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주인되기
박세영, 교남소망의집 작업치료사
명산의 기준
친정과 시댁 근처에는 각각 북한산과 남한산이 있습니다.
양가의 어르신들은 자신들의 집 근처 산을 오르시며 서로의 집 주변 산이 명산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설악산이나 태백산 정도는 되어야 명산이 아닐까 생각하여 시간이 나면 명산이라고 이름하는 산을 찾곤 합니다.
산길 걷기
교남소망의집의 옆에는 작지만 다채로운 산이 이웃하고 있습니다. 바로 ‘봉제산’입니다.
입주인 대부분은 산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다리가 아프고 힘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출발은 힘들지만 가다보면 각자의 즐거움을 발견합니다.
“꽃 예쁘다. 오늘 좋았어”라고 말하기도 하고, 정상에서 마시는 얼음물은 그 어떤 음료수 보다 맛있어 보입니다.
겨울에는 오백원씩 챙겨와 정상 부근에서 파는 차를 사 마시는 것도 힘든 중 소소한 즐거움일 것입니다.
그중에도 제일 인상 깊은 입주인이 있습니다.
나뭇잎을 치며 걷는 은서 씨
은서 씨와 함께 봉제산 을 오르기 시작한 건 작업치료 중 감각활동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감각활동은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의 오감 외의 전정, 고유수용감각 활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각 감각의 과다한 추구나 회피를 하는 경우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런 경우 감각통합 활동을 해 주는데 등산을 하는 과정은 전정. 고유수용성자극 및 감각 협응에 도움이 됩니다.
산을 오른 후 은서 씨가 하는 독특한 행동을 보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풀을 치는 행동이었습니다.
높고 낮은 풀들을 손끝으로 가볍게 치는 모습이었는데 ‘촉각 자극활동인가 아니면 치는 소리를 듣는 청각자극 활동인가?
집에서 단단한 장난감을 치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고유수용감각 자극인 것 같았는데’ 하면서 머리를 굴리기 시작합니다.
그 때 또 다른 생각이 듭니다. ‘풀들에게 인사하는 것일까?’
그 때부터 은서 씨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니 교남 안의 풀들도 종종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낮은 풀은 허리를 낮춰 치기도 합니다.
그 모습이 마치 표현언어가 어려운 은서 씨가 마음속으로 ‘안녕 잘 잤니? 너 그새 많이 컸다.’ 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새 함께 따라서 살살 쳐 봅니다. 눈으로만 보는 것과는 느낌이 다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몇 달간 외부 건강걷기를 쉰 후 오랜만에 은서 씨와 산에 오르던 날입니다.
그날따라 은서 씨의 걸음이 느립니다. 뒤를 돌아보니 평소보다 더 많은 풀들에게 인사합니다.
보통 발치에 있는 풀까지는 치지 않았는데 허리를 꽤 숙여 낮은 풀들에게까지 인사를 건넵니다.
갈 길이 멀지만 천천히 은서 씨가 건네는 인사를 기다리며 걷습니다.
중턱까지 오르면 나무의 거친 껍질에 손을 대고 미소를 짓습니다.
이후 당연하다는 듯이 집으로 가는 길로 손가락을 가리킵니다.
“오늘은 좀 더 걸을게요.” 좀 더 돌아서 가는 길로 안내합니다.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계속 뒤돌아보며 걷습니다.
돌아가는 길로 걷다보면 그네와 같은 의자가 나옵니다. 앉아서 함께 앞뒤로 흔들며 땀을 식혀 봅니다.
이웃들과 함께 걷기
주변을 보니 여러 이웃이 함께 봉제 산을 걷고 있습니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부터 시작하여 2-3명 함께 빠른 걸음으로 걷지만
숨차지도 않은지 쉴 새 없이 이야기 하며 걷는 아주머니들이 계십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학교에 가는 횟수가 줄어든 아이들까지 봉제산 을 걷고 함께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웃들과 마주할 수 있고 함께 땀을 흘릴 수 있는 봉제산이란 장소에서 함께 걷는 일이
우리 입주인들의 또 하나의 중요한 작업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웃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동네 산이 우리에겐 명산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못 다한 이야기
우리의 작년 책 제목처럼 여느 사람처럼 사는 삶 을 돕고 싶어 주변의 환경 안에서 할 수 있는 일,
내가 속한 지역사회에서 여느 이웃들과 함께하는 일을 고민했습니다.
일의 시작과 과정을 돕기, 산길 걷기, 아동들과 함께 레고 만들기,
텃밭 가꾸기를 하면서 자연스러운 치료 효과도 함께 얻어 보고자 했습니다.
내년에는 지역사회 안에서 내가 원하는 장소를 찾기, 마트에서 계산하는 것을 좀 더 잘 해볼 수 있도록 돕기,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감각놀이 하기, 산길을 좀 더 길게 걸어보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입주인들과 함께 경험치를 늘려가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업을 찾아가는데 함께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역사회를 생각하면 지금은 코로나 밖에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이 방해꾼이 얼른 사라져 주어 보통의 일상을 되찾았으면 합니다.
내 시간의 주인이 내가 되는,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을
교남소망의집에서 혹은 지역사회 안에서 시작하는 것을 함께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