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예수뎐] 종자기
4복음서에서 예수가 풀어낸 숱한 메시지는
예수의 노래였습니다.
예수가 품고, 보고, 느끼고, 살았던 신의 속성을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내놓은
예수의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참 드물었습니다.
예수의 노래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중국 춘추시대에 살았던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도 그랬습니다.
백아는 산과 강, 하늘과 땅을 노래했지만
거문고 소리에 담긴 그의 우주를 알아채는
사람은 종자기가 유일했습니다.
그런 종자기가 세상을 떠났을 때
백아가 느끼는 외로움은 얼마나 컸을까요.
결국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달랐습니다.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수는 거문고의 줄을 끊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예루살렘과 갈릴리, 이스라엘 땅을 떠돌며
끊임없이 거문고를 탔습니다.
그 소리에 하늘의 소리를 얹어서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예수의 노래는 달랐습니다.
그저 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위로하고,
어깨를 토닥거리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혼자 힘으로 도무지 풀 길 없는
인간의 어두운 절망에
예수는 빛을 풀었습니다.
그런 빛을 세상에 풀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노래에는
문고리가 달려 있습니다.
당기면 누구든지 신의 속성으로
녹아들 수 있는 문고리입니다.
예수가 노래한 가사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질수록
하늘나라로 들어서는 문고리가
더 선명히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내 마음을 가난하게 하려면 어찌해야 하나?
문고리를 여는 방법을 일러달라.”
예수는 이미 그 방법까지 노래를 했습니다.
다름 아닌 ‘자기 십자가’입니다.
저마다 주어지는 자기 십자가를 통과하며
우리의 마음이 조금씩 가난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노래는 들을수록 참 놀랍습니다.
2000년 전의 노래가
2000년 후를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을 뚫으니까요.
세례 요한이 죽었지만,
예수는 거문고 줄을 끊지 않았습니다.
백아와는 달랐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의 노래는 인간의 마음을 겨누기 때문입니다.
100년 뒤, 1000년 뒤, 2000년 뒤
누구라도 '예수의 종자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소리에 내 마음이 무너질 때,
비로소 예수의 거문고가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때는 우리도 ‘예수의 종자기’가 됩니다.
누구라도 ‘예수의 지음(知音)’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