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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좋은글과 좋은음악이 있는곳 원문보기 글쓴이: 불루스카이
Michel Polnareff:프랑스 가수.출생:1944 Michel Polnareff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뮤지션으로 1944년, 프랑스의 유명한 음악가, 그래서일까. 그의 노랫말은 인생과 인간에 대한 식견이 가득하다. Michel Polnareff의 음악은 꿈길 같은 방랑자의 체험이 담겨 있다. 관습을 버리고 오랜 세월 동안 잊고 있었던 고향을 다시 찾아오는 방랑자의 발걸음을 닮았다. 또 그의 목소리는 그의 삶처럼 한없이 밝고 다정스러운 연민이 넘쳐흐른다.
holidays / michel polnareff
Holidays, oh holidays
Holidays ː Sylvie Vartan
샹송계를 대표하는 명가수 실비 바르땅은 1944년 8월15일 불가리아에서 태어났다. 1952년 프랑스로 이민을 온 실비 바르땅은 처음부터 가수에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채 스무 살이 되기도 전인 1961년 오빠 에디 바르땅이 리 드하던 밴드의 싱어가 갑작스레 그만두면서 엉겁결에 노래를 시작했다. 오빠보다 음악활동은 늦게 시작했지만 훨씬출중한 재능을 지닌 실비 바르땅은 솔로로 데뷔하면서 본격적인 성공궤도에 진입하게 된다. 1963년에 발표한 'Quand Le Film Est Triste'가 각종 인기차트를 석권하면서 일약 젊은 세대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무드 가득하고 문학적인 샹송보다는 과감하게 록큰롤을 혼합한 호쾌한 음악, 기존의 여가수들이 보여주던 다소곳하면서도 나긋나긋한 이미지를 과감하게 탈피한 그녀의 모습은 당시 젊은이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적인 태도와 부합되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던것이다. 단숨에 '예-예 음악의 여왕'(예-예: Yes의 줄임말로 록큰롤을 좋아하며, 2차 대전을 직접 겪지 않은 60년대 당시의 신세대들을 뜻한다)으로 등극한다. 한번 시작된 성공은 더욱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실비 바르땅이 부른 영화(우상을 찾아라)의 주제가 '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그녀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알려진다. 음악활동이 잘되면서 실비 바르땅에게는 사랑이 찾아온다. 당시 최고의인기를 누리면서 뭇 여성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던 당대의 미남스타 조니 할리데이와 사랑에 빠진다. 대단한 화제를불러모으며 1965년 결혼을 한 이들은 그이듬해 여름에 아들 다빗 할리데이를 얻었다. 다빗 할리데이는 부모의 음악재능과 빼어난 용모를 그대로 물려받아 현재 인기가수로 맹활약 중이다. 이토록 행복한 실비 바르땅을 운명의 신이 질투라도 하듯 그녀에게 모진 시련이 다가온다. 1968년, 70년 두 차례나 겪은 대형 교통사고는 그녀의 가수생명을 위협할 정도였다. 재기가 어렵지 않겠냐는 세간의 예상을 불굴의 의지로 깨뜨린 그녀는 불후의 명곡 'La Maritza'를 발표한다. '세느강이 당신의 강인 것처럼 마릿차는 나의 강입니다... '라는 노랫말을 통해 실비 바르땅은 마음의 고향인 불가리아 남부의 마릿차강과 빠리를 상징하는 세느강을 함께 노래했다. 불가리아에 대한 애틋함이 담긴 이 노래는 폭발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다시 한번 그녀를 세계적인 인기가수로 만들었다. 이 노래는 당시 한국에서도 뜨거운 사랑을 받았는데, 지금도 'La Reine De Saba(시바의 여왕)'과 함께 샹송의 명곡이자 그녀의 대표곡으로 기억되고 있다. 1970년 중반부터 1980년 대 초반까지 여러 공연을 통해 수십만 관객을 동원하던 실비 바르땅은 가수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지만, 개인적으로는이별의 아픔을 겪는다. 세기의 결혼식을 가졌던 실비 바르땅과 조니 할리데이의 사랑은 1981년에 끝났다. 1984년 미국인과재혼하며 실비 바르땅은 심기일전했지만 샹송계에 불어닥친 세대교체의 흐름과, 함께 활동했던 동년배 가수들의 퇴장과 함께 예전의 영화가 멀어진다. 이후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며 거의 가수활동을 안 하던 그녀는 빠리의 어느 무용학교 책임자로학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어느새 환갑을 맞이한 실비 바르땅에게 2004년은 참으로 의미가 큰 한 해였다. 자신의 생을 회고한 자서전출간과 함께 새 앨범 (Sylvie)를 들고 다시 샹송 무대로 화려하게 컴백했기 때문이다. 2004년 상반기는 주로 자서전과새 앨범 프로모션 활동으로 보냈고, 늦가을부터는 빠리를 필두로 벨기에, 스위스를 포함한 유럽 투어에서 매우 좋은 반응을얻어냈다. 새 앨범과 자서전을 홍보하기 위해 마음의 고향인 불가리아 소피아를 방문해서 거의 국민 영웅적인 환영과 찬사를 받았다. 불가리아 대통령의 환영사까지 받은 실비 바르땅은 고향의 푸근한 인심을 마음깊이 느끼며 감동했다고 한다. 긴 금발머리를 야성적으로 흩날리며 경쾌한 록큰롤을 부르던 60년대에서 라 마릿차와 시바의 여왕을 진지하게 열창하던 70년대로, 그리고 이제 인생의 의미를 깨달은 그윽한 모습의 지금까지 실비 바르땅은 먼 길을 걸어왔다. 앞으로도오랫동안 실비 바르땅은 '파격과 낭만의 샹뙤즈(여가수)'로 기억될 것이다.
박인희(1947년생) 1970년대를 풍미(風靡)한 지성파 여자 포크 가수. 별명은 '노래하는 시인'이다.
숙명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재학 중인 1970년에 혼성 듀엣 뜨와에므와로 데뷔하고서 「약속 「세월이 가면」으로 인기를 얻었고 많은 팬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1972년 솔로로 독립하고서 1976년까지 앨범 6장과 시를 낭송한 음반을 내놓았다. 정서를 대단히 듬뿍 담고 있고 시의 정취가 있으며 여성스럽고도 기품이 있는 여러 곡을 담아서 대중가요인데도 음반이 발매될 때마다 문학을 사랑하고 고전음악과 샹송을 사랑하는 다수한 팬에게 많이 찬사받았다.
그 여인의 음색은 매우 청아했고 노래할 때 감정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었으면서도 그 여인이 추구한 음악은 촉촉한 감수성으로 가득하고 문학다운 낭만이 넘치는 매력이 있었다. 매우 쉬운 단어로 인생과 사랑을 속삭이는 듯하였으나 그 노랫말은 매우 유식하면서 뜻이 깊은 특색이 있었다. 대표곡은 「모닥불」인데 당시에서 1980년대까지 대학생들이 membership training할 때마다 즐겨 부르던 노래로, 어느 누구든지 이 노래를 한 번도 불러보지 않은 사람이 없고 「방랑자」, 「얼굴」, 「하얀 조가비」「끝이 없는 길」「그리운 사람끼리」도 크게 사랑받았으며, 이런 노래는 가사나 멜로디에 불필요한 겉멋이나 너절한 장식이 들어가 있지 않은 탓에 21세기인 지금에 다시 들어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시집 『지구의 끝에 있더라도』, 『소망의 강가로』과 수필집 한 권을 출간하는 등 문학가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렇게 글 솜씨에 일가견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야 방송에서 라디오 DJ로도 명성을 떨쳤다. 수녀 이해인과 여자중학교 동창으로서 서로 친하게 지냈다. 가수 활동을 접고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인 방송국장으로서 일하면서 살았는데 지금 아들이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라는 소문도 있다. 연예계를 떠나고서는 언론에 노출되기를 싫어하여 현재 알려진 근황이 거의 없다.
사랑의 휴일(Holidays) - 박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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