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키리는 바그너의 4부작 대하 악극 ‘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주신 보탄과 지혜로운 여신 에르다 사이에서 태어난 9명의 전사 딸들의 이름이다. 이들은 날개 달린 천마를 타고 전장을 찾아다니며 전사자들을 방패에 실어 자신들의 본가인 발할라성으로 운반하는 일을 한다.
일명 ‘링사이클’로 알려진 이 악극을 관람하지 않은 사람들일지라도 들으면 대뜸 알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한 곡이 제2부 ‘디 발키레’(Die Valkure)의 제3막 전주곡인 ‘발키리의 기행’일 것이다. 발키리들이 천마를 타고 함성을 지르며 공중을 비행하는 모습을 묘사한 이 곡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감독한 베트남전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사용돼 대중음악이 되다시피 했다.
영화에서 “나는 아침의 네이팜 냄새를 좋아한다”며 으스대는 킬고어 미군 중령(로버트 두발)이 헬기를 타고 베트콩들을 공격할 때 이 곡을 청천벽력처럼 요란하게 틀어놓고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었다. 가공스런 장면이었다.
현재 히트중인 탐 크루즈 주연 영화 ‘발키리’(Valkyrie)의 제목은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해 그를 암살한 뒤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던 독일군 장성 및 고급 영관급 장교들의 작전명 ‘발키리 작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작전은 1944년 7월20일 육본 참모장이었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폭탄이 장치된 서류가방을 동프러시아에 있는 히틀러의 작전본부 ‘늑대의 굴’의 브리핑실에서 히틀러 주재 하에 회의를 할 때 책상 밑에 두고 나와 히틀러를 암살한다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폭사하면 베를린에 있는 쿠데타 주모자들이 ‘발키리 작전’을 발동, 군 예비대를 동원해 나치 친위대와 지도자들을 체포한 뒤 정권을 장악하기로 계획했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운 좋게도 살아남아 쿠테타는 불발하고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및 4명의 공모자들은 거사 불과 몇 시간 뒤인 21일 새벽 0시30분 베를린의 당시 전쟁성 건물이던 벤들러 블록 마당에서 총살당했다. 나머지 공모자들은 이보다 훨씬 더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영화 ‘발키리’에서도 아프리카 튜니지아 전선에서 한쪽 눈을 잃는 등 중상을 입은 슈타우펜베르크가 치료 뒤 자기 집에 돌아와 가족을 만날 때 ‘발키리의 기행’이 사용된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어린 아이들이 레코드로 이 곡을 틀어놓고 칼싸움을 하는 장면인데 이를 아내와 함께 바라보는 슈타우펜베르크의 눈에 착잡한 기운이 감돈다.
나는 지난 2007년 8월에 이 영화의 제작사인 UA(크루즈는 이회사의 사장)의 초청으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동료들과 함께 촬영현장인 베를린을 방문했었다. 나는 크루즈를 만난 다음 날 동료 몇 명과 함께 벤들러 블록을 찾아갔었다. 전후 복구된 건물은 우중충한 분위기였는데 슈타우펜베르크 등이 총살당한 자리에는 쇠로 만든 레일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건물 한쪽 벽에는 처형당한 5명의 이름과 그들의 행동을 기리는 간단한 내용이 적힌 패와 함께 화환이 걸려 있었다. 총살 직전 “우리의 거룩한 독일만세”라고 외친 슈타우펜베르크는 독일의 영웅으로 취급받고 있다. 벤들러 블록 앞길은 슈타우펜베르크 슈트라세(스트릿)로 명명됐다. 히틀러에 대한 암살기도는 여러 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악마의 행운’이라고나 할까. 히틀러에 대한 독일인들의 저항운동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슈타우펜베르크 암살시도도 마찬가지다. 당시 독일 고위장교들은 나치스 당원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단지 조국을 위해 싸웠을 뿐이었다.
슈타우펜베르크의 거사는 제임스 메이슨이 롬멜 장군으로 나온 ‘사막의 여우’에서도 묘사된 바 있다. 히틀러 암살시도를 다룬 흥미진진한 스파이 스릴러가 프리츠 랭이 감독한 ‘인간 사냥’. 영국 신사로 사냥전문가(월터 피전)가 독일 바바리아 알프스 지역 베르히테스가덴의 은신처에 있는 히틀러를 라이플로 저격하려다 체포된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런던으로 도주하나 여기까지 쫓아온 독일 비밀경찰 두목(조지 샌더스)과 숨 막히는 생사의 추격과 도주의 숨바꼭질을 벌이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드라마다.
그리고 실제로 2차 대전 말기 영국은 ‘폭슬리 작전’이라고 명명된 히틀러 암살 작전을 마련한 뒤 암살자를 밀파, 베르히테스가덴의 은신처에서 칩거중이던 히틀러를 암살할 치밀한 계획을 마련했다가 취소하기도 했다.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시도 불과 9개월 뒤 히틀러의 자살로 유럽전쟁이 끝난 것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