 떠 올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섬뜩한 감정을 떠올리고 있으나 그 것조차도 그 아이가 당한 것에 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현장에서 일이 어떻게 벌어진지는 이제 알게 되었다. 그 것이 확실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꽤 가능성이 큰 이야기였다. 하지만 수사는 학문과는 달리 그 결과물이 나와야 한다. 이 것이 족같은 응용과학의 한계였다.
“그걸 그렇다고치면, 앞으로 우린 뭘 어떻게 해야하죠?” “음… 일일이 물어볼래?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이 뭐냐?” “범인은 외부인이고, 집의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거죠.” “그걸로 특정 지을 수 있는 거 없어?” “외부인이야. 속초시민 전체에 해당될테고, 또 임부장의 적이 있다면 그들이 여기까지 왔을 수도 있기야 하지만…. 집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역시 친인척일까요? 하지만 그 두가지 유형에 공통분모는 없는데요.” “대학 나왔으면 뭐하냐? 헛똑똑인데. 집 만든 놈은 집 구조에 대해 잘 알겠지?” “아.” “그리고 집 만드는 놈이 애새끼랑 같이 만드냐? 애가 처음보는 인물이겠지?” “그렇군요. 그 때 집 공사할 때 인부를 대준 용역업체에 알아보면 대략 리스트가 나오겠네요. 하지만… 만약 애를 납치한 놈이라면 나 잡아가십쇼. 하고 기다리진 않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잠수 탄 새끼가 범인이지.” “네?”
조 순경은 한순간 머리가 어찔했다. 마치 빈깡통을 쇠파이프로 때릴 때 나는 소리가 들린 듯 했다. 잠수타고 없어지면 수사가 난항에 빠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김 순경은 오히려 잠수를 타면 수사가 진척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상식과 어긋나 있지만, 김 순경의 말은 오히려 더욱 희망적으로 들렸다.
“그럼 거팔사(지휘통제소)에 무전쳐서 알아보겠습니다.” “그렇게 하든가.”
입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김 순경은 경찰 수첩을 펴더니 그 사이에 끼워놓은 하트모양 스티커를 조 순경에게 보여주었다.
“그게 뭡니까?” “글씨 못 읽냐?” “개미 인력... 집공사, 수리 대행?” “아까 그 집 벽에 붙어있던 스티커야. 일단 여기부터 알아보자고.”
조순경은 설마 설마 하면서도, 자그마한 거 하나 놓치지 않는 김 순경에게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사람이 왜 경찰서 내에서 그렇게 무시받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한편, 조직은 능력만으로는 안되는 곳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거팔사 거팔사 여기는 미 스물다섯.” [[미스물다섯, 여기는 거팔사 용유?]] “자료요청하고 싶은데요.” [[유선으로 종수바람]]
하긴, 예민한 자료 검색을 무전으로 하려한 게 어리석었다. 하지만 근처에 공중전화는 커녕 수퍼마켓도 하나 보이지 않는 깡시골촌에서 전화 한통 쓰기가 얼마나 힘든지…
“조금만 더 가면 온천장이 있으니까 넌 거기서 전화 걸어서 알아봐. 난 택시타고 시내에 들어가볼테니까.” “네? 하지만 2 인 1 조잖아요.” “지금 애가 어디서 떨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까지 시간버리라고?” “아… 그럼 어디로 가시는지 좀 말해줘요.” “개미인력에 직접 찾아가보게. 아마 수복탑 쪽에 있을 거야.” “설마 혹시….” “그래, 청호동 쪽인 거 같다.”
조 순경은 김 순경과 청호동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것이 김순경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한편, 역시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일거라고 생각했다.
“승봉이 형. 이거 가져가요. 서로 연락은 돼야죠.”
조 순경은 뒤춤에 찬 두 대의 무전기 중 하나를 김 순경의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마치 김 순경이 조순경에게 했던 짓을 그대로 돌려준 것과 같았다.
“새끼…. 그래. 나도 알아보는 대로 연락 줄게.” “제가 더 빠를 겁니다.” “그래, 근데, 너... 2000 원 있냐?” “네?” “택시비가 없어서 그러는데 돈 좀 꿔줘.” “네?” “여기 할증구역이라 돈이 더 나온단 말이야.”
조순경은 생각했다. ‘이게 갈취구나.’하고…
85년 8월 15일 오후 4 시 강원도 속초, 동명동 소재 개미인력
인력 사무실이야 어디에 붙어있어도 상관없다지만, 그래도 한참 개발 공사 중인 노학동 쪽에 있지 않고 바닷가쪽에 있는 이유는 역시나 접근성과 땅값의 문제였다. 노학동은 아무도 가지 않는 완전 깡시골이고, 동명동은 배가 들어오는 한적한 곳이지만 그나마 시장과 가까우니 지나다니는 사람이 전혀 못 올 곳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속초 동명항을 따라 들어오다보면 갯배를 타고 청초호를 건너 청호동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목이기도 했다.
청호동 사람들이 속초 시민들 사이에서 차별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나름 억척스러운데가 있어 사실상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죄다 청호동 사람들이었다. 고기잡이 배 선주, 수협 조합장, 심지어 인력시장까지도 청호동 사람들이 운영하곤 했다. 개미 인력은 바로 그런 곳 중 하나였다. 그러다보니 개미 인력을 통해 일거리를 구해가는 사람들은 죄다 청호동 사람들이었다. 물론 손이 달릴 때에는 어중이떠중이 뜨내기들도 받아주고는 했지만, 규모가 작은 집 공사같은 경우에는 어림없었다.
그러한 폐쇄적인 특성 덕분에 용의자를 추려내기는 훨씬 수월할 것이다. 청호동 사람이라면 다들 이웃이고, 심지어 이름보다는 누구 아빠,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익숙할 정도이다. 어정쩡하게 잘 모르겠다. 라는 대답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서로 알고 있을 것이다.
“실례합니다~”
김 순경은 개미 인력이라고 간판이 걸려 있는 단층짜리 건물의 미닫이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한여름인데도 치우지 않은 연탄난로가 그를 반기고 있었다. 지저분한 벽지가 발라져 있고 그 가운데에 은행같은 데에서 나눠준 듯한 달력이 붙어있고 그 위로 빼곡하게 작업일정이 적혀 있었다. 대충 이것만 넘겨봐도 언제 무슨 작업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같았다.
“아무도 없어요?”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입으로는 크게 안에 사람을 불러보았으나 마땅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건가 싶어서 딱히 의심을 사지 않는 범위에서 안을 돌아다보려고 사무용 책상 위를 올려다 보았는데 그 때 뒷문이 열리며 빠글머리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아이고 김형사님, 어쩐 일이시래요?” “형사는 무슨요.” “아니 사복입고 돌아댕기는 경찰이면 형사지. 그래 무슨 일 있으시대요?”
역시 같은 청호동 사람인 모양이었다. 둘은 이미 안면이 있는 사람인듯 이야기는 쉽게 쉽게 진행되었다.
“혹시 노학동에 큰집 지어준 적 있습니까?” “으매매, 무슨 일 났더래요?” “아니요. 신경쓰실 정도는 아니고, 아이 없어진 거 찾아줘야해서요.” “무서워라. 이게 도대체 몇 번째요? 근데 노학동이라꼬요?” “네, 아마 집주인 이름이 임현철일겁니다.” “임 부장님 땍. 네네 우리 가게에서 사람 대줬더래요. 잠깐만 앉아봐요.”
빠글머리 아주머니는 손때가 잔뜩 묻은 두꺼운 스프링 노트를 펼쳐보이더니 대략 넉달 전 페이지로 넘겨서 날짜를 손가락으로 그어내리며 이름을 찾았다.
“아, 코피 내주까요?” “아니요. 됐습니다.”
지금 김 순경에게 커피보다 더 중요한 건 용의자 명단이었다. 그리고 그 것은 이내 곧 모습을 드러냈다.
“자 찾았어요.” [[미스물넷 여기 미스물다섯.]]
아주머니가 찾았다는 말과 거의 동시에 무전기에서 지직 잡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 순경의 목소리였다.
“여기 미스물넷. 용유.” “현팔팔지 종출 바랍니다.” “수복탑 앞 개미인력이다. 튀어와.”
무전음어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귀찮아진 김 순경은 어서 오라는 말을 하고서 다시 아주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주머니가 뭔가 찾아냈다고 했는데 무전 때문에 말이 끊어졌던 참이었다. 벽돌장같은 무전기를 일일이 허리춤에서 뽑고 다시 꽂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수사가 한층 진행되고 있는 판이라 기대감이 올라온 터였다.
“네 안그래도 여기까지 튀어왔습니다.”
아주머니에게 돌렸던 시선도 또 다른 방해로 또 흐트러지고 말았다. 드르륵 미닫이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조 순경이 어느새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서에서 조사해보니까 여기에서 사람을 썼다고 하더라고요. 전기공사는 신일전기에서 했고요.”
배시시 웃으며 태연스레 들어온 조 순경이었으나 그 때문에 시선을 빼앗긴 김 순경의 얼굴은 좋지 못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조 순경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고, 그다지 빼앗긴 시간도 길지 않았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주머니, 인부들 명단 나왔습니까?” “응, 최씨 아바이랑, 순돌네, 오지미 씨랑, 작은 갯배 선장이 나갔더랬어요.”
이름이 나온 건 하나 뿐이었다. 다들 호칭으로 성씨나 자식 이름 그리고 또 다른 부업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순경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한 마을 사람이기에 그 정도만으로도 어디에 사는 누구구나 하는 게 머릿속에 들어왔다.
“최씨 아바이는 낼모레 환갑인데 뭐하러 노가다 뛰러 나왔대요?” “몰랐어요? 그 집 아주마이가 거 뭐냐, 암에 걸렸다잔나.”
암? 불치병. 그리고 그 것은 돈이 많이 드는 병이었다. 그리고 돈이 생겨난 이후로 그 것은 가장 큰 강력 범행의 동기였다.
“딱허기도 하지. 수술비는 고사하고, 입원비 내려고 하루 일해서 하루 입금하고 그렇드래요.” “하루하루 일하면 맨날 나온다는 거에요? 그 노친네가?” “엊그제까지는 그렇게 계속 나왔는데, 오늘은 또 안나왔네 그래.”
게다가 아이가 납치된 날에 나오지 않았다? 점점 의심이 깊어질만한 일이었다.
“혹시 최씨 아바이 집이 어딘지는 알아요?” “거 있잖아. 갯뱃집 뒤에 오렌지 지붕.” “네 알아요.” “그 왼쪽 옆의 옆집이야. 주소가 적힌 게 있을텐데... 아바이 마을 XX 호 집이네.”
건물이 죄다 무허가 주택인지 제대로 된 주소가 아니라 입구에서 몇 번째 집,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행정적으로 불편하다고 해서 직접 찾아가기도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갯배타면 바로네요.” “응, 걸어서 5 분이면 돼.”
인력사무소 아주머니의 도움은 꽤 유용했다. 무엇보다도 공짜에 친절하기까지 한 정보여서 더욱 좋았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청호동 사람들은 이렇구나.’
청호동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이던 박반장의 행동들과는 달리 청호동 사람들간에는 호의적이고 협조적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안과 밖의 구분이 확실한 사람들이었다. 그 증거로 아주머니는 김 순경을 바라보던 눈을 조 순경에게 돌리는 순간 경계하듯 장부를 덮어버렸다.
“뭐해? 나가지 않고?” “네?” “아픈 사람이 있으면 병문안을 가야지.” “하지만 지금은 근무 중….” “싫음 너 혼자 여기 남아있던가?”
김순경은 아주머니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조 순경을 지나쳐 인력 사무소의 미닫이 문을 열고 나갔다. 그렇게 남겨진 조 순경은 아주머니에게 눈을 살짝 마주치다가 아주머니의 경계의 눈빛을 보고서 자신감을 잃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실례합니다.” “댁하고는 할 이야기 없으니까 나가시래요.” “아니 경찰입니다.” “경찰이든 나발이든 할 얘기 없다니까요!” “아.... 이런... 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