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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사제불이의 공전보
‘소설 《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2회 오사카(大阪)
오사카에는 ‘창가의 마음’이 모두 응축되어 있다.
사제정신과 학회의 혼,
상승(常勝)의 원점과 불패(不敗)의 서원(誓願)
서민의 드라마와 지용(地涌)의 투쟁이.
오사카를 알면 학회의 위대함을 알 수 있다.
자, 오사카에서 ‘창가승리’를 향한 역사의 문을 열자.
서민의 영웅을 격려하기 위해
가장 먼저 오사카 땅을 밟았다
지방지도의 첫 출진
소설 《신ㆍ인간혁명》은 야마모토 신이치(山本伸一) 회장이 세계광포의 첫걸음을 내딛는 장면(1960년 10월 2일)부터 시작한다. 제1권은 첫 해외 방문을 묘사하고, 귀국길에 오르는 장면에서 끝난다.
제2권에 들어가면 신이치가 일본 국내에서 격투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기록된 장면은 제1권에서 조금 거슬러 올라 신이치가 제3대 회장에 취임(1960년 5월 3일)한 이후 일본 각지를 돌며 격려하는 모습이 씌어 있다.
신이치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회원을 만나고 사랑하는 동지와 함께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또 새로운 지부의 탄생을 축하하고, 활동의 흐름이 궤도에 오르도록 온 힘을 다해 격려를 보냈다.
그 ‘첫 출진’이 오사카였다. 다시 말해 오사카는 이케다(池田) 선생님이 소설 《신ㆍ인간혁명》에서 가장 처음 언급한 일본의 천지(天地)다.
간사이총지부간부회를 향해
회장에 취임하고 닷새 뒤인 5월 8일, 야마모토 신이치는 오사카부립체육회관에서 개최하는 간사이총지부간부회에 참석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제2권 ‘선구’의 장에서 이 간부회의 모습을 집필하기에 앞서 먼저 간사이 불멸(不滅)의 원점을 적었다.
1956년 ‘오사카투쟁’으로 5월에 1만 1111세대라는 절복(折伏)의 금자탑을 세운 역사, 그 해 7월에 실시한 참의원선거에서 이룩한 ‘설마가 실현’이라는 쾌거 그리고 이듬해인 1957년의 ‘오사카사건’.
선생님은 이 오사카사건에 대해 이렇게 쓰셨다.
“거기에는 학회의 전진을 방해하려는 권력의 악질적인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때 그의 체포를 가장 슬퍼하고 분노하며 앞장서서 사악한 권력과 투쟁한 사람들이 바로 간사이 동지들이다.”
그리고 그때의 진심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그는 ‘서민의 영웅’이라 할 수 있는 간사이 동지들을 가장 먼저 격려하고 함께 출범하자며 용약(勇躍)하여 오사카 땅을 밟았던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유대
이어서 이케다 선생님은 간사이가 강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간사이 벗에게 야마모토 신이치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선생님’이었다.
동지 한 사람 한 사람과 신이치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입장이나 역직이라는 관계를 넘어 함께 광선유포의 사명에 살아가려는 인간관 인간이라는 유대로 맺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간사이의 강함이며 또 학회의 강함이다.”
학회에는 ‘나와 선생님’이라는 무수한 사제의 유대가 있다. ‘오사카투쟁’은 그러한 사제의 유대를 굳게 맺은 생애 잊지 못할 원점으로 빛난다.
‘오사카투쟁’ 당사는 신심의 연륜이 짧은 멤버가 대부분이고 간부도 적었다. 그러나 모두 이케다 선생님의 지도대로 투쟁하면서 학회활동의 기쁨을 알았다.
“선생님 덕분에 신심의 제호미(醍醐味)를 맛보았다.” “선생님의 격려로 지용보살(地涌菩薩)의 사명을 자각할 수 있었다.”며 모든 멤버가 ‘나와 선생님’의 원점을 갖고 있다.
창가의 강인함의 토대는 ‘사제’라는 사람과 사람의 유대다. 이 점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여러분이 새로운 광포의
파동을 일으키기 바란다
좌담회를 충실하게
야마모토 신이치는 간사이총지부간부회에서 300만 세대를 달성하는 길은 충실한 좌담회에 있다고 강조했다.
“전 간부가 용약하여 좌담회에 참가하고 또한 확신 넘치는 신심의 화기애애한 좌담회를 개최해 간다면 홍교의 테두리는 반드시 넓혀집니다. 좌담회는 학회의 축소판입니다. 직업도 처지도 다른 남녀노소가 모여 행복해지는 길을 서로 이야기하고 격리하는 모습은 현대 사회의 오아시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도 좌담회에서 불행에 우는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 나누며 광선유포의 싸움을 일으키셨습니다. 이 풀뿌리 운동이 오늘날까지 학회를 지탱해 온 것입니다.
아무쪼록 좌담회의 충실에 힘을 쏟아 간사이 여러분이 선구가 되어 새로운 광선유포의 파동을 불러일으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간사이, 그 중에서도 청년에게 거는 기대가 씌어 있다.
“어둠의 저편에서 새벽의 빛이 달려와 아침이 도래했음을 알리듯 광선유포의 운동에도 선구의 빛이 없어서는 안 된다. 신이치는 전국 각 지역 중에서도 간사이 동지들에게 학회 선구로서의 훌륭한 활동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각 부서 중에서도 신이치는 그것을 청년부에게 기탁하려 했던 것이다.”
간부의 자세
제2권 ‘민중의 깃발’에서는 1960년 12월 5일, 오사카시의 미나토체육관에서 개최한 간사이 3개 총지부 결성대회(간사이총지부간부회)에서 신이치가 지도한 내용으로 선생님은 간사이를 생각하는 마음을 이렇게 말했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간사이의 새로운 출발에 즈음하여 간부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학회의 조직이나 동지를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하고 명문명리와 영예영달을 꿈꾸는 간부는 학회를 좀먹고 신심을 부패시키는 요인이라고 엄하게 단언했던 것이다.
신이치가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간사이는 영원히 민중의 편에 서서 불행으로 고뇌하는 사람들을 구하는 일본의 모범적인 조직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오사카에 보낸 지도 - 사악한 권력과 벌이는 싸움
(‘오사카사건’ 판결 전날에 개최한 간사이남자부간부회에서 체포 자체가 부당하다고 단언한 뒤 지도한 내용)
“나는 어떠한 박해를 받아도 일어섭니다. 만약 유죄가 되어 다시 투옥된다 해도 대성인의 대난을 생각하면 사소한 일입니다. 또 마키구치 선생님, 도다 선생님의 유지(遺志)를 계승한 나는 자신의 목숨을 아낄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량한 시민을, 착실하게 사람들을 위해 진력해 가는 민중을 괴롭히는 권력과는 생애, 결단코 끝까지 싸울 결의입니다. 이것은 나의 선언입니다.
불법은 승부입니다. 잔혹한 취조를 한 검사들, 또 그렇게 시킨 권력과 우리들 중 어느 쪽이 올바른지 영원히 지켜보고자 합니다.”
신이치의 말에는 열렬한 기백이 담겨 있었다. 그는 남자부에게는 자기와 같은 마음으로 사악한 권력과는 감연히 싸우고 민중을 끝까지 지켜 가는 사자로 일어서 주기를 바랐다.
간사이의 젊은 동지는 신이치의 말에서 악에 대항하는 암굴왕과 같은 불요불굴의 금강과 같은 신념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마음으로 하여 광선유포라는 장정(長征)의 여로(旅路)를 가겠다고 결의했다.
신이치는 다시 힘주어 호소했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은 어떠한 철학도 미칠 수 없는, 전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불멸의 원리를 설하는 대생명철학입니다. 그 불법을 넓히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지용의 보살이며, 대성인의 제자인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각과 신념 아래 불행한 사람들 편이 되어 어디까지나 민중의 행복을 제일로 더욱더 당당하게 전진을 개시하지 않겠습니까.”
간사이남자부간부회는 민중과 함께 살아가는 맹세의 모임이 되었다.(제5권 ‘사자’)
오사카사건의 본질
제4권의 ‘춘람’ ‘입정안국’, 제5권의 ‘승리’ ‘사자’에서는 오사카사건을 둘러싼 재판 등의 모습이 씌어 있다. 이케다 선생님은 소설 《신ㆍ인간혁명》에서 1956년의 ‘오사카투쟁’과 1957년의 ‘오사카사건’이라는 상승불패(常勝不敗)의 원점을 거듭 써 내려갔다.(제11권 ‘상승’, 제17권 ‘민중성’, 제22권 ‘신세기’, 제23권 ‘용기’, 제25권 ‘복광’ 등) 거기에 불멸의 학회정신이 있고 사제공전(師弟共戰)의 드라마가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그 중에서도 ‘오사카사건’이 다투어 일어난 당시 배경을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에 다가가 생명에 새겨야 할 정신을 그렸다.
‘오사카사건’은 1957년 4월에 실시한 참의원 오사카지방선거구 보궐선거에서 도쿄에서 온 일부 회원이 빚은 매수 사건과 몇몇 동지들이 호별방문을 하다 체포된 데서 시작했다. 선거법 위반과 무관한 이케다 선생님이 이 선거의 최고책임자라는 이유로 혐의를 뒤집어쓰고 7월 3일에 체포되어 보름에 걸쳐 구속되었다.
소설에서는 이 ‘오사카사건’이 회원의 선거법 위반을 기회로 삼아 새로운 민중 세력인 창가학회의 대두(擡頭)를 꺾어버리려는 권력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분석했다. 또 학회로 민중이 자각하여 현실의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 된 사실은 국가 권력에 커다란 위협이었음에 틀림없다고도 통찰했다.
제5권 ‘승리’에서는 1961년 12월 16일, ‘오사카사건’ 재판에 출두한 신이치가 의견을 진술하고 권력을 등에 업고 약한 자를 괴롭히는 듯한 취조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처사라고 검찰의 횡포를 예리하게 지적했다. 이 재판은 84차례를 헤아리는 공판 중 83번째에 해당한다. 당시 재판을 방청한 하야시 지에코 씨(간사이방면 부인부 총주사)는 “참으로 굉장한 기백이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승리’에 이 장면이 실린 날은 1996년 7월 17일로 해마다 7월 17일에는 저뿐 아니라 모든 간사이 동지가 ‘내 원점의 날이야’라며 새롭게 결의합니다.”
하야시 씨도 1957년 4월, 참의원 오사카지방선거구 보궐선거 투표일부터 사흘이 지난 뒤, 모리구치경찰서의 헝사에게 연행되어 며칠씩 취조를 받았다.
하야시 씨는 당시 스무 살로 여자부 반장이었다. 형사가 책상을 치며 계속 협박했지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기에 추궁을 계속 부정했다. 겨우 경찰의 취조가 끝났다고 생각하자 이번에는 검찰에 불려갔다. 취조는 더욱 심해졌다. 이케다 선생님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 알고 있지’ ‘네가 자백하면 다른 사람도 모두 내보내주겠다’며 자백을 강요했다. 신기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다만 분했다. 권력의 횡포를 용서할 수 없었다. 열흘쯤 뒤에 풀려났다.
그로부터 두 달 뒤, 하야시 씨는 이케다 선생님의 체포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해결됐다고 생각했기에 놀랐습니다. ‘왜 선생님이 체포되어야 하는가’ 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그저 선생님이 무사하시기를 기원했습니다.”(하야시 씨)
1957년 7월 17일에 개최한 오사카대회에서 하야시 씨는 도지마강의 강둑 근처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며 강 건너에 있는 오사카지검을 노려보았다. ‘선생님을 괴롭히는 권력이 밉다, 반드시 이 원수를 갚겠다.’
이날의 서원은 지금도 하야시 씨 그리고 간사이 동지의 가슴에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왜 간사이는 사제의 서원을 잊지 못하는가.
“우리의 이케다 선생님이니까요.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으면 간사이는 없고, 우리도 없습니다. 잊을 리 없습니다.”
하야시 씨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서 ‘보은’의 인생을 살아가는 간사이의 강인함을 보았다.
빛나는 무대 간사이 본부
‘오사카투쟁’ 등이 펼쳐진 무대인 옛 간사이 본부.
1955년 12월 13일, 도다(戶田) 선생님을 모시고 낙성입불식을 열었다.
음악학교 건물을 수리한 3층 건물로 많은 사람이 모이면 흔들릴 정도로 오래된 건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간사이에 세계 제일의 법성(法城)을 만들겠다고 기원했습니다.”(2007년 11월, 간사이이케다기념회관에서 개최한 본부간부회 스피치)
말 그대로 ‘오사카투쟁’ 50주년인 2006년 11월, 옛 간사이 본부가 있던 자리 근처에 위퐁당당한 간사이이케다기념회관이 탄생했다.
기고 ‘상승의 본진’에서 완승을 향해 전진
총오사카장 오카모토 도시아키
“5월, 아름답게 펼쳐진 상승의 푸른 하늘 아래, 지금 다시 한 번 전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제30권<상> ‘웅비’)
이케다 선생님은 회장을 사임한 지 1년이 지난 1980년 5월 3일을 오사카에서 맞았다. 이날, 새롭게 완성된 간사이문화회관에서 ‘창가학회의 날’ 기념근행회를 개최했다.
당시 나는 소카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지 1년쯤 되었을 때로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간사이문화회관으로 달려가 정문의 행사진행요원을 맡았다. 선생님이 도착하시자 커다란 환성이 일었다. 스승을 구도하는 동지들의 눈빛과 열기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선생님은 정문 근처 계단에서 여러 차례 기념촬염을 해주셨다. 손이 빨개질 정도로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나누셨다. 행사진행요원인 우리도 함께 사진을 찍어주셨다.
선생님은 그때의 심경을 소설의 한 장면에 이렇게 쓰셨다.
“신이치의 흉중에는 ‘모든 동지를 격려하지 않고서 어떻게 가만히 있을 쏘냐’라는 불꽃 같은 기백이 넘쳤다. 이 일념이야말로 ‘창가의 혼’이다.”
(제30권<상> ‘웅비’)
그리고 선생님은 기념근행회에서 이렇게 지도해주셨다.
“위대한 간사이는 일본과 전 세계의 모범이 되고 영원히 광선유포의 선구가 되기 바랍니다. 나도 간사이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상승의 역사를, 새로운 인생의 역사를 생애 만들어갈 결의입니다.” 제30권<상> ‘웅비’)
그날 밤, 이케다 선생님은 간사이마키구치기념관에서 정의의 반전공세를 기약하며 ‘5월 3일’이라고 크게 휘호하셨다. 오사카에서 새로운 민중의 시대를 여는 투쟁을 시작하신 깊은 의의와 우리의 사명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은 1주일에 걸친 이 간사이 지도에서 7만 명이 넘는 회원을 만나 격려하셨다. 지금 그때의 격투를 떠올리면, 나도 오사카 동지를 끝까지 격려하고 지탱하면서 새로운 광포의 금자탑을 세우겠다는 투혼이 불타오른다.
오사카는 ‘상승의 본진(本陣)’이다. 입정안국(立正安國)의 깃발을 드높이 내걸고 ‘지금은 전진 두려움 없이’라는 결의로 올해 ‘창가승리의 해’ 완승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겠다.
탄압에도 두려움 없이
《신·인간혁명》 제5권 ‘사자’에서는 1962년 1월 25일, 신이치가 무죄판결을 받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 뒤 신이치는 간사이 본부로 이동해 함께 판결을 받은 멤버들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오사카사건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요.
학회는 민중을 조직하고 입정안국의 정신에 입각하여 민중을 위한 정치를 실현하려고 정계에도 동지를 내보내 왔습니다. 그 학회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권력은 이대로 두면 학회가 자기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일대 민중 세력이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학회를 부수려고 한 것이 이번 사건입니다.
그 때문에 호별 방문이라는, 말하자면 가벼운 죄로 체포당한 여러분을 위협하고 들볶아, 선거 위반 행위는 나의 지시이며 학회가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고 조서를 조작했습니다. 학회를 위험한 범죄 집단으로 꾸며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본래 권력이란 민중을 지키는 것이며 선량한 민중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회의 주역, 국가의 주역은 민중입니다. 그 민중을 학대하고, 괴롭히고, 인권을 유린하는 마성의 권력과는 단호히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학회의 사명이라고 나는 선언해 두겠습니다.”
이어서 신이치는 미래를 응시하며 힘차게 말했다.
“학회가 민중의 깃발을 내걸고 싸우는 한, 권력이나 그것에 영합하는 세력의 탄압은 게속될 겁니다. 이번 사건으로 박해가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법 해석을 왜곡하여 학회를 위법 단체로 모략하여 단죄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예전의 치안유지 법과 같은 악법을 만들어 탄압을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학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범죄나 사건을 학회의 짓이라고 퍼뜨리기도 하고 온갖 스캔들을 날조하여 퍼뜨리는 일도 있을 겁니다.
또 타인을 시켜 학회에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짓궂은 짓을 하고, 그것을 학회의 짓이라고 생각하게 하여 함정에 빠뜨리려는 모략도 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마성의 권력과 학회를 시기하는 모든 세력이 서로 손잡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중과 학회를, 또 나와 동지를 이간시켜 학회를 괴멸로 몰아넣으려고 할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한 탄압은 다투어 일어날 때는 집중포화처럼 일제히 일어납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대성인은 대박해 속에 ‘세간(世間)의 허물은 조금도 없으나’(어서 958쪽)라고 단언하셨지만, 나도 나쁜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력은 모략을 꾸며 없는 죄를 씌우려고 할 겁니다.
나는 권력의 마성과는 철저히 항전하겠습니다. ‘아직 단념(斷念)치 않노라’(어서 1056쪽)입니다. 민중의, 인간의 승리를 위한 인권 투쟁입니다.”
또 선생님은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학회의 전통정신을 말했다.
“창가학회의 역사는 항상 권력의 마성과 투쟁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초대 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이후 학회에 일관하는 위대한 정신이다.
대부분의 일본 종교는 한결같이 권력을 두려워하고 권력 앞에 굴복해 온 것에 비해, 학회는 민중의 행복과 인간 승리를 위해 감연히 정의의 깃발을 내걸었다. 그 때문에 초대 회장은 옥중에서 존귀한 순교의 생애를 마쳤다. 인권의 기본을 이루는 신교(信敎)의 자유를 관철했기 때문이다.
또 그 때문에 학회에는 항상 탄압의 거친 폭풍우가 몰아쳤다. 그러나 거기에야말로 인간을 위한 진실한 종교, 창가학회가 나아가야 할 자랑스런 대도(大道)가 있다.
오사카에 보낸 지도 – ‘날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결의로
(야마모토 신이치가 ‘간사이의 노래’ 가사를 구술하고 아내 미네코가 메모하는 장면)
“지금 다시 한번 진열에…….”
첫머리는 이 말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름 없는 서민이 나와 함께 스크럼을 짜고,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역사를 열면서 광포의 금자탑을 우뚝 세운 간사이다. 마성(魔性)을 드러낸 권력의 횡포에 나와 같은 마음으로 분노하고, 피눈물을 닦으며 맞서서 상승의 대성을 구축한 간사이다. 간사이에는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긍지 드높은 원점이 있다. 그렇다면 언제나 그 원점으로 돌아가 더욱더 ‘날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결의로 일어서야 한다. 또 간사이 동지와 맺은 유대는 결코 우연도 아니고, 금세에 한정된 것도 아니다. 광선유포를 서원하고 뛰어 나온 지용보살로서 구원(久遠)의 사명으로 이어져 있다.’
신이치가 마음속 깊이 이렇게 느낀 순간 “자네와 나는 구원부터 맹세한 친구와 봄의 노래”라는 가사가 입에서 거침없이 나왔다. 미네코가 눈동자를 빛내며 이렇게 말했다.
“봄의 노래, 좋은 가사네요. 행복도, 환희도, 약동도, 승리도 모두 응축되어 있군요.”
(제28권 ‘광선보’)
광포 스승의 각오
제10권 ‘행풍’에서는 신이치가 각지의 반장, 반담당원(당시)과 기념촬영을 하는 투쟁을 오사카에서 먼저 시작하는 장면을 소개한다.
간사이 동지와 함께 한 기념촬영회는 1965년 10월 3일, 오사카부(府) 후세시(현재 히가시오사카 시내)에 있는 체육관에서 실시했다. 선생님은 이 촬영회에 참석한 간사이 벗의 기개를 이렇게 적었다.
“‘진(眞)을 베끼는(寫)’ 것이 사진이니까 절복도 하지 않고 기념촬영에 참가한다면 패기(覇氣) 없는 얼굴이 영원히 남고 만다. 큰일이다!”
친근함이 담겨 있고 간사이 벗의 마음이 솔직하게 나타난 말이다. 어떠한 때라도 끝까지 투쟁하고 스승 곁에 모인다. 이러한 학회정신이 개성 넘치는 말에서도 반짝인다.
기념촬영회에 참석한 신이치 또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고열에 시달리면서 온 힘을 다해 끊임없이 격려한다. 자신은 어찌 되어도 제자의 분투에 진심으로 응하고 제자의 미래에 희망의 빛을 보낸다. 이것이 광포 스승이 다진 각오였다.
제14권 ‘열풍’에서는 1969년 12월, 그 해 일곱 번째 간사이 지도에서 격투한 내용을 언급했다. 히가시오사카에 있는 시립중앙체육관에서 20일에 개최한 간사이간부회에서 신이치는 몸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다해 스피치하고 ‘아, 여명은 가깝도다!’를 힘차게 지휘했다.
선생님은 간사이 지도에 대한 신정을 이렇게 강조했다.
“신이치는 이번 간사이 지도에 광선유포의 미래를 길었다.
간사이가 모든 것에 크게 승리하여 언제나 전국을 이끄는 존재가 되면 광선유포의 새로운 흐름이 열리게 된다. 왜냐하면 이는 각 방면이 중심이 되어 학회를 견인하는 지방 시대의 개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번 간사이 방문은 어떻게 해서든 대성공시켜야만 했다.”
제17권 ‘희망’에서는 1973년, 가타노시에 개교한 소카여자중학교·고등학교(현재 간사이소카중학교·고등학교)에서 신이치와 학원생이 원점을 새긴 날들을 소개했다.
제18권 ‘전진’에서는 1973년 12월에 나카노시마에 있는 오사카시 중앙공회당에서 개최한 제36회 본부총회에 관해 언급했다. 이 회합은 도쿄 이외의 지역에서 처음 개최하는 본부간부회였다.
제22권 ‘신세기’에서는 ‘경영의 신’이라고 불린 마쓰시나 고노스케 회장과 신이치의 교류가 씌어 있다. 신이치는 마쓰시타 회장의 초청으로 오사카 가도마시에 있는 마쓰시타전기산업 본사를 견학하고, 마쓰시타 회장이 소카여자학원을 방문하는 등 두 사람은 여러 차례 거듭 교류했다.
제23권 ‘용기’에서는 오사카투쟁과 오사카사건의 정신을 다시 한번 기술했다. 출옥한 지 20년째를 맞는 1976년 ‘7ㆍ17’을 기념하여 ‘인간혁명의 노래’를 만들어 발표하는 장면이 그려 진다.
제24권 ‘어머니의 시’에서는 1976년 11월 17일에 탄생한 도요나카시에 있는 간사이마키구치기념관의 개관식과 이튿날 18일에 간사이도다기념강당에서 개최한 학회 창립 46주년 기념식전을 비롯해 마키구치 선생님 32주기 법요를 언급했다. ‘엄호’에서는 간사이도다기님념당에서 개최한 ‘교학부대회’(1977년 1월 15일)에서 신이치가 스피치한 내용을 상세히 기술했다.
상승(常勝)의 하늘
1978년 7월, 제28권 ‘광선보’에는 신이치가 간사이의 노래를 짓는 모습이 씌어있다.
7월 초, 신이치의 제안으로 간사이 청년부를 중심으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8일 오전, 신이치에게 완성된 가사 초안이 도착했다.
신이치는 동지들의 노고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가사를 지어 간사이 벗에게 선사하자고 결의하고 그날 오후부터 곧바로 작사를 시작했다.
작사는 신이치가 가슴속에 용솟음치는 심정을 구술하고 아내 미네코가 그 가사를 메모하면서 진행했다.
일단 가사는 마무리되었지만 신이치는 그 뒤에도 간사이 동지의 의견도 들으면서 거듭 퇴고했다. 곡도 담당 멤버에게 곡의 느낌을 이야기하고 직접 흥얼거리면서 이미지를 전단하는 등 계속 수정했다. 이렇게 헤서 노래는 완성됐지만 신이치는 노래를 발표할 간부회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모든 생명을 쥐어짜듯 다시 곡을 검토했다. 신이치는 간사이의 노래를 이렇게 말했다.
“점수를 매긴다면 98점이겠군요. 남은 2점은 간사이 동지의 혼입니다. 간사이 동지의 혼이 노래에 깃들었을 때 100점 만점이 됩니다.”
이 ‘2점’은 ‘겨우 2점’이 아니라 간사이 동지에게 각별한 의미가 딤긴, 말하자면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2점’이라고 할 수 있다.
‘상승’이 간사이의 사명이다.
‘불패’가 간사이의 서원이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완수했다’고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는 ‘만점’의 투쟁을 했을 때 비로소 쟁취할 수 있다. 사소한 차이로 쓰디쓴 경험을 한 적도 있기 때문이다.
광포 스승의 진심과 신뢰에 제자가 온 힘을 다해 부응한다. ‘사제승리’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제자의 집념 어린 모습과 제자의 투혼이라는 점을 간사이의 노래, ‘상승의 하늘’이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광선보’에서는 ‘오사카의 날’에 해당하는 7월 17일, 간사이도다기념강당에서 개최한 기념간부회에서 간사이의 노래를 발표했다.
그리고 드디어 합창 순서다.
“모두 마음속에 뜨거운 정열을 불태우며 목청껏 노래했다. 어떤 사람은 ‘자네와 나와는 구원부터’라는 부분을 부르며 감동의 눈물을 글썽였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간사이 용감하게 서라’라는 말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어떤 사람은 ‘지금은 전진 두려움 없이’에 무한한 용기를 느끼며 열창했다.
단상에는 함께 투쟁하면서 ‘상승’과 ‘불패’라는 역사의 초석을 구축한 신이치가 있었다. 모두 눈물로 앞이 가린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다시 출발하자고 굳게 다짐했다. 신이치도 불이(不二)인 간사이 동지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면서 마음속으로 계속 외쳤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간사이 동지여! 미래 영겁에 걸쳐 간사이는 정의의 깃발이 드높이 휘날리는 상승의 도읍이 되어라! 민중을 끝까지 지키는 인간찬가의 도읍이 되어라! 간사이가 있는 한 학회는 반석과 같다.”(제28권 ‘광선보’)
기고 새로운 서원의 드라마를!
도쿠부치 미치요 총오사카부인부장
이케다 선생님은 소설 《신·인간혁명》 마지막장 ‘서원’을 1982년 3월에 개최한 제1회 간사이청년평화문화제부터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문은 청년이 연다. 젊고 훌륭한 인재가 잇달아 성장하고 힘을 유감없이 발휘해야 국가도, 사회도, 단체도 영원히 발전한다.”(제30권<하> ‘서원’)
이 문화제는 새롭게 입회한 청년 1만명이 행진하며 입장하는 식순으로 막을 열었습니다.
당시 입회한 지 2년이 된 저도 참여해 앞에서 세 번째 줄에서 힘껏 행진했습니다.
가정불화와 생활고로 괴로워 하면서도 스승을 구도하며 절복에 도전하고 모인 그 날,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마이크를 잡았을 때 땅이 울리는 듯한 큰 환성 속에 저도 ‘선생님! 선생님!’ 하고 외쳤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쓰셨습니다. “청년들은 문화제를 통해 고난에 맞서 싸우는 학회정신을 배우고 자기 삶의 자세로 구현했다. 즉 불가능의 벽을 부수는 불요불굴의 ‘간사이 혼’을 여기에 계승한 것이다.”(제30권<하> ‘서원’)
초창기부터 오사카에는 강한 사제의 유대가 빛나고 있습니다. 1956년 ‘설마가 실현’이라고 불린 ‘오사카투쟁’ 그리고 이듬해 1957년, 폭우와 천둥 속에 개최한 ‘오사카대회’
“동지들 마음에 정의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그 가슴속 깊이 ‘상승(常勝)’이라는 서원을 새겨 자각한 민중이 대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간사이 동지들은 신이치와 함께 싸우며 권력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중의 행복과 소생이라는 역사를 썼다.”(제30권<하> ‘서원’)
저는 여자부 시절 그리고 지금은 부인부로서 ‘오사카대회’의 무대가 된 나카노시마의 오사카시 중앙공회당이 있는 기타오사카총현에서 광포를 위해 달렸습니다. 많은 선배에게서 한결 같은 사제의 신심을 배운 일이 최고의 재산입니다.
“싸움은 절대 지면 안 된다!”고 말할 때마다 투지가 용솟음칩니다. 이 서원이 바로 총오사카부인부의 혼입니다.
소설 《신·인간혁명》이 완결하고 제자가 새로운 서원의 드라마를 쓸 때가 왔습니다. 총오사카 부인부는 후계의 청년 그리고 새로운 힘을 키우면서 모든 것을 승리로 열겠습니다.
오사카 각지로
1978년 11월 9일, 야마모토 신이치는 이해 들어서 여섯 번째 간사이 지도에 들어갔다. 그때의 행동은 제29권 ‘상락’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무렵, 종부의 승려들은 각지에서 학회원에게 비도한 처사를 되풀이했다. 신이치는 다기진 동지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틈을 내어 오사카 각지를 돌며 많은 멤버를 직접 격려했다.
오사카에 도착한 신이치는 곧바로 도요나카시에 있는 간사이마키구치기념관에서 개최한 간사이최고회의에 참석해 ‘교양’ ‘건강’ ‘진지함’ 등 지도자의 바람직한 자세를 힘주어 말했다. 이튿날인 10일, 신이치는 사카이문화회관(훗날 사카이평화회관)을 방문했다. 사카이지부 결성 25주년의 가절을 축하하는 근행을 하고 참석자를 격려한 뒤, 이즈미사노시에 있는 센슈문화회관으로 가서 신이치가 청년실장 시절에 함께 식사하며 간담한 멤버들과 재회한다.
그리고 그날과 이튿날인 11일에 개최한 센슈문화회관 개관기념근행회에 참석해 혼신의 힘을 다해 지도했다. 12일에는 기시와다시에 있는 센슈회관을 둘러보고, 이동하는 차 안에서 ‘센슈의 노래’ 가사를 지었다. 그리고 예정에는 없었지만 갑작스립게 미나미오사카문화회관(훗날 하비키노문화회관)을 방문해 끊임없이 진검승부의 격려를 펼쳤다.
《신·인간혁명》 제29권 ‘역주’에서는 신이치가 구리야마 미쓰코 간사이방면 부인부장이 암선고를 반고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서 보낸다. ‘역주’에서 오사카를 무대로 펼쳐진 장면을 <세이쿄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한 날은 기이하게도 ‘간사이의 날’인 4월 8일이었다.
빛나는 무대 - 나카노시마 오사카시 중앙공회당
상업도시 오사카의 경제 중심지로 발전한 나카노시마를 상징하는 건물이 오사카시 중앙공회당이다. 지난해 완공 100주년을 맞은 일본의 중요문화재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가극단 ‘아이다’의 공연을 비롯해 헬렌 켈러와 가가린 등 저명인이 강연한 이 공회당은 간사이 광포사에서도 중요한 장소다. 도다 선생님이 일반강의를 하신 장소이며, 무엇보다 1957년 7월 17일 ‘오사카대회’를 개최한 무대다.
“최후에는 끝까지 신심을 한 사람이, 또 올바른 불법이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으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이케다 선생님의 혼이 담긴 외침은 지금도 동지들의 투혼이 되어 세차게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신이치는 병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삼세(三世) 영원한 생명관(生命觀)에서 받아들이고 대확신을 담아 말한다. 신이치의 이 지도는 병마와 싸우는 벗과 소중한 사람을 잃은 벗에게 끝없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병을 이겨내는 근본은 위대한 생명력을 용현시키는 일입니다. 그 힘은 타인을 지키기 위해 꿋꿋이 살아갈 때 가장 강하게 발휘됩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록이나 귀환한 사람들의 증언을 보아도 필사적으로 아이를 지킨 어머니들이 누구보다도 강하고 늠름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우리는 광선유포라는 만인의 행복과 세계평화를 목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병을 이겨내겠다고 기원하면 지용보살의 생명이 부처의 위대한 생명이 솟아올라 넘쳐 납니다. 그것으로 병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또 신심을 해도 젊어서 병으로 요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죄업이 어느 정도인지 범부인 우리로서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산 사람에게는 삶을 멋지게 완전 연소한 환희가 있습니다. 그러한 삶과 행동은 인간으로서 존귀한 빛을 발하며 많은 동지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병상에서도 병문안 온 동지를 열심히 격려한 사람도 있습니다. 의식이 흐릿해지고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제목을 부른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지용보살로서 인생을 완결한 모습입니다, 금세에 죄장(罪障)을 모두 소멸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더욱이 생명은 삼세 영원하기에 내세에도 지용의 사명에 불타 지용의 불자(佛子)들이 늘어선 진열 속에 태어납니다.
광선유포의 대하와 함께 살아간다면 병과 죽음으로 불안해 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삼세 영원히 황금빛으로 빛나는 드넓은 행복의 바다가 팔을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케다 선생님은 이 지도에 이어서 만감을 담아 이렇게 썼다.
“신이치는 불이(不二)의 간사이 동지가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정진의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랐다.”
오사카에 보낸 지도 - 진지하고 우직하고 성실하여라
(간사이마키구치기념관에서 열린 간사이최고회의에서 리더의 자세에 대해 말하는 장면)
“학회활동은 현대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불도수행입니다. 불도수행은 자신과의 대결이며, 자신의 한계를 타파하고 마음을 강하고 크게 하여 경애를 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 아무리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꾸며도 근저에 적당히 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인간혁명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지하고 우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반드시 크게 성장합니다.
신심이 타성에 빠지면, 근저에 있는 진지함이 약해져 열심히 하는 척만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간부라도 신심의 환희가 사라지게 되고, 타인을 촉발시킬 수도 없습니다.
22년 전 그 ‘오사카투쟁’에서 크게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은 모두가 진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환희가 있고, 공덕이 있고 확신이 끓어올라 감동 속에서 개가를 울릴 수 있었습니다.
중심이 되는 간부 여러분은 새로운 ‘상승 간사이’를 건설하기 위해서도 이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는 신이치의 목소리에는 간사이가 크게 비약하기를 강하게 바라는 심정으로 가득했다. (제29권 ‘상락’)
빛나는 무대 - 간사이도다기념강당
오사카 도요나카시에 있는 간사이도다기념강당은 1976년 4월에 완공했다.
‘인간혁명의 노래’를 발표한 제25회 여자부총회를 개최한 장소다. 1978년 7월 17일에는 ‘간사이의 노래’(상승의 하늘)를 선보였다.
이케다 선생님은 회장을 사임한 뒤, 1981년 11월 22일에 개최한 제3회 간사이총회에서 “다시 한번 나와 함께 싸우자”고 사자후(師子吼)했다. 그리고 ‘아, 여명은 가깝도다’를 지휘하고 동지는 사제공전(師弟共戰)을 서원했다.
선생님은 1987년 4월 16일, 새롭게 단장한 이 강당을 방문했다. 간사이대표간부회와 간사이여성총회의 의의를 담은 20세기 마지막 본부간부회를 개최한 곳도 이 강당이다.
먼 옛날/ 불가사의한 인연으로/ 섬기는 일은/
다른 사람은 변해도/ 나는 변치 않으리
우리의 스승
제30권<상> ‘대산’에서는 제1차 종문(宗門)사건을 자세하게 기술했다. 여기서는 1979년 4월 24일 회장을 사임한 날 밤, 간사이에서 긴급하게 개최한 회합에서 등단한 간부가 큰 목소리로 외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먼 옛날/ 불가사의한 인연으로/ 섬기는 일은
다른 사람은 변해도/ 나는 변치 않으리.’
이 시처럼 비록 야마모토 선생님이 회장을 그만두셔도 우리 간사이의 스승은 영원히 야마모토 선생님입니다.”
그러자 다들 “옳소!” 하고 주먹을 높이 들어올렸다. 이 시(詩)는 일찍이 도다 선생님이 이사장을 사임할 당시 이케다 선생님이 도다 선생님에게 선사한 시다. 간사이의 외침은 사제를 위해 끝까지 살아가겠다고 각오한 모든 동지의 마음 그 자체였다.
이케다 선생님이 회장을 사임한 뒤, 간사이 부인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의 스승은 이케다 선생님이라는 서원을 다 함께 다졌다. 그 중 한 사람인 구리하라 아키코 씨(간사이방면 부인부 총주사)는 여자부 시절, ‘오사카투쟁’으로 사제정신을 새겼다.
1956년 4월 8일, 오사카구장(오사카 야구장, 1998년 철거)에서 도다 선생님을 모시고 총회를 개최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오사카 회원에게 “스승을 맞이할 때는 승리의 결과를 내고 맞이해야 합니다.” 하고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투쟁을 강조했다. 젊은 이케다 선생님의 일념은 오사카 구석구석까지 고루 미쳐, 일본 제일의 결과로 총회를 맞았다.
“사제정신을 배운 오사키 동지는 확대의 대화를 더욱 더 의기양양하게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4월, 900세대 이상 홍교를 달성했습니다.”(구리하라 씨)
다음날인 5월, 절복과 더불어 참의원선거를 지원하는 투쟁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그러던 중 ‘폭력종교 창가학회’라는 유언비어가 적힌 전단지가 오사카 전역에 뿌려졌다.
“대화하러 가면 아무런 근거도 없는 중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케다 선생님은 태연자약하셨습니다. <성인어난사>에 ‘각자는 사자왕(師子王)의 마음을 발휘해서 남들이 아무리 위협할지라도 겁내지 말지니라. 사자왕은 백수(百獸)를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사자의 새끼도 또한 이와 같다. 그들은 야간이 짖는 것이고 니치렌의 일문은 사자가 짖는 것이로다.’(어서 1190쪽)고 하는 구절을 인용해 ‘용장(勇將) 밑에 약졸(弱卒) 없다’며 우리를 북돋아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사자후는 모두 동지의 결의가 되어 5월에 11,111세대 절복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구리하라 씨는 ‘불멸의 금자탑’은 순풍에 돛을 단 듯한 상황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폭풍우 속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은 이케다 선생님의 일념이 근원이었다고 힘주어 말하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오사카는 이케다 선생님에게 마음을 합치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어떤 악전고투도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원리’가 모든 동지의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사카, 간사이는 강합니다.
소설을 공부할 때마다 오사카 그리고 간사이에 생각하는 이케다 선생님의 마음이 이토록 깊은가 하고 가슴이 떨립니다. 지금은 아직 ‘말법만년 진미래제(末法萬年盡未來際)’의 초창기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사제 원전을 새기는 투쟁을 하겠습니다.”
‘5월 3일’
제30권<상> ‘웅비’에서는 회장에 사임한 지 1년이 지난 1980년 5월 3일, 완공한 지 얼마 안 된 간사이문화회관에서 신이치가 동지를 감싸 안듯 격려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날은 그 해 2월, 신이치가 ‘5ㆍ3’을 ‘창가학회의 날’로 정하고 처음 맞이한 기념일이었다. 신이치는 ‘창가학회의 날’을 기념하는 근행회에 참석해 동지를 맞이하며 악수를 나누고 기념촬영을 했다. 행사진행요원에게도 끊임없이 격려의 말을 보냈다.
신이치는 기념근행회에 참석한 뒤, 간사이마키구치기념회관으로 갔다. 신이치는 붓을 쥐고 혼을 쏟아 넣는 심정으로 ‘5월 3일’이라고 크게 휘호했다.
이틀 뒤 5월 5일, 신이치는 간사이문화회관에서 개최한 ‘창가학회 후계자의 날’ 기념근행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오사카의 지부남자부장회, 지부여자부장회에 참석하고 5월 8일까지 있는 사력을 다해 동지들을 격려했다.
제30권<하> ‘승리의 함성’에서는 1981년 7월 10일, 신이치가 간사이문화회관에서 개최한 청년부총회에 축전을 보냈다.
마지막 장 ‘서원’은 1982년 3월 22일, 오사카에 있는 나가이육상경기장에서 개최한 제1회 간사이청년평화문화제의 모습부터 쓰기 시작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문화제에서 처음으로 ‘육층원탑’에 도전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현장감 넘치는 필치로 묘사했다. 그리고 거기에 담긴 우정의 드라마를 언급하면서 ‘간사이 혼’의 연원을 밝혔다.
“‘이 오사카에서 가난과 병을 내쫓고 싶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행복하게 하고 싶다’는 것이 도다 조세이의 뜻이었다.
이 엮원을 실현하기 위해 도다는 제자 신이치를 대리로서 간사이에 파견했다. 스승의 마음을 가슴 깊이 새긴 신이치는 광선유포를 지휘하며 간사이 땅을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이케다 선생님은 오사카지부에서 홍교의 금자탑을 이룬 역사와 ‘설마가 실현’이라는 극적인 대승리, 나아가 ‘오사카대회’에서 ‘권력의 마성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며 정의의 불꽃을 혁혁히 불태운 동지들의 서원을 다시 한번 언급하고 이어서 적었다.
“그때 등에 업혀 있던 아이들이 지금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해 청년평화문화제라는 커다란 무대로 뛰어나와 온몸으로 민중의 개가(凱歌)를, 환희와 평화를 표현하고 있다. 청년들은 일이나 학업이 끝난 뒤 서둘러 연습장소로 달려와 필사적으로 불굴의 투지를 불태우고 땀을 흘리며 열심히 연습했다.
초창기에 투쟁한 장년부나 부인부는 날마다 응원하러 와서 함께 데려온 손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봐두렴, 저렇게 열심히 힘쓰는 모습이 간사이 혼이란다! 학회정신이란다!’
초창기 동지들은 후계의 젊은 사자(師子)들이 훌륭하게 성장해 혼의 바통을 이어받은 데 기쁨과 자부심을 느꼈다.”
오사카에 보낸 지도 - 간사이 혼의 계승
오사카의 서민 속으로 들어가 ‘이 세상에서 비참을 없애겠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서원한 도다 조세이의 일념, 이것은 바로 ‘평화의 마음’이었다.
신이치는 이 도다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전혼을 쏟아 동분서주했다. 그리고 간사이 동지들은 신이치와 함께 싸우며 권력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중의 행복과 소생이라는 역사를 썼다. 바로 ‘간사이 혼’ ‘학회정신’을 계승하는 속에서 ‘평화의 마음’도 계승된 것이다. (제30권<하> ‘서원’)
불굴의 혼을 함께 나눈
오사카에서 새로운 문을 열자!
함께 출발하자!
2018년 9월 8일의 연재 완결까지 4회를 남겨둔 9월 5일, 선생님은 다시 소설의 무대를 오사카로 옮겼다.
그리고 2000년 12월 10일에 개최한 간사이대표자회의, 14일에 개최한 본부간부회(간사이도다기념강당)에서 지도한 내용을 썼다.
신이치는 오사카 방문에 즈음해 이렇게 결의했다.
“8일, 신이치는 귀국길에 올랐다. 홍콩에서 출발해 향한 곳은 상승의 도읍 간사이였다. 그가 회장에 취임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오사카다. 20세기의 마지막 지방지도를 오사카에서 마무리하고 함께 21세기를 향해 새로운 문을 열고 싶었다. 모두 신이치와 고락을 함께하고 불굴의 혼을 함께 나눈 동지들이다.”(제30권<하> ‘서원’)
신문에 게재하기 전날인 9월 4일, 태풍 21호 제비가 간사이를 강타해 커다란 피해를 주었다. 최대풍속 44미터 이상의 ‘매우 강한 태풍’이 일본에 상륙한 것은 25년만의 일이었다. 폭풍의 피해는 매우 커서 일시적으로 오사카부에 있는 100만 가구가 정전됐다.
그런 만큼 간사이를 방문하는 장면은 재해와 마주하는 동지에게 그 어떤 것보다 격려가 되었다. ‘고난에 질 수 있겠는가’ 하고 ‘불굴의 혼’을 불태웠다.
그리고 선생님은 소설의 마지막을 2001년 11월 12일에 개최한 본부간부회로 끝맺었다. 이 본부간부회는 신세기 제1회 간사이총회의 의의를 담은 회합이었다.
‘자, 함께 출발하자! 목숨이 있는 한 싸우자! 제2의 일곱개의 종을 드높이 울리면서 위풍당당하게 나아가는 것이다.(제30권<하> ‘서원’)
오사카의 벗은, 간사이의 동지들은 이러한 신이치 가슴속 외침을 내 마음 속 서원의 외침으로 삼아 지금 다시 전진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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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도움 되고있어요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편안한 주말 되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