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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2 건강을 위한 운동일기
오전내내 비가 오는 가운데 우산을 쓰고
10,828걸음 걷기 한 나 자신을 칭찬해!
추배도(推背圖) 제48상 (第四八象) 辛亥 乾上離下 同人(천화동인)
참왈(讖曰):
卯午之間 厥象維離 (묘오지간 궐상유리)
묘(卯)와 오(午)사이(卯午之間)에, 그(厥) 상(象)이 벗어나지 않는데 , 즉 진사(辰巳)년에
八牛牽動 雍雍熙熙 (팔우견동 옹옹희희)
여덟마리의 소(八牛)가 이끌어 움직이니(牽動), (소울움 소리에)요란하게 모여드는데, 빛이 나는구나(熙熙)
송왈(頌曰):
水火既濟 人民吉 (수화기제 인민길)
수화(水火: 남북)가 서로 상생하고 화합을 하니(既濟), 사람들(人民)이 살기좋다(吉).
手持金戈 不殺賊 (수지금과 불살적)
군사력을 가지고 있지만(手持金戈), 전쟁을 하지 않는다(不殺賊)
五十年中 一將臣 (오십년중 일장신)
나이 오십되어서(五十年中), 하나(一 : 태을)인 장수(將臣)가 출세하는데.
青青草自 田間出 (청청초자 전간출 )
푸르고 푸른 풀(青青草 : 정도령)이, 전(田) 사이(間)에서 ,즉 십승(十勝) 정도령(鄭道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出).
【 청(青)이란 십이월(十二月)의 파자 이기도 하다. 】
다음은 대순전경(大巡典經) 제7장 교리(敎理)와 규범(規範) 8~10절에,
『하루는 弟子(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崔水雲(최수운)의 侍天主(시천주)는 布敎 五十年工夫(포교 오십년공부)가 들어 있고,
金京訢(김경흔)은 五十年工夫(오십년공부)로 太乙呪(태을주)를 얻었나니
같은 五十年工夫(오십년공부)에 어느 呪文(주문)을 取(취)함이 옳으냐’
光贊(광찬)이 對(대)하여 가로대
‘先生(선생)님의 處分(처분)대로 하사이다’
가라사대
‘侍天主(시천주)는 이미 行世(행세)되었으니
太乙呪(태을주)도 아울러 쓰라’ 하시고 읽어주시자 이러하니라
『 吽哆吽哆 太乙天上元君 吽哩哆야到來 吽哩喊哩 娑婆訶 』
『全州(전주)에서 金碩(김석)을 入道(입도) 시킬 때
光贊(광찬)과 亨烈(형렬)을 左右(좌우)에 세우시고 淸水(청수)를 그 앞에 놓고
두 사람으로 하여금 太乙呪(태을주)를 중이 念佛(염불)하듯이 스물한 번을 읽게 하신 뒤에
金碩(김석)으로 하여금 읽게 하시니라.』
『하루는 柳贊明(유찬명)과 金自賢(김자현)에게 일러 가라사대
‘各自(각자) 十萬名(십만명)에게 布敎(포교)하라’ 하시니
贊明(찬명)은 對答(대답)하고
自賢(자현)은 대답치 아니하거늘
催促(최촉)하사 對答(대답)을 받으신 뒤에 일러 가라사대
‘平天下(평천하)는 내가 하리니 治天下(치천하)는 너희들이 하라.
治天下 五十年工夫(치천하 오십년공부)니라’』
대순전경(大巡典經) 제4장 천지운로(天地運路) 개조공사(改造공사) 173절에,
『上帝(상제) 天地(천지)공사를 마치신 뒤에
<布敎 五十年工夫 終畢(포교 오십년공부 종필)>이라 써서 불사르시고
여러 제자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옛 사람(孔子공자)이 五十歲(오십세)에 가서 四十九年(사십구년) 동안의 그름을 깨달았다 하나니
이제 그 度數(도수)를 썼노라.
내가 天地運路(천지운로)를 뜯어고쳐 물샐틈없이 度數(도수)를 굳게 짜 놓았으니,
제 度數(도수)에 돌아 닿는대로 새로운 기틀이 열리리라.
너희들은 삼가 墮落(타락)하지 말고 오직 一心(일심)으로 믿어 나가라.
이제 九年(구년) 동안 보아온 開闢(개벽)공사의 確證(확증)을 天地(천지)에 質正(질정)하리니
너희들도 參觀(참관)하여 믿음을 굳게 하라.
오직 天地(천지)는 말이 없으니 天動(천동)과 地震(지진)으로 表徵(표징)하리라’ 하시고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 문득 天動(천동)과 地震(지진)이 아울러 크게 일어나니라』
우리는 이 글에서 몇 가지 증언한 것을 눈여겨 볼 구절이 있는 것이다.
포교 50년공부 종필(布敎 五十年工夫 終畢)이라고 써서는 불을 사르고
제자(弟子)들에게 이르기를,
옛 사람 공자(孔子)가 나이 50세에 가서야 지난 49년 간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하였는데,
그 도수(度數)를 썼다고 한 것이다.
천지운로(天地運路)를 뜯어고쳐서 물샐틈없이 도수(度數)를 굳게 짜놓았으니
그 도수(度數)가 돌아 닿는 대로 새로운 기틀이 열린다고 했다.
공자(孔子)가 나이 50세에 천명(天命)을 깨달았다고 하였는데,
그 도수(度數)를 썼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천명(天命)을 받을 자의 나이가 50이 되어서야,
비로소 천명(天命)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명(天命)을 받을 자가 언제 천명(天命)을 받을지를, 천하(天下)에 미리 알리는 말인 것이다.
그 비유를
공자(孔子)가 천명(天命)을 깨달은 것이 나이 50이라고 하고,
최수운(崔水雲) 선생의 시천주(侍天主)에는 포교(布敎) 50년 공부가 들어있고,
충남 비인(庇仁)의 김경흔은 50년 공부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나
시천주(侍天主)는 이미 행세(行世)되었으니,
아직 행세(行世)되지 않은 태을주(太乙呪)를 써야 한다면서 태을주(太乙呪)를 읽어주셨다고 한 것이다.
또한
평천하(平天下)는 내(甑山)가 하리니,
치천하(治天下)는 너희들이 하라고 하며,
그 치천하(治天下)가 50년 공부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내용에서 한 마디로 천명(天命)을 하늘이 내렸다고 하면,
바로 평천하(平天下)한 후에 치천하(治天下)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치천하(治天下)라는 공부가 50년 공부라고 하고,
또한 50년 공부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다고 한 것이다.
시천주(侍天主)는 이미 행세(行世)되었으나,
태을주(太乙呪)는 아직 행세되질 않았으니, 태을주(太乙呪)를 써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즉 태을(太乙)이라 하면 바로 단주(丹朱)를 의미하니,
곧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하는 말인 것이다.
즉 앞으로 오는 운수(運數)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인 태을(太乙)의 운수(運數)라는 것이다.
즉 태을(太乙)인 하나님의 아들에게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공부,
즉 수신제가(修身齊家)를 49년 간 시키고, 하나님의 아들의 나이가 50이 되어서야,
비로소 천명(天命)을 깨닫게 한다는 뜻이 숨어 있는 말인 것이다.
나이 50이 되어서야 비로소 천명(天命)을 깨닫게 하는 일은,
천지운로(天地運路)를 뜯어고쳐서 물샐틈없는 도수(度數)를 굳게 짜 놓았으니,
제 도수(度數)에 돌아 닿는 대로, 새로운 기틀이 열리리라고 하신 것이다.
이는 털끝만큼의 오차(誤差)가 없도록 짜 놓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확증(確證)으로, 천지(天地)에 공표(公表)를 한다면서, 믿음을 굳게 하라시며
오직 천지는 말이 없으니 천동과 지진으로 그 증거를 나타나겠다고 하시며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
곧 천동(天動)과 지진(地震)이 아울러 크게 일어나더라 하신 것이다.
이 부분을 증산(甑山) 상제께서 여러 차례 강조(强調)하신 말씀인 것이다.
미래(未來)에 나타날 대두목(大頭目)인 하나님의 아들 태을(太乙)이,
그가 나이 50에 천명(天命)을 받은 후에 천하(天下)를 통치하게 될 것이라고
거듭거듭 강조하신 구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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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저 사람의 50년 공부에다 비유하여 말씀을 하셨으나,전(傳)하고자 하는 속뜻은
오로지 앞으로 하나님의 천명(天命)을 받을 자가 나이 50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승(十勝)이라고 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기러기가 오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고, 하나님의 일은 그대로 실패인 것이다.
인간(人間)에게는 희망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구세주(救世主)가 말로만 구세주(救世主)이면 무엇하는가?
홀로 산 속에 들어가 일생(一生)을 수도(修道)만 하면 무엇하는가?
세상(世上)은 그대로인데 말이다.
구세주(救世主)란
실질적으로 인간에게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문제(問題)를 해결해 주어야만이 진실로 구세주(救世主)인 것이다.
이 고통(苦痛)의 세상(世上)에서 벗어나는 참다운 자유(自由)를 주어야만이 진실로 구세주(救世主)인 것이다.
이것이 진실로 해탈(解脫)이며 인간(人間)에게 자유(自由)를 주는 것이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것이다.
그러니 누구 한 사람 의인(義人)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려 왔던 것이다.
한 사람만 나타나면 되는데, 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하늘의 대임(大任)을 맡길래다 보니 육체적(肉體的)으로 정신적(精神的)으로 남이 알 수 없는
고통(苦痛)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런 이유(理由)도 모르고,
이러한 고통(苦痛)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버려진 사람인 것이다.
본인의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게을러서 그런 것도 아니고, 뭐 큰 잘못을 저질러서 그런 것도 아닌데,
아무리 무엇을 하려고 하여도 되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으니 말이다.
다만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홀로 목표가 없는 외로운 공부 밖에는 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승이 있어 깨우쳐서 깨닫는 것도 아닌 것이다.
선생도 어느 수준까지야 물어볼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 이상은 질문을 하여도 답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다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정도령을 독각사(獨覺士)라고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홀로 깨우친 사람이라는 것이다.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누가 가르쳐 주어서 깨닫는 것이 아닌 것이다.
천지(天地)는 말이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의 아들에게 다정하게 가르쳐주지 않겠냐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극히 공정(公正)한 하나님이신 것이다.
공부하는 데는 왕도(王道)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쉬운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버려 두어서,
어려운 고통(苦痛)을 이겨 나가 스스로가 깨닫게 하는데 그 교육목적(敎育目的)이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한 마디로 고생(苦生)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어서 이유(理由) 없는 고통(苦痛)이다 보니,
스스로 버려진 아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50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기러기를 통하여 천명(天命)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 동안 나이 49세까지 스스로가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은 진실(眞實)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단순(單純)한 의미(意味)로 잘못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그 모든 경서(經書)와 예언서(預言書)에 나오는 주인공(主人公),
즉 구세주(救世主)는 하나님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주인공(主人公)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이 나서서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당신이 직접 나서서 이루시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아들에게 천명(天命)을 내려서, 즉 대임(大任)을 맡겨서 일을 이루려 하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2권 28장 120편에,
조유호귀초유귀(鳥有呼歸草有歸)
새(鳥)와 초(草: 不老草)가 돌아오라고 부르짖어도
삼년하사이지귀(三年何事爾遲歸)
어찌하여 3년을, 이와 같이 늦게 돌아오는가?
고지미면인의신(固知未免人疑信)
진실로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인간의 모습을 벗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을 알겠는데,
영득은광칠빈귀(嬴得銀光漆鬢歸)
다만 몸에 은빛 광채(銀光)와 검은 머리(漆髮)가 되니, 돌아오게 되는구나.
우리는 해월(海月) 선생의 시(詩)에서도 앞의 격암유록(格菴遺錄) 송가전(松家田)과 같은 내용(內容)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정도령이 세상에 나타나도 그가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고, 무엇하나 더 나은 것이 없으니,
다만 말로만 이야기하여선 도무지 믿어 주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무언가를 보여주어야만이 돌아오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해월(海月) 선생의 시(詩)에서도 그렇게도 돌아오라고 울부짖는 것이 새(鳥)라고 한 것이다.
초(草: 不老草)가 또한 돌아오라고 한다는 것이다.
격암유록(格菴遺錄)은 천계성(天鷄聲)이라고도 하고, 천 마리 닭 속에 한 마리 봉황(鳳凰)이라고도 한 것이다.
또한 까마귀라고도 표현한 것이다. 까마귀란 태양을 의미하는 말이다.
예부터 전하기를 태양 속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있고, 달 속에는 두꺼비가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오라고 하여도 안 돌아오던 사람들이 3년이 지나면 서로 다투어 가면서 돌아온다고 한 것이다.
돌아오고 싶었었는데 못 돌아온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과 다름없는 정도령이기에 믿지 못해서 안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도령의 몸에서 은빛 광채(光彩)가 나고, 나이들어 희끗하던 머리카락이 젊은 사람의 윤기나는 머리카락으로 바뀌게
되니, 그 때서야 비로소 모두가 돌아온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보여 주어서 따르는 것과 보지 않고 따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고 믿는 사람은,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먼저 보여 주지 않아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진실로 믿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사람은 숫자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能力)으로 기사이적(奇事異蹟)을 보여 주어서, 안 믿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닌 것이다.
먼저 보여 주지 않아도 따르는 사람이 있는데, 아무나 그렇게 쉽게 따르는 것이 아닌 것이다.
첫댓글 50년은 무슨 35에 알았소 그대가 내게 동화책을 써준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