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한국 현대시의 패러디 전개양상
전통 장르의 계승과 패러디의 보수성
서정주가 즐겨 모방인용하는 문헌설화는 『삼국유사』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가 원텍스트를 우리의 고전에서 찾았던 이유는 4·19, 5·16, 유산으로 이어지는 첨예한 당대 현실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서 시대와 역사에 대해 우회적 대응이 용이했기 때문이고, 나아가 당대의 화두였던 민중적 상상력 구축에 부응하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서정주는 일체의 ‘개인적이고 시대적인 것’에서 벗어나, 시인 스스로가 신화로 규정했던 신라적 ‘영원주의’와 ‘자연인’을의 전환을 기획했던 것이다. 특히 『질마재 신화』에 수록된 시편들은 원텍스트로서의 민담설화나 신화에 서정주의 독창적인 해석과 구연口演화법이 가미되고 있어, 패러디 동기도 분명하고 그 효과 또한 크다.
기마騎馬의 남편과 동행자 틈에
여인네도 말을 타고 있었다.
「아이그마니나 꽃도 좋아라
그것 나 조끔만 가져 봤으면」
꽃에게론 듯 사람에게론 듯
도 공중에게론 듯
말 위에 갸우뚱 여인네의 하는 말을
남편은 숙맥인 양 듣기만 하고,
동행자들은 또 그냥 귓전으로 흘려 보내고,
오히려 남의 집 할아버지가 지나다가 귀동냥하고
도맡아서 건네는 수작이었다.
「붉은 바위ㅅ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나ㄹ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꺽어 드리리다」
꽃은 벼랑 위에 있거늘,
그 높이마저 그만 잊어버렸던 것일까?
물론
여간한 높낮이도
다아 잊어버렸었다.
한없이
맑은
공기가
요샛말로 하면―그 공기가
그들의 입과 귀와 눈을 적시면서
그들의 말씀과 수작들을 적시면서
한없이 친한 것이 되어가는 것을
알고 또 느낄 수 있을 따름이었다.
―서정주, 「노인헌화가」 부분
인용된 부분은 「노인헌화가」의 후반부다. 생략된 전반부는 노인이 부른 「헌화가」를 중심으로, 후반부는 노인과 수로부인의 대화와 교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제목과 본문의 직접 인용을 통해 패러디 전경화 장치를 드러내고 있다 「헌화가」의 직접 인용과 화자의 해설적 서술로 이루어진 이 시의 구조는, 기술물(해설적 서술)과 삽입가요로 이루어진 『삼국유사』의 서술양식에 대한 모방이기도 하다. 원텍스트의 구절을 보자.
성덕왕 때에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곁에는 돌봉우리가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두르고 있어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데, 그 위에는 철쭉꽃이 만발하여 있다. 공의 부인 수로가 이것을 보더니 죄우 사람들에게 말한다. “꽃을 꺾어다가 내게 줄 사람은 없는가.” 그러나, 종자들은 “거기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하고 아무도 나서지 못한다. 이때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늙은이 하나가 있었는데,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가사까지 지어서 바쳤다. 그러나, 이 늙은이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중략) 노인의 헌화가는 이러했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저 꽃 꺾어 바치오리다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조
서정주의 「노인헌화가」에는 여러 층위의 목소리가 혼재한다. 첫 번째 층위로는 원텐스트를 그대로 전달하는 객관화된 화자의 목소리와 그것을 해석하는 주관화된 화자의 목소리가 있다. 두 번째 층위로는 『삼국유사』의 향가에 관련된 실제 인물들이 목소리가 있는데, 5연의 향가 인용 부분가 2연의 수로부인의 대사 수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세 번째로는 주관화된 화자의, 묻고 답하는 독백적 문답이 충위가 있다. 여러 층위의 여러 목소리가 공존하는 이 시의 다성성은 원텍스트의 전지적 시점의 서사구조를 복합적이고 극적인 구조로 재창출해낸다. 이처럼 전지전능한 구연의 화자야말로 서정주의 패러디 시가 가진 개성적 미학이기도 하다.
원텍스트의 향기가 신이함을 배경으로 ‘꽃’에 대한 수로부인의 미의식과 ‘수로부인’에 대한 노옹의 미의식을 형상화했다면, 「노인헌화가」는 ‘수로부인’에 대한 노옹의 직접적인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교감을 형상화한다. 그 사랑을 해석해내는 관점은 세 번이나 반복되는 ‘수작(전반부 2·4연, 후반부 4연)이라는 중심 시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격화된 원텍스트의 ’노옹‘은 신라의 늙은이’, ‘머리 흰 늙은이’, ‘남의 집 할아비’로 강등되고 있으며, ‘수로부인’ 역시 ‘젊은 여인네’, ‘남의 아내인 것도 무엇도’, ‘벼랑의 높이’도 ‘다아 잊어버린’ 노옹은 주책없는 늙은이처럼 묘사된다. 또한 ‘꽃을 꺾어다가 내게 줄 사람은 없는가(折花獻者其雖)’라고 근엄하게 말하는 원텍스트의 수로부인은, “아이그마니나 꽃도 좋아라/그것 나 조끔만 가져 봤으면”처럼 호들갑스러운 여인네로 변화되어 있다. 꽃을 주고받는 그들이 행위도 당연히 ‘수작’으로 세속화될 수밖에 없다. 신적인 차원의 원텍스트를 인간적 차원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유머가 발생하는 것이다. 유머를 불러일으키는 원텍스트와의 주요한 불일치는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 「노인 헌화가」 | |
(일연의 서술 동기) | (서정주의 패러디 동기) | |
꽃과 노래 | → | 수작/한바탕 건네인 수작/도맡아서 건네인 수작 |
노옹 | → | 늙은이/머리 흰 늙은이/남의 집 할아비 |
수로부인 | → | 젊은 여인네/남의 안사람/남의 아내 |
신이함·미의식 강조 | → | 희극적이되 지고지순한 남녀의 애정을 강조 |
「노인헌화가」에서 웃음의 대상이었던 노옹과 수로부인의 사랑은 마지막 연예 이르러서는 이상적 대상이 된다. ‘한없이/맑은’ 공기나 ‘한없이 친한’ 등의 긍정적 형용사로 수식하고, 말슴과 수작‘이라는 시어에서처럼 수작과 말씀을 동일화시킴으로써 시인은 그들의 사랑을 이상화시킨다. 즉 자신의 나이도, 신분도 현실적 조건도, 위험도 모두 잊어버린 노옹의 순수한 사랑은, 속물적인 오늘날의 사랑과 대비를 이룬다. 즉 서정주는 그가 찾고자 하는 영원한 ’사랑‘ 혹은 ’남성상‘을 형상화하기 위해, 나아가 시인이 몸담고 있는 현실의 윤리·도덕·관습을 간접 비판하기 위해 향가 「헌화가」을 재기능화시킨 셈이다.
김지하는 서정민요·노동요를 비롯한 광범위한 고전 단시들, 서사민요나 판소리, 탈춤대사 등을 풍자문학의 보고로 파악한 바 있는데, 이러한 전통 장르에 내재한 풍자적 언어들을 패러디하여 새로운 풍자시 양식을 만들어낸다. 그가 ‘담시譚詩’나 ‘대설大說’과 같은 새로운 시 양식의 창조에 골몰했던 일차적 동기는, 기존의 시로는 당시의 현실에 대응할 수 없다는 서정시의 장르적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민중지향적인 전통구비 장르를 계승·발전시키고, 당시의 정치현실에 대한 전면적인 풍자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전략적 동기 또한 더해졌을 것이다. 패러디가 사회구조적인 악의 교정·개선이라는 풍자의 목적을 위해 기여하게 될 때 패러디는 문학외적 문맥에서 그 기능을 발휘할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패러디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이와 같은 패러디의 풍자적 특성은 패러디가 사회적 문맥과 연관되고 있음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현실에 향한 풍자야말로 김지하의 패러디 동기이자 패러디 목표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낸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도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겄다.(밑줄은 필자)
―「오적 五賊」: 화자의 도입 대목
김지하는 「오적」을 발표하면서 그 독특한 시 형식을 일컬어 ‘담시’라 명명했다. 세상에 떠도는 구비전승의 ‘이야기 구조’를 지칭하는 민담에서 ‘譚’자를 차용하고, ‘노래’를 지향하는 문자로 기록된 율문이라는 뜻에서 ‘시’를 결합한 명칭이다. 청자로서의 독자가 현장에 있는 듯, 온갖 비어와 속어를 동원해 풍자적으로 직접 ‘이야기’하는 이 담시의 화자는, 논자들에 의해 (단면) 판소리로 이해되거나 판소리의 계승으로 간주되는데 기존의 서정시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당혹스러움을 안겨준다.
인용 대목은 총 326행으로 이루어진 「오적」의 시작 부분이다. 밑줄 친 부분은 판소리 「흥보젼」의 서두인 ‘북을치되잡스러이치지말고똑이러케치럇다’와 ‘내별별이상한고담한나르히야보리라’라는 구절에 대한 패러디다. 이 서두는 판소리 광대의 허두 사설辭說이 그대로 남아 있는 대목인데, 김지하가 굳이 이 구절을 차용한 것은 담시의 화자가 광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의도했기 때문이다. 「오적」의 화자는 작중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사건을 전달하는 이야기꾼으로서, 시 속의 인물을 묘사하고 사건을 엮어나간다. 서정주의 구연 화자와 비교해보자면, 김지하의 광대로서의 화자는 4·4조를 근간으로 하는 판소리 율격을 차용하고 있으며 다양한 창唱과 아니리, 발림, 추임새 등 판소리 양식을 구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다성적 목소리의 주체가 방대한 관심과 지식, 전지전능한 능력을 드러내고 있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김지하는 과거와 현재, 사설과 창과 아니리, 등장인물과 독자의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시적 화자를 선택하여 풍자의 강도를 높이를 높이고 있다.
판소리 율격을 그대로 살린 위의 첫대목에서 ‘붓끝이 험하다’,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적이 있다’는 구절은 옥고를 치룬 적 있는 시인의 전력前歷과 언론탄압이 당대 정치상황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또한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라는 구절로 기존의 시와 다른 담시의 변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첫 대목을 통해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 다음과 같다.
① 판소리 양식(그 중에서도 특히 「흥보젼」을 차용하고 있다.
② 이 시는 기존의 ‘좀스런’ 시와는 다른 시 양식이다.
③ 현실의 언로 언로가 자유롭지 못하다.(그리하여)
④ ‘도둑이야기’라는 설화적 알레고리 형식을 취한다.
「오적」은 이야기의 무대를 ‘옛날도 먼옛날 상달 초사흗날 백두산아래 나라선 뒷날’ 이라고 과거로 한정시킴으로써 현실에 대한 풍자적 거리를 획득한다. 오적과 좀도둑 꾀수의 행적이 ‘전해오는 옛날 이야기임’을 강조하는 이 설화적 관용구는 허구적 세계, 즉 알레고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한다. 이러한 장치에 의해 도둑이야기는 당대 현실의 이야기면서 과거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즉 이야기가 실제 현실과 구별되는 허구임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이와 같은 구비민담의 허구화 전략은, 화자가 현실의 세계와 허구의 세계를 자유로이 오가며 풍자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주고 독자로 하여금 당대의 현실에 대해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게끔 해준다.
비문학 장르와의 경계 허물기와 패러디의 전위성
황지우는 ‘시적인 것’의 새로운 발견과 ‘파괴의 양식화’를 위한 패러디 전략으로 1980년대의 현실구조를 탁월하게 형상화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는 다양한 비문학 장르를 차용해 재조립하거나 재해석함으로써 원텍스트의 통상적인 의미와 기존의 시 형식을 파괴하는 전위성을 확보하곤 했다. 비문학 장르에 속하는 원텍스트의 종류로는 “신문의 일기예보나 해외 토픽, 비명碑銘, 전보, 연보年譜, 광고 문안, 공소장, 예비군 통지서 등 일상의 거의 모든 프로토콜들” 이외에도 벽보, 텔레비전 프로, 음표 및 도표, 시사만화, 정치적 슬로건, 애국가, 화장실 낙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시인이 이런 비문학적이고 일상적인 형식들에 주목했던 이유는 지배이데올로기의 허위를 폭로하는 데 이 하위 형식들이 유용했기 때문이다. 황지우는 독자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에 대한 독자들의 반성적 자각을 유도해내기 위한 시적 장치로 패러디를 특화시키고 전략화한다.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오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황지우, 「심인」
1연부터 3연까지 신문의 ‘심인란(사람을 찾는 광고란)’을 그대로 옮겨놓은 후에 마지막 연에서 시적 자아의 현실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원텍스트의 객관적 인용(1연~3연)과 시적 자아의 자기발견적인 현실상황(4연)을 병치시키는 이 같은 구조는 패러디에서 쉽게 발견되는 공식이다. 원텍스트의 현실과 시작 자아의 현실을 대비시켜놓음으로써, 원텍스트의 현실과 패러디에서 쉽게 발견되는 공식이다. 원텍스트의 현실과 시적 자아의 현실을 대비시켜놓음으로써 원텍스트의 현실과 패러디텍스트이 현실이 충돌하면서 패러디 효과는 극대화된다. 1연에서 3연까지의 원텍스트는 찾는 사람의 이름, 가출 혹은 실종 날짜. 가출 사유만이 다를 뿐 1970~1980년대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심인란의 유형화된 관용구들이다. 찾고 있는 김종수·이광필·조순혜, 이 각각의 이름을 시인은 크고 진한 활자로 강조해 독자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이름들은 세 가지 층위에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사실적인 층위로, 신문 심인란 그대로의 현실적인 인물들을 지칭한다. 둘째는 역사적인 층위로, 1연의 1행 ‘80년 5월 이후 가출’이라는 구절에 유의할 때 그 이름들은 1980년 ‘오월광주’의 비극으로 실종된 사람들을 환기한다. 이때 각각의 이름들과 연락처, 가출 내용들은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환기하는 효과가 있다. 셋째는 가장 포괄적인 관념의 층위로, 상실한 혹은 실종된 이상理想의 다른 이름들이다. 시대적인 문맥에서 보자면 자유나 민주주의와 같은 사회적 이상이 되겠지만 개인적인 문맥에서는 사랑이나 가족애, 그밖의 다른 것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심인」의 패러디 핵심은 이 구제화된 이름들이 심인란의 상투적 관용구 속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구체화된 이름과 연락처들을 철저하게 익명화시킬 뿐만 아니라 구체적이고 시대적인 고통까지를 상투화시킨다. 또한 1연~3연의 현실적 다급함과 절실함은, 4연의 화장실에서 앉아 똥을 누고 있는 화자의 상황에 묻혀 희석화되는 동시에 대비적으로 극대화된다. ‘쭈그리고 않아/똥을 투’는 시적 자아의 자세는 일체의 역사적·시대적 의미가 제거된 가장 본능적이고 사적인 모습이고, 시인 스스로에 대한 냉소적 고발이기도 하다. 결국 이 시는 심인란의 상투적 형식과 ‘쭈그리고 앉아/똥을 누’는 시적 자아를 병치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시대적 고통과 진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또한 이러한 역설적 상황의 제시를 통해 시인은 독자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원텍스트의 시적인 의미를 찾고 현실을 바로 보고 그 현실의 삶을 반성하도록 한다. 타인의 아픔과 시대적 아픔에 무심한 시적 자아 및 독자의 삶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유도하는 시적 장치로 패러디를 활용하고 있다.
오규원은 한 단계ej 나아가 신문이나 대중잡지의 상품광고, 텔레비전의 광고화면, 비디오 등을 통해 기능화되고 수단화된 언어를 집중적으로 몽타주한다.
드봉 미네르바
브라 스스로가 가장 아름다운 바스트를 기억합니다
비너스 메모리브라
국회의원 선거 이후 피기 시작한
아이비 제라늄이 5,5월이 가고
꽃과 여인, 아름다움과 백색의 피부,
그곳엔 닥터 벨라가 함께 갑니다. 원주통상
6월이 되었는데도 계속 피고 있다
착한 아기 열나면 부르펜시럽으로 꺼주세요
여소야대 어쩌구 하는 국회가
까시렐-빠르쟌느의 패셔널블센스
말의 상찬이 6월에서 7월로 이사하면서
―오규원, 「제라늄, 1988, 신화」 부분
이 시도 광고문안의 객관적 인용과 정치적 현실묘사를 병렬의 방식으로 병치하고 있다. 오규원은 광고문안을 그대로 끌어다 인용한 후 당대의 정치현실에 대한 뉴스기사 문장과 엇갈려서 나열한다. 언뜻 보기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두 파편적 사실들을 독자들로 하여금 들여 쓴 부분과 내 쓴 부분을 등가로 읽을 것을 요구한다. 일종의 교차읽기cross-reading를 유도하는 셈이다. 현대사회에서 상품광고는 인간의 소비욕망을 부추긴다. 광고문안, 즉 광고가 만들어내는 기호는 가짜욕망, 최면, 허위의식, 속물성을 특징으로 하는 상업주의적 욕망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광고는 허위의 물질적 풍요를 가장하며 허위의 욕망을 자국하고, 나아가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예술현상을 일컫는 키치를 조작한다. 그러한 광고문안을 정치상황과 병치시킴으로써, 우리의 정치현실이 허위로 둘러싸인 광고문안의 나열과 같다는 것을 폭로하며 그 둘 모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특히 생간걸침enjambement의 효과를 자아내는 인위적인 행갈이와 불연속적인 리듬이 불러일으키는 파편화된 효과는, 기존이 낯익은 서정시 형식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광고가 내포하고 있는 정지성과 정치이데올로기가 내포하는 허위성을 폭로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하여 독자는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보다도 더욱 신랄한 그러나 유희적인 풍자의 공간을 경험하게 되고, 그 병치적 대조 혹은 유사가 주는 반전으로 인해 신선함을 느낀다. 예술과 현실, 문학적인 언어와 비문학적 언어, 과거와 현재, 텍스트와 텍스트 등의 간극이 붕괴되고 장르가 해체되는 데서 비롯되는 방법적 가벼움과 해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상업적 선전문구를 그대로 도입하는 오규원의 작업은 대중이 감수성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서구문학의 수용과 패러디의 진보성
패러디의 계획은 ‘언어를 달리하는’ 다른 문화에 대한 애정과 비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언어의 벽을 허무는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문화와 문화 간의 대화는 문학의 연속성과 유동성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게 하는 패러디적 재발견이다. 서구문학의 대상으로 하는 패러디는 다른 외국어를 토대로 창작된 작품을 변형하여 새로운 모국어로 확장·전환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패러디가 서구의 문학을 수용하고 그것과 대화하는 주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① 지금, 하늘에 계시지 않은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나라이 말씀이 아니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그러나 땅에서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나이다/(중략)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말해지고 있사옵니다. 언제나 출타중이신 아버지시여
―박남철, 「주기도문」 부분
② 지금 하늘에 계신다 해도
도와 주시지 않는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아버지의 나라를 우리 섣불리 믿을 수 없사오며/(중략)
제발 이 모든 우리의 얼어 죽을 사랑을 함부로 평론ㅎ지 마시고
다만 우리를 언제까지고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둬, 두시겠습니까?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이제 아버지의 것이
아니옵니다(를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 보시오)
밤낮없이 주무시고만 계시는
아버지시여
―박남철, 「주기도문, 빌어먹을」 부분
기도는 신앙인이 하나님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로다. 특히 주기도문은 서구정신을 대표하는 절대적 로고스 혹은 진리로서의 ‘말씀’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부정한다는 것은 서구문학의 전통을 부정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마태복음』은 기도의 대상과 여섯 가지의 간구, 그리고 송영의 부분을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6장 9절~13절
박남철의 시 ①②는 주기도문을 패러디한 연작시다. ①은 계신→계시지 않은, 임하옵시며→말씀이 아니며, 이루어지나이다→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나이다, 있사옵나이다→말해지고 있사옵니다와 같이 원텍스트의 긍정 서술어를 부정 서술어로 바꿈으로써 주기도문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한다. ②는 여기서 더 나아가 통사·어조·문맥의 차원에서 원텍스트에 대한 강도 높은 부정의식을 보여준다. 두 번의 괄호를 사용해 ‘일흔 번쯤 반복해 읊을’ 것을 강요함으로써, ‘~하옵시고’와 ‘이루어지이다’는 술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원텍스트에 구현된 강한 믿음의 세계를 사사건건 비아냥거리며 부정한다. 즉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하나님을 죽었다라는 철저한 무신론적 입장을 담고 있다.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보)’라는 문장을 괄호로 처리한 이면에는 종교적(설교) 담론에 대한 부정을 내포하고 있는데, 종교적 신념의 대부분이 막부가내의 ‘반복적 읊음’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또한 ‘그냥 이대로 내려려 둬, 두시겠습니까?’라는 설의적 반문과 ‘얼어죽을’ ‘빌어먹을’과 같은 비속어들이 환기하는 부정의 의미도 강하다 두 시 모두 ‘출타중’이거나 ‘주무시고만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걸 보면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전면적으로 부정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텍스트 즉 성경 속에서 보여주었던 그 권위와 근거는 크게 부정되고 있다.
―잉게 숄著. 박종서譯. 靑史. 188면 값 1,900원
“어머니 오셨어요?”
“오냐, 잘 지냈니?”
“네”
(사이……말 없음)
“애야, 내일이면, 네가 그 자리에 없겠구나”
―황지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전문
이 시는 제목과 부제를 통해 원텍스트를 전경화하고 있다. 잉게 숄의 넌픽션소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나치즘에 대항하여 저항운동을 펼치다 죽은 뮌헨대 학생들의 생활을 묘사한 작품이다. 죽음을 불사한 학생운동가들의 투쟁을 그린 원텍스트의 상황을 패러디텍스트에 그대로 반복함으로써 황지우는 우회적으로 1980년대의 우리 현실을 고발한다. 원텍스트의 상황을 반복함으로써 패러디텍스트가 놓인 문맥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재맥락화를 하고 있다.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부제의 ‘188’면이라는 패이지 숫자다 시인이 부제로 밝히고 있는 ‘잉게 숄著. 박종서譯. 靑史. 값 1,900원’에 해당하는 원텍스트는 187면의 “역자의 말”에서 끝나 있다. 165면에서 소설은 끝이 나고. 187면에서 후기인 ‘역자의 말’ 조차도 끝나고 있다. 187면에서 후기인 ‘역자의 말’조차도 끝나고 있다. 187면의 ‘역자의 말’은 다음과 같다.
마지막 면회에서 어머니가
「이제 너의 방은 언제나 비어 있겠구나」
하고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말씀을 하시자, 죠피는
「엄마 1~2년이면 끝날 거예요」
하며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이 말은 나찌의 파멸을 확신하고, 마지막 한순간까지 저들이 파멸 뒤에 오는 자유의 날을 기다리겠다고 확고한 결의를 나타내고 있다.
이보다 20여년 전에 프란츠 카프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유로운 자는 항상 태연하고 조용하다 ― 비록 처형당하기 직전이라도」
이렇게 그들은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까지 아니 앞으로도 길이 독일 학생들의 귀감이 될 것이다.
황지우가 부재로 제시한 188면은 원텍스트에서는 백지다. 그러니까 시인은 역자의 말이 끝난 그 다음의 백지 페이지, 즉 188면에 죠피가 처형되기 직전 어머니와 나눈 원텍스트 187면의 마지막 대화를 재구성해서 써넣음으로써 우리 현실을 풍자한다. 원텍스트의 ‘이제 너의 방은 언제나 비어 있겠구나’가 황지우 시에서는 ‘애야, 내일이면 네가 그 자리에 없겠구나’가 변형되고 있다. 전자가 기다림의 의미가 여운처럼 남아 있다면, 후자는 부재 그 자체만을 강조한다. 원작자는 나치의 파멸을 확신하고 자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기 때문에 ‘「엄마, 1~2년이면 끝날 거예요」’라는 대사로 끝을 맺는 반면, 패러디스트에게 그러한 신념을 보이지 않는다. 단지 ‘네가 그 자리에 없다’라는 사실만을 드러내는데, 더욱 암울한 패러디텍스트의 정치현실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읽혀진다.
이 시의 경우, 독자가 원텍스트에 대해 정보를 가지고있지 않으면 시의 해석 및 패러디 동기나 목적 등을 올바로 이해하기 힘들다. 1연의 인사말이 어떤 상황에서 오가는 것인지, 2연의 말없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3연의 ‘자리에 없음’이 또 무슨 의미인지 불분명하다. 원텍스트의 상황, 즉 학생·민중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처형될 죠피와 그 어머니와의 마지막 면회 장면을 패러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이해될 수 있다. 특히 부제에서 원텍스트의 역자·출판사·가격까지를 명시한 것은, 반드시 그 번역서여야만 ‘188면’의 의미가 살아날 수 있고 시 전체의 의미가 전달 될 수 있다는 패러디스트의 의도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제목과 부제를 기발하게 활용해 패러디 동기를 숨겨두고 있는 셈이다. 이때 원텍스트가 환기하는 서구의 역사적 상황(나치즘의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운동)은 폭력적인 우리의 정치현실(1970~80년대 독재정권에 대한 대학생들이 저항운동)을 풍자하기 위한 진보성을 발휘한다.
한국 현대시 간의 교류와 패러디의 이념성
동시대 독자를 사로잡았던 유명한 텍스트는 정전화되어 후배시인들에 의해 제조명되곤 한다. 길지 않은 현대시사에서 현대시를 원텍스트로 하는 패러디의 양상은, 중심 이미지나 서술어에서부터 시의 구조 및 시정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다닥다닥다닥다닥다닥다닥다닥다닥다닥다
凹凸한 지붕들, 들어가고 나오고,
찌그러진△□들, 일어나고 못 일어나고,
찌그러진 ♂♀들
88올림픽이 오기 전까지의
新林山 10洞 B地區가
보인다
‘해야 솟아라 지난 밤 어둠을 살라 먹고 맑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솟지 마라
原註: 따옴표 안에 인용된 구절이 박두진 「해」의 일부라는 것을 밝히는 것 자체가 불경이다. 그러나 나의 불경은 소년 시절엔 전편을 암송했던 이 시를 모조리 까먹었다는 데 있지도 않고, 겨우, 혹은 무의식적으로, 생각난 이 구절이 과연 맞게 인용된 것인지 더 이상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기억이여, 제발 맞아라! 정말 눈물겹도록 이 日出이.
―황지우, 「‘日出’이라는 한자를 찬, 찬, 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부분
이 시는 산동네의 이참풍경을 각종 도형과 기호를 차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그 풍경은 ‘찌그러진’이라는 형용사에 집약되어 있는데, 아침 해가 너무 쉽게 잠자리로 들어올 수 있는 주거환경, 아참에 못 일어나게 하는 피곤한 노동, 일어나도 갈 데 없는 실업상태 등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풍경과 대비를 이루고 있는 것이 ‘88올림픽’과 ‘고운 얼굴의 해’인데, 특히 ‘88올림픽’과 등가의 이미지로 직접 인용된 박두진의 시 구절은 시인의 패러디 대상이자 목표물이다. 원텍스트를 인용한 후 그와 반대되는 부정서술어 ‘솟지마라’를 이어 진술함으로써 원텍스트를 뒤집고 있다. 인용따옴표로 전경화된 원텍스트는 패러디스트에 의해 변형되어 있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 이글 애뙨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밑줄은 필자)
―박두진, 「해」 부분
황지우는 원텍스트의 밑줄 친 부분을 중심으로 ‘해야 솟아라 지난 밤 어둠을 살라 먹고 맑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라고 간략하게 재구성한다. 이렇게 재구성한 이유에 대해 원텍스트를 ‘까먹었’으며 또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원주原註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확인하지 않’은 것이 바로 원택스트에 대한 불경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듯 능청을 떨고 있다. “해야, 고운 해야. 늬가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라고 노래하는 원택스트의 눈부신 ‘해의 솟음’은, 그러한 ‘해의 솟음’에비유되는 현실의 ‘88올림픽’은 찌그러진 산동네의 집들과 찌그러진 암수부호로만 취급되는 도시빈민의 현실에서 볼 때 한낱 허구나 허세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긴 원주를 통해 역설적·우회적으로 기능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원주는 원텍스트를 전경화시킬 뿐만 아니라 원텍스트에 대한 태도와 패러디 전략을 동시에 드러낸다. 사실 이 시가 ‘불경’스러운 것은 대선배 시인의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이 ‘불경’스러움을 간접화시키고 아이러니의 시적 장치를 위해 원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는 의도적으로 원텍스트에 대한 불경스러움의 원인을 자신의 게으름으로 돌리며 원텍스트의 문학적 권위와 규범에 대한 도전을 시도한다.
황지우의 시가 한 편의 작품을 원텍스트로 하는 것이라면, 박상배 시는 여러 작품을 원텍스트로 한다.
①내 누님같은 생긴꽃아 너는 어디로 훨훨 나들이 다니다가 지금 되돌아와서 수줍게 수줍게 웃고 있느냐 ②새벽닭이 울 때마닥 보고 싶었다. ③꽃아 순아 내 고등학교 시절 널 읽고 천만번을 미쳐 밤낮없이 널 외우고 불렀거늘 그래 지금도 ④피가 잘 돌아가고 있느냐 잉잉거리느냐 새삼 보아하니 이젠 아조아조 늙어 있다만 그래두 내 기억 속에 깨물고 싶은 숫처녀로 남아 있는 서정주의 ③순아 난 잘 있다 오공과 육공 사이에서 민주와 비민주 보통과 비보통 사이에서 잘도 빠져 나가고 있단다. 그럼 도 만나자 ③꽃나비꽃아(밑줄과 번호는 필자)
―박상배, 「희시戱詩·3」 전문
이상적인 패러디 독자는 패러디텍스트를 구성하는 수많은 인용과 인유가 구조적으로 어떻게 짜여 있는가를 풀 수 있어야 한다. ‘희시戱詩’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인용시는 서정주의 여러 시편들을 짜깁기하여 만든 패러디의 유희적 기능이 강조된다. 특히 이 제목은 전통 한시에 대한 패러디 양식이었던 조선 후기 김삿갓의 희시를 연상케 하는데, 제목에서부터 기존 시 장르를 희롱하고자 한 의도를 드러내면서 전체적으로 유희적 문체를 구사하고 있다. 패러디 텍스트에 밑줄 친 부분의 원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①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국화 옆에서」
②내 너를 찾아왔다……유나臾娜.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새벽닭이 올 때마다 보고 싶었다…: 「부활」
③꽃아, 아치마다 개벽하는 꽃아.: 「꽃의 독백」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밀어」
밤이 깊으면 숙淑아 너를 생각한다. 달래마늘 같이 쬐그만 숙아: 「밤이 깊으면」
④피가 잉잉거리던 병은 이제 다 나았습니다.: 「사소娑蘇 두번째의 편지 단편」
「희시戱詩」의 창작 동기를 시인 스스로 “유독 서정주의 시들은 나의 애송시에 속했다. (중략) 아직도 내 의식의 주변부에 아무렇게나 까려 있는 이 추억물을 불시에 그냥 내뱉은 것이 「희시」가 된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박상배의 패러디텍스트는 서정주의 여러 편의 시들에서 일부를 가져와 한 편의 시를 구성한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표절이나 도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이 시가 의도된 짜깁기 방법에 의거한 ‘희시’로서의 작품일 뿐만 아니라 시인 스스로 원텍스트의 근거를 ‘서정주의 순아 난 잘 있다’라는 구절 등을 통해 작품 속에 전경화시켜 놓고 있기 때문이다. 패러디텍스트는 중간 부분의 ‘잉잉거리느냐’와 ‘새삼’을 경계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가 시인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되는 서정주의 여러 텍스트에 대한 기억의 파편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후반부는 화자의 현재 상황에 대한 냉소적 인식을 드러낸다. 이 두 부분은 서정주의 시를 외우던 ‘고등학교 시절’의 시적 화자와, 오공·육공 시절을 통과해온 중년을 넘은 시적 화자를 대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때 짜깁기된 원텍스트들은 시인의 과거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는 기억의 편린들이다. 물론 독자들에게도 그 원텍스트들은 1850년대, 1960년대의 풍경과 정서를 환기하는 기능을 한다.
혼성모방적 짜깁기에 의한 이러한 패러디는 원텍스트가 가진 해석적 권위와 근거 자체에 무관심하며, 따라서 원텍스트에 대한 계승이나 비판·풍자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단지 역설적·반어적·유희적 어조에서 비롯되는 가벼운 희극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특징은 표절에 유희성과 전략성을 첨가시킨 ‘표절유희play-giarism’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후배 시인은 선배시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선배시인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재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영향에 대한 불안에 초점을 맞춰 박상배는 선배시인의 영향력을 유효화시켜 전략적으로 역이용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시적 상실과 시적 성취라는 두 가지 국면을 동시에 드러낸다. 문학의 독창성·원본성은 물론 그 진정성까지를 회의케 한다는 점이 시적 상실이라면, 글쓰기의 자유로움과 해방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또 다른 시적 성취이기도 하다.
최근이 패러디는 점차 극단화되는 추세다. 원텍스트의 작품 전체를 그대로 차용한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때 패러디스트는 원텍스트를 그대로 복사해내는 동시에 원텍스트에 의문을 던진다. 결과적으로 원텍스트에 대한 시적 논평을 제공한다. 패러디스트란 보다 전문적인 독자나 비평가로서 원텍스트를 인식하는 자임을 재확인하는 셈이다.
아빠, 나도 진짜 총 갖고 싶어
아빠 허리에 걸려 있는.
이 골목에서 한 놈만 죽일테야
늘 술래만 되려 하는
도망도 잘 못 치는
아빠 없는 돌이를 죽일 테야
그 눔 흠씬 패기만 해도
다들 설설 기는데,
아빠,
〔黃東奎, 「아이들 놀이」,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서울, 문학과지성사,, 1989)〕
―박남철, 「묵상: 예수와 술래」 전문
인용시는 황동규의 「아이들 놀이」를 글자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뒤, 제목만 「묵상: 예수와 술래」로 바꿨다. 시 하단의 〔 〕에 원텍스트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원텍스트인 황동규의 「아이들 놀이」는 살벌한 삶 혹은 현실의 질서를 ‘아이들 놀이’라는 우화를 통해 드러낸다. 아빠 없는 ‘돌이’는 늘 술래만 되려 하고 도망도 잘 못 친다. 우리 사회의 힘없는 자 혹은 쇠외된 자를 대변하고 있으며 또다른 측면엣 비굴한 자를 대변한다. ‘나’는 약한 자이자 비굴한 자의 전형인 돌이를 제거함으로써, 연민의 대상을 제거하고 약한 자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강자로 인정받으려 한다. 양육강식의 폭력성과 폭력배의 생리를 닮은 권력의 폭력성을 아이들 놀이를 통해 보여준다. 이렇듯 황동규는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선과 악, 양심과 폭력, 진실과 억압의 갈등을 아이의 목소리를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원텍스트는 강자:약자, 지배자:피지배자, 위정자:민중의 권력구조에 대한 알레고리인 것이다.
원텍스트의 전문을 그대로 인용한 후 ‘묵상: 예수와 술래’라고 제목만 바꿔달고 있기 때문에 이 시 역시 패러디 동기와 패러디텍스트의 의미는 제목에 의해 완성된다. 첫째는 말없이 조용히 생각하거나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뜻의 ‘묵상’이라는 시어를 굳이 제목에 의해 완성된다. 첫째는 말없이 조용히 생각하거나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뜻의 ‘묵상’이라는 시어를 굳이 제목에 끌어들인 것으로 보아, 원텍스트에 대한 비아냥거림 즉 ‘원텍스트의 의미가 너무 고차원적이라 나는 묵상한다. 그러나 묵상을 해도 그 의미는 모르겠다. 이 현실에서는 과연 누가 술래인가, 그 술래가 바로 예수가 아니겠는가’라는 냉소적 의미로 해석된다. ‘묵상’이라는 단어 또한 원텍스트에 대한 딴지걸기로서의 비평적 고찰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둘째, ‘예수와 술래’라는 단어를 통해 원텍스트의 ‘술래’가 수난의 대명사 ‘예수’와 상관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박남철은 원텍스트의 ‘늘 술래만 되려 하는/도망도 잘 못치는/아빠 없는 돌이’의 모습에서 바로 예수를 읽어낸다. 어쩌면 ‘돌이’에 문단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시인 스스로를 투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텍스트의 일상적 혹은 정치적 알레고리는 패러디텍스트에서 종교적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관점만을 암시할 뿐 그 결과적 의미는 고스란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두고 있다. 박남철은 원텍스트를 그대로 복사해 단지 제목 하나만을 바꿔놓고는 독자에 따라 시의 의미를 다르게 읽힐 수 있는 텍스트의 미결정서에 기여하도록 한다. 반복이란 항상 본질적으로 위반이고 예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용시와 같은 동일한 반복은 가장 위반적이다.
―정끝별, 『패러디』, 모악, 2017, 33~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