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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제사장의 의복(4) - 에봇의 재료
“그들이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이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이 쓸 것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이니라 그들이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에봇을 짓되 그것에 어깨받이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이어지게 하고 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 짜는 법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에봇에 정교하게 붙여 짤지며 호마노 두 개를 가져다가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그들의 나이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 새기라 보석을 새기는 자가 도장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테에 물리고 그 두 보석을 에봇의 두 어깨받이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워서 기념이 되게 할지며 너는 금으로 테를 만들고 순금으로 노끈처럼 두 사슬을 땋고 그 땋은 사슬을 그 테에 달지니라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반듯하게 하고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테에 물릴지니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순금으로 노끈처럼 땋은 사슬을 흉패 위에 붙이고 또 금 고리 둘을 만들어 흉패 위 곧 흉패 두 끝에 그 두 고리를 달고 땋은 두 금 사슬로 흉패 두 끝 두 고리에 꿰어 매고 두 땋은 사슬의 다른 두 끝을 에봇 앞 두 어깨받이의 금테에 매고 또 금 고리 둘을 만들어 흉패 아래 양쪽 가 안쪽 곧 에봇에 닿은 곳에 달고 또 금 고리 둘을 만들어 에봇 앞 두 어깨받이 아래 매는 자리 가까운 쪽 곧 정교하게 짠 띠 위쪽에 달고 청색 끈으로 흉패 고리와 에봇 고리에 꿰어 흉패로 정교하게 짠 에봇 띠 위에 붙여 떨어지지 않게 하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을 것이니라(출28:4~29).”
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
에봇은 대제사장이 입는 특별한 옷이다. 일반 제사장들은 에봇을 입지 않고 긴 두루마기 같은 옷을 입는다. 그런데 대제사장만 에봇을 입었다. 이 에봇은 어깨받이와 흉패를 붙이기 위한 옷이다. 이것은 금실과 베실을 섞어 짜서 만들어졌다. 금실은 황금색이고, 베실은 청색, 자색, 홍색, 백색이다. 전체가 다섯 가지 색을 짜서 만든 천이다. 우리가 만약 그것을 실물로 만들어 본다면 색깔이 굉장히 아름다울 것이다.
금실은 황금색으로 신성을 상징하는 색깔이고, 청색 자색 홍색 백색의 실은 인성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청색은 하늘의 색깔, 자색은 왕의 색깔, 홍색은 생명과 구속의 색깔, 백색은 정결한 인성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청색 자색 홍색 백색의 색깔이 있는 셈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황금색 즉 신성한 색이 있다. 결국 이 구성 요소로 봐서 이 천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며, 인격을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천은 “정교하게 짜서” 라고 되어 있다. 짜여져 있다는 것은 각기 실의 성질은 그대로 있으면서 그것이 서로 물려 있다는 뜻이다. 합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짜여져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하는 의미가 여기서 나온 말이다. 제 삼의 어떤 것이 만들어져 버린 것이 아니라 그 색깔이 있는데 그것이 짜여져 있다. 신이 인간이 된 것이 아니고, 말씀이 인격과 함께 짜여져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볼 때 ‘신이 인간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안 된다. 신성이 있지만 그 신성은 인간성 속에 짜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뜻은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 안에 짜여져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또 신이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나라는 존재는 그대로 있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신성이 짜여지는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기독론에 관한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제일 어려운 것이 기독론이다. 하나님 하면 간단한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신성이냐 인성이냐 하는 문제 때문에 굉장히 어렵다. 이 문제 때문에 기독론이 생겼다. 일곱 가지 종류의 학설이 있다.
①‘도세티스트’라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신성만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인성을 부인하고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신이었는데 우리 눈에 보이기에 인간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때문에 요한 일, 이, 삼서 가 쓰여졌다.
②‘에비오니스트’라고 하는 사람들은 인성만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신은 아니고 단지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인간 중에서 으뜸가는 인간, 대표적인 인간이라고 한다. 이 두개가 기본이 되어서 또 다른 이론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③‘아리안’이라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신성은 있지만 불완전하다. 그래서 피조물 중에 으뜸인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신성은 불완전하고 피조물 중에서는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④‘아폴리나리안’이라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불완전하고 신성만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다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
⑤‘네스토리안’이라는 사람들은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⑥‘유티키안’이라는 사람들은 구별되면서도 같이 있다고 하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융합설을 주장한다. 구별되지 않고, 화학적으로 융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짜여 졌다는 말은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동재한다는 말이다. 여러 가지 색깔들의 실들이 짜여져 있는 것은 색깔로는 구별되어 있으면서 천이라는 상황 속에 동재하는 것, 같이 있는 것이다. 구별되면서도 동재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것을 부인하고 융합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나가서 말씀을 전할 때 잘못 하면 이 여섯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에 걸릴 수 있다. 오해되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또 우리가 가져야 할 입장은, 그리스도께서는 인성과 신성을 소유하시면서 그 분의 인성과 신성은 완전하시고, 그런데 그것이 한 인격체 안에서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인격체 안에서 연합되어 있다.
에봇을 짜는 천속에 금실과 베실이 함께 짜여져 있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의 그림이다. 만일 에봇이 아니면, 그 천이라는 상황이 없으면 둘은 분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천이라는 사정 속에 둘은 동재하고 있다. 같이 하나로 있는 것이다. 한 인격체 안에 연합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 따로, 인성 따로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한 인격체 안에 연합되어 있다. 짜여져 있다. 분리되면서도 동재한다. 제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에 대해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요20:28)”이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예수님 자신은 항상 “인자(요12:23)”라고 하신다.
예수를 하나님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하면,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한 것이다. 그 때는 사람이 아닌가? 이것이 헷갈리는 문제이다. 한 인격체를 모르면, 다시 말하면 그 천 자체를 모른다면 어려운 문제이다.
에봇 안에서 짜여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어 있다. 이것은 교회를 보면 알 수 있다. 교회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다. 색깔도 다르고 다 다르다. 아무리 은혜가 있다 하더라도 다 색깔이 다르다. 그런데 어디서 하나인가 하면 한 인격체 안에서 하나이다. 교회라는 단체적인 인격 안에서 우리는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푸르고 어떤 사람은 붉은데, 그것이 한 인격체 안에서 하나인 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것은 이론적인 것보다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이것을 못 보고 생각만 하게 되면 이론이 끝이 없다. 교회를 보면 이것을 이해하면 쉽다. 천을 놓고 보면 쉬운 것처럼 교회를 놓고 보면 짜여져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고 함께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한번 짜여진 천은 마음대로 분리되어 나간다든지 왔다 갔다 할 수 없다. 한번 천으로 짜여지면 그대로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청색 실은 청색 실이고 백색 실은 백색 실이고 금실은 금실이다. 그것이 없어져 버리고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제 3의 어떤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성이 더해진다는 것은 합해진다는 뜻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어떤 것에 연결되어 신성이 더해진다고 생각한다. 연결된다는 말은 나는 인간이지만 기도를 통해서 또는 믿음을 통해서 항상 관계를 가지고 항상 그분에게서 무엇인가를 받아서 내가 시행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줄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관계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관계만 있지 같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짜여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짜여져 있다는 개념을 포착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짜여진 것이다. 어떻게 짜여지는가? 금실과 베실이 어떻게 짜여지는가? 짜여지기 위해선 둘 다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금도 금덩어리로는 같이 짜여질 수가 없다. 금이 실로 가늘게 만들어져야만 베실과 섞일 수 있다. 베실도 마찬가지다. 원래는 삼베이다. 그것이 과정을 거쳐서 실로 뽑아져야 한다.
실로 뽑는 기술을 방적 기술이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베로 짜는 것을 방직 기술이라 한다. 그래서 방적회사가 있고 방직회사가 있다. 실 뽑는 공장이 있고, 베를 짜는 공장이 있다. 실 뽑는 공장은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고 베를 짜는 공장은 연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을 좋게 뽑아야 좋은 베를 짤 수 있다.
실이 나쁘면 좋은 베를 짤 수 없다. 실을 뽑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우리가 한 인격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고, 방직하는 것은 연합을 해서 하나의 천이 되는 과정이다. 짜여진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으로 발전했다. 말씀이 육신 되었다는 것은 방적을 통해서 방직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과정을 거쳐야 사람과 연합이 되지,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하늘에 계신 분으로는 사람과 연합할 수가 없다. 사람 역시 과정을 거쳐야 하나님과 연합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는 십자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방적이 안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합이 불가능하다.
하나님도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분이 산으로 내려오셨고, 산이 계신 분이 성막으로 내려오셨고, 성막으로 내려오신 분이 다시 사람에게로 내려오는 그런 과정을 겪으셨다. 과정을 겪는 동안에 자기 자신은 상당한 손상을 입을 수도 있고, 상당한 고통을 입을 수도 있다.
우리가 십자가로 가는 길이 내가 생각하는 것, 내 주장, 내 모든 것이 다 끝나고 오직 그 분의 필요만 남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도 사람과 연합하기 위한 것만 남고 나머지는 다 없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어떤 사람들은 구약에 있는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홍해 바다를 가르는 것, 여리고 성을 무너지게 하는 것, 불덩어리를 내려 250명을 죽인 하나님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은 사람과 그냥 연합할 수가 없다. 그런 하나님이 많은 과정을 거쳐서, 방적과정을 거쳐서 금실이 될 때만 천이 될 수 있다. 하나님도 그런 것을 포기하신 것이다.
그런 상태로 있어서는 사람과 연합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성질로서의 하나님을 포기하고 사람과 연합할 수 있는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것이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처녀가 잉태하기까지, 하나님도 그만큼 과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에봇은 결국 하나님의 신성과 사람의 인성이 과정을 거쳐서 짜여진 옷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신성과 그 인성이 한 인격 안에서 짜여진 분이다. 오늘 교회는 무엇인가? 같은 원리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한 인격체 안에서 짜여진 것이다. 그래서 에봇은 교회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모양이다. 금실이 베실과 함께 짜여졌으므로 교회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모양이다.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 흉패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흉패와 어깨받이이다. 흉패는 가슴에 다는 것이고, 어깨받이는 어깨에 메는 것이다. 이것들은 에봇에 부착이 되어 있다. 사실 에봇은 이것을 위해서 만들어진 옷이다. 이것을 붙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흉패와 그 기능은 어떤 것인가? 흉패는 어떤 변화를 상징한다. 흉패는 전부 보석이다. 12개의 보석이다. 보석은 전부 변화한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이 보석으로 변화되어서 가슴에 붙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판결 흉패라 한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는 인도 흉패라고도 한다. 왜 판결 흉패라고 하는가? 그 속에 우림과 둠밈(Urim and Thummim)이라는 것을 두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어느 지파 보석이 빛이 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가 어느 쪽으로 가는지 판결했다.
그런 판결이 돼야만 인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판결 흉패라고도 하고 인도 흉패라고도 한다. 그 목적은 인도하는 것이다. 인도하기 위해서는 판결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판결해야만 어느 쪽으로 갈지 알게 된다.
로마서 8장 1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예를 들어 유다 지파의 보석이 반짝거렸다면 하나님의 뜻이 거기 있다는 것이다. 그런 뜻이 전부 거기서 나온다. 신약을 쓸 때 이 사람들이 그냥 쓴 것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구약의 관념이 박혀 있는 사람들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 박혀 있기 때문에 그 개념을 가지고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림과 둠밈이 신약에 오면 하나님의 영이 된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판결 흉패는 어떻게 해서 판결이 되고 인도함이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옷을 입는 순서와 연관이 있다. 옷을 입을 때는 어떻게 입는가? 여기서 계시하는 순서는 흉패부터 계시되어 있지만, 사람이 입을 때는 흉패부터 입는 것이 아니다. 속옷을 먼저 입고 그 위에 겉옷을 입는다. 속옷에서 겉옷까지는 모든 일반 제사장과 같이 입는다. 그런데 대제사장은 그 위에 에봇을 다시 입는다.
그 에봇 위에 어깨받이와 흉패를 붙이게 되어 있다. 이런 순서로, 속옷 겉옷 에봇 어깨받이 흉패를 입으면 정장이 된다. 이럴 때 판결 흉패가 작동한다. 옷은 우리의 인격을 상징한다. 우리 인격의 행위를 상징한다. 우리가 속부터 겉까지 완벽하게 옷을 입어야 한다.
타락한 사람은 적신, 곧 옷을 벗는 것이 부끄러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고 되어 있다. 창세기 2장 마지막에 보면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5).”고 되어 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 오면 무화과 입으로 가렸고, 가죽옷을 입혔다고 되어있다(창3:7,21참) 왜냐하면 벌거벗은 것은 부끄러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것은 부끄러움과 죄악의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창세기 2장에서 벌거벗은 것은 정상이었는데, 3장에 내려오면서 벌거벗은 것은 타락의 징조가 되었다.
의복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판결 흉패가 작동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예복을 입어야 한다. 청함 받은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예복을 입고 왔고, 어떤 사람은 예복을 입고 오지 않았다.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1~14)”이 예복, 이것이 바로 대제사장이 입는 에봇이라 할 수 있다. 제사장의 옷이다.
우리가 어떤 모양을 만들어서,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그 앞에 서야지 벌거벗은 채로 그 앞에 설 수는 없다. 우리교회에서 벌거벗는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다른 말이다. 아담을 벌거벗겨 놓으면 죄악 밖에 없다. 배를 갈라놓으면 똥 밖에 나올 것이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담은 벌거벗겨 놓으면 죄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세마포로 가리는 것이다. 세마포는 과정을 거친 인성이다. 과정을 거친 그리스도이다. 과정을 거친 그리스도로 가려야 된다.
죄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이 나온다. 창세기 3장 이후에 아담은 가리움을 받아야지 벌거벗으면 안 된다. 벌거벗었다는 말을 잘못 사용하면, 아담을 벌거벗어 놓은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고 죄악이다. 아담을 다 까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아담은 다 까발려 놓으면 안 된다. 아무것도 안 나온다. 세마포를 입어야 한다. 까발려 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의복을 갖출 때 비로소 판결 흉패가 작동해서 하나님의 인도함이 따르게 된다.
판결 흉패는 대제사장이 가슴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간증을 의미한다. 네모반듯하다고 되어 있다. 장도 한 뼘, 광도 한 뼘이다. 한 뼘씩 되어 있는 정사각형이다. 장과 광이 한 뼘씩이다. 두 겹으로 네모반듯하다고 되어 있다. 네모반듯하다는 말은 정확하고 정당하다는 뜻이다. 두 겹이라는 말은 간증이다. 둘은 항상 간증의 숫자이다.
한 뼘이라는 말은 손 안에 들어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손의 범위 내에 들어 있다. 왜 손 안에 열두지파가 들어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우리의 간증은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간증이다. 손 밖에 있는 간증은 간증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 밖에 있었던 것을 장황하게 내어 놓으면 지루하고 듣기 싫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간증을 해야지, 손 밖에 있는 것을 내놓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물론 광범위하게 본다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지만, 구체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과 하나님의 손 밖에 있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손 밖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오기 위한 하나의 준비는 되지만, 그것이 큰 간증이 되지는 않는다. 간증을 할 때 손 밖에 있었던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줄이고, 손 안에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간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는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 손 안에 들어있다. 한 뼘 안에 들어 있다. 그리스도가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 안에 들어 있다. 그리스도의 통제에서 벗어난 것은 교회가 될 수 없다. 그 손안에 있어야 된다. 그 손을 벗어나는 것은 안 된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는 말이 나온다. 그 한 뼘 안에 들어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있다. 내 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내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데 내 손을 벗어난 것은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 있어야 하나님이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내가 너무 커 버리면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교회 안에서도 너무 큰 사람은 교회의 손 안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가버린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손은 악한 세대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결코 거기서 빼앗을 자가 없다.
네모가 반듯하다. 장과 광이 한 뼘씩으로써 네모가 반듯하다. 이 네모가 반듯한 위에는 12개의 보석이 박혀 있다.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보석이 들어 있다. 이것은 한 백성의 실체이다. 열두지파로 구성된 민족, 그것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아무리 많더라도 12지파이다. 숫자가 천만일 때도 12지파고, 일억일 때도 12지파다. 항상 12지파로 구성된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12사도로 구성된다. 12사도가 기초석이 되었다. 오늘 교회도 마찬가지로 12사도의 터 위에 세워졌다. 이것은 한 백성의 실체이다. 한 단체, 한 나라, 지금은 한 몸으로서의 교회의 실체이다.
이것이 어디에서 하나의 실체가 되는가? 보석이 따로따로 있는 것과, 네모반듯한 흉패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은 성질이 다르다. 한 흉패 안에서 하나의 실체가 된다. 한 흉패 안에서, 한 건축 안에서 실체가 된다. 보석들이 전부 다른 곳에 가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의 반지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의 노리개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흉패 안에 들어올 때, 그 때 비로소 한 실체를 이루게 된다.
오늘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각각으로 한 사람씩, 신령한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놀라운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믿음이 좋은 사람, 기도에 능력이 있는 사람, 은사가 있는 사람, 많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건축 안에 있지 않으면 한 실체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주적인 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실체가 될 수 없다. 하나하나 떨어져서 자기 혼자 믿고 있는 것은 그 백성으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이 군대에 가는 것은 군대라는 하나의 실체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군대에 입대해야 그 나라에 필요한 사람이 된다. 젊은 사람이 자기대로 놀고 있으면 국가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는 제주도에 떨어져 있고, 하나는 울릉도에 떨어져 있다면 국가가 필요할 때 아무 소용이 없다. 실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적은 지금 한 실체로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는 실체가 없으면 대항하지 못한다.
한 흉패 안에서 실체가 되고, 한 건축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한 실체가 된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나 혼자 똑똑하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잘났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한 실체를 이루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세상은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에 교회도 하나의 실체여야 한다.
세상은 실체인데, 교회는 개별적이다. 지금까지 2000년 동안 교회가 세상을 정복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세상은 실체인데, 교회는 실체가 안 되고 기도하는 개인이고 믿음을 가진 개인이다. 그래서 아무런 힘이 없다. 숫자는 많아도 힘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하나의 실체가 되는가? 어떻게 해서 각각의 보석들이 한 흉패 안에 모여지게 되는가? 물질 같으면 갖다 놓으면 되겠지만, 실제적으로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한 흉패 안에 붙어 있게 되는가? 그것은 죽고 다시 산 생명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할례 받은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한 민족으로 한 실체가 되었다.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죽고 다시 살았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 이삭을 낳았다. 이삭은 낳기 전부터 이미 할례를 받은 사람이고, 낳고 난 후에 역시 할례를 받은 사람이다.
이방인들을 가리켜 할례 없는 백성이라고 한다. 할례가 없다는 말은 지금 말로 하면 십자가가 없는 사람이다. 죽고 다시 살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옛사람 그대로 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삭은 옛사람 그대로의 사람이 아니고 할례를 받고 나온 사람이다. 이 사람은 죽고 다시 산 사람의 상징이다. 이 생명 때문에 그들은 한 실체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한 실체가 되는가? 이 죽고 다시 산 생명 때문에, 이 운명 때문에 우리는 한 실체가 된다.
그리고 이 운명은 변화를 거치므로 말미암아 빛을 내게 된다. 이 운명이 아닌 것은 변화해도 소용이 없다. 세상에서 변화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쁜 일을 회개하고 좋은 사람이 된 사람들도 많고, 개과천선한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한 실체가 될 수가 없다. 자기대로 변화가 되지만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죽고 다시 산 운명과 그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하고 요구하는 한 실체가 되지 못한다.
우리 고향에 돈 밖에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6.25때 동네 사람들에 의해 바다에 던져졌는데 어떻게 간신히 살아나왔다. 살아나온 다음에 사람이 많이 바뀌었다. 좋은 일을 많이 하다가 죽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 사람도 물론 변화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 실체 안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다. 자기 개인으로는 변화된 사람이다. 육신적으로는 죽고 다시 산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에게 복음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영원한 운명과 생명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어떻게 각각의 다른 것들이 하나의 실체가 되는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볼 때 각기 개성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여러 가지가 다르다. 또 은혜를 받았다 해도 그 은혜를 받는 것 자체도 다르고, 체험도 다르고, 다 다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하나의 에봇 안으로, 하나의 흉패 안으로 연합이 되는가? 그것은 죽고 다시 산, 이 한 가지 운명 때문이다. 여기서는 다 하나이다. 그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고, 다른 곳에 있을 수가 없는 운명이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는 원래부터 변화를 목적으로 했다. 사람을 지으시고 동산에 두셨다. 그리고 그 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있고, 생명의 물이 있었다. 생명나무에는 생명열매가 열리게 되고, 생명 강물 속에는 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있다. 이것은 모두 어떤 흐름을 통해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생명을 먹고 변화되고, 흐름을 통해서 변화된다. 생명나무를 먹고 생명이 자란다. 자라는 것도 일종의 변화이다. 나무가 싹이 나서 열매를 맺을 때까지 자란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물속에 있는 보석으로 묘사되었다.
하나님은 원래 창조 할 때, 창조한 그대로 놔두고 사용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생명으로 자라게 해서 사용하려 하셨다. 그리고 흐르는 물을 통해 변화시켜서 사용하려 하셨다. 그렇게 하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다. 그러므로 설사 아담이 범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담이 만일 생명나무를 안 먹고, 선악과도 안 먹고, 아무것도 안 먹었다면 사용할 수 없다. 흐르는 물속에서 변화하지 않았다면 아담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 하더라도 쓸모가 없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어떤 경우에는 ‘저 사람은 하나님이 없어도 잘 살 사람이다’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자기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남도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죽고 다시 산 생명을 먹고 자란 것이 아니고, 흐르는 물로 말미암아서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다. 하나님의 목적을 놓고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목적 안에 있는 것만 가치가 있지 그 목적 안에 있지 않는 것은 가치가 없다.
죽고 부활한 것, 죽고 다시 산 것, 이것이 신성한 생명이고 이 생명이 변화를 거쳐서 건축에 이르게 된다. 자라남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번식하게 되고, 변화함으로 말미암아 건축이 이루어진다. 비슷한 개념이지만 자라나서 번식하는 것이 건축일 수도 있고, 건축이 바로 번식일 수도 있다. 어떤 의미로는 번식이고 어떤 의미로는 건축이다.
이 변화를 상징하는 보석들이 4줄로 12개가 박혀 있다. 가로로 3개씩 박혀 있고 4줄이므로 12개가 된다. 3☓4는 12이다. 넷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피조물을 상징한다. 요한계시록에 가면 네 생물이 나오는데 이것은 피조물을 상징한다. 그리고 셋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삼일성, 신성함을 상징한다. 이 신성함이 피조물 속에 들어가면 변화가 된다. 변화라는 것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신성이 들어가서 변화된다.
아까 말한 고향의 그 사람은 신성이 들어가서 변화된 것이 아니고, 양심이 들어가서 변화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변화는 양심이 들어가서 바꿔진 것이 아니라 신성이 들어가서 변화된 것이다. 그래서 보석이 되고, 그것이 판결 흉패에 붙어 있게 된다. 자기 혼자 변화된 것은 필요가 없다. 자기 혼자 양심상으로 ‘내가 너무 나쁜 짓을 많이 했구나. 이제 좋은 일 좀 하고 살아야겠구나.’하고 변화된 것은 판결 흉패에 들어올 수 없다. 하나님의 실체 안에 들어올 수 없다.
이 12보석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성취와 통치의 행정을 위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한 변화된 인격으로서의 건축을 갖는 것이고, 그 건축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 행위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구약시대에는 법으로 다스렸지만, 궁극적인 통치는 변화된 인격으로 통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통치가 이루어진다. 열두 개의 보석은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계시록에는 일곱이라는 숫자가 나오고 열둘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그래서 일곱 교회, 일곱 등대, 일곱 별, 일곱 영,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전부 일곱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전부 땅에서의 교회를 상징하는 숫자이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새 예루살램 속에 나온다. 열두 문, 열두 천사, 열두 샘, 열두 사도, 열두 진주, 열두 실과, 새 예루살렘에는 열둘이 나온다.
요한계시록 초반부에는 일곱이 나오고, 후반부 마지막에는 열둘이 나온다. 초반부에는 교회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일곱이 나오고, 후반부에는 새 예루살렘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열둘이 나온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3에다 4를 더한 숫자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더했다는 말인데 우리가 은혜를 입었다는 말이다. 시간 안에서는 하나님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 바로 교회이다. 피로 값 주고 산 것이다. 은혜를 입었다. 이것은 더함의 문제이다. 그런데 열둘이라는 숫자는 곱하는 문제이다. 곱하는 문제는 짜여지는 문제이다. 왜 짜여지는가? 이것은 하나의 실체가 되기 위해서이다.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과 협력하려면 짜여져야 협력이 되지, 더해져서는 협력이 되지 않는다.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은 감사는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가면 달아난다. 은혜를 입은 당시에는 감사하며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하지만, 막상 목숨을 바칠 상황이 생기면 달아난다. 더해놨기 때문에 달아날 수 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세상에 수없이 많다. 그러나 짜여져 있기 전에는 달아나 버린다. 그런데 3과 4로 곱해지면 어쩔 수 없이 싫어도 붙어 있어야 한다.
열둘이라는 숫자, 새 예루살렘은 사람과 하나님이 다시 분리될 수 없다. 서로 융합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르지만 분리될 수 없다. 한 운명체가 되어 죽으나 사나 함께 있어야 한다. 천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금이라도 천속에 들어와 있으면 빠져나갈 수 없다. 예를 들어 그 옷이 더러운 곳에 가면, 금이 안 가겠다고 할 수 없다. 할 수 없이 거기 가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거기 같이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에게 협력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마지막 단계는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지 않아도 하게 된다. 왜냐하면 한 운명이 되어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빠지면 그 천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또 어쩔 수 없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도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고,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뗄 수가 없다. 그것이 곱하는 문제이다. 협력과 조화이다.
예수님도 마지막에 짜여져 있는 분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어쩔 수 없어서 하는 말이다.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마지막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하는 말이 나온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자리에서 그 분과 협력하는 사람이 된다.
처음에는 좋아서 하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다. 좋은 일, 재미있는 일은 얼마든지 좋아서 할 수 있지만, 어려운 일, 내가 희생되어야 하는 일이 나오면 내가 좋은 것만 가지고는 못한다. 우리가 항상 어린아이처럼 은혜만 입고 사는 단계에만 있을 수는 없다. 그 단계에서는 하나님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짜여진 상태에서는 하나님에게 도움이 된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고 다음에는 짜여져 협력하게 된다. 사도들도 마지막에 가면 자기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로써, 그것이 꼭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에 맞지 않아도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안할 수 없는 길로 간다.
이것이 짜여지는 상태이며 열둘이라는 숫자의 의미이다. 성경의 맨 마지막은 짜여지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가면, 둘이 서로 짜여져서 연합하고 협력하는 관계가 된다.
흉패는 가슴에 붙어 있다. 임금들이 붙이고 있는 것처럼 가슴에 붙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가슴에 있는 교회를 상징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슴에 있다. 가슴에 있다는 말은 사랑 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가슴은 사랑을 표현한다. 우리 마음의 어떤 장소를 표현할 때 가슴으로 표현한다. 가슴에 있다, 가슴에 품는다는 말이 있다. 판결흉패가 가슴에 있다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또 교회와 함께 있다. 만일 흉패가 없다면, 에봇은 별로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왜 저 옷을 입고 있나?’ 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흉패가 있기 때문에 ‘저것 때문에 에봇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흉패는 에봇을 영광스럽게 하며 아름답게 하는 것이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슴 안에 있고, 또 그리스도는 교회와 함께 있다. 교회와 함께 있는 것은 결국 그 분의 영광이고 아름다움이다. 교회가 없는 그리스도는 초라하다. 처음 오셨을 때, 초라한 이유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오실 때, 그는 영광중에 오신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 하는 말은 초라하게 혼자 오는 것이 아니고 영광스러운 판결 흉패와 함께 온다는 뜻이다. 교회와 함께 오신다. 교회와 함께 온다는 말은 교회 없이는 예수님께 다시 오실 수 없다는 뜻이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결국 교회를 타고 오신다는 뜻이다.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공중에 둥둥 떠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타고 오시는 것이며, 영광을 타고 오시는 것은 교회를 타고 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영광과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 그리스도는 그 영광과 아름다움 위에 떠서 오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나갈 때 그 영광과 아름다움에 떠서 세상에 나가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때, 영광의 구름 위에 계신 분을 전파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다시 오신다는 것을 전파하는 것이다.
흉패가 있는 에봇, 그 에봇이야 말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교회가 있는 그리스도야말로 참으로 영광스럽고 아름답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그리스도는 교회와 함께 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하였고, 우리가 만날 수 있고, 접할 수 있고, 관계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되었다.
만일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교회와 함께 있기 때문에 영광스럽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 앞에 전할 수 있는 분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해서 세상과 관계를 가진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다. 그 분 혼자만 되지 않고, 교회는 교회만으로는 되지 않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다. 또 상호 거주하는 관계이다. 서로가 서로 안에 거한다. 흉패는 에봇에 거하고 에봇은 흉패에 거한다. 또 상호 조화를 이룬다. 에봇과 흉패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상호 미화시킨다. 서로 아름답게 한다.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아름답게 하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름답게 한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을 공급하고, 우리는 그분의 표현이 되어 상호 보완적이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했다. 서로 상호 거주하게 된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완전한 것이다.
그리스도도 물론 완전하고, 교회도 완전하다. 그렇지만 상호 보완적이고, 상호 거주하고, 상호 조화를 이루고, 상호 미화하는 이 온전함만 같지 못하다. 개인적으로 그 분은 온전하시지만, 교회와 더불어 있는 그 분과는 비교할 수 없다. 흉패는 결국 그리스도의 가슴에 있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다.
다. 어깨받이
다음에는 어깨받이가 나온다. 어깨받이는 어깨에 계급장처럼 다는 것인데 이것은 간증을 의미한다. 한쪽에 여섯 지파씩, 양쪽에 열두 지파를 호마노에 새겨서 달도록 되어 있다. 흉패는 그 분의 가슴에 있으므로 사랑에 대한 간증이다. 그런데 어깨받이는 어깨에 있으므로 그분의 능력에 관한 간증이다.
그 분은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도 있다. 그리스도의 어깨에 있는 교회의 상징이다. 교회는 단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어깨, 그분의 능력 안에 있다. 흉패는 변화를 말하지만, 어깨받이는 간증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간증과 변화가 바로 교회이다. 그 분의 능력과 사랑을 간증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간증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는 간증을 통해서 늘 변화한다. 우리의 간증이 늘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으면 늘 비슷한 말처럼 들리지만 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말을 할 때 보면, 계속 변화하고 있다. 왜 변화 하는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간증을 하면서 변화한다. 간증을 하고 있는 것은 늘 변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어제와 똑 같은 것을 간증하는 사람은 없다. 조금이라도 뭔가 다른 것을 간증한다. 듣는 사람은 ‘그게 그거구나’ 라고 생각하지만, 자기는 속에 뭔가 조금 다르니까 간증을 하고, 다르니까 또 간증을 하는 것이다. 제목은 같은데 내용은 늘 달라지는 것이다. 변화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어깨받이와 흉패는 에봇의 부속품이다. 에봇을 아름답게 하고 에봇을 완전하게 하는 그런 부속품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속품이다.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건강하게 하는 그것이 흉패와 어깨받이이다. 사랑과 능력을 증거하는 모습이다.
군인들은 어깨에도 뭔가를 달고 가슴에도 훈장을 달고 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것이다. 어떤 영광을 표현하기 위해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교회도 같은 입장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라. 고리로 연결함
이것을 연결하는 요소가 있다. 네모반듯한 흉패에 위에도 고리 두 개, 밑에도 고리 두 개를 금으로 만들었다. 고리가 있어야 붙일 수 있다. 위의 고리는 금사슬로 어깨받이에 달게 되어 있다. 그 다음 밑에 고리는 꼰 실로 끈을 만들어서 띠에다 묶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벗어지지 않도록 했다.
위에는 금 고리에 금 사슬이고, 밑에는 베실로 꼰 실로 띠에 묶여있다. 위에는 신성을 상징하고, 밑에는 인성을 상징한다. 항상 그렇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매달려 있고, 그 다음에 인성에 붙들어 매여져있다. 그것을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매라고 되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성에 매달려 있는 것은 결국 인성에 붙들어 매여져 있는 가운데 있다. 십자가의 자리가 우리의 자리를 확고하게 붙들어줘야 거기에 매달려 있지, 확고하게 붙들어 주지 않으면 우리는 매달려 있을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는 이미 지나간 것이고, 이제는 보좌위에 계신다, 우리는 보좌에 계신 분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말은 맞는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가셨고, 보좌우편에서 생명주는 영으로 우리에게 오셨으므로 사실은 보좌에 계신 분이 전파되는 것이다. 영광이 전파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실로 붙들어 매어진 것이 아니라면 안 된다. 그 말은 십자가가 굳건하게 서 있지 않는다면 또 다른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십자가가 없는 것은 기초가 없는 공사처럼 되고 만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와 보좌는 다르지만, 영원 안에서는 한 자리이다. 그 한 자리가 어떤 자리에서 보면 십자가이고, 어떤 자리에서 보면 보좌이다. 물질적으로 생각하면 십자가 다르고 보좌가 다르지만, 영 안에서 본다면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자리가 바로 그 자리이다.
부활하시기 전에 사도들은 십자가를 죽음으로 보았다. 죽음으로 보았기 때문에 허망하고 절망이었다. 그런데 성령이 그들에게 오심으로 인해서 그들의 눈이 열려서 죽었던 분이 살아서 오신 것을 보았다. 부활로 오신 것을 봤다. 그런데 그는 부활로 온 것만이 아니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우편에 계신다.
스데반이 말할 때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하였다. 이것은 모두 물질적인 것을 봤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한 실재를 봤는데 그 속에서 그분이 새롭게 인식되어져 왔다. 인식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지, 물질적인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세계는 시간이 있고, 공간이 있다. 십자가라는 공간이 있고 보좌라는 공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물질적인 세계를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적이거나 공간적인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와 보좌는 한자리이다.
그래서 흉패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매달려 있고, 인성으로 붙들려 있다. 그 자리에 흉패는 든든하게 붙잡혀 있다. 오늘 이스라엘은 이렇게 붙들려 있고,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붙들려 있다. 이렇게 붙들려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탈되지 않고 한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금 사슬을 보면 금 사슬 역시 과정을 거친 것이다. 꼬아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과정을 거친 하나님, 과정을 거친 신성이다. 그냥 금덩어리가 와서 붙은 것이 아니고 사슬로 매어져 있다. 우리가 목에 구슬을 걸거나 손에 사슬을 거는 것은 매인 바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한테 손이 묶였다는 것은 그에게 매인 바 되었다는 말이고, 내가 목에다 걸었다는 말은 매인 바 되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신랑이 신부에게 목걸이를 걸어줬다는 말은 ‘너는 나한테 매였다’ 는 말이다. 그것을 받을 때 ‘내가 매였구나’ 하고 알고 받아야지 공연히 받아서 ‘왜 나를 묶나?’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처음부터 ‘나는 받지 않겠다’ 해야 한다. 금 사슬은 과정을 거친 하나님이다.
밑에 줄은 청색 베실로 꼬았다. 그 역시 과정을 거친 것이다. 청색은 하늘의 속성이다. 인간이지만 하늘의 속성으로 꼬아서 묶은 것이다. 인간적인 속성으로는 묶을 수 없다. 인간적인 생각, 인간적인 속성으로는 그것을 붙들어 맬 수 없다. 하나님의 색깔인 청색이 와서 우리를 에봇에 붙들어 매여 있도록 만든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붙잡혀 있는 것은, 금 사슬과 청색 실에 의해서 붙들려 있는 것이다.
금 고리는 붙드는 요소이다. 고리는 항상 영을 말한다. 법궤에도 고리가 있고, 제단에도 고리가 있고, 떡상에도 고리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 붙드는 요소이다. 우리가 아무리 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그분이 우리를 붙들어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이 없다면 우리는 붙들려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은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시공간적으로 설명할 수가 도저히 없다.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론이나 지식으로나 생각으로 그것을 설명하거나 자기가 해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어떻게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어떤 사람을 만나보면 정말 예수를 전혀 모른다. 전혀 모르는데 믿고 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전혀 모르고 믿을 수 있을까? 나도 지금 생각하면 전혀 모르고 믿었다. 어떻게 모르고 믿었을까? 어떤 신기한 고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 고리에 내가 붙들린바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그것을 구체적으로 파헤쳐보고 설명해 보려 해도 설명이 되지 않는 그런 부분이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르면서도 믿고 있는 것을 무시하면 안 된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이 있다.
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그 어떤 것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 속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찾는 것이다. 안 그러면 찾겠는가? 다 알고 나서 믿으려 하면 못 믿는다. 다 알고 나면 믿을 것 같지만 믿지 못한다. 다 알 수가 없다. 어느 세월에 다 알겠는가?
이상하게도 모르는데 붙들려 있다. 어떤 사람들이 처음 예수를 믿는 것을 보면 신기한 경우가 있다.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 사람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믿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무엇인지 모르게 눈물이 나고 , 무엇인지 모르지만 감동을 받아 예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고 금 고리로만 설명할 수 있다. 그의 능력과 그의 사랑이 어떤 모양으로든 자기 가슴에 닿았다. 전달할 때 그 사람이 어떻게 전달하였든지 간에 받는 사람 속에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에 감동이 되어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믿게 된다. 그것이 금 고리다.
옛날에 CCC에서 사영리 같은 것을 전해보면 그것을 듣고 무엇이 되겠는가 싶은데 믿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것도 되지 않는데 무슨 이유인지 하여간 그 사람 속에 감동이 일어나는 수가 있다. 그러면 자기 인생에 전환점이 된다. 이것이 바로 고리이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을 것이니라.” 했다. 이 판결 흉패가 하나님 앞에서 기념물이 될 것이다. 제사장은 항상 가슴에 이스라엘을 품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슴에는 항상 교회를 품고 있다. 우리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서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았다. 이 판결 흉패가 그리스도의 영원한 기념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모든 결과가 판결 흉패에 붙어 있다. ‘이삭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나왔다.’ 그것이 어디서 증명되느냐?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증명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우편에 있다.’이것이 어디에서 증명되는가? 교회에서 증명이 된다. 그래서 영원한 기념물이다. 그 기념물이 그 분을 증거 하는 것이다.
에봇을 짜는 법과 흉패를 만드는 법이 동일하다. 그리스도의 조성과 교회의 조성은 동일하고, 그리스도의 형성과 교회의 형성은 동일하다. 원리가 동일하다. 에봇을 짜는 법으로 흉패를 짠다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은 짜는 법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법이나, 교회가 그 분의 말씀을 받아서 한 실체를 이루는 것이나 그 짜는 법이 동일하다. 영원히 동일하다. 예수님 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원리나, 오늘 우리 안에 말씀이 육신이 되신 원리는 동일한 원리이다. 교회 안에 말씀이 들어가서 교회가 변화되는 원리나, 예수 안에 하나님 말씀이 들어가서 독생자가 된 것이나 그 원리가 동일하다.
이런 원리 안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전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분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조성되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첫 번째 씨였다. 첫 번째 씨가 만들어지는 원리는 모든 다른 열매들이 만들어지는 원리와 같다.
그리스도의 원리나 교회의 원리는 하나이므로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이다. 한 원리로 짜여져야 그것이 붙어있게 되지, 서로 다른 원리로 만들어졌다면 붙어 있을 수가 없다. 우리도 한 원리 안에서, 한 말씀 안에서 조성될 때 한 교회가 된다. 한 말씀과 한 원리로 조성되지 않으면 한 교회가 될 수 없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한 원리가 교회 안에서 작용하여 한 덩어리가 된다.
그런데 죽음과 부활이라는 원리가 아닌 다른 것이 와서 교회를 만들면 둘이 하나가 되지 못한다. 짜는 법이 동일해야 같이 붙어 있을 수 있다. 좋은 것이 많지만, 좋은 것이라 해서 다 합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원리가 동일해야 합해질 수 있다. 짜는 법이 동일해야 한다. 에봇 짜는 법과 흉패 짜는 법이 동일하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동일한 원리 가운데 있다. 결국 이스라엘과 교회는 동일한 원리 가운데 있고, 교회와 새 예루살렘도 동일한 원리 가운데 있다. 다 같은 원리 가운데 있다. 하나는 물질적이고, 하나는 인격 안에 있고, 하나는 영원 안에 있다. 이스라엘은 물질적이고, 교회는 인격적이고, 새 예루살렘은 영원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리는 다 동일하다.
에봇은 대제사장이 특별히 입는 옷이기에 그것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옷이고, 그리스도는 교회로 인해서 영광을 얻으신 분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이신 그 에봇에 붙어있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다.
판결 흉패만 떼어놓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깨받이만 떼어 놓는다면 보석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에봇에 붙어 있음으로써 실체화 되어서 하나의 건축이 된다.
제사장의 의복 자체를 볼 때, 그것이 하나의 건축이다. 에봇도 짜여져 있고, 판결 흉패도 붙어 있고, 어깨받이도 붙어있는 어떤 구조물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구조물이다. 인격의 구조물, 그리스도와 교회가 짜여져 있는 인격적인 구조물이다.
오늘 우리는 인격의 구조물 속에 들어와 있다. 나는 나 개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여기서 개인은 가치가 없다. 구조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고, 구조물에서 일체가 되는 거기에서 우리의 가치가 있다. 그렇다고 개인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개인이 존재하면서도 한 일체 안에서 존재하고, 일체 안에서 가치가 있다.
아무리 좋은 문짝이라도 그것이 건축 안에 있을 때 좋은 문짝이지, 따로 떼어놓고 있으면 귀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처음에 우리 집을 지을 때 남은 나무문이 하나 있었다. 한 짝으로는 돈이 비싼데 잘못하여 남았다. 사방에 굴러다니다가 결국 마지막에 두들겨 부셔서 깨고 말았다. 놔두면 쓸모가 없고 다시 팔수도 없고 쓸 수도 없고 짐만 되었다. 아깝지만 하는 수 없이 깨서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한 일체 안에서 가치가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체 안에서 가치가 있다. 일체를 떠나면 우리는 아무 가치가 없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당신의 건축 안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다 떨어져서 쓸모없는 사람들이고 가치 없는 사람들인데 그 일체가 되는 세계 안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을 감사하고 이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그 능력을 경험하고 당신을 표현하는 한 실체로 우리가 세상 앞에 서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이 세계 안으로 하나님의 영광만 있는 세계 안으로 우리를 불러 주셨으니까 우리 일생이 오직 이 영광을 위해서 쓰여지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고 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인생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