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부름(홍태희 스테파노, 서강대 신학대학원 대우교수)
어린 시절 신앙을 키웠던 곳은 철원의 한 공소였습니다. 지금은 갈말성당이 된 지포리 공소가 그곳입니다. 조그만 공동체였지만 초등학교 시절 그 장소는 친구들과의 놀이터이자 신앙을 익히는 학교였습니다. 사제도 없는 공소에서 언제나 그곳에 머무르시며 신앙생활을 이끌어주시던 홍수명 다두 회장님을 잊을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요리문답을 외우고 세례를 받을 때가 되었을 무렵, 친구들의 세례명 중 가장 흔한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자인지 사도인지도 구분 못 하는 문요한·신요한·최요한이 대세였는데, 회장님은 저에게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주셨습니다. 최초의 순교자라는 성인의 신원은 더욱 저에게 무언지 모를 책임감과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더욱이 김수환 추기경님과 같은 본명을 갖는다는 것은 큰 영광이었습니다. 이후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은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과 함께 스스로 저를 규정하는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스테파노 성인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혹자는 부제나 집사로 신분을 설명하였지만, 교회 초창기의 성인을 위계적 분위기의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성경은 성인이 베드로와 같은 나자렛 제자들과는 달리 넓은 세계의 문명을 경험했던 그리스계 유다인 제자라고 전해줍니다. 그리고 율법과 성전의 틀 안에서 선교하던 사도들과 달리, 스테파노는 하느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사시는 분이 아니라고 대사제 앞에서 당당히 설교합니다.(사도 7,47-50) 그 어떤 제자보다 올곧은 모습을 보인 성인은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짓겠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 그대로 살기로 작정하셨고, 그리고 성전 모독죄로 끌려가 투석형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며 알게 된 성인의 모습을 따라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닮아 살아가기에는 어림없지만, 그러나 주님 메시지의 근본을 잃지 않는 성인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습니다. 성인의 죽음으로 인해 신자 공동체는 예루살렘에서 적당히 살아남는 길보다 아시아로, 그리스로, 로마로 뻗어 나가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자연물이나 사물에 이름 붙이기를 함께 해 보았습니다. 교정의 벚나무, 길고양이, 휴대전화 등 다양한 자연과 사물이 다온이·초롱이·은영이 등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름을 갖게 되자 그들은 대화가 가능한 인격으로 변하였습니다. “다온이는 매일 나에게 안부를 물어봅니다. 학교에 잘 다녀왔는지, 재미있는 일은 없었는지”, “초롱이와는 이제 몇 가지 의사표시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요즘은 남자 친구에게 푹 빠져 있어요.”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것이 이름 부름으로 인해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경험을 합니다. 그것은 인간 세계를 넘어 자연 안에서 하느님 은총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적당히 사람으로 살아남기만을 전전긍긍했던 우리의 삶은 지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쓰레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이 온실가스가 되어 지구를 달구고 바다로 흘러가 대양 한가운데 부끄러운 쓰레기 섬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을 넘어 자연을 하느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피조물로, 인격을 가진 친구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로 생각했었다면 좀 더 신중하지 않았을까 성찰하게 됩니다. 우선 내 주변의 자연 친구들에게 이름을 붙여 불러봐야 하겠습니다.
홍태희 스테파노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