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시편 62편 1-6절
설교제목 : 내가 배운 두 가지
별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건강하셨습니까? 무더위는 지속되고 있지만, 가을을 알리는 입추가 되었습니다. 이런 절기가 기후위기로 조금은 무색해졌습니다. 하지만 한 여름의 뜨거운 사자의 열기가 정점에 이르면, 곧 그 힘은 기울어지고 반드시 새로운 시간이 도래합니다. 새로운 계절을 모셔들이기 위해 이 여름을 잘 나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으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이에 한국은 두 나라에서 눈치를 보아야 하는 미묘한 문제를 야기하였습니다. 경제 위기와 코로나 위기 속에서 정치, 경제 패권을 주도하기 위한 강대국의 치열한 싸움이 더욱 예고하고 있습니다. 불확실하고 불안이 가중되는 세상에서 마음이 답답함은 가 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게오그르 루카치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는 《소설의 이론》에서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되는 것이다.” 별의 지도도, 어둔 밤을 밝힐 별빛도 잃어버려, 길을 헤매는 시대에 있지만, 모험에 찬 걷기를 해나갔으면 합니다. 무당의 아들이었던 공자는 끊임없이 스승을 찾아 걸었고, 스스로 스승이 된 이후에도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걷고 또 걸었습니다. 하층민의 공자, 흙수저 공자가 업그레이드 된 것은 학습 때문이었습니다. 습習은 스스로 날개 짓을 하는 것이 습의 뜻입니다. 스스로 좋아서 날개 짓하는 배움을 멈추지 않았고, 걷기를 계속 해나갔습니다[김응교(2015) : 곁으로, 새물결플러스, p13-23]. 때로 고단할 때는 쉬어가고, 때로 대화하며 걸어가다 보면, 낯선 세계는 친숙해지고, 모험으로 가득 찬 세계는 결국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행여 길이 없어도, 희망이 없어 보여도 좋습니다. 마음의 별을 따라 스스로 길을 내어가면, 자신이 떠나간 길 뒤에는 길이 생기고, 더불어 새로운 삶을 향해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잠잠히 기다려라
오늘 시편 62편의 표제는 “지휘자를 따라 여두둔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다윗의 시”입니다. 시편 39편에서 여두둔은 레위 자손 중 성전 찬양대를 이끌었던 사람입니다. 이 시편은 여두둔을 따라 이름을 붙인 성전 찬양대가 낭송한 것으로 보입니다. 곤경에 처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을 당당히 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고통스러운 상황은 3절과 4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기울어가는 담과도 같고 무너지는 돌담과도 같은 사람을, 너희가 죽이려고 다 함께 공격하니, 너희가 언제까지 그리하겠느냐? 너희가 그를 그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릴 궁리만 하고, 거짓말만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저주를 퍼붓는구나.”
기울어가는 담과 무너지는 돌담은 붕괴 위험이 있는 울타리의 형국입니다. 허물어져가는 담처럼 위태한 인생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담은 일종의 경계이자 보호, 원리를 가리킵니다. 자신을 든든하게 보호해주던 울타리가 무너지려고 하는데, 대적자들이 공격하여 완전히 부수어 버리고자 합니다. 약해질 때로 약해져 기울어가는 취약한 자아를 마구 흔들어대며 공격하고 있습니다. 불이 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처럼 버틸 힘조차 잃어가고 있는 이를 마구 흔들어댄다면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떨어뜨려 망하게 하려고 궁리하며, 겉으로 친구 행세하지만, 속으로는 거짓과 저주를 퍼부으며 생명을 노리는 대적자들로 굴복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살벌한 전쟁터 같은 세상의 모습일 것입니다. 성취와 목표 중심 사회는 무한 경쟁이라는 미명 하에 경쟁자의 약점을 잡으면 물고 늘어져 죽이려 달려듭니다. 앞서가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떨어뜨릴 궁리를 합니다. 비틀거리며 멀미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인은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인생의 절박함 속에서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을 기다림은 나의 구원이 그에게만 나오기 때문이다(1).”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기다려라. 내 희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5).”
왜 시인은 내가 하나님만을 기다린다고 하지 않고,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하는 것일까요? 나에 대한 공격과 비난이 일어나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을 때, 영혼은 불안해하고, 깊은 상처를 받아 절망하며 자포자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공격에서 내 안에 있는 혼이 위기를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나의 감정과 정서에서 일어나는 불안과 절망을 다독여야 합니다. 고통받은 영혼에게 잠잠히, 조용히, 침착하게 기다리라고 말해야 합니다. 위기에 처하고, 불안으로 안절부절하면 조급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에게 말을 걸어 침착하게 기다리라고 다독여야 합니다.
무엇을 희망 삼는가?
그런데 이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잠잠히 기다리기 위해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나의 구원은 하나님께로만 나오고, 나의 희망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힘을 의지하고 재물을 기대어 그것을 희망삼아 삶을 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 실제적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10절에서 “억압하는 힘(또는 힘)을 의지하지 말고, 빼앗아서 무엇을 얻으려는 헛된 희망을 믿지 말며(탈취한 것에 헛된 희망을 두지 말아라), 재물이 늘어나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아라”합니다.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권력에 의지하려 하고, 거둔 재물에 희망을 두며 살려 합니다. 이런 힘과 재물에 희망을 두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희망삼을 수 없는 법입니다. 요즘 제 자신을 성찰하며 돌아보곤 합니다.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고, 이런 저런 역할들이 외적으로 부여되면서 자아의 힘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힘이 들어가면 갈수록 내면과의 관계는 부실해지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종종 내담자들이 고통 속에서 무언가를 기대할 수 없는 척박한 처지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또한 스스로 열등감과 실패, 좌절 속에서 희망을 품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척박하고 고통스런 외적 상황과 스스로 규정한 한계상황에서 꿈은 놀랍게도 엄청난 자원으로 북돋아줍니다. 그의 내면에 귀중한 자원이 있음을 깨닫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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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권력도 재물도 아닙니다. 나에게 희망을 주는 것도 안락한 집도, 든든한 통장잔고도, 자녀의 성공과 출세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희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고 그분을 희망삼는 자는 고통스런 삶의 자리에서도 삶의 희망을 꽃피울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배운 두 가지
시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에 두 가지를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권세는 하나님의 것’이요, ‘한결같은 사랑도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11b-12a).”
자신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고통과 체험을 통하여 배운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첫째, 힘은 하나님께 속한 것, 다른 번역에서는 힘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한결같은 사랑, 인자함은 주님께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힘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 세계와 인생을 다스리시고 운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은 내 군사력과 재물, 내 힘과 자랑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력이 우리를 지상에 살게 하듯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힘이 이 세계를 다스리고 있음을 체득한 것입니다. 또한 한결같은 주님의 사랑이 우리 인생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계심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백성아, 언제든 그만을 의지하고, 그에게 너희의 속마음을 털어놓아라(8)고 권고합니다.
우리 시대는 부당한 과대망상으로 인간과 국가 제도가 구원자의 역할을 떠맡고 구원자의 위치에 올라가 있습니다. 이 과대망상은 인간을 팽창의 위험 속에서 높은 곳에 줄타기하며 불안하고 위태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의 과대망상을 보려하지 않습니다. 연금술사들은 하찮은 물질을 고귀한 물질로 변환하는 작업을 수행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겸손을 강조하고 그들의 실험과 글에는 하나님의 도움을 간청하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힘과 사랑으로 자신의 작업이 완수될 수 있음을 굳게 붙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힘과 사랑이 우리를 이끄시며 우리의 여정을 완성해가심을 신뢰하며, 확신 가운데 길을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