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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마라톤의 면류관 고전9:24-27 히11:6, 12:1-2
지금 중국에서는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중인데 한국은 이번 올림픽에서는 최악의 메달을 딸 수 밖에 없었다. 잘 알다시피 중화주의에 압도되어 심판들이 중국선수를 너무 봐 주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실례로 우리나라는 작년 12월 열린 2021~22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1차 대회 준결승전에서 혼성 계주 세계 신기록(2분35초951)을 세웠는데 이번 중국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선수의 주종목이었던 쇼트트랙 2000m 혼성 계주에서는 블루투스 터치부터 중국에게 금메달을 몰아주기까지 도를 넘었다는 것이 불공정에 민감한 한국 청년세대의 분노를 불렀다. 물론 베이징 겨울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한 한복은 한국과 문화충돌을 일으켰다는 것에 대한 분노 폭발은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한꺼번에 분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16년 주한미군이 사드 를 배치하자 중국이 한국에 보복하면서 중국은 한국 기업을 핍박해 철수하게 한 것은 물론 드라마·음반·공연 등 한류의 수입을 막고 관광객의 한국 송출도 중단했던 것에 대한 불만이 이번 올림픽에서 불공정 사례가 벌어지자 한꺼번에 터져나온 셈이다. 축제여야 할 올림픽이 왜 이렇게 거칠어진 것은 중화 민족주의를 지목할 수 있는데 1월 25일 중국 선수단 출정식 구호에서 “지도자에게 보답하기 위해 목숨을 걸자. 일등을 다투고 패배는 인정하지 않는다. 총서기와 함께 미래로 가자”란 구호에는 이번 올림픽을 중화 올림픽으로 만들기로 했다는데 배경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쇼트트랙에서 손을 쓰는 것은 절대 금물인데 쇼트트랙 혼성 계주 준결승에서 중국팀의 터치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미국과 러시아가 실격을 해 중국이 결승에 올라가 결국 금메달을 차지했다. 아무리 봐도 도를 넘는 중국 어드밴티지에 우리나라 대한체육회는 8일 베이징 동계올림픽 메인미디어 센터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CAS에 관련 사항을 제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불공정한 게임을 보면서 분노는 하겠지만 이런경기에서 상을 못받았다고 안타까와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거짓과 오류가 어디든 오염되었으며 여기서 받았던 면류관은 곧 썩어질 관이지만 천국에서 받을 면류관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경기에 대해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하느니라(고전9:25).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믿음의 경주에서 탈락하지만 않는다면 천국에선 썩지 않을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인류평화를 상징하는 올림픽 경기는 스포츠를 통해 종족과 종교와 이념을 뛰어넘어 화해와 평화로 나아가는 축제이다 보니 감동과 기쁨 그 자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올림픽경기다. 특히 우리나라는 올림픽을 통해 세계적인 스타들이 배출하면서 더 많은 화제 거리를 남겼는데 돌아보면 그런 기적들이 꽤 있다. 김연아가 대표적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에 있어 피겨란 미지의 영역이었는데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그야말로 김연아는 피겨사에 다시 나오기 힘든 선수로 평가되었고 또 지금의 LPGA는 한국 선수들의 경연장이 됐으나 20여년 전만해도 넘을 수 없는 벽으로 간주된 무대였으나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가 '맨발'로 정상에 오른 뒤 이제 한국은 박인비가 올림픽금메달을 따는 등 숱한 스타들을 보유하게 됐다. 수영의 박태환 역시 태생적인 신체조건 탓에 수영 등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세간의 평가를 딛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수영 400m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듯이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스포츠에서는 소위 '기적' 같은 일들이 왕왕 펼쳐진다. 현대를 3S시대라고 하는데 Speed, Sex, Sports. 그 중에서도 Sports는 현대인의 가장 인기 있는 관심분야가 되었는데 올림픽 경기 종목들을 눈여겨 보면 우리 신앙에 큰 도움이 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단거리 경주 달리는 것은 상을 얻기 위해 최고의 빠른 경주 할 것을 깨닫게 하는데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만 상을 받는다(고전9:24) 또 양궁이나 사격이나 권투경기는 목표점을 명중시켜야지 허공을 치면 안되고 오르지 목표지점을 집중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신앙생활도 우리의 대적인 마귀를 이기는 것이 신앙생활을 바로 한다는 것이다. 또 장애물경기는 돈이나 명예나 가족이 때로는 장애물이 되었을 때 잘 넘어야 한다는 것이 생각나는데 너희가 잘 달렸는데 누가 너희를 막아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갈 5:7). 이처럼 신앙생활을 막는 장애물이 바로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자. 올림픽의 꽃이라고 부르는 마라톤 경기는 2시간 이상 완주해야 하는 경기인데 성경에 비춰본다면 인생을 마라톤한다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이런 신앙의 마라톤을 할려면 무거운 것과 얽매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달려야 함을 깨닫게 한다(히12:1).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마치 운동장에서 경주하는 선수들이라고 하면서 선수가 상을 받듯이 신앙생활도 최선을 다해 잘 믿어야 하늘나라에서 면류관을 받을 수 있다는 영적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므로 세상 끝 날까지 인내로서 믿음을 지킨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신앙의 달음질을 한 완주자에게 상주시기를 기뻐하시므로 성도들은 상을 받도록 잘 믿으라는 것입니다.
(고전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 그리스에는 올림픽경기(아테네)와 함께 이즈미안(고린도)경기장에서도 각종경기가 열렸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이즈미안 경기’를 연상케 하면서 영적 교훈을 주는데 결론은 “너희도 상을 얻도록 이와 같이 신앙의 달음질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은 바로 (면류)관입니다. 성경에는 어떤 면류관들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선한 싸움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시는 면류관
신앙생활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이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며 구원에 이르도록 사탄마귀와 싸우는 영적 싸움입니다. 만약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신앙생활 한다면 당연히 낙오자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고 말씀하십니다(딤전6:12).그리스도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이 땅에서 어두운 세력과 싸우다 보면 의와 복음인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핍박받는 사람으로서 그들이 추구하는 기쁨이나 당하는 고난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사람들입니다. 마귀들은 절망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성도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하므로 성도들은 항상 말씀으로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것은 다 참으셔도 믿음 없는 것은 참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이 믿음가운데 있는지 확인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믿음을 공고히 하고 마귀와 대적해서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절망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공격해 오면 성도는 믿음의 방패와 말씀의 검과 기도로 대항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믿음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통로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래 동안 나라를 잃고서도 절망하지 않고 나라를 되찾은 것은 회당중심으로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낙심될 때 더욱더 말씀을 읽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귀가 주는 시험은 안개 같아서 말씀만 있으면 순식간에 사라지게 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말씀을 갖고 부르짖으면 의심의 구름은 사라지므로 기도는 능력 있게 만드는 힘의 원동력이므로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도 기도하면 강하게 되지만 아무리 지혜 있는 사람도 기도하지 않으면 연약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영적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참는 일이다. 첫째는 이웃에게 참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 자신에게 참는 것이요, 셋째는 하나님께 참는 것이라고 합니다. 악인의 형통이라는 부조리를 참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서 악인의 형통에 대해서 참는 것을 육체가운데 가시를 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모든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건강한 사람이 그 건강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잊고 사는 것과 같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은혜만으로는 우리가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가시와 고난을 통해서 성숙되게 하십니다. 시편 73편에는 악인의 형통에 관해 원망을 쏟아놓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악인의 형통에 대해서 그다지 원망하지 않게 됩니다. 악인의 형통은 우리를 온유한 자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이십니다. 사람들은 믿음의 삶을 살면 만사가 형통하는 줄로 알지만 믿음의 삶을 산다고 해서 모두가 축복과 육신의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고난과 역경의 싸움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를 따라 고난과 역경의 삶이 끝까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이 어떠하든지 모든 싸움에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느냐 입니다. 아무리 편안한 삶이라 하더라도 영적싸움에 패해서 믿음을 잃는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은 모든 상황에서 믿음을 얼마나 굳건히 지켜 승리하느냐 입니다. 믿음의 길은 믿음을 위해 끊임없는 싸움과 고통 속에서 이루어내는 역경의 길입니다. 그러한 길을 흔들림 없이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강한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단 마귀와의 선한 싸움에서 이겨낼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받아야 하늘나라에 가면 면류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 성도들이 받을 면류관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는 상이 면류관이듯이 하나님이 선한 싸움을 한 성도들에게 주실 상은 바로 면류관입니다. 인생여정의 경주를 마친 성도들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주실 줄 믿습니다.
1) 전도의 상인 자랑의 면류관
(살전2:19)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우리의 소망이나 환희의 관이 무엇이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 분 앞에 있을 바로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영혼을 구원한 사람에게는 자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자랑의 면류관이 전도의 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빛의 길로 옳은 데로 인도한 자는 하늘나라에서 해같이 빛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에서 최고의 면류관이 내가 전도했던 영혼을 하늘나라에서 볼 수 있다는 자랑의 면류관입니다. 전도한 사람만이 받는 자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2) 재림의 소망을 가진 자에게는 의의 면류관
(딤후4:8)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 우리 기독교의 핵심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입니다. 그중에 어느것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믿음을 지키고 달려갈 길을 다간 자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3) 양들을 사랑한 자에는 영광의 면류관
(벧전5:3-4) 3 하나님의 상속 백성위에 주인처럼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 떼에게 본이 되다. 4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받으리라. 내가 전도하고 전도한 양들을 돌아보는 사람에게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4) 순교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
(계2:10)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죽기까지 핍박과 시험을 이긴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마귀권세와 싸워 이긴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5) 절제하는 자에게 썩지 않을 면류관
(고전9:25)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하느니라. 모든 일에 절제한 자에게 썩지 않을 면류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면류관은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들이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마치 우리가 올림픽의 경기장에서 마라톤 경기하는 것으로 비유된다면 우리들은 위에서 보았던 갖가지 면류관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예수님 닮는 것을 우리 인생의 목표로 정하자
(고전9:26)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여기서 말하는 향방이 없다는 것은 목표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목표 없이 달리는 것은 탈선이고, 목표를 이리저리 바꾸면서 달리는 것은 방황입니다. 목표없이 달린다는 것은 마치 권투 선수가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은 것이며, 달리기 선수가 방향을 잃고 아무방향으로만 달리는 것이므로 헛수고입니다. 인생살아가는 동안에는 삶의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삶의 목적을 분명히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왜 사는가? 왜 일하는가, 왜 돈을 버는가, 왜 공부를 하는가? 이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사는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목표가 분명하여야 사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짐승들은 먹이를 먹으며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삶의 목적이 없으나 사람은 매사에 생각이 있고 왜 하는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오직 이 세상 것에만 목표를 두고 삽니다. 그 사람의 평생 소원은 고급 아파트 아니면 고급승용차 아니면 승진이나 명예 아니면 돈 수10억 등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목표 둔 사람에 대해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눅12:16-20)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많은 소출에 크고 새로운 창고를 짓고 만족해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 어리석은 자여 이 밤에 네게서 네 혼을 요구하리니 그러면 네가 예비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 밤에 죽음을 맞이하는 부자처럼 아무 소용없는 헛된 일에 목표를 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목표를 어디에 세워야 합니까?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신앙인의 삶의 목표는 바로 우리 주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인데 곧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것들에 도달하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빌3:13)
사도 바울은 (빌3: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나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부르심의 상을 목표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시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주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와 찬송과 말씀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루 이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사는 날까지 하는 경기입니다. 신앙마라톤에서는 출발점에서 먼저 출발했어도 소용없습니다. 반환점을 먼저 돌았어도 소용없으며 골인점에서 먼저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할 때 과거 잘 했던 것이 중요치 않습니다. 지금 잘하면 최고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지금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신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님을 늘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살아가십니까? 돈버는 것입니까? 사업을 확장하는 것입니까? 출세입니까? 여하튼 주님안에서 기도하면서 원하는 일을 통해 목표가 달성되었으면 그것을 통해 예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목표를 이 땅에 두는 것이 아닌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하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려면 절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고전9:25)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절제하고 억제해야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훈련이며 이 훈련을 통해 승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잠16:32) 분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영(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도시를 취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승리는 철저한 자기 관리 즉 처절할 정도로 자기 자신과 싸움에서 이겼을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입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도 선수촌에 입촌하면, 먼저 선서식을 다짐하고서 그 이후로는 철저하게 자기와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싸우기 전에 먼저 자신과 싸워서 이긴 자들이 경기에 나가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선수들은 몇 분, 몇 초의 경기를 위해서, 수년간을 땀 흘리면서 준비합니다. 옛날에는 며칠 못가면 시들어 버릴 월계관과 또 사람들 기억에서 곧 잊혀질 메달을 따기 위해서 선수들은 자기 절제와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만 절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인생여정 마라톤 경주를 한다고 생각하면 특히 신앙인들이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목표로 살아간다면 성도들에게는 자기 절제와 훈련이 더욱더 필요한 것은 당연합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솟아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절제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 마음에 스며드는 욕심을 물리쳐야하고 세상의 유혹을 부정해야하고 경건훈련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모두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므로써 신앙의 면류관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고전9:24) 경주할 때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상을 받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상받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라면 최선을 다하여 달리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달리라는 말은 승마경주에서 경주마가 혼신의 힘을 쏟아 달리듯이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마장에서 달리는 말은 옆을 보지 못하도록 눈가리개를 하고 앞만 볼 수 있도록 하고 달리는데 우리들도 오직 예수님만 봐야지 세상을 바라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해바라기라는 해만 따라다닌다고 하여 해바라기지만 우리는 주님만 바라본다고 한다면 주바라기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칭찬 좀 한다고 우쭐대도 안되고 누가 책망 한다고 해서 시험들어도 안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경주에 있어서도 주님께서 예비하신 승리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속에 안주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십시오,
(딤후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8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친 사람 즉 사명을 완수한 자에게 주시는 상이 의의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이런 면류관은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말씀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6:5)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는 자가 최선을 다하는 자이며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상주시는 분입니다. 신앙의 경주에서는 ‘누가 더 빨리 달렸느냐보다 누가 더 최선을 다했느냐?’로 승패가 결정됩니다. 최고가 되기보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주님께 드리는 최선의 신앙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4. 법대로 달려야 합니다.
(딤후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모든 경기마다 규칙이 있고 법이 있습니다. 거꾸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은 신앙의 영적 경기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인생 마라톤에 2차전은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경주를 달리면서 방향을 모르고 무조건 달리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번 더 반칙하면 끝날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에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정코스가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는 것이며 이 길을 가기위해서는 지름길로 가려 하지 말고, 반칙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오직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길이 유일한 길입니다. 이 길로 가야만 자기인생여정을 다 마치고 주님 앞에서 서는 날 신앙의 면류관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신앙경주는 혼자서만 한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며 지켜보는 증인들이 있다는 것을 믿고 정도로 달려야 합니다.
(히12:1-2) 1 그러므로 증인들이 이렇게 큰 구원을 이루며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려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2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앞에 가려면 무거운 짐과 여러 가지 죄악을 떨쳐 버리고 달려가야 한다는 말씀이십니다. 그 달려가는 우리의 모습을 먼저 하늘나라에 먼저 간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음의 창시자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달려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자를 설명 한다면 개가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생각하면됩니다. 개는 멀리서도 자기 주인의 발자국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알아주는 개를 반려동물로 키우게 됩니다. 그런데 개 중에도 영리한 진돗개나 세파트 같은 개는 주인이 훈련시키고 나면 주인이 허락하는 것과 금지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인이 고깃덩어리를 놓으면 처음에는 먹을려고 하지만 그때마다 주인이 안 돼! 하고 소리를 치면 멈칫 하고 먹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도 동일한 방법으로 고기를 갖다 놓으면 또 개가 고기쪽으로 접근할 때 안 돼! 하고 소리치면서 개를 가볍게 때려주면서 여러번 반복해서 훈련시키면 그 다음에는 고기를 갖다 놔도 고기를 보기 전에 주인먼저 바라보면서 주인이 먹으라고 하는지 안 된다고 하는지 눈치를 살핍니다. 개는 그렇게 해서 길들여집니다. 하물며 개도 이렇게 먹기전 주인을 바라보는데 이성과 영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마땅히 해야 될 것과 해서는 안되는 것을 분별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런 성도들만이 신앙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먼저 간 신앙의 선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금 인생 마라톤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무엇보다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서는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성도라면 죄의 짐을 벗어놓고 신앙마라톤을 하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5. 신앙마라톤하는 자세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그의 피흘리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늘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라톤 선수는 42.195km를 달리면 되지만 우리 인생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생 경주자들인데 어떤 사람은 70-80년을 달리고, 어떤 사람은 불의의 사고로 30년도 채 달리지 못하고 끝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생경주를 마친 후 우리를 구름처럼 둘러서서 보아왔던 믿음의 선진들이 있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인생 경주를 마친 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죄악의 짐을 털어 버리는 것이 신앙마라톤의 출발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믿음의 창시자이시고 완성자이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달려가려면 누구에게나 삶의 패턴이 있습니다.
(1)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야 합니다
달리기 선수는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속옷 입고, 겉옷 입고, 외투까지 입고 달리기하는 선수가 없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무거운 죄의 짐을 벗어버리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그러면 무거운 죄짐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1) 욕심이라는 죄를 버려야 합니다.
욕심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는 다릅니다. 먹고 싶다, 그것은 욕심이 아니라 본능입니다. 그런데 욕심이란 하나님이 금한 것까지 자기가 갖겠다는 것이 욕심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그 곳에서 에덴동산 안에 있는 것은 다 먹을 수 있으나 단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만은 먹으면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허락한 것이 있고 금한 것이 있습니다. 금한 것을 취하는 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탐욕의 결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욕심 부리다가 영생대신 사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약 1:14절 에는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인간들로 하여금 엿새동안은 열심히 일하며 살라고 하였지만 제7일째 주의 날까지도 자기 날로 삼으면 욕심입니다.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라고 했는데 십분의 일까지도 취한다면 욕심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허락한 것은 임의로 할 수 있지만 금한 것을 취한다면 욕심입니다. 욕심이라는 죄에 붙들리는 사람은 부지런히 살아도 늘 곤고합니다.
2) 교만이라는 죄를 버려야 합니다.
자기 교만이라는 말은 자기 생각대로 믿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믿는 사람들이 교만한 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리라고 믿으면서 내 믿음은 내가 지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섬김의 대상이지 우리의 탐심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 믿음 내가 못 지키며 주님이 붙들어 주셔야 합니다. 베드로가 자기 믿음 지키려고 주님앞에서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끝까지 주를 따르겠다고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주님없이 나혼자 내일을 하겠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나는 할 수 없으니 주님 도와 주세요, 그래야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또 신앙인들 중에는 뭐 사람들이야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하나님 앞에서만 바로서면 되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는 신경 안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교만한 자들입니다.
3) 매인 것을 풀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신앙양심 앞에 거리낌이 없어도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18:18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묶으면 그것이 하늘에서 묶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풀면 그것이 하늘에서 풀리리라. 이 땅에서는 사람과의 관계도 매우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하고, 사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심지어 마귀에게 조차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마귀에게 인정을 받다니 무슨말인가요? 마귀가 생각하기를 그 사람은 손댈 수 없어, 그 사람은 정말 세상이 감당못할 사람이야, 하고 마귀가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는 것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히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따르라. 그것들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과도 화목해야 되지만, 사람들과도 화목하고 사랑의 관계가 이어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무엇인가 맺혀 있어서 마음과 몸은 병들어 있는데 본인은 그 원인을 알지 못합니다.
말씀중심으로 교회중심으로 신앙생활해야 하는데 아직도 자기중심으로 인본주의적으로 믿는다면 입으로는 주님을 부르지만 실제로는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마7:21-23) 21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는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평소에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시험이 왔을 때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단 한번도 하나님 말씀 앞에서 아니오 한 일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예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되나니 그러므로 우리도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집과 교만은 무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면 고집을 부리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배우지 않고 듣지 못해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자기가 속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으로써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 성경말씀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인지를 들추어내는 것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속사람을 비추면 내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사람이 얼굴을 보려면 거울 앞에 서야 되는 것처럼 자기 심령을 보려면 말씀앞에 서야 되는데,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면서 자기 모습을 밝히 봐야합니다. 그래야 죄를 회개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허락하는 것인지 금한 것인지 분별력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은 성경 말씀밖에 없습니다.
회개없는 믿음, 회개없는 천국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회개는 깨닫고 고치는 것입니다. 뉘우치기만 하고 고치지 않는 사람은 회만 하고 개를 안 한 것입니다. 너희가 각각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사1:3) 소도 자기 주인을 알며 나귀도 자기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며 내의 백성은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오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줄도 모르고 원망이나 하고 불평이나 하고 죄를 지으니 너희가 매를 맞지 않았느냐? 어찌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데가 없이 되었구나.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고집부리고 죄를 지어서 이렇게 되지 않았느냐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제라도 금식하고 회개하며 돌아오면 내가 너희를 찢었으나 다시 싸매어 줄 것이고 하나님이 징계하였으나 하나님이 치료해 준다고 말씀합니다. 사는 길은 한 가지 오직 회개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이 매를 맞을 때는 아프고 쓰리지만 그것 때문에 깨닫고 회개하고 주의 도움을 구하면 주님은 과거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욕심이라고 하는 죄와 자기 교만이라고 하는 무거운 죄를 벗어 던져 버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 믿음의 경주를 계속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꿈과 소망을 가지고 고난을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인내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뭐가 즐거우냐고요? 내가 이렇게 십자가를 짐으로 삼일만 지나면 아버지께서 날 부활시고 나를 통해 천하만민이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난 이후에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고 아버지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준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고 장차 나타날 영광을 미리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사람은 소망이 있을 때 인내할 수 있고, 희망이 있을 때 노력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부활의 꿈이 있어야 인내할 수 있습니다. 예수믿는 이유는 우리가 이 땅에서 죽고 난 후 천국에서 영생한다는 꿈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탈무드에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면서 지혜의 말씀을 얻었으면 합니다.
어느 산속에 가난한 농부와 아내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살고 있었던 가난한 농부가 집을 떠나 멀리 다른 마을에 가서 돈을 벌어 오기로 하고 아내와 집을 두고 떠났는데 떠나기전 농부와 아내는 서로를 향한 믿음을 지키자고 굳게 약속했습니다. 집을 떠난 농부는 이십일을 걸려 어느 마음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부잣집에서 20년을 일하기로 했습니다. 농부는 주인에게 20년 동안 자신의 일한 보수를 저축해 두기를 부탁했습니다. 드디어 20년이 차서 농부는 주인에게 자신의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는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20년간 번 돈을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세가지 삶의 지혜를 들을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틀동안 고민한 농부는 20년간 주인을 잘 알았기 때문에 20년간 번 돈 대신 주인이 주는 세가지 삶의 지혜를 듣기로 했습니다. 주인이 미소를 지으며 조목조목 세가지 삶의 지혜를 말해 주었습니다. 첫째로 인생에서 지름길을 택하지 말게. 그러면 대가를 크게 치르고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네. 둘째로 과하게 호기심을 가지지 말게 과한 호기심은 다칠수도 있다네. 셋째로 화가 났을 때 절대로 무언가를 결정하지 말게.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후회를 하게 된다네. 주인은 그에게 빵 세덩어리를 주면 말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빵은 돌아가는 길에 먹고 세 번째 빵은 집에서 먹게나. 농부는 주인에게 감사하며 길을 떠났습니다. 첫째 날에 그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는 여행자를 만났습니다. 농부는 대답했습니다. 20년의 머슴살이를 끝내고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20일이나 걸린답니다. 여행자가 말했습니다. 제가 5일밖에 걸리지 않는 더 빠른 지름길로 안내해 주겠습니다. 농부는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지름길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인이 들려줬던 첫 번째 조언이 떠올랐습니다. 농부는 지름길 대신 긴 여정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상강도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밤이 되어 농부는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하룻밤을 머물기로 했습니다. 그가 잠을 자고 있을 때 큰 울음소리가 그를 깨웠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궁금해져서 그는 일어나서 문을 조금 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해줬던 두 번째 조언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집주인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호랑이가 밤에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문을 단단히 잠그고 있었지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농부는 20일이 걸려 집에 도착했는데 밤이라 집에는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부푼마음으로 그는 창문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집안을 들여다 보는 순간 기쁨이 충격과 분노로 변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다른 남자를 함께 자고 있었끼 때문입니다. 증오가 그의 마음을 지배했고 그는 들어가서 둘을 죽이고 싶었는데 주인이 말해준 세 번째 조언을 기억했고 자신을 억제했습니다. 그날밤 그는 헛간에서 잠을 잤습니다. 해가 떠오르자 그는 마음을 진정하고 생각했습니다. 주인에게 돌아가서 일을 다시 구하고 아내와 그의 애인을 죽이지 말자. 하지만 돌아가기 전에 아내에게 자신은 믿음을 잃지 않았다고 말하기로 했습니다. 그가 문을 두르렸을 때 아내는 문을 열고 그의 품에 안겨왔습니다. 그는 아내를 거칠게 밀어내며 슬프게 말했습니다. 나는 항상 믿음을 가졌는데 당신은 나를 배신했어! 아니예요. 아내가 강하게 머리를 저었습니다. 나는 당신과 어젯밤에 한 남자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단 말이요. 농부가 말했습니다.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그 남자는 우리 아들이예요. 당신이 떠날 때 저는 임신중이었고 우리 아들은 스무살이 되었어요. 그 말을 들은 농부는 아내를 꼭 껴안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인의 지혜를 20년의 노동으로 산 것이 지금 이순간의 행복이구나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부부와 아들은 마지막 남은 빵을 먹기 위해 마주 앉았습니다. 농부가 빵을 자르니 그가 20년 동안 번 돈과 이자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습니다. 이 농부가 주인의 지혜를 택한 것이 이처럼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혜를 얻어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스포츠 경주에서는 일등을 해야 면류관을 받지만 천국에서는 일등만 면류관을 받는 게 아니고 누구든지 끝까지 경주하여 천국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면류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믿음을 끝까지 지켰으면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의 짐을 벗어 던졌으면 힘껏 달리십시오.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 선수는 체력도 필요하지만 정신력도 있어야 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경주에서도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들에게 면류관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마 24:13절에 말세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은혜가 있을지어다. 인내하는 사람들이 신앙의 면류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나의 생각, 나의 삶의 방식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며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마치 운동장에서 경주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 인생마라톤 경주에서 면류관을 받으시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진정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