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일아함경_15. 유무품(有無品)[3]>에서는 최고의 보시는 법보시라고 했다. 스님들이 중생을 위해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법보시보다 중요한 것이 있겠는가? 그리고 스님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이미 세속을 떠난 사람들인데, 무슨 재물이 있어 재물보시를 하겠는가? 스님들은 다만 법보시를 베풂으로써 중생들에게 재물 보시를 할 수 있도록 중생들을 이끌 수 있을 뿐이다. 만일 법보시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중생들은 자연히 재물보시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대승의 보시도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시바라밀다를 수행의 방편으로 삼은 것은 아함경의 법보시와는 성격이 조금 다른 것 같다. 무주상 보시, 곧 상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보기로 하자. 무주상 재물보시는 중생이 하는 보시일진대 수행의 최고의 경지에 이른 중생이 할 수 있는 보시이며, 보통의 중생들은 흉내조차 내기 어렵다. 무주상 법보시는 설법사의 보시일진대 중생들의 근기와 처지에 따라 설법의 수준이나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중생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적어도 설법을 준비하거나 설법하는 시점에서는 무주상 법보시는 성립하기 어렵다. 무주상 보시를 말할 때는 적어도 이러한 문제를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무주상 보시는 목표를 방편으로 삼은 표현이다.]
불교의 현실에서는 법보시를 빙자하여 중생들을 현혹하고 재물과 명성을 얻는 이들도 있다. 곧 중생들의 기복적 성향을 이용하여 점술이나 예언 등을 통하여 중생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며 결국에는 중생들의 삶을 망치게 하고 나아가 사회 전체를 망치게 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불교 교단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이들에 대하여 분명하게 경고하고 이들을 사회로부터 퇴출시키는 단호한 조치가 필요할 것 같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생들이 불교를 잘못 이해하게 함으로써 불교의 본질을 흐리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 시대에도 이런 일들이 항상 일어났는데, 아함경에는 이러한 삿된 행위와 견해들에 대하여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붓다는 이들 삿된 행위와 견해들을 단호히 배격하였다. 불교 교단에서는 삿된 행위와 견해를 대하는 붓다의 태도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내 제자들은 마법을 신봉하거나 해몽을 하고 관상을 보고 점성술을 숭상하지 말라. 또 새나 짐승의 소리로 점을 치거나 잉태법이나 의술을 행해서도 안 된다.”(숫타니파타_신속)
그 밖의 갖가지 삿된 행위와 견해에 대해서는 <장아함경_21. 범동경(梵動經)>에서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또 불교인들 가운데는 여러 사회 집단들에서 보이는 양극단적 대립의 어느 한쪽에 서서 그들에 동조하거나 그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행위는 결국 다른 한쪽의 견해에 대하여 부정적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니, 이런 행위들은 불교의 중도에 벗어나는 것이다. 중도는 양쪽에 견해에 대한 중립적 태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어느 한쪽에 치우친 주장들을 모두 경계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붓다의 시각에서 보면 양극단의 어느 쪽에 서 있는 중생들이든 간에 다 평등한 중생들이며, 4무량심으로 제도해야 할 중생들이다. 그러니 불교 종단에서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모든 중생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28. 05. 26,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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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나이의 논평]
작성한 글은 초기 불교와 대승 불교의 보시관을 비교하고, 현재 불교계가 직면한 삿된 행위(사명, 邪命)의 문제와 사회적 대립 속에서 지켜야 할 중도(中道)의 가치를 아주 날카롭고 정연하게 짚어내고 있다.
이 글에서 다룬 핵심 논점들에 대해 몇 가지 통찰을 보태어 정리한다.
1. 법보시와 무주상보시의 현실적 조화
<증일아함경>에 근거하여 출가자의 본분을 법보시로 규정하고, 그것이 중생의 재물보시로 이어진다는 구조적 분석은 매우 탁월하다. 출가자는 세속의 재물이 없기에 정법(正法)을 전하는 것이 최고의 보시일 수밖에 없다.
대승 불교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역시 매우 현실적이고 타당하다.
재물보시의 측면:
범부 중생이 '내가 베푼다'는 상(相)을 완전히 비우고 보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법보시의 측면:
설법자는 중생의 근기(根機)를 끊임없이 살피고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해야 하므로, 대상과 방편에 대한 고려 없이 '상이 없는 설법'을 전제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무주상보시는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수행의 지향점으로 삼되, 현실에서는 중생의 눈높이에 맞춘 구체적이고 자비로운 방편(법보시)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시킬 수 있다.
2. 삿된 행위(사명)의 배격과 교단의 책무
점술, 예언, 기복을 이용해 이익을 취하는 행위를 교단 차원에서 단호하게 단죄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깊이 공감한다. 이는 불교의 본질을 왜곡하고 사회적 폐해를 낳는 심각한 문제다.
언급한 <숫타니파타>와 <장아함경>의 '범동경' 외에도, 초기 경전에서는 승가가 취하지 말아야 할 그릇된 생계 수단을 '사명(邪命, micchā-ājīva)'으로 규정하여 엄격히 금지했다.
붓다가 점술이나 관상, 의술(주술적 의술)을 금한 이유는 그것이 인과법(因果法)에 어긋나며, 중생을 주체적인 깨달음의 길에서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교단이 이러한 삿된 행위를 방치하는 것은 붓다의 유훈을 저버리는 일이다. 정법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내부적인 정화 시스템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3. 사회적 대립과 중도(中道)의 진정한 의미
현대 사회의 양극단적 대립 속에서 불교가 취해야 할 태도를 '중도'로 명확히 규정했다. 특히 "중도는 양쪽 견해에 대한 중립적 태도가 아니라, 어느 한쪽에 치우친 주장들을 모두 경계하는 태도"라는 정의는 중도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기계적 중립의 오류 극복:
중도는 가치 판단을 유보하는 방관이나 산술적 평균이 아니다. 양극단이 가진 탐·진·치(貪瞋癡)와 편견을 모두 해체하는 역동적인 실천이다.
사무량심(四無 laṅgā-citta)의 실천:
대립하는 양측을 모두 자·비·희·사(慈悲喜捨)의 태도로 품어야 할 중생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불교가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사회적 플랫폼(소통의 토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종합 의견이 글은 아함경의 붓다 정신으로 돌아가 현대 불교의 왜곡된 실태(기복주의, 상업주의)와 사회적 갈등 속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통렬하게 성찰하고 있다.
초기 불교의 청정한 계율과 정법 정신을 기준으로 삼아 교단이 나아갈 길을 명확히 제시한 훌륭한 논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