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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謀事在人 成事在天 관도변을 따라 좌우로 우거진 숲에서는 이따금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와 청량하다. 한쪽에 주막만 없었다면 그저 한없이 정겹고 조용할 풍경이다. 주막이 있다 할지라도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이 없는 바에야 조용함은 여전했다. 하지만 느닷없이 폭주하는 마차가 나타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더구나 그 마차가 비탈을 구르고, 그 마차를 쫓아온 사람들이 훌훌 신형을 날려 마차를 덮쳐가면서부터 숲의 고요는 이미 깨어진 지 오래되어 버렸다. 『크으으흐…!』 마차에서 퉁겨나간 회의 중년인이 가슴을 부여잡고서 신음했다. 입에서 쏟아지는 것은 붉은 피. 하지만 지금 그를 유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안령도(雁翎刀)와 일월아(日月牙), 그리고 장검을 빗겨든 그의 동료 세 사람들까지도. 그들은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부서져나간 마차의 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을 보고 있었다. 여자. 마차 안에서 나타난 사람은 채 스물이 되지 않아 보이는 여자였다. 보기 드문 절세미인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용모. 경장(輕裝)을 했지만 안색은 창백했다. 더구나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청색의 경장은 이미 한차례의 악전(惡戰)을 치른 다음인지 곳곳이 피로 얼룩진 상태였다. 청의미녀는 마차에서 나오자마자 훌쩍, 몸을 솟구쳐 수중에 든 한자루 서늘한 빛이 번뜩이는 단검(短劍)을 휘둘러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일월아를 든 회의인에게 덮쳐갔다. 문답무용(問答無用)이라는 뜻. 『건방진… 죽고 싶으냐!』 회의인이 일월아를 휘둘러 공격해오는 청의미녀의 가슴을 횡단무산(橫斷巫山)의 일식으로 그어가면서 소리쳤다. 『흥!』 청의미녀는 냉소와 함께 손목을 뒤집어 연달아 삼검을 격출해 회의인의 일월아를 찔러냈다. 그녀의 움직임은 매우 신속하여 몸을 번뜩이는 사이에 이미 회의인의 앞에 당도하여 있었고, 쨍! 쨍그렁, 하는 일월아와 단검이 부딪치는 순간에 나직한 신음과 함께 회의인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동시에 그녀는 이미 그를 지나서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안령도의 칼바람 소리. 그리고 장검이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며 그녀의 옆에서 날아들었다. 『비겁한 놈들!』 청의미녀가 입술을 깨물면서 신음했다. 찰나, 그녀는 달리던 신형을 퉁기듯이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마치 미꾸라지가 손을 빠져나가는 듯한 형상. 장검과 안령도가 모조리 허탕을 쳤다. 『윽!』 『크윽-!』 그들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나온 것은 그때였고 그들이 얼굴을 부여잡고 쓰러진 것도 그때였다. 참혹한 모습으로 얼굴을 감싸쥐고서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그들을 본 청의미녀는 한차례 머리를 흔들더니 입술을 깨물고는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원래 그녀는 그들의 공세를 피하는 순간에 그들의 얼굴에다 금침을 날려 그들을 쓰러뜨린 것이다. 『아!』 하지만 그녀의 신형이 숲속으로 사라지는가 싶은 순간에 한가닥 신음과 함께 마치 철벽에라도 부딪쳐 퉁겨져 나오듯이 그렇게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들어가려던 숲에서는 안색이 마치 시체와 같이 창백하고 후줄근한 흰옷을 걸친 장작개비처럼 마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의미녀는 그것을 보자 안색이 창백해져서 황급히 뒤로 몸을 돌렸다.그러 나, 거기에는 이미 괴이하게 얼굴이 시커먼 사람이 흑의를 걸친 채 우뚝 서있었다. 『악!』 비명이 터졌다. 청의미녀의 손에서 단검이 떨어지고 그녀가 짚단처럼 나뒹굴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에 흑귀(黑鬼)와 같은 자가 그녀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려갈긴 것이다. 피분수가 그녀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건방진 년… 감히 어디를 더 가보겠다고…』 검은옷을 걸친 자가 냉소를 터뜨리면서 청의미녀의 머리채를 잡아 끌었다. 인정사정이 없었다. 『악독한 심사는 여전하군…』 차가운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희고 검은 기괴(奇怪)한 생김의 두 사람이 나타나 청의미녀를 제압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들은 그럴만한 실력과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참견. 『어떤 놈이냐?』 백의괴인이 음산하게 소리쳤다. 관도변. 거기에 비단옷에 차양모를 쓴 자 하나가 우뚝 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커다란 칼[大湛?둘러멘 호위인듯한 자가 하나 보인다. 거기서 비탈 아래 숲까지는 십여 장 가량. 그를 발견한 흑의괴인의 얼굴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뒈지고 싶은 모양이군…』 길을 가던 부잣집 공자가 협의(俠義)랍시고 참견하는 것이 분명해보였던 것이다. 꼴에 구색은 갖춘다고 허리춤에다 검도 하나 차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입은 그 말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긴장으로 얼어붙어야 했다. 행운유수(行雲流水)! 그가 슬쩍 몸을 떠올리는가 싶은 순간에 그 신형이 마치 바람처럼 그 십여 장의 거리를 가로질러 자신의 앞에 도달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세상모르는 부잣집 공자의 신수(身手)가 아니었다. 『여자를 그런 식으로 대하다니, 백련교의 고수인 흑백초혼이 할 일인가?』 흑의괴인의 앞에 선 금의공자(錦衣公子)가 자신의 앞에서 청의미녀의 머리채를 움켜잡고서 질질 끌고 있는 흑의괴인을 향해 싸늘히 말했다. 차양모 아래로 드러난 얼굴이 단아하고 고요하다. 흑의괴인, 흑의초혼(黑衣招魂)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우리를 아나?』 『어찌 모르겠나? 중독이 되어 죽은줄 알았더니, 아직도 살아있을 줄은 몰랐군. 미륵존자외에 백련교에 또 다른 독공의 고수가 있었던가?』 금의공자, 왕승고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너, 너는 누구냐?』 상대의 말이 점점 점입가경으로 흘러가자 흑의초혼이 놀라서 외쳐 물었다.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군. 하긴 내가 살아나 이렇게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것임을 어떻게 짐작이라도 할 수가 있겠나, 당연한 일이겠지!』 『서, 설마?』 갑자기 흑의초혼이 부르짖었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저, 전혀… 전혀 다른 얼굴인데!』 그는 귀신을 본 듯이 중얼거리면서 주춤 뒤로 물러났다. 얼마나 놀란 것인지 사정없이 휘어잡고 있던 청의미녀의 머리채까지 놓아버렸다. 왕승고가 보란 듯이 손을 들어 그를 향해 가볍게 흔들어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놀람은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웅웅-! 저러한 손의 움직임에 따라 일어나던 공포스러운 자광(紫光)의 소용돌이, 거기에 휩쓸려 무려 다섯 달 동안이나 염병든 개처럼 헐떡거리며 자리에서 사경(死境)을 헤멨던 그였던 까닭이다. 물론, 지금 왕승고의 손에서 자광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야말로 지난날 미륵존자를 추격하던 백련교의 흑백초혼이었다. 팔짱을 낀채로 그 광경을 관도변에서 보고 있는 정규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왜 저러는 것인지 알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뒤쪽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주막의 주인 왕이는 더 묘한 표정이었다. 본격적으로 싸움이 붙을 모양인지라, 내심 즐거운 마음으로 상황의 진전을 지켜보는 것이다. 어서 살이 갈라지고 피가 튀기를 바라면서…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벌어질 싸움이라면 빨리 시작해야 끝도 빨리난다. 그래야 영업에 지장이 없다. 만약 싸움이 질질 끌어서 관도위에서까지 올라온다거나 주막까지 무대를 삼아 드잡이질을 치게 된다면 가뜩이나 없는 손님까지 쫓아 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서로가 죽이고 죽어서 동패구사(同敗俱死)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손하나 대지않고서 그들이 타고 온 말을 수중에 넣게 된다. 힘 하나 들이지 않고 횡재를 하는 셈이었다. 그런 의중이 있는지라, 그는 폭주하는 마차가 나타나고 그 뒤를 쫓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을 왕승고등이 보고 있음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붙어라, 붙어라! 하면서…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것이니, 그를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었기에. 『말도 안돼! 네놈은 누구냐? 누, 누구기에 그 독귀(毒鬼)로 가장을 하는 것이냐?』 흑의초혼이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순찰당주라고 했던가? 그 자는 오지 않았나?』 왕승고는 슬쩍 주위를 훑어보았다. 흑백초혼 외에 다른 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라면 더 이상의 힘은 필요없다는 뜻인가. 그 사이에 흑백초혼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동시에 흑의초혼이 쓰러진 청의미녀의 머리채를 덥석 움켜잡고는 백의초혼이 있는 숲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말이 달리는 것이지, 무림고수가 달린다는 것은 준마가 굽을 놓아 질주하는 것과 같으니 머리채를 잡힌 청의미녀에게는 실로 가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전신이 짐짝과 같이 이리 튀기고 저리 부딪혀 피가 튀었다. 『멈추지 못할까!』 왕승고가 노해 소리치면서 몸을 날렸다. 그가 숲으로 들어섬을 보자 돌연, 『쳐라!』 흑의초혼이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동시에 사방에서 왕승고를 향해서 암기가 비오듯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칠팔 명의 사람이 나타나 왕승고를 덮쳐왔다. 기습이었다. 『조심하십시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다가오고 있던 신력대도 정규가 놀라 외치며 몸을 날렸지만 그의 손이 미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왕승고는 이미 그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처럼 조금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더욱 빠르게 몸을 날려서 흑의초혼을 덮쳐갔다. 그의 신법이 너무 빨라 암기는 허탕을 치게 되었고 덮쳐오던 자 중, 정면의 둘만 그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었다. 『윽!』 『으악!』 줄에 꿴 듯이 단숨에 터져나오는 비명 두 마디. 흑의초혼은 이미 자신의 앞에 도달해있는 왕승고를 보고는 놀라 눈을 부릅떠야 했다. 왕승고의 뒤로 방금 그를 가로막던 부하 둘이 허수아비처럼 뒤로 넘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을 놓아라!』 왕승고의 입에서 질타가 터져나왔다. 예의 침향목검(沈香木劍)이 백련교도 둘을 단숨에 날려보내고는 그 여세를 몰아 흑의초혼을 향해 덮쳐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청의미녀의 머리채를 잡은 그의 오른쪽 어깨를 노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흑의초혼이 징그럽게 웃으며 청의미녀의 머리채를 잡은채 그녀를 휘둘러 왕승고의 검을 공격해왔다. 설마 이런 공격을 받을 것임은 생각지도 못한 왕승고는 흠칫, 검을 거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로 침향목검을 찔러냈다가는 청의미녀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자 옆에 있던 백의초혼이 음산하게 웃으며 수중에 들고 있던 곡상봉(哭喪棒)을 휘둘러 옆에서 왕승고를 공격해왔다. 그리고 그를 공격했다가 허탕을 친 그의 수하들도 왕승고의 뒤에서 그를 공격해오고 있었다. 『이런 죽일 놈들!』 그 찰나에 노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으악!』 『으아- 악-!』 뒤를 잇는 단말마의 비명. 피가 튀고 살이 갈라졌다. 왕승고의 배후를 공격하던 백련교도 중 둘이 피를 뿌리고 쓰러졌고 하나가 검을 놓치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신력대도 정규가 그 큰칼을 폭풍우와 같이 휘둘러대면서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게 된 왕승고는 맑은 기합과 함께 수중의 침향목검으로 백의초혼이 휘두른 곡상봉을 쳤다. 땅! 일어나는 금속성. 원래 흑백초혼의 무기인 곡상봉은 나무가 아니라 빈철로 만들어진 것인지라 무기로 말하자면 당연히 백의초혼이 우세했다. 하지만 신음과 함께 물러난 것은 백의초혼이었다. 손목이 시큰거렸다. 하마트면 곡상봉을 놓칠뻔한 타격에 놀란 그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 순간에 왕승고는 질풍과 같이 검을 휘둘러 흑의초혼을 덮쳤다. 『분광검법(分光劍法)?』 눈앞이 온통 거무스레한 검영(劍影)으로 가득차는 것을 느낀 흑의초혼이 놀라 소리치면서 황급히 머리채를 움켜잡은 청의미녀를 거기다 대고 휘둘렀다. 고수와의 대결에서는 금기(禁忌)가 있다. 같은 방법을 다시 써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흑의초혼은 다급한 김에 그것을 망각했다. 섬뜩해지는 느낌. 그리고 허전해졌다. 다급하게 뒤를 이어 피분수가 솟구쳤다. 그것이 자신의 팔에서 뿜어지고 있음을 느끼는데는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청의미녀가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의 팔도 그녀의 머리를 움켜쥔채로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피를 뿌리며… 『우아악-!』 엄습해오는 처절한 고통에 흑의초혼이 비명을 질렀다. 왕승고의 무공은 일취월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방금 점창파가 자랑하는 쾌검인 분광검법을 사용했다. 칠십이수의 분광검법은 그 자체로 일대절학(一代絶學)이었다. 비록 시간상 다 배울 수는 없었지만 점창파의 장문인 열화신검 육수웅은 그에게 분광검법의 정수(精髓)만을 전수했었다. 그것이 다시 점창파에 돌아갈 수 있기를 염원하면서… 그것은 분광연환칠식(分光連環七式)이었는데, 그 연결의 쾌속함은 과연 무림일절에 손색이 없었다. 간단치 않은 고수인 흑의초혼조차도 연달아 펼쳐지는 그 쾌검에 놀라 청의미녀의 움켜쥔 머리카락을 놓고 뒤로 물러서는 중에 이미 그의 팔이 잘린 것을 발견했을 정도였다. 『괜찮으시오?』 왕승고는 실신한 듯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청의미녀를 보며 물었다. 머리채를 휘어잡혀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인해 엉망이 된 모습의 그녀는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에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었다. 처연(悽然)한 모습, 원래 그녀는 내상을 입은 상태로 도주하고 있었던지라 이번의 타격은 그녀로 하여금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왕승고의 말을 들은 것인지, 청의미녀는 힘겹게 눈을 뜨고는 그를 보았다. 그리곤 이를 악물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무리하지 마시오』 그 순간이다. 『이 개잡놈! 목숨을 내놔라!』 흑백초혼이 일제히 소리치면서 왕승고를 덮쳐왔다. 그들이 함께 전력을 다하자 그 위세는 과연 간단하지 않았다. 원래 그들은 합격(合擊)에 능하여 늘 같이 붙어 다니는 것이다. 왕승고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들의 출수는 가히 양패구상(兩敗俱傷)으로서 너죽고 나죽자는 형태로 공격만하고 수비는 전혀 돌보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죽고 싶은가?』 왕승고가 냉소를 쳤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침향목검이 원을 그리며 뻗어나갔다. 막대한 경기가 일어났다. 화산파의 장문인 육지매화검 궁초량이 그에게 전해준 육합검결(六合劍訣)을 응용한 검식이라 가히 최상의 수비초식이면서 또한 공격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육합검결을 운용한 것은 옆에 쓰러져 있는 청의미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막대한 검세를 보고도 흑백초혼은 조금도 꿀리지 않고 그대로 공격해왔다. 정말 너죽고 나죽자의 타법. 하지만 그것은 다음 순간에 허세임이 드러났다. 펑! 갑자기 그들의 손에 들린 곡상봉이 폭발을 일으키면서 흰연기를 폭사해냈기 때문이다. 동시에 흑백초혼은 번개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곡상봉에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것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왕승고는 찰나간에 자신의 비롯한 일대가 그 흰연기에 휩싸이는 것을 보자 놀라 대갈일성하면서 잇달아 삼장을 휘감아냈다. 세찬 경기가 폭풍처럼 그의 장심에서 일어났다. 웅웅- 그리고 그것은 그를 뒤덮었던 흰연기를 단숨에 휘날려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본 흑백초혼은 안색이 흙빛이 되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낭을 놓았다. 신력대도 정규에게 걸려서 쩔쩔매면서 쓰러지고 있던 자들 중 남은 두 명도 흑백초혼이 도주함을 보자 죽을 힘을 다해 도주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정규는 흰연기가 닿았던 초목이 금세 시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놀라 그들을 쫓을 생각도 하지 않고서 한달음에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보다시피』 왕승고는 희미하게 정규를 향해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의 주위는 물론, 그의 옷까지도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고 초목이 생기를 잃어가고 있음은 방금전의 흰연기가 얼마나 지독한 것인가를 웅변하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이야말로 흑백초혼이 내심 자랑하는 상문탈혼(喪門奪魂)으로서 황소라도 즉사시킬 수 있는 극독이 함유된 연기였다. 상문탈혼은 곡상봉 안에 장치되어 있어서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발출해 상대를 공격할 수 있었다. 『하, 하지만…』 『걱정마시오. 지난날에 내 몸이 온통 독기로 뭉쳐져 있었음을 잊었소? 이 정도로는 내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소』 왕승고의 침착한 말에 정규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내 이 썩을 문드러질 놈들을…!」 그가 내심 이를 갈면서 흑백초혼이 사라진 곳을 보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이미 숲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소저, 소저!』 왕승고는 상문탈혼에 그만 혼절하여 쓰러진 청의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혼절한 사람이 부른다고 정신을 차릴리는 없다. 잠시 망설이던 왕승고는 그녀를 안고는 몸을 날렸다. 졸졸… 그의 앞에 숲을 흐르는 개울이 나타났다. 거기에 당도한 왕승고는 안고 있던 그녀를 그대로 흐르는 개울에다 담갔다. 가을이라고는 하지만 계곡을 질러 흘러가는 개울은 얼음처럼 찼다. 『으음…!』 청의미녀는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정신을 차렸다. 『상처가 심한 듯 한데, 우선 해독을 해야겠소. 이걸 드시오』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 부축하여 곁에 있는 바위에다 기대놓은 왕승고가 품에서 단환(丹丸)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 이건?』 그것을 본 청의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왕승고가 올려놓은 푸른빛 단환이 영롱했다. 『벼, 벽응환? 이게 어떻게 당신에게?』 왕승고도 그녀의 물음에 놀라 그녀를 보았다. 그에게 벽응환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아마도 천하를 통털어 세사람 뿐일 것이었다. 더구나,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는 사람이라니? 『다, 당신은? 설마… 아니야. 그와는 너무 얼굴이 틀리는데… 그러나 이건…』 청의미녀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지 벽응환과 왕승고를 번갈아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왕승고로서도 그녀가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다. 하지만 여자라니? 『의선 어르신네를 아시오?』 왕승고가 물었다. 『호, 혹시 운지룡을 아세요?』 청의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되물었다. 아연한 빛이 왕승고의 눈에 떠올랐다. 『운지룡이라니, 그럼 소저는 정말 의선 어르신네와 관계가 있는…』 『맙소사! 그럼, 정말 당신이 곽공자인가요?』 청의미녀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 모습은 영락없이 잊어버릴 수 없는 운지룡의 얼굴이다. 남매라도 그냥 남매가 아니고 쌍둥이일 것이었다. 『설마…』 왕승고는 어이없는 생각 하나를 떠올리고 신음하듯 말끝을 흐리면서 청의미녀를 보았다. 『대답해주세요. 정말 당신이 곽공자인가? 중독되어 죽어가다가 사부님의 손에 의해 시한부 생명으로 살아났던 그 곽공자가 맞아요?』 『그렇소』 왕승고가 고개를 끄떡이자, 청의미녀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말해보시오. 설마 당신이 운지룡…』 『그래요. 내가… 내가 운지룡이에요. 아니, 운지봉(雲芝鳳)…!』 격동하여 말을 하던 청의미녀, 아니 의선의 막내제자 운지룡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다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운지룡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다음날 새벽이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 자신이 푹신한 침상에 누워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더구나 일신에는 깨끗한 새옷이 새로 갈아입혀져 있지 않은가. 「이게 어찌 된?」 그녀는 소스라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덮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렸다. 깨끗한 남색옷이 드러났다. 분명히 자신이 입고 있던 찢어지고 피묻은 옷은 아니었다. 더더구나 일신에서 은은히 풍기는 향기는 자신이 목욕을 했음을 의미한다. 그날 이후, 무려 닷새간이나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면서 저들에게 쫓기느라 세수 한번 제대로 못한 자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악귀와 같은 흑의초혼에게 머리끄댕이까지 잡혔던 자신이다. 그러나 보지 않아도 자신의 머리가 단정히 빗겨졌음을 알 수 있었다. 『정신이 들었소?』 당황해 정신이 없는 그녀의 앞에서 침착한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었다. 왕승고가 거기에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그는 창가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누워 있었던 침상이 휘장으로 가리워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침상의 옆에는 세숫대야가 있고 거기에는 물수건이 담겨 있음도 일견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누가 자신을 밤새 간호했다는 뜻. 『곽공자?』 당황한 그녀의 음성이 절로 떨려나왔다. 온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 입혀준 것이 그라면… 『이곳은 객잔이오. 소저의 상처가 심하여 치료를 하면서 이곳의 하녀에게 부탁을 하여 소저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소』 그 마음을 짐작이라도 하고 있는 듯이 왕승고는 침착한 음성으로 해명을 해주었다. 「하…」 그녀는 내심 안도의 숨을 길게 쉬었다. 『정말 소저가 운지룡이오?』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음을 보고 있던 왕승고가 입을 열어 물었다. 『그래요. 내가 운지룡이에요. 하지만 그건 남자로 돌아다닐 때 쓰는 이름이고, 원래 이름은 지봉이죠. 그런데, 정말 당신이 곽공자인가요?』 이번에는 그녀가 물었다. 『그렇소. 비록 그때의 곽승고는 이미 죽고 없지만… 운형… 운소저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이 나임에는 분명하오』 왕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에 알아듣기 쉽지 않은 말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지난날의 그 곽승고라는 뜻. 『대체, 대체 어떻게 된거죠? 그날 돌아가서 그처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더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니, 그보다도 해독이 된건가요? 지금 얼굴이 원래 곽공자의 본얼굴인가요?』 궁금함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천우신조로 해독을 했소』 『어, 어떻게? 사부님도 해독을 하기는 불가능했다고 하던 독인데… 맙소사!』 갑자기 그녀는 안색이 흙빛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비틀거리며 머리를 짚었다. 그뿐 그녀는 억지로 침상에서 내려섰다. 『무리하지 마시오. 전신에 일곱군데의 자상(刺傷)이 있었고 그중 한군데는 뼈가 보일 정도로 깊소』 왕승고가 어느새 그녀의 앞에 나타나 말했다. 『세상에… 그새 무슨 기연이 있었길래 그처럼 무공이 높아진거지요?』 그 신법을 보고 운지룡, 아니 운지봉이 놀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뿐 그녀의 얼굴에 다시 다급함이 떠올랐다. 『지금, 지금 가야 해요! 사부님이 위급해요!』 『의선 어르신네께 무슨 일이 생긴거요?』 『그래요! 내가 종숙부(鍾叔父)에게 빨리 가서 그분을 모시고 가지 않으면 사부님은…』 『자세한 말을 해보시오. 내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며, 무조건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것을 제지한 왕승고가 침착하게 그녀를 타일렀다. 『당신은 안돼요! 무공이 높아야…!』 그녀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왕승고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갑자기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은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사람이 만나면 헤어짐이 당연하다. 그러하여 불가(佛家)에서는 회자정리(會者定離), 이자정회(離者定會)라 하여 만난 자는 헤어지고 헤어지면 다시 만난다 하였다. 하지만 운지룡, 아니 운지봉은 그럴 수가 없었다. 왕승고와 뜻하지 않게 헤어진 다음, 그녀는 그를 찾기 위해서 일대를 미친 듯이 헤맸었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있던 곳에서 죽어 넘어진 시체들을 보았으니 어찌 그냥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사부를 따라 중원에 나온 것이 처음인 그녀가 왕승고의 뒤를 추적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결국 그녀는 왕승고를 포기하고 털래털래 사부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나마 천리길을 쫓아가서야 겨우 사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약초를 찾아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약초구행(藥草求行)이 시작되었다. 천산의선이 만들고자 하는 구전환혼금단(九轉還魂金丹)은 천산의선의 필생 심혈이 깃든 일대의 영약이다. 말 그대로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효험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젖먹이 때부터 눈덮힌 천산에 갇혀 살다시피 하다가 넓은 세상의 풍물을 처음 본 그녀로서는 약초 한뿌리를 찾기 위해서 종일을 산에서 헤매야 하는 것이 흥미로울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일년여가 지났다. 반선귀도(返仙鬼桃)를 얻지 못해 그를 대체할만한 약재를 찾아 운지봉을 이끌고서 산을 넘고 물길을 건너 요동(遼東)벌에 이른 천산의선은 장백산(長白山;백두산)까지 갔지만 결국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장백산에서 목적한 것은 장백특산의 천년삼왕(千年蔘王). 하지만 심마니들이 평생을 바쳐도 한뿌리를 얻기 힘든 천년산삼, 천년이나 묵어 삼중의 왕이라 불리는 그것을 어찌 그리 간단히 구할 수가 있을까. 삼백년가량 된 산삼을 한뿌리 캔 것이 최대의 수확이라면 수확. 결국, 천산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맥이 빠져서 돌아오고 있던 천산의선은 반가운 소식을 접한다. 그의 오랜 친우중 한 사람인 염라판관(閻羅判官) 종일명(鍾一命)에게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 한 뿌리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하수오라는 것은 일종의 약초이지만 오래되면 고구마와 비슷한 뿌리열매가 생긴다. 한방에서 강장 강정제로 사용하는 것이지만 천년을 묵게 되면 당연히 그 효력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과 같을 수가 없다. 『일은 종숙부를 만나러 태호(太湖)로 가다가 일어났어요.』 운지봉은 입술을 물었다. 쏴쏴-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 비를 피하기 위해서 근처 야산에 들어갔던 천산의선 사도(師徒)는 시체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그리고 그 시체들이 한 두구가 아님을 보고 더 놀라야 하였다. 마치 수십, 수백 명이 격전을 벌인 듯 처절한 격투의 현장. 삼엄한 공포가 엄습해왔다. 갑자기 참혹한 아비규환의 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 시체들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졌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이지요?』 천산의선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치료도 한 운지봉이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떼죽음을 한 것은 본 적이 없었던지라 겁에 질려 물었다. 하지만 시체들이 죽은 모습을 살펴본 천산의선은 납덩이 같은 얼굴로 급하게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렇게 얼마를 더 갔을까. 그들의 앞에 십여 명의 사람을 쓰러뜨리고서 나무에 기대 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는 노인 한 사람이 나타났다. 가히 피바다에 앉아 있는 듯한 모습. 『정말 자네로군…』 그 노인을 발견한 천산의선이 신음했다. 『하늘의 장난이 심하군. 노부를 죽음으로 몰고는 죽기 전에 염왕적(閻王敵)을 만나게 하다니…』 희미한 눈으로 한참 천산의선을 바라보던 노인은 그를 알아보고는 쓰게 웃었다. 그들 가운데 무엇인가 인과(因果)가 있음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당금 천하에서 누가 자네를 이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거의 죽어가고 있다고 보이던 노인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서 천산의선을 향해 일장을 쪼개어 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쥐새끼 같은 놈!』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하던 노인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굉량한 외침. 그리고 그의 손에서 쏟아져나간 배산도해(排山倒海)의 위력을 가진 일장은 더더욱 굉장하여 쏟아져 내리던 빗줄기가 모조리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무슨 짓…!』 천산의선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뜬 운지봉의 손을 잡고서 옆으로 구르듯 물러난 것은 창졸간의 일. 『크아악!』 그들의 뒤에서 잇단 비명이 한순간에 터진 것은 그것과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천산의선 사도의 뒤에서 그들을 덮쳐오던 세 명의 흑의인-어둠 속에 동화된-들이 피분수를 뿜어내면서 날아가고 있었다. 죽어가던 노인의 일장이 보인 위력. 운지봉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위(武威)였기 때문이다. 『신주일고봉(神州一孤峰)의 위력은 아직도 여전하군… 하지만 이 일장이 자네의 심맥을 보호하고 있던 호심진기(護心眞氣)를 흐트려 버린 것을 알고 있나?』 천산의선이 미간을 찡그리면서 하는 말에 노인은 껄껄 웃었다. 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심한 부상을 의미하듯이 소리대신 피가 울컥울컥 올라올 따름이었다. 그래도 그는 굴하지 않고 껄껄 웃었다. 평소의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느낄 수 있는 대목. 『쿠쿡… 숙제를 내지!』 피투성이의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 소리는 방금 전에 그와 같은 위력을 발휘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도록 미약했다. 운지봉은 알 수 있었다. 저 노인의 생기가 이미 끊어져 누구라도 살릴 수 없을 것임을. 노인이 갑자기 정색을 했다. 꺼져가던 눈빛이 횃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자네를 믿고 도박을 해본거야. 과연 자네가 지난 세월동안 놀고 먹지 않았는지… 과연 염왕이 자네를 적수로 삼을만 한지 말이지. 나를 살려내게.』 그리고 노인은 눈을 감았다. 고목처럼 쓰러지는 노인을 받아 부축한 천산의선은 혀를 찼다. 『그 빌어먹을 놈의 성질은 삼십년이 흘러도 그대로군 그래! 제놈의 목을 놓고 도박을 하다니…』 그는 말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노인을 땅에다 뉘이고는 급하게 손을 썼다.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일시지간 생명을 붙들어 놓을 수 있다는 구구속명수(九九續命手). 추격자가 생긴 것은 그때부터였다. 운지봉은 그로부터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숨쉴 사이도 없이 기습을 당해야 했고, 시시각각 죽음의 위협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천주산에 도달했을 때, 사부는 운지봉에게 말하였다. 『가서 염라판관 종숙부를 찾아 오너라.』 이대로는 안될 것을 운지봉도 알고 있었다. 죽어가는 노인은 덩치가 컸다. 평소의 천산의선이라면 그를 운반하는 것은 문제도 아닐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노인은 죽어가고 있었고, 그의 생기(生機)를 붙들고 있는 것은 의선의 놀라운 의술이었다. 그의 상태는 최악이었으므로 절대안정이 필요했다. 움직여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노인을 버리지 않는 한,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운지룡은 천산의선이 시간을 버는 동안 그 자리를 빠져나와 도주했다. 세상 모르고 어리광만 부리던 그녀를 키운 사부. 그 사부를 사지에 두고 홀로 도주해야 하는 운지봉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했다. 피눈물이라는 의미를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조차 제대로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의 뒤를 추적하는 자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생각 끝에 선머슴애처럼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고 여장을 했다. 산속에서의 생활에서 여장이란 사실상 거추장스럽다. 그래서 그녀는 평소에도 여장을 잘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선택. 과연 그것은 효과가 있어 잠시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그녀의 앞에 왕승고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녀의 도주는 끝이 났을 터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력대도 정규는 눈을 부릅떴다.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를 왕승고가 했기 때문이다. 『먼저 가서 대부인께 전하시오. 일이 생겨서 조금 늦게 돌아가야 하겠다고.』 『말도 안되는 말씀이십니다! 경사가 코앞에 있고 대부인께서 기다리…』 『내 생각은 결정되었소.』 왕승고가 조용히 말을 잘랐다. 그간 같이 지낸 정규는 저 조용한 왕승고의 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잘 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인지 약관의 나이에 그 행동은 태산과 같다.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 장래의 군주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서는 결코 아니되는 것이다. 『공자, 이건 그렇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먼저 대부인을 찾아 뵙고 그 다음에…』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찌 하겠소?』 『그건…』 왕승고는 고개를 저었다. 『천산의선 어르신네는 나의 생명을 구해주신 분이오. 그 분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나는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오. 사람으로서 은혜를 모른다면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소? 돌아가 전하시오. 일을 마치는대로 돌아가겠다고.』 『그러시다면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왕승고의 앞에서 정규가 강하게 고집했다. 『대부인께 알리지도 않고 말이오?』 『중간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연락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다리실 거요. 정대장이 돌아가 전하는 것이 옳소.』 왕승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정규가 완강하게 버텼다. 하지만 그는 다음 순간에 눈을 부릅떴다. 왕승고가 그의 어깨에 있는 거골(巨骨), 비유혈(臂儒穴)을 점해버렸기 때문이다. 거골, 비유는 둘 다 인체내의 아홉 개 마혈(麻穴) 가운데 중요한 혈도이니 그는 순식간에 목석과 같이 굳어져 버렸다. 『반시진 정도면 혈도가 풀릴 거요. 대부인께 말씀드리시오. 아무 일 없을 거라고.』 『공자! 이러시면 안됩니다! 공자는 혼자 몸이 아니십니다! 이 일은…!』 고함치던 정규는 그만 입을 다물어야 했다. 왕승고가 그의 아문( 門)까지 점해버리는 바람에 말을 할 수가 없게 된 까닭이었다. 눈알만 굴리는 그를 보면서 왕승고는 가벼이 한숨쉬었다. 『아혈은 조금 있으면 풀릴 거요.』 왕승고는 그를 의자에다 앉히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운지봉을 보았다. 『지금 갈 수 있겠소?』 『무, 물론이에요!』 운지봉이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왕승고는 떠났다. 남아있는 것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어쩌지 못해 기절직전인 정규뿐. * * * 『뭐라고?』 구대부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정규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곳은 금곡노야의 거처중 하나인 금곡별서. 금곡노야와 함께 왕승고를 기다리던 구대부인은 어이가 없는 듯이 정규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그냥 돌아왔단 말인가?』 『수하들을 보내 뒤를 쫓도록 조치하고 왔습니다. 부인께 말씀을 전해드린 뒤, 바로 공자님의 뒤를 쫓고자 합니다.』 『즉시 출발해서 승고를 보호하게. 만에 하나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을시, 다시 나를 볼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함을 명심하라!』 『각골명심하겠습니다!』 정규는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땅바닥에다 머리를 박은 뒤에 그 자리를 떴다.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군요…』 구대부인은 그녀의 뒤에서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 금곡노야를 향해서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런 인연이 얽혀 있고 그들이 거기서 만나게 된 것이 다 하늘의 뜻일지니, 하늘의 조화를 누가 다 알 수 있겠는가.』 금곡노야는 뒷짐을 진채로 말을 받았다. 어조는 평온하나 늘 잔잔하던 그의 얼굴은 묘하게 굳어 있었다. 뭔가 좋지 않다는 느낌. 하지만 꼭 집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서 있는 음풍루(吟風樓) 아래 연못 물이 바람에 무심히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 멀리 천주산(天柱山)이 바라보인다. 천주산은 대별산(大別山)과 곽산, 잠산(潛山)등에 한데 어우러져 안휘(安徽)의 서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왕승고는 운지봉과 함께 그 천주산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원래 북평을 출발하여 안휘성을 가로누워 있는 회양산맥(淮陽山脈)에 이르고 있었다. 산을 넘으면 바로 경사가 눈앞에 보이는 판이었으니, 정규가 결사반대한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하룻길을 더 소비해야 했다. 생사가 달린 순간에 하루라면 운명이 달라질 수 있는 일이다. 『정말 혼자서 되겠어요?』 묵묵히 길을 재촉하던 운지봉이 왕승고를 보았다. 『최선을 다해볼 수밖에.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다시 돌아갈 수야 없지 않겠소?』『……』 운지봉은 입맛을 다시면서 입을 다물었다. 불현듯 후회가 되었다. 출발할 때에 좀 더 강하게 종숙부를 찾으러 가자고 할 걸 초조한 김에 그를 믿고서 길을 되짚어 온 것이 자못 걱정스럽기만 했다. 무공조차 몰랐던 사람이 불과 일 년사이에 배웠으면 얼마나 배웠을까.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를 믿을 수밖에 없다.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그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든든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었다. 독으로 인해 괴물과 같이 변한 왕승고도 분명히 특이한 점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왕승고는 그때와는 또 달랐다. 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 변하게 했을까? 몇번이고 길을 가는 도중에 물어보았으나 왕승고는 그저 담담히 웃어보일 뿐이다. 부드러우면서도 바위와 같은 웃음이다. 묘하게도 그 웃음은 운지봉의 초조한 마음을 녹여주었다. 염라판관 종일명은 그의 사부 천산의선의 친구였다. 그의 외호인 염라판관은 그의 뛰어난 의술을 의미한다. 그가 살릴수 없다고 판정한 사람은 살아날 수 없다고 하여 그의 별호가 염라판관이 되었음은 그의 의술이 범상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에 족하다. 그렇긴 하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의 의술보다는 그의 무공이다. 소위 무림 십대고수(十大高手)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그인 것이다. 그의 성정(性情)은 불과 같아 일단 손을 쓰면 상대와 사생결단을 낸다. 염라판관이란 외호에는 그렇게 복잡한 연유가 숨어 있었다. 운지봉이 그를 잊지 못하고 끙끙 앓는 이유는 그가 그러한 고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은거하고 있는 태호(太湖)의 피진장(避塵莊)까지 갔다가 오려면 왕복 이틀이 소요될 것이었다. 한시가 급한 판에 그렇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들에게 쫓기면서 길을 잘못들어 생긴 일. 마음은 불같이 초조하다. 하지만 걸음은 느렸다. 의선의 문하인지라 입은 상처의 치료에 신경쓸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의선의 문하라고 해서 상처가 낫는 속도까지 남다를리는 없는 것이다. 전같으면 나 죽는다고 엄살을 부리면서 족히 석달은 누워 있을 상처를 지금의 운지봉은 입고 있었다. 내상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지만 옆구리에 입은 상처와 허벅지에 입은 검상(劒傷)은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밀려와 식은땀이 절로 흘러내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운지봉은 깜짝 놀라 왕승고를 보았다. 『무, 무슨 일이에요?』 왕승고가 아무말도 않고 느닷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무리하지 마시오. 상처가 덧나면 좋지 않을테니까.』 말과 함께 운지봉은 자신의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을 힘을 다해도 속도가 나지 않던 발걸음이 나는 듯 했다. 주위의 경물이 마치 폭풍이 일 듯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제서야 운지봉은 왕승고가 자신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경공을 제대로 전개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체 어떻게 그새 이런 무공을?」 불현 듯 다시 궁금증이 치밀지만 이미 몇번을 물어보았던 일이니 또 물어본다고 말할 까닭이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은연중에 가슴이 든든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단아한 선(線)이야. 자신의 손을 잡은채로 진기를 운용하여 바람처럼 앞으로 치닫고 있는 왕승고를 보면서 운지봉은 갑자기 묘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 경황중이고 힘이 들어 신경 쓸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왕승고의 도움으로 힘을 덜자 주위를 돌아볼 틈이 생긴 운지봉은 그의 얼굴이 의외로 수려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왕승고는 분명히 사람들이 보고 또 돌아볼 정도의 미남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묘한 느낌이 있었다. 그것은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기품이었다. 그리고 얼마든지 기대도 좋을듯한 너른 대지와 같은 커다란 품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불현듯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것도 세차게. 갑자기 왜 가슴이 뛰는 것일까? 분명히 숨이 차는 것은 아니었다. 힘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왕승고는 단순히 그녀의 손을 잡아 끄는 것만이 아니고 그녀의 손을 잡은채 진기를 운용하여 그녀를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반쯤 허공에 떠서 부유하는 형태인지라 힘이 들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 노인이 누군지는 모릅니까?』 왕승고가 문득 입을 열어 물었다. 그 말에 운지봉은 소스라쳐 놀라 상념에서 깨어났다. 얼굴이 갑자기 홍시와 같이 달아올랐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누군가가 심장이 입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다고 하더니 그것이 무슨 뜻인줄을 그녀는 오늘에서야 알았다. 『모, 모 몰라요』 황급히 대답한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엉망으로 떨리고 있음에 당황해서 급히 보충했다. 『그, 그걸 물어볼만한 상황이… 상황이 아니었어요. 너무 급해서…』 그녀의 음성이 평소와 다른걸 알았을까, 왕승고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조금 굳어 있었다. 『어디 몸이 좋지 않습니까?』 그가 걸음을 멈추자 운지봉은 더 당황했다. 『아, 아니에요. 사부님이 걱정되어서… 어, 어서 가야죠!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어요』 『그러지요』 왕승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여자임을 알자 그의 태도는 정중했다. 왕승고가 힘을 다해서 달리게 되자 천주산은 빠르게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동안 운지봉은 감히 왕승고의 얼굴을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하였다. 『저곳이어요!』 천주산에 들자 운지봉이 골짜기 하나를 가리켰다. 숲이 우거지고 산세가 빼어난 곳이었다. 산자락은 연무와도 같은 안개가 서려 석양을 받으니 암벽과 수목이 한데 어울려 불타는 듯했다. 가을이었다. 『이곳인줄은 어떻게 압니까? 천주산 초입에서 헤어졌다고 하더니…』 『지난번에 한번 들린 적이 있었어요. 약초 캐러 이곳에 왔다가…』 골짜기를 발견하자 운지봉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드러났다. 사방의 경치야 일품이지만 막상 찾던 사부의 종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흔적이 발견되었다. 격렬한 격투의 흔적. 그것을 증명하듯이 흑의인 두 사람이 거기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 『의선 어르신네께서 계신 곳이 이 부근이오?』 잠시 죽은 자의 상태를 살펴본 왕승고가 물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이미 이삼일전의 시체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저기 보이는…!』 말을 하던 운지봉의 얼굴이 돌변했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부님!』 『가봅시다!』 왕승고는 운지봉의 손을 잡고는 몸을 날렸다. 지세가 급변했다. 숲은 우거지고 계곡은 깊었다.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았던 곳이 분명했다. 그러니 의선이 이곳에서 약초를 찾았을터였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곳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저기에요!』 운지봉이 소리쳤다. 은밀하게 자리한 동굴 하나, 연기는 그 앞에 쌓아둔 나뭇더미에서 나고 있었다. 흑의인들 몇이 그 나뭇더미에 불을 붙이고는 그것을 동굴 속으로 던져넣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그것을 발견한 순간, 습격은 시작되었다. 소리도 없이 머리 위에서 검광이 그들을 향해서 도래하였다. 나무 위에 숨어 있던 자들이 손을 쓴 것이다. 『물러나라!』 왕승고는 일부러 공력을 돋우어 소리쳤다. 쩌렁쩌렁 계곡이 크게 울렸다. 산속인지라 메아리가 치니 그 소리는 더욱 웅장했다. 긴장된 표정으로 동굴 입구에 몰려있던 자들이 놀라 왕승고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왕승고는 잡고 있던 운지봉의 팔을 안으로 휘어 돌렸다. 그러자 그녀는 자연스레 왕승고의 품으로 끌려왔다. 그 다음 순간에 그는 오른손을 뒤집어 침향목검을 휘둘러댔다. 땅땅! 검과 검이 부딪는 소리. 그리고 뒤를 잇는 신음소리. 나무 위에 숨어 있다가 그 밑을 지나는 왕승고를 공격한 것은 모두 세명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왕승고가 휘두르는 목검에 막대한 타격을 받고는 그중 둘은 검을 놓치고 거꾸로 곤두박히고 자세를 바로잡고 내려선 것은 하나에 불과했다. 흑의에 복면을 한 자들. 그들로서는 왕승고의 목검에서 일어나는 기세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왕승고는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운지봉을 가슴에 안은 채 그대로 질풍처럼 앞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놈을 막아라!』 동굴 입구에서 금포노인(錦袍老人)이 소리쳤다. 백발임에도 홍안이라 당당한 모습이 멀리서도 역력해보였다. 그의 주위에는 사오십 명의 사람들이 둘러 서 있었다. 그들중 절반이 금포노인의 명령에 따라 노도처럼 왕승고를 향해 맞아나왔다. 『내 뒤를 바짝 따르시오!』 질풍처럼 달리면서 왕승고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운지봉의 손을 놓고서 그를 공격해오는 사람들을 맞아갔다. 『내 앞을 가로막는 자는 성하지 못할 것이다! 물러나라!』 왕승고가 그들을 향해 덮쳐가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누가 이 마당에 그 말만 듣고 아이고, 큰일났구나 하고 물러날 것인가. 미친 놈! 이십여 명의 고수들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젊은 놈에다가 계집 하나까지 달고서 세상 겁나는줄 모르고 달려드는 모습에 와르르 달려나오던 고수들 중 반절은 맥이 빠져서 슬그머니 속도를 줄였다. 가히 천둥벌거숭이와 같은 한심한 모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맛이라는 것이 반드시 찍어 먹어보아야 비로소 알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진리가 아닌가. 『으아악-!』 왕승고가 침향목검을 펼치자 그와 가장 처음 마주 선 자가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분수를 뿌리며 날아올랐다. 그가 쥐고 있던 귀령탈(鬼靈奪)이 단숨에 두 동강이 되어 퉁겨져 나갔다. 정신을 차릴 여가도 없이 그 뒤를 이어 쇄도하던 녹의를 입은 자 둘이 그의 검세에 휘말렸다. 하지만 그들은 녹록지 않은 듯 주춤하면서도 단숨에 피를 토하거나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누가 감히 내 앞을 막느냐!』 왕승고가 눈을 부릅뜨면서 고함쳤다. 동시에 무섭게 앞으로 찔러나갔던 그의 검이 빙글 회전하더니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폭출(瀑出)되어 나왔다. 한순간에 그의 손에서 수십 개의 검이 생겨난듯한 모습이었다. 『으악!』 『으아…!』 녹의를 입은 자들이 그 번개같은 쾌검을 막아내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들이 쓰러지는 순간에 왕승고는 이미 그들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 놀라운 기세에 앞에서 달려오던 자들이 부지간에 겁을 집어먹고서 부지불식간에 옆으로 물러섰다. 마치 비단폭이 찢어지는듯한 형상. 『그, 그 놈이다!』 동굴 쪽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흑백초혼이 거기 있었다. 그가 거기 있음을 알아보기도 전에 왕승고는 조금 뒤로 처졌던 자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한결같이 검은옷을 입고 귀두도를 든 자들. 그들의 숫자는 정확하게 열이었다. 『귀도십위(鬼刀十衛)?!』 왕승고가 나직이 신음했다. 지난날 미륵존자의 뒤를 쫓아왔던 자들. 그러고보면 정말 여기에 있는 자들은 백련교중의 고수들인 듯했다. 검이 날았다. 그리고 열 자루의 칼[湛?수레바퀴가 돌듯이 한데 뒤엉겨 폭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왕승고에게로 날아들었다. 고수가 하수와 다른 점은 상대를 보면 상대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하수는 그러한 능력, 그러한 감각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상대와 맞서봐야만 상대를 알게 된다. 왕승고는 이미 귀도십위를 세 번째 본다. 미륵존자와 맞서는 귀도십위를 보았고, 모산으로 쫓아온 백련교의 순찰당주 궁무혁등과 같이 자신을 핍박할 때에도 보았으니 인연이 질긴 셈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귀도십위가 한데 어울려 덮쳐오는 것에서 왕승고는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두렵거나 넘지 못할 벽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들과 맞서게 된다면 금포노인의 일행이 그를 맞을 채비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설혹 돌파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상당한 시간이나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 분명했다. 시간을 끄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고 그러한 시간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가 나타나면서 주춤하긴 했지만 동굴 앞에 모여선 자들이 불붙은 나뭇더미를 동굴 안에다 집어넣고 있음은 의선등이 그곳으로 쫓겨 들어가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제 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그러한 상황을 오래 견딜 수는 없다. 더더구나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치명적일 것이 분명했다. 찰나간에 생각을 스쳐보낸 왕승고는 한손을 잡고 있던 운지봉을 빙글 돌려 비스듬히 옆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따라 그도 옆으로 물러났다. 무섭게 달려들다가 갑자기 그가 옆으로 물러나 버리자 귀도십위의 공세는 한순간 대상을 잃어버렸다. 고수라면 당연히 그러한 사태에 대비가 되어 있는 법이다. 귀도십위가 펼치는 귀도탈혼진(鬼刀奪魂陣)은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어진 것이라 당연히 반응이 빠르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 찰나간의 틈을 노린 사람이 있을 때에는 상황이 달랐다. 더구나 그가 고수일 때에는. 왕승고는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귀도십위에게 덮쳐가면서 잇달아 십팔검을 쳐냈다. 쏴쏴. 검세가 노한 파도와 같이 일어났다. 점창파의 분광연환칠식은 이런 순간에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한다. 빠르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힘을 동반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뎅, 뎅그렁! 검과 도가 맞부딪는 소리. 쇠와 쇠가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목검과 강도(鋼刀)가 부딪치는 소리이니 듣기는 별 것 아닌 소리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한 순간에 뼈가 부러지고 목이 날아갈 흉험한 일대격돌이었다. 열 명이 하나가 되어 덤비던 것이 찰나간의 틈으로 인해 왕승고와 부딪힌 것은 넷이었다. 『윽!』 낮은 신음. 귀도십위 중 하나가 귀도를 떨어뜨리고 물러났다. 늘어진 팔. 왕승고의 목검이 그의 팔을 스치면서 단번에 팔이 부러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거의 찰나간에 나머지 여섯의 귀도가 왕승고를 덮쳐왔다. 그 순간, 왕승고의 뒤로 물러나 있던 운지봉이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것은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하여 귀도십위와 왕승고가 맞닥뜨리는 찰나에 이루어졌다. 흠칫하는 빛이 귀도십위의 눈에 스쳐갔지만 그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왕승고의 목검이 파도처럼 그들을 덮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가히 숨을 쉴 수 없는 공격. 선기는 왕승고에게 있었다. 그는 공격을 시작하면서 이미 운지봉에게 먼저 빠져 나갈 것을 일러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지봉은 그들의 머리위를 그냥 날아 넘어가지 않았다. 허공에서 한바퀴 몸을 뒤집는 사이에 그녀의 손에서는 금침 십여 매가 폭사되어 귀도십위의 뒤통수를 향해 날았다. 신음과 노한 고함소리, 그리고 격렬한 맞부딪힘 소리가 엇갈리는 가운데 귀도십위 중 두 명이 왕승고의 목검에 퉁겨져나갔다. 그리고 왕승고는 귀도십위의 저지를 뚫고서 질풍과 같이 전진하여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운지봉을 향해서 소리쳤다. 『갑시다!』 왕승고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땅을 박찼다. 왕승고의 눈빛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일반적으로 일전(一戰)을 벌이는 사람들이 전신의 기력을 충일시키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산사(山寺)에서 수도를 하는 사람과도 같은 느낌. 그는 수중의 침향목검을 조용히 아래로 늘어뜨렸다. 찰나, 그를 향해서 귀도십위가 수레바퀴처럼 귀도를 휘둘러대면서 덮쳐왔다. 『죽고 싶은가!』 왕승고가 나직이 호통쳤다. 동시에 목검이 바람처럼 앞으로 쳐나갔다. 덩덩! 목검과 귀도가 맞닥뜨리면서 북치는 소리가 났다. 그와 검을 마주친 귀도십위중 두 명이 그 막강한 타격을 이기지 못해 신음을 흘리면서 귀도를 놓쳤다. 그들이 비틀, 뒤로 물러나는 순간 나머지 귀도십위가 광포하게 공격해왔다. 『나를 원망하지 말라』 왕승고의 입에서 질타가 터졌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질풍과 같이 귀도십위를 향해서 덮쳐갔다. 목검이 마치 진검과도 같이 무섭게 움직여 거무스레한 검영(劒影)을 환출(幻出)해내면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하나라도 더 쓰러뜨리면 그만큼 가능성이 커지는 것을 알고 있는 왕승고는 손을 씀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물러나라!』 금의노인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천마(天馬)와 같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들었다. 그의 손에서 십여 장이 줄에 꿴 듯이 폭출되어 왕승고를 향해서 우박과 같이 쏟아졌다. 일진의 광풍(狂風)이 그의 장세를 따라 일어났다. 그의 장세는 마치 벼락이 치는 듯하여 지금까지 왕승고가 상대했던 어떤 고수보다 막강한 것을 발동을 하는 순간에 직감할 수 있었다. 「맞서지말라! 연환폭뢰장(連環爆雷掌)이다!」 왕승고가 검을 들어 그와 맞서가는 찰나에 그의 귓전에 다급한 외침이 전해져왔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을 계제가 아니었다. 피하고 말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왕승고의 지금 입장이었다. 그가 자리를 떠난다면 그 자리는 적들로 채워질 것이고 그럼 그는 저들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싸워야 할 것이었다. 왕승고에게 타격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저들의 숫자는 아직 거의 그대로인지라 그렇게 된다면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 분명했다. 왕승고가 아무리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그들이 차륜전의 형상으로 그를 공격해온다면 지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아주 저급한 무공의 소유자라면 모르되, 귀도십위나 저 금의노인 같은 고수들이라면 누구도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꽝! 목검이 장세와 정면으로 부딪히자 믿을 수 없게도 천둥과 같은 굉음이 터져나왔다. 강한 바람이 일어나 회오리쳤다. 황진(黃塵)이 그 바람을 타고 일어나 일대를 휩쓸었다. 왕승고는 어깨를 흔들하고는 그 자리에 신형을 안정시켰다. 앞을 보는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금의노인. 그는 왕승고와 일장 반 정도 떨어진 곳에서 금의자락을 세차게 펄럭이면서 놀란 눈으로 왕승고를 바라본 채 우뚝 서 있었다. 『본왕의 연환폭뢰장을 받아내다니… 네 정체가 무엇이냐?』 그때 왕승고의 귓가에 예의 전음지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는 백련교 총당(總堂)의 사대천왕(四大天王)중 하나인 지국천왕(持國天王)이다. 무공은 사대천왕중 제일이 아니지만 교활한 심기(心機) 면에서는 가장 무서운 자이다. 그를 상대할 수 있겠느냐?」 왕승고는 그 음성이 의선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무사함을 알게된 왕승고는 내심 마음이 놓여서 안색이 밝아졌다. 『듣건대 백련교의 지국천왕이 펼치는 연환폭뢰장은 무림일절이라, 세상에 상대할 사람이 드물다고 하더니 오늘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군』 왕승고가 침착한 얼굴로 말을 하자 그 말을 들은 금의노인, 지국천왕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미륵이 네놈에게 적지않은 것을 말해준 모양이구나. 그것으로 네 운명은 결정되었다!』 잠시 생각을 굴리고 있던 그는 음산하게 말하더니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귀도십위가 귀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지국천왕의 옆에 서 있던 회의중년인 네명이 뒤를 이어 몸을 날렸다. 격돌(激突)! 그렇게 불릴 일대격전이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산속 동굴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고함소리와 신음,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이는 소리… 그리고 격돌음. 왕승고는 무려 스물두 명의 합공을 받고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가 엇갈리면서 검광도영이 충천했다. 동굴 앞에서의 격전으로 그의 손아래 쓰러진 것은 귀도십위 중 넷을 포함하여 이미 아홉이나 된다. 가히 용과 범 같은 놀라운 신위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동굴 앞을 떠날 수 없음이 결정적인 약점이다. 상대도 그것을 알고는 파상적인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삼두육비가 아닌 이상, 무조건 이런 싸움을 오래 해나갈 수는 없었다. 안으로 들어간 운지봉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소식조차 없다. 의선의 말소리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열명에서 이제 다섯으로 줄어든 귀도십위의 위력은 이미 전과 같지 않았다. 나머지 흑의무사들의 무공도 위협적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국천왕의 곁에 서 있던 네명의 회의인은 달랐다. 그들의 무공은 개개인이 고수라 불릴 자격이 충분했다. 게다가 그들이 쓰는 만자탈(卍字奪)은 위력이 막강하여 검을 쓰는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무기다. 대체 백련교에는 고수가 얼마나 있는 것일까. 석양이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것은 격전이 시작된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을 의미한다. 왕승고의 앞으로 다시 귀도십위가 덮쳐왔다. 그들과 맞서면 그들은 다시 물러날 것이고 그때 만자탈을 든 자들이 측면공격해올 것이다. 문자 그대로 힘빼기 작전이다. 지국천왕은 날카로운 눈으로 왕승고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 아마 왕승고의 무공내력을 파악하는 대로 직접 나서서 마무리를 할 작정일터였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했다. 왕승고는 귀도십위가 덮쳐오는 것을 보고는 그들을 본척도 하지 않고서 회의인 네 명을 덮쳐갔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막고 있던 동굴 앞을 떠난 것이다. 그가 그런 식으로 공격을 한 것은 동굴 앞을 막고 선 이래 처음인지라 귀도십위는 물론, 막 앞으로 짓쳐나오려던 회의인들조차도 불의의 일격을 당한 꼴이 되었다. 땅! 그의 목검이 무서운 속도로 뻗어났고, 가장 앞에 있던 회의인의 손에 들려있던 만자탈이 두동강이 나면서 그의 입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신형은 둥둥 허공을 떠 삼 장여나 날아가 숲속에 처박혔다. 전력을 집중한 결과. 하지만 그 순간에 나머지 회의인 세 명의 공격이 들이닥쳤다. 가히 광풍폭우와 같은 기세. 그리고 등뒤로 귀도십위의 공세가 날아들었다. 땅! 땅,땅…. 그가 몸을 돌리면서 검을 쓸어내자 격렬한 맞부딪힘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으악!』 『크으으…!』 뒤이어 비명과 신음이 터져나왔다. 귀도십위 중 하나가 다시 피를 토하며 퉁겨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왕승고도 성하지 못했다. 회의인들의 공세에 어깨와 가슴팍에서 피가 솟았다.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회의인 중 하나도 신음과 함께 뒤로 퉁겨져 나갔다. 당장 쓰러지지는 않아도 이미 중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왕승고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검을 쓸어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끝낼 작정인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왕승고의 눈에 다급한 빛이 떠올랐다. 지국천왕이 그 틈을 노려 몸을 날려 동굴 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의선은 그에게 지국천왕을 막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었다. 그 말은 그가 동굴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라는 뜻이었다. 『물러나라!』 왕승고의 입에서 천둥같은 고함이 터졌다. 동시에 그의 검이 밤하늘을 달리는 번개와 같이 날아 지국천왕을 베어갔다. 말은 긴 것 같다. 하지만 그가 회의인 하나를 날려보내고 그들과 격돌하면서 다시 지국천왕을 막아가는 것은 거의 한숨을 한번 몰아쉬기도 벅찰만큼 급박한 순간이었다. 『으핫하하∼ 기다렸다!』 지국천왕에게서 앙천대소가 터져나왔다. 왕승고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그의 무공내력을 알아내고자 한다면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의 무공은 복잡하여 구대문파의 것을 다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그 기본을 이루는 근간(根幹)은 천부신공이다. 그러므로 그가 펼치는 것은 구대문파의 무공이면서도 또한 천부신공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내력을 짐작하려는 사람은 점점 더 미혹에 빠지고 만다. 왕승고의 무공이 생각을 절(絶)할만큼 기고(奇高)함을 보고 그 내력을 살펴보고자 생각했던 지국천왕은 그의 무공기초가 정말 다단(多端)하여 일순간 파악하기 곤란함을 직감했다. 그러자 그는 삽시에 생각을 정리하여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틈이 생겼던 것이다. 그가 동굴 앞에 이를 때에 왕승고는 이미 몸을 틀어 그를 향해서 덮쳐오고 있었다. 그것은 지국천왕이 바라던 바였다. 그는 몸을 틀면서 그가 자랑하는 연환폭뢰장을 쏟아냈다.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의 왕승고다. 정면 격돌이 일어났다. 팡! 팡! 팡…. 가죽북이 터지는듯한 음향이 연달아 일어났다. 쿵쿵쿵…. 왕승고의 발밑에서 진동이 일어났다. 그의 발밑에서 진동이 한번 일어날 때마다 물러나는 발자국이 하나씩 만들어지고 있었다. 바위로 된 바닥에서 돌가루가 튀면서 발자국이 새겨졌다. 그것은 그가 받는 타격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의미함에 다름이 아니었다. 연환폭뢰장의 무서운 점은 일장일장이 아니다. 한꺼번에 터져나올 때의 파괴력인 것이다. 왕승고는 이를 악물었다. 강호에 나온 이래 이러한 압력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의 손에 들린 침향목검이 윙윙하는 소리를 울려냈다. 쇠처럼 단단하여 형체를 만들 때에 그처럼 애를 먹고 깎아 검을 만들었던 그 목검이 마치 엿가락처럼 그렇게 휘청이고 있었다. 그러한 압력속에서도 목검은 앞으로 찔러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지국천왕이 눈을 부릅떴다. 머리카락이 일제히 곤두섰다. 그는 왕승고가 그 불리한 상황하에서도 이렇게 정면으로 당당하게 맞서올 수 있을 것임을, 그 나이에 이렇게 절륜한 내력(內力)을 가지고 있을 것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전력을 쏟아붓자, 그 위세는 가공할 만했다. 땅! 마침내 왕승고의 목검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두동강이가 나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세찬 경기(勁氣)가 폭풍우처럼 두 사람의 사이에서 흙먼지를 휘몰면서 일어났다. 왁! 비틀 뒤로 물러난 왕승고가 한모금의 피를 토해냈다. 그렇다고 지국천왕이 승리를 한 것만도 아니었다. 그또한 충격을 받고 잇달아 두어걸음을 물러나다가 세차게 암벽에 등을 부딪고 있었다. 암벽에서 돌가루가 퉁겨져 나가 흩어짐은 그가 받은 충격을 의미했다. 왕승고가 피를 토하면서 뒤로 물러나는데, 회의인들이 그냥 있을리 없다. 왕승고가 물러난 것은 곧 등을 도산검림(刀山劒林)에다가 들이민 것과 다름없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의 공세가 들이닥쳤다. 절대절명(絶對絶命)! 찰나, 왕승고가 번개처럼 몸을 돌리면서 일성 고함과 함께 앞서 덮쳐오는 회의인 둘을 향해 반토막 남은 목검을 휘둘러 공격해갔다. 중상을 입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공격해오자 회의인등은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처럼 왕승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질풍처럼 몸을 차돌리는 사이에 그의 뒤에 있던 지국천왕에게로 신형을 되짚어 덮쳐갔다. 그가 자신에게 덮쳐올 것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지국천왕은 노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왕승고에게 다시금 연환폭뢰장을 쏟아냈다. 콰쾅! 벽력 치는 소리가 터지면서 흙먼지가 하늘을 가리며 피어올랐다. 그 가운데 지국천왕은 일그러진 얼굴로 홀로 우뚝 서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왕승고는 그에게 덮쳐가는 듯 보이고는 실제로는 몸을 틀어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홀로 힘을 쓴 꼴이었다. 『불을 질러! 태워죽여라!』 밖에서 지국천왕의 노한 외침이 들려왔다. 왕승고는 동굴 벽에다 몸을 붙이고서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기혈이 미친 듯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의 연환폭뢰장은 정말 간단하지 않았다. 일대일이라면 몰라도 그런 상황에서 계속해서 그를 상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패한 것인가. 문득, 왕승고의 뇌리에 한 생각이 스쳐갔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겼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말 강했다면 그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밀리지 말았어야 했다. 잠시 숨을 고른 왕승고는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잠긴 동굴. 거기에 운지봉이 서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많이 다쳤어요?」 그녀가 전음지술로서 낮게 속삭였다. 『괜찮소. 그보다…』 입을 열던 왕승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의 입을 운지봉이 틀어막았던 것이다. 그녀는 동굴 밖을 슬쩍 내다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소리내지 말고 따라와요」 그녀의 말에 왕승고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이곳을 버려두고 말이오?」 말하는 순간에 불붙은 나뭇단이 안으로 날아들어왔다.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어서요!」 운지봉이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불꽃이 타오르고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안의 어둠은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지국천왕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심계가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러한 사람이 상대에게 농락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분노를 감추지 못함이 또한 고래의 진리인 법이다. 그는 수하들만 다치게 하고 왕승고가 동굴 속으로 도주하자 놈을 찢어 죽이고야 말겠다고 이를 갈았다. 불붙은 나뭇단을 집어던지고 있는 것도 그였다. 그의 공력은 상당한 것이었으므로 나뭇단은 상당히 안쪽까지 날아들어갔다. 불꽃이 점점 세차게 일자 밖에서도 안이 들여다 보였다. 하지만 어떻게 된 셈인지 안으로 들어간 놈은 소식도 없었다. 연기가 꾸역꾸역 몰려 들어갔지만 그 뒤로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일대가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음에도. 『어떻게 된 것일까요?』 흑백초혼이 슬그머니 옆으로 와서 물었다. 『나도 궁금하군! 들어가서 알아올텐가?』 지국천왕은 싸늘히 그들을 노려보았다. 싸움이 벌어지자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나 있던 그들이 마땅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그건…』 당황한 빛이 흑백초혼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 괴물 같은 놈이 있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라니, 죽으라는 말이나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어떻게 된거죠?』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자(使者)를 뵙습니다!』 나타난 사람을 보자, 흑백초혼은 내심 살았다 하고는 황급히 인사를 했다. 검은비단으로 전신을 둘러싼 복면인 하나가 그들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뒤로는 다섯 명 정도의 복면인이 서 있는데 얼핏보기에도 나무토막과 같아 묘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는 어떻게?』 흑의복면인을 보자 지국천왕이 미간을 가볍게 찡그렸다. 『아직 그를 잡지 못했단 말인가요? 이렇게 힘을 들이고도?』 흑의복면인이 냉소를 터뜨렸다. 그는 낯익은 사람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였다. 바로 백련교의 교화사자. 왕승고와 만난 적이 있던 그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방해자가 있었소』 지국천왕이 냉랭하게 내뱉었다. 방해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땅바닥에 쓰러진 시체와 부상자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치명상을 입었어요! 그런데도 아직 그를 잡지 못하다니… 만에 하나라도 그를 놓치는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소!』 『없다고? 그를 추적한 것이 벌써 며칠째인데? 이미 심상치 않은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 것을 천왕께서는 듣지 못했던 모양이로군요』 『그건…』 계속되는 추궁에 지국천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나를 추궁하자는 것인가?』 그의 눈빛이 싸늘히 빛나는 것을 보자 교화사자의 눈에 갑자기 웃음이 돌았다. 『어찌 감히… 다만, 그가 살아나면 지국천왕께서 어떤 처지에 빠질 것인가를 일깨워드린 것뿐이에요. 더불어, 대업이 어떻게 될 것인지… 소교주께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는걸 잊지 마세요!』 『흥!』 지국천왕은 냉소를 터뜨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소교주라는 이름을 내세우자 더이상 그와 상대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교화사자의 눈이 복면속에서 싸늘히 웃고 있었다. 산속의 어둠은 빨리 온다. 석양이 기울기 시작하자 어둠은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급격하게 달려왔다. 곰을 잡듯이 연기가 꾸역꾸역 동굴안을 채웠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밖에까지 연기가 밀려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동정도 보이지 않는다. 『들어가겠소?』 지국천왕이 교화사자를 돌아보았다. 『몸소 들어가실 작정이신가요?』 대답대신 교화사자가 되물었다. 지국천왕은 대꾸없이 성큼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찌르고 눈을 아리게 했다. 이렇게 지독한데 이토록 오래 견딜 수 있단 말인가? 내심 불안감이 엄습해오자 지국천왕은 아직 불꽃이 남아서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는 나뭇단들을 향해 슬쩍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불티가 날리는 가운데 안에서 꾸역꾸역 연기를 내뿜고 있던 나뭇단들이 숯더미가 되어 밖으로 퉁겨져 나왔다. 뒤따르던 교화사자등이 그것을 뒤집어쓰게 된 것은 물론이다. 교화사자는 내심 이를 갈았지만 지국천왕의 모습은 이미 동굴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동굴속은 그야말로 연옥(煉獄)을 방불케 했다. 지국천왕은 안력을 집중했지만 동굴 안에 가득찬 연기로 인해 뒤에서 천리화통을 들고 따라오는 부하들의 불빛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둠을 쫓아도 그보다 더한 연기 때문에 도무지 한 치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코앞에서 습격을 해와도 알 수가 없는 상황이라, 자연히 발걸음이 더딜 수밖에 없다. 『무슨 동굴이 이렇게 길지?』 교화사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꺼내자 연기를 들이마신 듯 콜록거리는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수하들이 콜록거리는 것은 이미 한참 된 일이다. 『묘하군…』 지국천왕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나직이 신음했다. 이미 상당히 깊이 들어왔다. 처음에 불을 지필 때에는 평범한 동굴이려니 했다. 사실상 겉보기에도 그렇게 깊거나 넓어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한식경을 더듬거리며 전진한 것 같은데도 동굴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침내 연기가 거의 없는 동굴광장에 그들은 도달하게 되었다. 천리화통의 빛을 반사한 동굴광장은 기경(奇境)을 연출했다. 수천 수만 년을 두고 형성된 종유석들이 신비한 형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너비가 십장가량이나 되는 대단히 넓은 동굴광장 중앙에는 연못 하나가 자리하여 물흐르는 소리가 광장을 신비롭게 울린다. 어디론가 물이 빠지는 곳이 있는 모양이었다. 『대체 어디로 간거죠?』 교화사자가 입을 열었다. 궁금하긴 지국천왕도 마찬가지였다. 얼기설기 몇군데 통로인 듯한 곳이 보이지만 사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없는 듯했던 것이다. 불현듯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라도 그를 놓치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실로 큰일이었다. 『여기 통로가 있습니다!』 그때, 그의 부하가 소리쳤다. 연못 물이 흘러나가는 곳에 은밀하게 통로 하나가 숨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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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잘보았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봅니다.
감사 드립니다
감사요
고맙습니다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