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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人生)은 메아리🧡
인생은 메아리 입니다. 사랑을 주면 사랑으로 돌아오고 미움을 주면 미움으로 돌아옵니다.
긍정의 시각으로 보면 긍정적인 삶이 되고 부정의 시각으로 보면 부정적인 삶이 됩니다.
인생은 준대로 되돌려 주는 원칙을 따릅니다. 우리의 생각과 언행은 언제고 반드시 그대로 되돌아옵니다.
벽에다 공을 던지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처럼 세상에 불만을 던지면 자신에게 불만이 돌아 오고 세상에 미소를 던지면 자신에게 미소가 돌아옵니다.
자신의 삶에 늘 불평 하면서 행복하기를 바라거나 자신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남들이 다가오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는 않는지요? 인생은 정직합니다. 우리의 삶은 주지 않은것을 받는 법이 없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즐거운 삶을 원한다면 즐거운 일들을 생각하십시오!
칭찬받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을 칭찬하십시오! 좋은 친구를 원한다면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선물을 받고 싶다면 먼저 선물을 하십시오!
행복은 사물 자체에 있지 않고 사물을 보는 방식에 있습니다.
없는 것 만을 생각하다가 있는 것마저 모두 잃습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 어디에 마음을 두느냐에 행복과 불행이 달려 있습니다.
항상 행복하진 않아도 행복한 일은 항상 있습니다. 행복한 일을 발견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오늘도 행복은 우리와 함께 있지만 그것을 발견하는 눈은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언제나 밝은 미소로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그대는 오늘도 좋은 일들이 있을 겁니다.
~좋은 글 中에서~
🙏 마음의수련
사람이 오래 살고 싶으면 마음이 먼저 건강해야 한다.
우리 몸에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義) 육근(六根) 이라는 여섯 도둑놈이 있는데 이 놈의 욕심이 지나쳐 사람의 생명을 빨리 거두어간다. 그러니 이 도둑놈 들을 잘 다스려야 하느니라.
1.예쁜 것만 보려는 눈이라는 도둑놈
2.자신에게 좋은 소리만 들으려는 귀라는 도둑놈
3.좋은 냄새만 맡으 려는 코라는 도둑놈
4.맛있는 것만 처먹 으려는 입이라는 도둑놈
5.쾌감만 얻으려는 육신 이라는 도둑놈
6.그리고,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려는 생각이라는 도둑놈.
이 여섯 도둑놈을 다스리는 놈이 바로 마음인데 이를 잘 다스려야만 오래 살 수 있다.
"이 여섯 도둑놈이 자꾸 번뇌를 일으켜 서 우리 몸을 빨리 망치게 하기 때문 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108 번뇌’ 라는 숫 자는 안이비설신의 (眼耳鼻舌身義) 육근(六根)과 색성 향미촉법의 육경,
좋음,나쁨,평등이라는 호악평등(好惡平等),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가 끊임 없이 작용하여 생긴 것을 말합니다.
즉, 육근에 육경을 더하면 12, 거기에 호악평등 3을 곱하 면 36, 여기에 과거 ,현재,미래 3을 곱 하면 108이 됩니다. 말하자면,108번뇌는 우리가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반복하여 작용한다는 뜻 입니다.
그러니, 육근이라는 번뇌의 도둑을 조종 하는 내 마음을 잘 다스려야만 건강한 삶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제행무상(諸行無常)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형태 있는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
"나도 꼭 죽는다." 라고 인정하고 세상을 살아라.죽음을 감지하는 속도는 나이별로 다르다고 한다.
청년에게 죽음을 설파한들 자기 일 아니라고 팔짱을 끼지만, 노인에게 죽음은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림과 같나니 종교, 부모, 남편, 아내, 누구도 그 길을 막을 수 없고, 대신 가지 못하며, 함께 가지 못한다.
하루 하루, 촌음(寸陰)을 아끼고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죽음의 두려 움을 극복하는 유일 한 길이다.
2.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헤어짐이 세상사 법칙이요, 진리이다. 사랑하는 사람, 일가 친척, 남편, 부인, 자식, 명예, 부귀 영화, 영원히 움켜 쥐고 싶지만 하나 둘 모두 내 곁을 떠나 간다.
인생살이는 쉼 없는 연속적인 흐름인 줄 알아야 한다.
매달리고, 집착하고, 놓고 싶지 않는 그 마음이 바로 괴로움 의 원인이며 만병의 시작이니, 마음을 새털같이 가볍게 하는 지혜가 필요 하다.
3.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운 사람, 싫은 것, 바라지 않는 일, 반드시 만나게 된다. 원수, 가해자, 아픔을 준 사람, 꼴도 보기 싫은 사람도 만나게 되며, 가난, 불행, 병고, 이별, 죽음 등 내가 피하고 싶은 것들이 나를 찾아 온다.
빙글빙글 주기적 사이클로 세상은 돈다. 나도 자연의 일부인 만큼 사이클 이 주기적으로 찾아 온다. 이를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 이라한다.
현명하고 지혜롭고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은 능히 헤쳐 나가지만 우둔하고 어리석고 매사에 소극적인 사람은 그 파도에 휩쓸리나니 늘 마음을 비우고 베풀며 살아라.
4. 구부득고(求不得苦) 구하고자, 얻고자, 성공하고자, 행복하고자, 하지만 세상살이가 그렇게 만만치 않다.
내가 마음 먹은 대로 다 이루어지면 고통 도 없고 좋으련만 모든 것은 유한적 인데 비해 사람 욕심은 무한대
이므로 아무리 퍼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와 같다.
그러므로 욕심덩이 가득한 마음을 조금 씩 덜어 비워가야 한다. 자꾸 덜어내고 가볍게 할 때, 만족감 , 행복감,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마치 형체를 따르는 그림자와 같이•••
- 좋은 글에서-
■무사수유대복(無量壽有大福)
유복량수(有福量壽)의 현판도 보인다 .유복량수(有福量壽 )의 현판도 보인다.
"많은 복과 한없는 수명"이라는 뜻 추사가 회갑때 쓴 작품으로, 불경의 극락왕생론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원래는 “유대복무량수(有大福無量壽)” 라 써서 방문 윗벽에 붙여 있었던 것인데, 오랜 세월의 풍화 작용으로 바탕지는 낡아 없어진 것을 1976년 고택정화 사업 때 떼어서 표구한 것이라고도 한다.
추사 글씨, 그림 가운 데 딱 한 점씩 꼽는 다면
“글씨에선 ‘침계’, 그림에선 묵란도 ‘적설만산(積雪滿山)’. ‘침계’(지본묵서, 42.8×122.7㎝, 간송미술관)는 추사가 제자인 침계 윤정현(1793~1874)에게 써준 추사체 편액이다.
제자의 부탁을 받았으나 ‘침’자의 예서 전형을 찾지 못해 무려 30년을 고심하고는 결국 예서·해서 합체로 썼다.
66~67세(1851~1852) 때 쓴 것으로 보이는데, 추사체를 만든 추사의 법고 창신 정신, 추사체 특징도 다 들어 있다.
한 글자를 30년 고심한 추사의 엄정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명작이다.
‘적설만산’(지본수묵, 22.8×17.0㎝, 간송미술관)은 1835년에 추사가 10여폭의 묵란도를 엮은 화첩 <난맹첩> ‘상권’에 실린 첫 작품이다.
“우리나라 중부지방 춘란을 그린 것인데 …, 난이 아니라 잔디 같다. 한겨울 눈보라 를 이겨내고 꽃을 피운 억센 난에 우리 민족의 강인한 기상, 산악지대인 이 땅의 특성, 조선 고유의 독특한 미감까지 녹아들어 있다.
추사의 성정을 잘 보여주는 명품으로, 난과 글씨와 인장의 조화미도 일품이다.”
신안구가(新安舊家) 의 편액으로 "성리학 의 전통을 이어온 집"이라는 뜻의 글도 볼수 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 되어 있는데 "신안의 옛집" 이란 뜻으로, 주자학의 시조인 주희가 중국 송나라 신안인 이므로 "주자 성리학자의 전통을 가진 집" 이라는 뜻 이다.
"가(家)" 자의 윗부분 점을 둥글게 처리한 것이 눈길을 사로 잡고, "신(新)" 자의 가로획을 촘촘히 붙여서 쓴 것과 세로 획에 변화룰 준 부분 이 특이하여 추사의 조형감각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유배 중이던 추사는 소치 허련 편에 ‘일로향실’이라는 편액을 써서 초의 선사에게 보냈다.
‘화로 하나 있는 다실’, 즉 ‘차를 끓이는 다로(茶爐) 의 향이 향기롭다’는 뜻이다.
초의가 제주도까지 차를 보내준데 대한 고마움의 정표로 차향이 은은하게 나는 초의가 머무는 일지암에 걸라고 써 준 편액이다. "죽로지실(竹爐之室)" 차를 끓이는 죽로(대나무화로)가 있는 방
봄바람처럼 큰 아량 은 만물을 용납하고, 가을물 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 지 않는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법고창신(法古創新) 을 보여주는 글씨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최고의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최고의 좋은 모임 이란 부부와 아들딸 과 손자 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 雖腰間斗大黃金印, 食前方丈侍妾數百, 能享有此味者幾人, 爲杏農書, 七十一果 이것은 촌 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 된다. 비록 허리춤에 말(斗)만큼 큰 황금 인(黃金印)을 차고, 먹는 것이 사방 한길 이나 차려지고 시첩 (侍妾)이 수백명 있다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행농(杏農 兪致旭) 을 위해 쓴다.71세의 과천 노인은 쓰다>
畵法有 長江萬里 (화법유 장강만리) - 그림의 법도에는 장강만리가 들어 있고
書埶如 孤松一支 (서세여 고송일지) - 글씨의 기세는 외로운 소나무 한가지와 같네
요사이 건필과 검묵 으로써 원나라 사람 들의 거칠고 간략한 것을 억지로 꾸며 내려고 하지만 모두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다.
왕우승(王右丞 維) , 대소 이장군(李思訓), 조영양(趙令穰 산수화가),
조승지(趙承旨 조맹부)는 모두 청록색을 쓴 그림 으로 뛰어났었다.
대개 품격의 높고 낮음은 그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뜻에 있는 것이니
그 뜻을 아는 사람은 비록 청록이나 니금 (泥金)을 쓴다해도 다 좋다.
서도(書道)도 역시 마찬가지다. 승련노인
차호명월성삼우(且呼明月成三友) - 또 명월을 부르니 벗이 셋이 되었구나,
호공매화주일산(好共梅花住一山)- 함께 매화를 사랑하며 같은 산에서 머무네
<동인인형(桐人仁兄)에게 완당이 촉예법(蜀隸法)으로 쓰다.>
대련 문구를 소개 한다.
구곡수통다조외(句曲水通茶竈外) 구곡수는 차를 끓이 는 부엌 밖을 흐르고
경정산견석란서(敬亭山見石欄西) 경정산은 돌난간 서쪽에 보인다.
원문거사첩심허(遠聞居士帖心許)멀리 벗의 소식을 들으 면서 서첩(書帖)에 마음으로 고개 끄덕 이고
노견이서유안명(老見異書猶眼明) 늙어서 새로운 책들을 보니 오히려 눈이 밝아지는구나
유애도서겸고기(唯愛圖書兼古器)오직 사랑하는 것은 그림 과 글씨 그리고 옛 그릇
차장문자입보리(且將文字入菩提)또 불경으로 보리 (깨달음)에 든다.
범물개유가취(凡物皆有可取)모든 사물 에 다 취할 바가 있고
어인하소불용(於人何所不容)사람에 대해 용서 못할 일이 어디 있으리
서이과삼천권(書已過三千卷)책은 이미 삼천권을 넘었고
화가수오백년(畵可壽五白年)그림은 오백년을 살아남을 수 있네
천벽신자팽옥명(淺碧新瓷烹玉茗) 열푸른 새 주전자에 옥명차를 끓이고
경황가첩사은구(硬黃佳帖寫銀鉤)고급 경황 종이의 아름 다운 공책에는 초서를 베껴쓰네
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 고요히 앉아있는 자리에 차가 반쯤 끓어 비로소 첫 향기를 내고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 오묘하게 움직이는 때에 물이 흐르며 꽃이 핀다.
추사체험관
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49(지번 용궁리 324-17)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서화가인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옛 집이다.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데,ㄱ자형으로 남향하고 있다. 각방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하였다.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추사의 옛 집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묘는 2단으로 정지한 후 안치되어 있다. 묘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일찍이 북학파인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에 입각한 학문을 연구했다.
24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 청나라에 가서 금석학과 서체 등을 배웠으며, 순조 16년(1816)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여 밝혀냈다.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헌종 2년(1836)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으며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헌종 6년(1840)에 제주도로 9년간 유배되었다가 헌종 말년에 귀양에서 풀렸다. 제주도에 지내면서 그 동안 연구해 온 추사체를 완성하였다.철종 2년(1851)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만에 풀려 돌아왔다. 그 뒤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에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A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B 추사기념관,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49
C 추사체험관,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1
D 화순옹주홍문,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7
조선국 승문원 검교(朝鮮國 承文院 檢校) 임기: 1722년 3월 1일 ~ 1723년 1월 8일
조선 순조 이공 당대 명화가이자 추사의 제자였던 이한철이 그린 초상화. 보물 547호.
김정희[ 金正喜 ]
자 원춘(元春), 호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노(果老) 농장인(農丈人)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출생 – 사망 1786년(정조 10) ~ 1856년(철종 7) 본관 경주(慶州)
출생일 1786년(정조 10) 6월 3일
출생지 조선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現 대한민국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사망일 1856년(철종 7) 10월 10일 (향년 70세)
사망지 조선 경기도 과천현 동면 주암동리 과지초당 (現 대한민국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과지초당)
경력 성리학자, 실학자, 고증학자, 서예가, 화가, 금석학자
정당 노론 벽파 잔존 후예 성향 북학파 세력
부모 김노영(양부), 남양 홍씨 부인(양모), 김노경(생부) 기계 유씨 부인(생모)
부친 - 김노경(金魯敬, 1766 ~ 1837) 모친 - 기계 유씨 유준주(兪駿注)의 딸
배우자 초배 한산 이씨, 계배 예안 이씨(이병현(李秉鉉)의 딸), 측실 한씨
자녀 김상무(양적자), 김상우(서자), 친인척 김이주(친조부), 김노성(친숙부)
(서자) - 김상우(金商佑 또는 金商禹) 측실 한씨 소생
남동생 - 김명희(金命喜, 1788 ~ 1857), 김상희(金相喜)
종교 유교(성리학) → 불교 → 유교(실학)
김정희는 조선후기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이다. 실학자이자 서화가이기도 하다. 1786년(정조 10)에 태어나 1856년(철종 7)에 사망했다. 24세 때 생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서 옹방강·완원 같은 청의 이름난 유학자들과 교유하며 진적을 함께 감상하고 경학 및 금석문과 서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귀국했다. 이후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고 독특한 추사체를 완성시켰다. 문인화론을 바탕으로 뛰어난 시서화 작품을 다수 남겼고 불교에 대한 이해도 높았다. 11년 동안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정희 [金正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 봉은사에 있는 추사 친필의 현판(추사 김정희가 1856년에 쓴 봉은사 판전의 현판)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 김정희
‘잔서’는 ‘남아있는 글씨’,‘완석’은 ‘고집스러운 돌’이라는 뜻이다. ‘글씨가 고집스럽게 남아있는 고비 파편’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금석학의 대가 추사는 오늘날에 대명작, ‘잔서완석루’라는 서재 이름을 남겨놓았다.
흔히 ‘잔서완석루’는 추사의 운필법이 집약된 명작 중의 명작이라고 불리운다. 임창순 선생은 글씨의 구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글씨에는 전서․예서․해서․행서의 필법이 다 갖추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쾌한 운필이 아 니라 오히려 중후한 멋을 풍긴다. 글씨 전체의 구도를 보면 위쪽은 가로획을 살려 가지런함을 나 타냈고,아랫쪽은 여러 가지 형태의 세로획을 들쭉날쭉하게 써서, 고르지 않지만 전체의 조화는 잘 이루어져 있다. 이런 구도는 일찍이 다른 서예가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이다.(유 홍준,완당평전 유홍준,336,7쪽에서 재인용) 낙관은 ‘삼십육구주인 三十六鷗主人’으로 되어 있다.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예산에서 피폐한 가산을 정리하고 오호 지금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용산에 작은 거처를 마련했다. 멀리 강 건너 노량이 보이고 한강을 유유이 떠도는 갈매기들이 보이는 그런 곳이었다. 추사는 한강가에서 낚시를 즐기고 갈매기들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한가한 노인이 아니었다. 추사는 이 한가한 ‘잔서완석루’ 글씨에 한 시대의 아픔과 회한을 깊숙히 숨겨놓고 있었다.
강희진은 『추사 김정희』에서 9의 배수 36의 숫자를 주역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역에서 이 9를 경계하기를 나서지도 말고, 벌리지도 말고,대들지도 말기를 권한다. 부중주정 不中不正하여 더 나갈 바가 없으니 나아가면 뉘우침만 남는다.9는 이런 항룡의 수로 늙은 용은 힘 을 쓸 수 없는 의미로 회한을 나타냄으로써 여기서는 자조적인 자신의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강제된 은퇴에 대한 역설이다.
추사 연구가들은 잔서완석루를 ‘희미한 글씨가 고집스럽게 남아있는 돌이 있는 누각 또는 고비의 파편을 모아둔 서재’ 쯤으로 해석하고 있다.
화가 이성현은 이런 기존 해석들을 넘어 추사 글씨에서 정치인으로서 추사 코드로 읽어 내고 있다. 그는 “추사는 정적의 눈을 피하기 위한 장치로 작품 하나하나, 작품 속 구석구석까지 번득이는 코드들로 채워놓았다”고 말하고 있다. 서화작품에 정적의 눈을 피해 세도정치를 비판하고 그의 개혁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잔서완석루를 ‘왕가의 족보를 꿰어 맞춰(殘書) 아둔한 종친(頑石)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시도가 대왕대비의 치맛바람(樓)으로 세 번 만에 성사되었다.’로 풀이하고 있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후자의 해석에 등장하는 왕은 강화도령으로 익히 알려진 25대 국왕 철종(1831~1863)이다. ‘잔서 완석루’의 뜻풀이로 내세운 전거는 ‘송사(宋史)’와 ‘시경(詩經)’이다. ‘송사’에서 ‘잔서’는 ‘상대를 설 득하기 위해 옛 자료를 모아 작성한 글’이라고 풀이한다. ‘완악할 頑’은 ‘둔하다’ ‘어리석다’는 의미 로 사람의 속성을 일컫는 글자이다. ‘시경’은 바위(岩)나 돌(石)을 천자의 종친이란 의미로 자주 사 용한다. 즉 ‘완석’이란 ‘아둔하고 고집 센 종친’을 지칭한다.
추사는 書자의 아래 부분에 ‘가로 曰’ 대신 옛글자를 사용하여 ‘사람 者’를 채워 넣었다. 특히 ‘者’의 대각선 획을 세 번에 걸쳐 완성했다. 이는 세 번 만에 왕위 계승권자로 결정됐다는 의미라 고 지은이는 풀이한다. ‘石’자는 어떨까. 비정상적으로 길게 뻗은 대각선 획이 2번에 걸쳐 이어 붙 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동 김씨들이 종친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대비의 치맛바람을 빌려 3 번 만에 성사시킨 것을 의미한다는 풀이다. ‘누각 樓’도 마찬가지다. ‘계집 女’부분을 관찰하면, 추 사가 3획으로 女자를 그린 뒤 가필을 하여 획을 이어 붙였으니 ‘치마를 휘젓고 있는 계집’이란 뜻 을 그려내기 위함이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친정식구들에게 권세를 몰아 주던 대비의 치맛바람을 ‘樓’자 속에 담아내기 위해 추사는 특별한 모양의 ‘계집 女’자가 필요했다 는 분석이다.
-서울=뉴스1,2016.5.3 이기창,추사는 왜 글씨에 암호를 심었을까
추사 글씨는 자유분방하다. 판전같은 천진함이 있고 불이선란의 화제나 초의 스님에게 쓴 편지 같은 짓궂음도 있다. 글씨 하나 하나에 메시지와 코드들을 명호와 함께 숨겨두고 있다. 글씨 같은 그림, 그림 같은 글씨와 상형문자도 있다. 세한도에서와 같이 지금의 댓글 같은 것들도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류 스타이도 하다.
추사의 글씨는 전체가 하나의 상징이다. ‘잔서완석루’를 글씨와 그림 그리고 명호를 함께 읽어야하는 이유이다.
사야 (史野)
사(史)는 내용은 보잘것없으면서 겉모양만 번지르르한 것을 뜻하고 야(野)는 아름답게 꾸미지 않은 소박한 것을 말한다. 사야는 논어에서 군자의 올바른 자세를, ‘문질빈빈 연후군자’로 표현했다.
군자는 문과 질, 겉과 속, 형식과 내용, 허울과 바탕, 세련됨과 거침, 잘 정리된 것과 자연 그대로로의 것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 군자라는 것이다.
요샛말로 겉과 속이 같아야한다는 말에 다름이 아닌, 말과 행동이 같아야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야라는 편액은 추사가 조선 후기 문신 권대긍에게 써 준 것이다. 사야는 권대긍의 아호이다.
이 ‘사야’는 ‘사’와 ‘야’가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내용과 형식이 어우러진 조야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서체이다.
행서와 예서를 섞어 쓴 추사만의 독특한 글씨체이다.
사야는 획의 크기와 굵기의 대소, 야의 투박함과 사의 기교가 함께 균형을 이룬 웅혼한 추사체이다.
내용((質)도 중요하지만 기교(文)도 필요한 것이다. 내용(질)이 기교(문)를 앞서면 야(野)해지고 문이 질을 앞서면 사(史)해진다.
야와 사가 균형과 조화를 이룬 상태, 표현해야할 콘텐츠에 잘 다듬어진 미문, 내외면의 균형과 절제
이것이 진정한 글쓰기이자 글씨이다. 세상사가 다 그렇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추사의 사야, 사물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월간서예)
역사에 대한 중시였고, 거기서 강조된 것이 경경위사(經經緯史) 정신이다. 경전의 진리를 영원히 불변하는 것으로 전제하여 날줄로 인식하고, 시대에 따라 그 양상이 변화하는 역사를 씨줄로 인식함으로써 경전과 역사를 날줄과 씨줄의 관계로 엮은 것이 경경위사의 정신이다.
계산무진 (谿山無盡) 물이 있는 산은 다함이 없다. 산에 물이 없으면 세월에 주전 앉지만 계곡이 깊은 산은 늘 그 생명과 기세를 유지한다.오로지 자신의 힘이나 자신의 가진 것으로만 사는 건, 생명의 진수가 아니다.
생명은 몸을 열어 무엇인가를 흘려 보내는 것, 마음을 열어 새로운 것들을 깊이 받아 들이는 것이다.
노자가 곡신불사(谷神不死)라고 한 뜻도 그런 의미이다.
명선(茗禪)이란 ‘차를 마시며 선정에 들다.’ 혹은 ‘차를 만드는 선승(禪僧)’이라는 뜻이다. 추사는 ‘명선’이라 쓴 큰 글씨 좌우에 이 글씨를 쓰게 된 사연을 직접 썼다. “초의(草衣)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왔는데, 몽정(蒙頂)과 노아(露芽)에 덜하지 않다. 이를 써서 보답하는데,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필의로 쓴다. 병거사(病居士)가 예서로 쓰다.” 라는 내용이다.
초의는 추사와는 30세에 만나 42년간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나누었던 동갑내기 승려 친구이다. 두 사람은 신분이 달랐지만 학문과 예술, 그리고 다도(茶道)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초의는 추사의 글씨를 지극히 좋아했고, 추사는 초의의 차를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추사는 무시로 초의에게 차를 보내줄 것을 당부하고 재촉했다.
숭정금실 (崇禎琴室) 숭정 (崇禎)의 거문고를 타는 방
숭정(1628 ~ 1644)은 明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로써 만주족인 淸의 중화적통을 인정
치 않았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淸의 연호를 쓰지 않고 이 숭정연호 (崇禎年號)를 고집 하였다.
조선의 전통적인 성리학자가 기거하는 방이란 뜻이다.
침계 (梣溪)는 윤정현 (尹定鉉)의 호이다. 윤정현은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우(季愚), 호는 침계(梣溪). 이조판서를 지낸 윤행임(尹行恁)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성균관에서 행한 특별시험 황감응제(黃柑應製)에 뽑혀, 1843년 식년문과 전시에 직부, 급제하였다. 51세의 나이로 늦게 출사하였으나 이듬해 규장각대교에 뽑혀 들어간 뒤 학문·문장의 조예와 가문적 배경으로 인하여 급속히 승진하였다. 2년 뒤인 1846년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정월 재신(宰臣)의 반열에 올라 홍문관제학을 역임하고, 1848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년 만인 1849년 2월 병조판서가 되었다.
과거급제 후 6년만에 판서에 오른 것이다. 이후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두루 거치고, 1856년(철종 7) 9월 판의금부사를 겸직하였으며, 11월에는 규장각제학이 되었다. 판서가 된 뒤 줄곧 비변사당상관을 겸임하였는데, 특히 호남구관당상을 오래 지냈다.
1858년 이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판돈녕부사 등의 명예직에 임명되었다가 82세의 나이로 죽었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여 그 덕망이 널리 알려졌고, 경사(經史)에 박식하고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비문에 능하였다. 문집으로 『침계유고』가 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죽로지실찬 (竹爐之室讚)
붕당과 정치적 쟁투 속에서 서로 찢어지고 갈등하는 세태를 의식한 그 시대 사람들의 무의식과 관련있다고 생각한다. 지초와 난초를 그린 것은 우정의 향기를 그리워한 추사의 마음이다. 쉬 휘 발하는 향기, 돌연 돌아서는 관계를 예감하며 그는 부적처럼 죽죽 지란 병분을 그리고 있었 던가(이상국, 『추사에 미치다』,122쪽)
도덕신선 (道德神仙)
추사는 66세 1851년 철종 2년, 7월 22일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달포 만에 9월 16일에는 침계 윤정현이 함경감사로 부임해왔다.
침계는 선생의 제자였다. 이 때 그는 곤궁한 추사에게 물품을 보내주곤 했다. 선생은 이를 매우 고마워했으나 진정 바라는 것은 침계와의 학문적 교류였다.
선생은 황초령비의 복원에 있었다. 지난날 함경도 관찰사였던 권돈인에게 황초령에 세웠던 진흥왕순수비를 찾아보게 했다. 그 때 찾아낸 비의 하단 부분의 탁본은 선생의 금석학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되었을 때는 권돈인 때 찾았던 비석 잔편들이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았다. 새로 부임해온 감사 윤정현에게 원위치에 비편을 세워 줄 것을 부탁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침계는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고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과거에 김씨 집안과 침계 집안과는 서로 다른 당색을 가지고 있었으나 제자였고 금석가였던 연유로 사실 추사와는 가깝게 지낸 사이었다. 선생이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 과천에 물러나 있을 때도 곤궁한 완당을 위해 침계는 간간히 선생에게 물품을 보내주곤했었다.
침계가 판서에 오르자 선생은 이를 축하해주기 위해 ‘도덕신선’이라는 횡액 글씨를 선물했다. “침계 상서(판서)를 받들어 칭송함‘이라는 제까지 써주었다. 도학으로써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최고의 찬사였다.
속 뜻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백수’라는 은유 ‘동해낭환’의 명호였다. 낭환은 ‘낭환복지(瑯嬛福地)’의 준말로 선도에서 천제(하느님)의 책들이 가득 쌓여있는 도서관을 말한다. 하느님의 서재인 셈이다. 복지는 복받은 땅이니 책을 무한대로 볼 수 있는 천국이라는 얘기이다.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할 일 없는 백수를 지칭한 것이다.
판서께서는 지금 조정 요처에서 큰 뜻을 펼치고 계시지만 저는 불행히도 한참 밀려나 이렇게 무직자로 떠도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동해의 백수’라고, 추사가 지칭한 것은 그가 동해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을 때(혹은 막 풀려났을 때)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빈섬, 잊지못할 추사의 글씨 하나,
침계가 ‘도덕신선’이라면 나는 ‘동해낭환’이라는 것이다. 그 신선의 서재를 지키는 할 일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침계에게서 받고자하는 것은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학문적 교류에 대한 청이었다. 일거리를 달라는 뜻이었다. 그 일거리가 금석문에 대한 학문 연구과 소통이었다. 정식으로 정치적 은퇴를 알림으로써 예민한 정국에 불러올지도 모를 엉뚱한 논란을 미리 막고자 하는 선생의 선택이었다.(강희진,추사 김정희,295쪽)
선생은 침계와 함께 여기저기 흩어진 순수비를 찾아내고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 때 쓴 것이 명필 중의 명필 ‘진흥북수고경’이었다.
윤 감사는 원위치인 황초령 고갯마루에는 세우지 못하고, 그 아래 중령진으로 옮겨 비각을 세웠다. 1852년 8월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진흥왕 순수비를 비롯한 함경도 관찰사 윤정현이 깨어진 순수비를 수습한 경위를 기록한 소비와 광부 9년(1900)에 비각 중건을 새긴 세비가 나란히 서 있으며 김정희가 쓴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이라는 현판이 비각에 걸려있다. '진흥북수고경'은 ‘신라의 진흥왕이 북쪽으로 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한 옛 영토’라는 뜻이다. 이 때 또 하나의 명작 해서와 예서의 합체인 ‘침계’ 가 탄생했다.
침계의 제발은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梣溪' 以此二字轉承疋囑, 欲以隸寫, 而漢碑無第一字, 不敢妄作, 在心不忘者, 今已三十年矣, 近頗 多讀北朝金石, 皆以楷隸合體書之, 隋唐來陳思王, 孟法師諸碑, 又其尤者, 仍仿其意, 寫就, 今可以報 命, 而快酬夙志也. 阮堂幷書.
침계(梣溪) 이 두 글자를 부탁받고 예서로 쓰고자 했으나, 한비에 첫째 글자가 없어서 감히 함 부로 쓰지 못한 채 마음 속에 두고 잊지 못한 것이 어느새 30년이 지났다. 요즈음 자못 북조 금석 문을 꽤 많이 읽었는데, 모두 해서와 예서의 합체로 되어 있다. 수당 이래의 진사왕이나 맹법사비 와 같은 비석들은 더욱 뛰어났다. 그래서 그 필의를 모방하여 썼으니, 이제야 부탁을 들어 쾌히 오래 묵혔던 뜻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 완당 김정희 짓고 쓰다.
맞는 글자를 못 찾아서 그랬다느니, 다른 사람을 시켜 부탁해서 그랬다느니 등의 변병을 늘어놓았다. 그들 사이의 돈독한 친분과 신뢰가 부탁 받은 30년 후 ‘침계’와 같은 또 하나의 불후의 명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도덕시선’,‘진흥북수고경’,‘침계’ 등과 같은 대 명작은 진정한 추사의 북청 유배예술이었다
은지법신(銀地法臣) 은지는 절집을 뜻하며 법신은 부처를 뜻한다. 은지법신(銀地法臣)은 전서. 예서. 행서가 어울린 작품이며, 서체를 넘나들며 자유자재로운 조형미를 보여주고있다.
글씨가 산들바람에 슬쩍 기운듯한 그 뉘움새에는 법열에 들어가는 정신적 해탈감이 느껴진다.
無酒學佛 有酒學仙 (무주학불 유주학선) 술 없으면 불법을 공부하고 술이 있으면 선도를 공부한다
詩中有畵 畵中有詩 (시중유화 화중유시) 시 안에 그림있고 그림안에 시가 있네
강상(江上) 시절에 권돈인의 옥적 산방을 위하여 조화접(藻華艓) 이라는 글씨를 써 주었다.
이 작품은 강상에 사는 완당이 옥적 산방 산 속에 살고있는 벗 권돈인에게 보낸 것으로, 그 제작 경위를 이렇게 적었다. "산에 살고 있지만 또한 강호의 뜻을 갖추고 있으니 표구해서 옥적 산방의 벽에 거십시오."
그래서 산에는 없고 강호에만 있는 것, 물풀(藻), 꽃(華), 배(艓) 세 글자를 쓴 것이다.
거기에다 “조화”란 말에는 문장이라는 뜻도 있으니 상징성도 좋다. 이 [조화접] 글씨의 구성은 아주 회화적이며 재미있다. 조자는 마름풀이 떠다니는 모양이고, 화자는 꽃이 피어나는 모양이며, 접자는 또 떠 있는 배 모양이다.
그래서 회화적인 만큼 더욱 법도(서예의 법도)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강상 시절 완당의 글씨는 디자인적 구성미가 강화가 두드러진다.
= 강상(江上) 시절이란 책을 전부 읽으면 이해가 가지만, 여기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추사께서 제주도 유배를 다녀와 기거했던 곳으로, 추정으로는 지금의 용산 쪽에 위치한 한강변을 말한다
일로향실 (一爐香室)은 초의(草衣) 선실(禪室)의 이름인데, 완당이 초의 선사의 일지암에 써 준 일로향실 현판은 예산 화암사에 써준 무량수각,시경루와 마찬가지로 에서체 중에서도 전한시대의 고졸하면서도 힘있는 글씨체를 기본으로 하면서 글자의 구성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디자인 해 추사체의 참 멋을 느끼게 한다
일로향실 (一爐香室) : 화로 하나있는 다실이란 뜻이다.
이성현의 저서 『추사 코드』의 ‘신안구가’ 에서 그는 ‘신안구가’를 당시 정치 정세의 비판의 도구로 풀어냈다.
‘신(新)’자는 ‘설 립(立)’,‘나무 목(木)’,‘도끼 근(斤)’의 합자이다. 그런데 ‘나무 목(木)’ 대신 ‘아닐 미(未)’를 썼다. ‘신(新)’자의 ‘아닐 미(未)’는 ‘아니다’의 뜻이 아니라 ‘아직’의 뜻을 갖고 있는, ‘아직은 새로움을 추구할 때가 아니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고 당부하는 말로 풀었다.
‘옛구(舊)’는 ‘풀초(艹)’,‘새 추(隹)’,‘절구 구(臼)’의 합자인데 ‘풀초(艹)’ 대신 ‘또 역(亦)’자를, ‘새 추(隹)’ 대신 ‘엉금엉금 기어가는 거북이의 모습을’,‘절구 구(臼)’ 대신 ‘밑빠진 절구의 모습’을 그렸다. ‘옛구(舊)’자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 잡지 못하는(거북) 쓸모없는 학문(밑빠진 절구)이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옛구(舊)’자의 ‘풀초(艹)’부분이 ‘또 역(亦)’으로 바뀌게 된 것은 ‘亦’은 원래 ‘어린아이가 부모의 행동을 따라하며 배우는’ 모방의 의미를 갖고 있는 글자로 추사가 ‘艹’부분을 ‘亦’으로 바꾼 것은 무언인가를 모방했더니 주자학의 폐단이 결국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는 얘기이다.
‘편안할 안(安)’은 ‘움집 면(宀)’과 ‘계집 녀(女)’합자이다. ‘여자가 집에 있어 집안일을 보니 편안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추사의 ‘安’자의 모습은 집안을 돌봐야할 여자가 집의 지붕을 세차게 걷어차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대가 세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조선말기 세도정치의 위세 등등한 대비의 행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편액은 주자학이 백성들을 풍족하게 먹여살리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학문이 아닌 공리공론을 일삼으며 정치적 명분만을 내세우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이성현의 견해이다.(이성현의 추사코드)
그는 이렇게 조선말기 세도 정치의 폐단과 주자학을 하나로 보고 ‘신안구가’의 코드를 시대 상황과 연계해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유천희해 (遊天戱海) 하늘에서 놀고 바다에서 노니네
완당의 과천 시절 글씨 중 가장 유명한 것의 하나이자 완당의 대표작으로 서슴없이 꼽히는 「산숭해심 山崇海深 유천희해 遊天戱海」는 과연 불계공졸의 명작이다.
산숭해심 (山崇海深) 산은 높고 바다는 깊나니,
산숭해심’과 ‘유천희해’는 원래는 한 작품이었다. 크기가 똑 같고 종이의 질도 같다. 글씨 모양은 물론 내용도 짝으로 되어있어 같다. ‘산숭해심'은 관기가 없고 ‘유천희해’는 ‘老阮漫筆’의 관기가 있다.
유홍준은 ‘산숭심해,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 라는 이 글귀의 근거는 옹방강이 ’실사구시‘ 정신을 풀이한 글 속의 한 구절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사구시는 공리공론을 떠나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객관적 학문 태도를 말한다.
황룡가화 (黃龍嘉禾) :
황룡은 복희 (伏羲氏)때에 황하에서 나온 용을 가르킨다. 이 용은 55점의 그림을 가지고 나왔는데 이것을 하도 (河圖)라 부르며 주역 팔괘의 이치를 담은 기본서가 된다. 황룡은 복희씨의 하도를 가르키며 고대의 제왕들은 이를 통치의 근간으로 삼았다
가화(嘉禾)는 양쪽 언덕에서 각각 돋아난 다른 모양의 이삭이 그 중간쯤에서 하나의 벼 속에 함쳐진 기이한
통일벼를 의미한다. 성왕의 동생 당숙은 스스로가 다스리던 땅에서 난 가화를 성왕에게 바쳤고,성왕은 이것을 주공에게 보냈다. 덕망이 높은 주공이야 말로 이 벼를 가질 만한 리더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황룡은 복희씨의 큰 정치를 뜻하고 가화는 그런 정치를 물려받은 주공의 선정을 가르키니, 황룡가화는 좋은 정치
가 훌륭한 리더에 의해 전승되는 멋진 전통에 대한 예찬의 상투어가 됐다.
추사는 이 현판뒤에 古之循吏致此瑞書爲公始太守 (고지순리치차서서위 공시태수)
무더위에 그대를 떠나보내니 大熱送君行, 내 심경 정말 심란하다오 我思政勞乎
황량한 풍경을 그려주노니 寫贈荒寒景, 「북풍도」만은 할까요? 何如北風圖
시에 나오는 「북풍도」의 고사가 있다. 후한 환제 때의 화가 유포가 「운한도雲漢圖」를 그리자 그 그림을 본 사람들은 모두 덥다고 느끼고, 「북풍도北風圖」를 그리자 사람들이 바로 추워 떨었다는 고사가 있다. 『박물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형용을 잘 한 작품을 이르는 말이다. 추사가 한여름을 스산한 겨울 풍경으로 그린 뜻은 부채를 부칠 때마다 더위를 식히라는 떠나는 이의 배려에서 그리한 것이리라.
지란병분은 영지와 난초가 함께 활짝 피었다는 뜻이다. 이 부채에는 난초꽃, 영지 버섯 그림과 추사 김정희,이재 권돈인,석파 이하응, 애사 홍우길의 화제들이 들어있다. 추사는 권돈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걸었다.
지란병분(芝蘭竝芬) 희이여묵(戱以餘墨) 석감(石敢) 지초와 난초가 함께 향기를 뿜어내다. 남은 먹으로 장난 삼아 그리다. 석감 권돈인은 대답했다.
백세재전 (百歲在前) 도불가절 (道不可絶), 만훼구최 (萬卉俱嶊) 향불가멸 (香不可滅) 우염 (又髥) 백년이 지난다해도 도는 끊어지지 않고, 만가지 풀이 꺾인다 해도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염 그리고 훗날 흥선 대원군은 이렇게 썼다. 인패지란 (紉珮芝蘭) 파생 (坡生) : 지초와 난초를 꿰어차다 애사 홍우길은 또 다음과 같이 썼다.
丁丑重陽恭琓 藹士生 정축년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공손한 마음으로 감상하다. 애사생이 부채에는 그림 두 점과 네 명의 인물과 그들이 쓴 화제들이 수십년에 걸쳐 등장한다. 어떤 이야기가 여기에 숨어 있을까.
추사 김정희와 우염 권돈인의 대화는 상식에 맞을까. 하나는 장난삼아 하나는 예의를 차려 썼다. 뭔가 문맥을 잘 못 읽고 있거나, 그 속에 말 못할 어떤 코드가 숨어있지 않나 생각되다.
이상국은 지란병분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붕당과 정치적 쟁투 속에서 서로 찢어지고 갈등하는 세태를 의식한 그 시대 사람들의 무의식과 관련있다고 생각한다. 지초와 난초를 그린 것은 우정의 향기를 그리워한 추사의 마음이다. 쉬 휘 발하는 향기, 돌연 돌아서는 관계를 예감하며 그는 부적처럼 죽죽 지란 병분을 그리고 있었 던가(이상국, 『추사에 미치다』,122쪽)
寫蘭亦當自不欺心始 (사난역당자불속일기심시)
一(蔽)葉一點瓣 (일덮을폐엽일점외씨판)
內省不疾可以示人 (내성불병질가이시인)
千目所視 千手所指 其嚴乎 (천목소시 천수소지 기엄호)
雖此小藝 必自誠意正心中來 (수차소예 필자성의정심중래)
始得爲下手宗旨 (시득위하수종뜻지)
書示佑兒 竝題 (서시우아 병제)
『난초를 칠 때에는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잎 하나 꽃술 하나라도 안으로 마음을 살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후에 남에게 보여야 한다.
모든 사람이 쳐다보고 모든 사람이 지적하니 두렵지 아니한가.
이 작은 그림도 반드시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비로소 손을 댈 수 있는 기준을 얻게 될 것이다. 아들 상우에게 써서 보이고 화제로 하다.』
제주도 유배를 앞둔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화제에서 보듯이 난을 칠때에는 불기심(不欺心), 즉 마음을 속여서는 안된다는 선생의 철학과 당시 사회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처한 선생의 착잡하고 심란한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俾我獨兮 英英白雲, ‘나만을 외롭게 하는구나 뭉게뭉게 이는 흰 구름‘은 시경의 소아 제 7 어조지십 ’백화‘에 나오는 구절이다. ’영영백운‘은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상징적인 시구이다. 두보가 ‘봄날에 이백을 생각하다 春日憶李白’라는 시가 있다.
봄 나무들 싱그러운 위북의 나, 저무는 날 구름에 마음 설렐 강동의 그대.
언제 둘이서 술잔을 나누며, 다시금 자상하게 시와 글에 대해 논하여 볼꼬.
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 何時一樽酒 重與細論文.
춘농로중 (春農露重) : 봄빛 짙어 이슬많고
春濃露重 (춘농로중)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 지는구나
地暖艸生 (지난초생) 땅이 풀리자 풀이 돋는다
山深日長 (산심일장) 산은 깊고 해는 긴데
人靜香透 (인정향투) 사람 자취 고요하니 향기만 사무치는구나
뭉게뭉게 흰 구름이여! 英英白雲, 가을나무에 둘렀네. 繞彼秋樹,
조촐한 집으로 그댈 찾아오니, 從子衡門, 그 누구 때문이던가. 伊誰之故.
산과 내가 아득히 멀어, 山川悠邈, 옛날에는 날 돌아보지 못했지. 昔不我顧,
허나 지금 어떠한가, 今者何如, 아침저녁 만나 세나. 庶幾朝暮.
적설만산 (積雪滿山) : 쌓인 눈 산을 덮다
積雪滿山 (적설만산) 쌓인 눈 산 덮고
江氷蘭干 (강빙난간) 강 얼음 난간 이루나
指下春風 (지하춘풍) 손가락 끝에 봄바람 부니
乃見天心 (내견천심) 이에서 하늘 뜻을 알다
居士題 (거사제) 숨어사는 선비 적다
仙風道骨水仙花 신선의 풍채나 도사의 골격 같은 수선화가
三十年過到我家 30년을 지나서 나의 집에 이르렀다
茯老曾携使車至 복암 이기양이 옛날 사신길에 가지고 왔었는데
秋史今移浿水衙 추사가 이제 대동강가 아문으로 옮기었다오
窮村絶峽少所見 외딴 마을 동떨어진 골짝에서는 보기 드문
得未曾有爭喧譁 일찍이 없었던 것 얻었기에 다투어 떠들썩한다
穉孫初擬薤勁拔 어린 손자는 처음으로 억센 부추잎에 비유하더니
小婢翻驚蒜早芽 어린 여종은 도리어 일찍 싹튼 마늘싹이라며 놀란다
縞衣靑ㅇ相對立 흰 꽃과 푸른 잎새 서로 마주 서 있으니
玉骨香肌猶自浥 옥 같은 골격 향그런 살결에서 향내가 절로 풍기는데
淸水一盌碁數枚 맑은 물 한 사발과 바둑알 두어 개라
微塵不雜何所吸 티끌조차 섞이지 않았으니 무엇을 마시는지
새한도 (塞寒圖)
제주도로 유배를 간 김정희는 유배가기 전이나 유배감 뒤나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을 대하고 있는 통역관
이상적의 행동을 보면서 김정희는 문득 논어 (論語)의 한 구절을 떠 올렸다.
자한 (子罕그물한) 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시들조)라는 구절이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공자가 겨울이 되어 수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김정희 자신도 어려운 지경을
만나고 나서야 진정한 친구의 의미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
이상적의 의리를 칭찬하며 다른 종이에 칸을 치고 세한도라는 그림의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蕅船是賞)
이라고 썼다. 우선은 이상적의 호였다.이상적은 감상하게나 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림을 마친 김정희는 마지작으로 인장을 하나 찍었는데 장모상망 (長母相忘)이라는 인장이다.
오래도록 서로 잊지말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 육근의 대상이 되는 여섯 가지 경계. 육식(六識)으로 인식하는 여섯 가지 경계. 육경(六境)ㆍ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금강경》에서는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하며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응생무소주심(應生無所住心)이니라”하여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러서도 마음을 내지 말고 응당 머문 바 없는 그 마음을 낼지니라”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