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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9 강
39.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9:35-38).”
천국을 열어 보여주는 신성한 치료
마태복음 9장 18절 이하에는 한 관리가 와서 예수께 절하면서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마9:18).” 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는 도중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에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는데 예수께서 돌아보시고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그 관리의 집에 가서 보니 딸애가 죽어서 사람들이 곡을 하고 헌화하고 있었는데, 그때에 사람들을 내보낸 후에 소녀의 손을 잡으니 소녀가 살아났다.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가시는데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 지르기를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좇으니 소경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졌다는 것이다.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렸다는 말이 나온다.
또 귀신 들려 벙어리 된 자가 있었는데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벙어리 된 자가 말을 해서 무리가 다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면서 모두 경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혈루증 앓는 여자, 죽었던 소녀, 소경 되었던 두 사람, 귀신 들려 벙어리 되었던 사람이 나온 것은 한 왕이, 영광스러운 왕이 오시면 죽었던 자가 살아나고 귀머거리가 듣고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걸어가고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마11:5,사35:5).
혈루증을 앓는 이 여자는 피가 자꾸 새나가는 병이다. 생명은 피에 있는데 피가 출혈되니 자기 생명을 보존할 수 없다. 이 사람은 사탄에게 속아서 자기가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모르는 그런 인생과 같다. 자기 생명을 붙들고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말이다.
종으로 팔려간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못산다. 사탄에게 노예가 된 인생은 자기 뜻과는 정반대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목적한 대로 쓰이지 못하고, 자기가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소모되어 버리면서 마지막에는 죽게 된다.
관리의 딸은 방금 죽었다고 했는데 다른 성경에서는 12살 난 소녀라고 한다(막5:42). 이 소녀는 12년 동안 살았지만 결국 죽음을 향해서 간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인생은 어려서 죽는 수도 있고 젊어서 죽는 수도 있고 늙어서 죽는 수도 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길이 없다면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산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가 없기 때문이다.
나무는 열매를 위해 자란다. 그러나 사람은 열매를 위해서 산다고 할 수가 없다. 만일 하나님이 목적하는 어떤 열매를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열매를 맺기 위해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맹목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사실 죽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소경 두 사람이 함께 고침 받고 살림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면서 소경 되었던 이 두 사람은 태어나서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다 소경이었다. 무엇인가 눈으로 보고 있기는 하지만, 영광의 빛을 보지 못하므로 항상 장님처럼 살았던 것이다.
보는 사람은 보는 것으로 살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은 생각으로 산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전부 생각으로 산다. 어떤 계시라는 것이 없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 없어서 모두 생각으로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장님이다.
이 장님들이 “다윗의 자손(왕)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왕이라는 뜻이다. 천년왕국 시대에 그리스도는 결국 우리의 왕이 되실 것이다. 그가 우리의 왕이 되시면 우리에게 계시하는 자가 된다. 이것이 이사야서의 사상이다. 한 왕이, 영광스런 왕이 오게 될 것인데 그 왕이 오게 되면 눈 먼 자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 말씀을 따라서 이 사건이 기록된 것이다.
예수께서 목자로 드러나심
은혜를 베풀 자가 오게 된다면 사람들은 은혜를 보게 되겠지만, 은혜를 베풀 자가 없다면 사람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할 것이다.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눠주기 위해서 있는 사람이다. 이 왕이 오게 된다면 소경이 없을 것이고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귀신 들려서 말을 못하는 자이다. 우리는 주님을 알기 전에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무엇인가를 보고 무엇인가를 들어야 말을 하는데 우리는 전에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해서 말을 하지 못했었다. 하나님 나라는 보고 듣지 않고는 말할 수 없다.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은 육신은 그대로이나 그 세계 속에서는 썩어질 것, 없어질 것밖에는 서로 듣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주께서 오시면 우리는 다른 눈이 열려져서 다른 세계를 보게 되고 다른 귀가 열려져서 다른 것을 듣게 된다. 그래서 다른 것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말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아담이 처음 지어졌을 때, 하나님은 빛으로 왔고 궁창으로 왔고 생명으로 와서 사람이 되었다. 그 안에는 모든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보면 말하게 되고 들으면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악과로 눈이 어두워진 후로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들을 것을 듣지 못하게 되어 소경과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무엇인가 우리 안에 와야 인식이 생기고, 인식이 생기면 표현을 하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다.
소경 되었던 사람은 분명하게 빛을 보고 눈을 뜨게 됐고, 귀머거리였던 사람은 귀가 열려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다.
이와 같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앞에서 예수님은 의원으로 드러나셨다. 병이 있으면서도 병이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의원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혼인집에서는 예수님이 신랑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 혼인집에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데 오직 신랑만 없는 것이다. 신랑이 있는 혼인집 같으면 굳이 신랑으로 드러날 필요가 없었지만 혼인집에 신랑이 없었다. 또한 가죽부대는 많이 있지만 포도주가 없으니까 예수님은 포도주로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니까 예수께서는 목자로 드러났다.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고,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고,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는 그런 세상에서 예수님은 목자로 드러난 것이다. “예수께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9:35-36).”
하나님을 나타낼 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남
우리의 생명은 참 기이하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나타낼 때,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날 때다. 어느 때는 의원으로, 어느 때는 신랑으로, 어느 때는 포도주로 드러나게 된다. 만약 그리스도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예수께서 혼자 방 안에 앉아 있었다면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나와서 하나님이 주신 다른 생명, 즉 그리스도의 생명을 표현하심으로 여러 여건과 환경을 통해서 이런저런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라는 독특한 사회를 만났기 때문에 메시아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니 종교도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는데 매우 유용한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검은색이 완전하게 드러나려면 흰 바탕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유대교가 아니었더라면 예수님은 메시아로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유대교는 예수를 그리스도 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우리에게 일어난 환경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생각지 않던 환경이 오게 되면 그것을 통해 놀라운 그리스도를 풀어내게 된다. 처음부터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오면 핍박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예수라는 생명이 드러나니까 핍박을 하게 된 것이다. 예수라는 생명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은 아주 선한 사람들이고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 생명이 드러나니까 그들은 악한 사람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의 생명이 드러나면 그 생명에 따라서 그 환경이 나오게 된다. 어떤 생명이 드러날 때 그것이 핍박이 되기도 하고 고난이 되기도 한다. 반대에 부딪히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예수님의 그러함과 같이 우리 자신을 내놓을 때 무슨 일이 생기게 된다.
만일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어떤 일도 생기지 않는다. 우리가 누구에게 우리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면 생각지 않던 환경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예수께서도 그런 환경을 만났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예수님은 목자 없이 유리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목자 없는 양 같은 모습에 한탄하셨다는 말이 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저자는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았을까? 여기에 나오는 모든 유대인들의 육신은 멀쩡하나 속에는 다 병들어 있다는 것이다. 마태는 육신의 병을 통해서 그 속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지적한다.
문둥병은 육신의 병으로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모르는 병이다. 심지어 자기 살이 떨어져 나가는 것도 모르고 단지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유대인이다. 예수께서는 유대교를 고쳐서 더 좋은 종교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고, 또 유대교를 없애려고 한 것도 아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주기 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만을 주는 것이 목자의 일이다. 오늘날 세상에도 이것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없어서다. 물론 그리스도가 있다고 하지만 오직 그리스도만이 아닌, 이것저것이 섞여 있는 것이 더욱 큰 문제다.
세상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부족하다. 오직 하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서 여러 가지가 다 있어도 부족한 이유는 절대적인 것 하나가 없어서다. ‘나는 이것이 아직도 좀 모자라다.’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 어느 것이든지 완전한 하나가 있어야 부족함이 없게 된다.
우리 인생도 그리스도가 적든지 많든지 간에 우리에게 절대적인 것이 되면 그것을 가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세상을 살릴 수가 있다. 고통 받는 자를 위로할 수 있고 죽은 자를 살릴 수가 있다. 그것이 희미해지면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다.
목자 없는 양 같은 이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만 모자란 것이다. 그리스도가 있으면 그것이 빛도 되고, 들리는 소리도 되고, 표현하는 말도 된다. 그것이 생명도 되고 삶도 되고 모든 것이 다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없으면 모든 것이 다 희미해서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함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듣지도 보지도 생각지도 못하고 모든 것이 다 없다. 사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사람이 왜 귀중한지를 모른다. 다른 짐승이나 사람이 똑같으니까 하나도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목자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이 사람들은 유리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목자가 있으면, 그리스도가 있으면, 우리는 유리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용도에 맞게 사용된다. 볼 것을 보게 될 것이며, 들을 것을 듣게 될 것이고, 말할 것을 말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서로 증거하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내 몸이 떨어져 나가도 떨어져 나간 줄 모르는 문둥병 상태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자기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그런 생활이었다. 분명히 의도한 바가 있어서 손도 있고 발도 있었지만 의도한 대로 가지 못하고 기능을 상실했던 중풍병자와 같았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마다하고 주시지 않은 것을 달라고 했던 열병 환자였다.
이런 모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는 자유자가 되었다. 그가 우리의 운명을 짊어지심으로써 우리의 약한 것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고 우리의 병든 것이 치유 받게 된 것이다.
인생은 바람과 바다가 흉용하게 일어나서 문제가 된다. 이 바람과 바다는 바로 우리의 환경이다. 우리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래에 있었고 흉용하던 바다 위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귀신 들려서 까닭 없이 소리를 지르던 사람이었다. 되지도 않은 소리를 내뱉고 무덤 사이에서 방황하던 거라사의 귀신 같은 인생이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귀신이 그렇게 시키니까 하는 것이다. 바로 이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갔다. 그 결과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되어 시끄럽지 않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이 사람을 한 사람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바람과 바다 위에서 시달렸고, 귀신에게 시달렸고, 죄에서 시달리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죄 사함 안에서만 완전히 해결된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심 속에 우리의 모든 바다의 문제, 귀신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점점 더 새롭고 더 완전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앞에서 열거한 병들은 모두 우리 인생의 상태를 말한다. 이런 형편에서 예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셨다. 그리스도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목자가 된 것이다. 양을 치는 목자는 그 양의 모든 것을 치료하면서 양을 친다. 발이 부러지면 깁스를 해주고, 먹을 것이 없으면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고, 목자의 소리를 듣지 못한 놈에게는 소리를 듣게 해서 따라오게 한다. 이것이 모두 목자가 하는 일이다.
우리 자신이 추수할 일꾼으로 가야 됨
예수께서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고 기도하셨다. 그렇다고 하늘을 쳐다보고 그렇게 기도한다고 해서 어디서 오겠는가? 우리 자신이 추수할 일꾼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 자신이 추수할 일꾼인 것처럼 너희가 지금 추수할 일꾼으로 가야 되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권능을 주셨다고 하였다(마10:1). 우리는 바로 이런 권능을 가지고 세상 앞에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귀머거리를 듣게 할 권능, 소경을 보게 할 권능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혈루증 환자를 치료하는 권능,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런 권능을 주시면서 추수할 일꾼으로 너희를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의사와 환자는 별개의 사람이다. 아픈 사람과 안 아픈 사람은 관계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의원과 환자는 하나이다. 내가 고침을 받으면 나는 의원이 된다. 고침 받은 사람이 고칠 수 있다. 그래서 하나인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의원이 되신 것은 하나님께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또 누군가에게 의원이 된다면 내가 고침 받았기 때문이다. 의원과 환자가 하나인 세계가 하나님 나라다.
신랑과 손님도 하나이다. 신랑이 되지 않으면 혼인집의 즐거움을 알 수가 없다. 신랑이 되어본 사람만이 혼인집의 즐거움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신랑이 아니면 혼인집 손님이 될 수 없고, 또 혼인집 손님이 아니면 신랑이 될 수 없다. 이와 달라 세상에서는 신랑과 손님은 별개다.
포도주와 가죽부대도 역시 하나이다. 포도주에게 딱 맞는 가죽부대는 없다. 현재적인 포도주에게는 항상 현재적인 가죽부대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교회로 살고 있다. 그리스도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디서 주님과 하나로 발견되는가? 내가 병을 고침 받고 또 내가 병을 고치는 사람일 때다. 거기에서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그것이 영원히 하나인 세계임을 알게 된다. 참으로 신기한 세계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인 세계에 와 있다. 목자와 양이 하나인 세계에 와 있다. 예수님을 어린 양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어린 양이기 때문에 목자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은 그가 어린양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생의 운명적인 구원이다.
그분이 우리의 질고를 담당하고 우리의 약한 것을 담당하려면,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연약한 것을 담당하는 사람은 가장 연약한 사람을 구원한다. 가장 연약한 것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장 완전한 목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낳는다.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병을 고침 받은 사람만이 의원이 될 수 있고, 어린 양인 사람만이 목자가 될 수 있다. 신부인 사람만이 신랑이 될 수 있다. 이것이 하나인 세계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이며 교회생활이 곧 그리스도의 생활이다. 교회에서 나타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생활을 누리고 있다. 우리 모두는 둘이 아니고 하나인 생활 안에 와 있다.
목자이면서 양이신 그리스도
우리는 다 목자이고 양이다. 내가 길러졌으면 기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훈련이나 교육을 통해서 이루려 한다. 그러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선생이 되겠는가? 먼저는 배우고 나서 선생이 되는 것이다.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지식의 세계에서도 그러하지만 특히 생명의 세계에서는 내가 양이 되어야만 꼭 목자가 된다.
그러므로 양인 우리는 다 목자인 것이다. 큰 목자장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 양이고 또 다른 양들 앞에서 목자인 것이다. 우리는 내가 받은 대로 기른다. 자기가 고침 받았는데 의원이 안 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분명하게 고침 받기만 했다면 그 고침 받은 병에 대해서 자기는 의원이 된다. 자기 문제에 대해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어떤 해답을 얻었다면 그 사람은 바로 그 해답이 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사역할 수 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갈 때 목자의 마음, 어린 양을 기르는 마음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대할 때 아주 조심해야 하는 것은 함부로 하면 그 사람이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그 구원만 드러내야지 다른 것이나 쓸데없는 것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생뿐이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고 했다. 우리는 참으로 이상한 나라에 옮겨와서 세상에 없는 것을 갖고 있다. 왜 세상에 없는 것을 우리에게 줬겠는가? 바로 그것을 세상에 줘야 할 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추수할 사람이 없습니다. 추수할 사람을 보내주십시오.” 하고 기도한다는 말은 “주여, 나를 보내소서.”라는 말과 같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는가? 이제 우리는 추수할 양식을 가졌고 알곡을 가졌는데, 우리가 안 가면 누가 가겠는가? 우리가 추수를 해야 할 사람들이다.
예수 - 하나밖에 해결할 수 없는 분
예수님의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오직 하나밖에 해결할 수 없는 분이다. 그런 분으로서 우리의 목자가 되셨다. 우리도 세상에 나갈 때는 오직 그 하나밖에 해결할 수 없는 사람, 하나밖에 줄 수 없는 그 사람으로 세상에 나가야 한다.
세상은 광활하고 역사와 문화가 얼마나 위대한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오직 하나만 가지고 가야 한다. 비록 두렵고 떨릴지라도 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으로 이 생명을 공급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영원한 목적이다. 이것이 없으면 꼭 신랑 없는 잔칫집과 같다.
우리는 잔칫집에 이 신랑을 주기 위해서 가고, 의원이 없는 세상에 의원이 되기 위해 간다. 이것이 비록 적지만 그 용도가 특별하다. 천지만물을 창조한 가운데 사람이 특별한 이유는 모든 만물보다 위대하거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사람이라는 용도가 특수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세상 속에 들어갈 때 우리의 용도가 특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데는 전혀 무능하지만 오직 한 곳에만 유용하다. 기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품은 값이 비싸서가 아니라 그것이 없으면 절대로 안 되기 때문이다. 비록 작을지라도 그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리스도도 그러하다. 생명은 가장 적지만 가장 소중하다. 눈에 안 보이면서도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이 바로 생명이다. 우리도 세상 앞에 목자로 서게 될 때 모든 것을 다 하는 사람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못해도 오직 하나, 우리가 받은 구원을 전해 주는 그 사람으로 선다는 사실에 100% 만족해야 한다.
이것저것 다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깊이 들어가려면 오직 하나만 알고 그것만을 추구해야 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그 길이 넓어서 찾는 이가 많다는 것이다(마7:13). 우리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하신 이 외골수, 오직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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