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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준 칼럼 2011. 11. 15 주기철 주영진 부자의 순교목회
청년들은 찬송가보다 복음성가를 많이 부른다. 근래에 나온 복음성가는 한국인에 의해 작사 작곡된 것이라 이해하기도 쉽고 현대적 감각으로 부르기도 좋단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찬양하고 성도들의 간구와 고백을 담은 찬송가를 소홀히 하는 것 같다. 한국 교회 믿음의 선진들이 불렀던 복음성가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내세 지향적이다. 현실 부정이다. 삶의 현장과 다르다. 느리다. 감상적이다라며 외면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청년들에게 한국 교회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그 시대에 불렀던 복음성가를 가르친다. ‘눈물없이 못가는길 피없이 못가는길 영문밖의 좁은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일제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옥살이를 하다가 8‧15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에 옥사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찬양이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믿는 자들은 일제의 신사참배나 공산당의 무신론 사상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살았던 성도들의 결연하고 눈물겨운 이야기를 듣는 젊은이들은 놀라며 감동하며 거룩한 결단을 한다.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 주영진도 아버지의 ‘일사각오一死覺悟’ 순교믿음을 보고 배우며 성장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목회자의 삶을 보면서도 그는 전도자로 나섰다. 부친이 마산문창교회를 섬길 때 그는 소학교에서 동방요배(천황숭배)를 거부하고 퇴학을 맞았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신 계명을 좇아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 것을 부인한 것이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첫 계명과 둘째 계명을 지킨 것이다. 아버지가 평양산정현교회로 옮기면서 아들 주영진은 숭덕학교를 다녔고 후에는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다녔으니 그 학교 교사이며 교장이었던 조만식 장로님으로부터 신실한 믿음과 민족정신을 다졌을 것이다.
일본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했다. 일치신학교에서는 신사참배 거부하는 주기철 목사 아들이라며 퇴학을 당했다. 1938년, 부친 주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결의하기로 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기 모이기 전에 미리 체포되었다. 당국의 고문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정절을 지키던 목사님은 1944년 4월에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조국 광복을 못보고 순교하신 것이다.
8‧15 조국광복, 북한에 소련군이 들어오고 공산정권이 세워지면서 교회를 통제했다. 그 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 그래도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온 평안도, 1907년 대부흥운동의 진원지였던 평양과 북한에는 정금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다.
주기철 목사님이 목회했던 평양산정현교회를 한상동 목사님이 맡아서 주영진을 전도사로 세웠지만 어머니(오정모)는 순교하신 아버지께 누가 될까 싶다며 염려하므로 장현리교회 담임전도사로 자리를 옮겼다. 공산당은 예배당에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을 걸라했다. 주 전도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그 믿음으로 이를 거부했다. ‘눈물없이 못가는길 피없이 못가는길 영문밖의 좁은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아버지의 일사각오 그 길을 결심한 것이다.
1950년, 6‧25 전쟁 도발 한 달 전.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주영진 전도사도 아내에게 “여보, 내 잠시 다녀오리다.” 하고 교회를 떠났다. 그 말이 마지막 인사가 되고 말았다. 그는 32세, 청년목회자였다. 그렇게 체포된 기독교인들은 총살되거나 강제노역을 하다가 죽었으니 주 전도사도 그렇게 ‘순교의 제물’이 되었을 것이라 한다. 그는 그렇게 세상과 끊어졌다. ‘주님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리’ 주 전도사는 아버지가 불렀던 이 찬송을 부르며 주님 앞에 나아갔을 것 같다. 대를 이어 십자가 앞에 자신을 드린 그들이 한국 교회 역사의 든든한 신앙산맥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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