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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 2. 큐티
열왕기상 1:1 ~ 14
다윗은 노쇠하고 아도니야가 왕이 되고자 하다
※ 열왕기의 기자는 예레미야로 추정한다. 예레미야는 통일왕국에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게 된 배경과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왜 망하게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역대기가 남 유다만을 배경으로 한다면 열왕기는 북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에도 많은 할애를 한다. 특별히 열왕기에서는 선지자들(요엘, 오바댜, 호세아, 아모스, 요나, 이사야, 미가, 나훔, 예레미야, 스바냐, 하박국, 엘리야, 엘리사)의 사역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기술된다. 왕의 역사 위주의 일반적인 흐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루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점이 제시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나라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알려주고자 하는 관점이라고 할 것이다. 결국 북 이스라엘도, 남 유다도 망하지만, 하나님이 망한 것이 아니며,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며,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라가 망했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로 이루어 질 것이라는 것을 면면히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의 백성은 망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회복하실 것임을 성령의 감동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눈길로 면면히 기록하고 있다.
관찰 :
1) 노쇠한 다윗
- 1절.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 다윗의 인생은 몹시 고생을 많이 한 삶을 살았다. 다윗은 대략 70세 정도를 살다가 죽었다. 그렇기에 다윗이 아주 장수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다윗은 나이가 많아 늙었다. 다윗은 빨리 늙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전쟁터에서 핏물을 뒤집어 쓰고,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수없이 치루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사울에게 쫓기며 하루를 보장 하지 못하는 삶을 십수년간 살았다. 블레셋으로 넘어가 지독한 고생을 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어도 많은 전쟁을 치루었고, 또한 자녀들로 인해서 마음 고생도 너무나 많이 한 삶을 살았다. 이러한 삶을 살아온 다윗은 노년에 건강을 잃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체온이 올라가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다만 체온이 오른 것만이 아니라 그가 왕으로서의 통치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기에 아도니야가 왕이 되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된 것이고, 다윗 왕의 생전에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 2절. “그의 시종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그로 왕을 받들어 모시게 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 이렇게 하는 것은 당시에 할 수 있는 마땅한 조치였다. 고대의 치료법에는 이렇듯 원기를 상한 남자에게 처녀와 동침함으로 원기를 회복하게 하는 방법이 있었다. 이 때 다윗의 경우는 성적 쾌락을 위한 방법이 아니라 치료를 위한 방법이었다. 다윗이 아직 후사에 대한 정리가 끝나지 않았기에 다윗의 통치가 이어지도록 하기 위한 시종들의 최선의 조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3절.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 수넴은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나사렛 근처 소 헬몬산 주변의 잇사갈 지파의 고을이었다. 다윗의 신하들은 의도적으로 아름다운 처녀를 구하며 미인으로 유명한 지역들 중에서 수넴의 아비삭을 찾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 4절.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 다윗의 시종들은 아비삭에게 다윗을 시종들도록 했다. 70인경은 “시중”을 “함께 누워 흥분하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아비삭이 잠자리를 함께 하며 다윗의 체온을 따뜻하게는 했지만, 이 때는 다윗이 여성과 성행위를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윗의 상태가 위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의 반란
- 5절. “그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 아도니야는 다윗이 헤브론 통치의 시기에 학깃을 통해서 낳은 넷째 아들이다.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은 다말 사건으로 인해서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했고, 둘째 아비가일의 아들인 길르압은 어려서 죽었고, 셋째 압살롬은 반란으로 인해서 요압에게 죽었다. 아도니야는 자신이 장자의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솔로몬에게 다윗의 왕위가 이어지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렇기에 아도니야의 행위에 대해서 열왕기 기자는 “스스로 높여서”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하나님의 선택이 중요하지 인간의 관점에 의해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 6절.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 아도니야는 인간적으로 보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잘 생기고, 똑똑한 자였다. 그러나 다윗은 아도니야를 훈육하는데 있어서 바르게 키우지 못했다. 아버지로부터 혼나지 않고 큰 아도니야는 교만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기에 쉬운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집에 빠져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니라 자신의 야욕에 의해서 움직이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 7절.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 =>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 등은 압살롬의 반역 때에도 바른 판단을 했었다. 그러나 이 때는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된다.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 바른 믿음과 신앙적 결단으로 다윗을 선택하고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심과 처세에 의해서 움직이는 존재들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사건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8절.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의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 당시의 상황 속에서는 장자권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아도니야 편에 굵직한 인물들이 모여서 아도니야가 왕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선택하신 것을 알고 있는 이들로서는 그러한 인간적인 판단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도니야를 따르지 않았고, 다윗의 용사들도 아도니야를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다윗의 용사들은 다윗과 행동을 같이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 훈련이 되었던 것이다.
- 9절.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바위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하 된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 “에르노겔”은 예루살렘 근처의 유명한 유양지이다. 이곳에서는 큰 잔치가 종종 열렸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큰 행사를 치루곤 하는 장소였다.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는 행위는 제사 행위였다. 아도니야는 매우 용의주도한 인물로 다윗의 자녀들과 다윗 왕의 신하들을 다 초청해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형식을 빌어 자신의 대관식을 거행하고자 한 것이다.
- 10절.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 아도니야가 이들을 초청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다윗의 왕위가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비록 에르노겔에서 제사 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고자 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뜻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신의 야욕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도니야를 따르는 이들도 모두 동일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3) 급박한 상황에서 나단이 취한 전략
- 11절. “나단이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말하여 이르되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음을 듣지 못하였나이까 우리 주 다윗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 아노니야의 반역에 대한 소식을 들은 나단은 밧세바를 통해서 다윗에게 이 소식이 알려지도록 하고자 한다. 아도니야가 철저하게 자신의 대관식을 다윗에게도, 나단과 솔로몬의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 12절. “이제 내게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아들 솔로몬의 생명을 구할 계책을 말하도록 허락하소서” => 나단은 하나님의 선지자로 다윗의 죄악을 드러낸 자이고, 또한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지으실 것에 대한 예언을 선포한 자이다. 그렇기에 나단이 단순히 구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솔로몬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수를 쓰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단의 의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 13절. “당신은 다윗 왕 앞에 들어가서 아뢰기를 내 주 왕이여 전에 왕이 여종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런데 아도니야가 무슨 이유로 왕이 되었나이까 하소서” => 나단은 스스로 왕에게 나아갈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밧세바는 다윗에게 나아갈 수 있었다.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빠르게 다윗에게 나아갈 수 있는 이는 밧세바 뿐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윗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지도 알려주고 있다.
- 14절. “당신이 거기서 왕과 말씀하실 때에 나도 뒤이어 들어가서 당신의 말씀을 확증하리이다” => 나단은 밧세바와 함께 다윗의 마음을 움직일 방도를 취하고자 하고 있다. 이것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여쭙고, 그 결과로 나온 방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기에 나단은 계략이 아닌 믿음의 행위로서 이 길을 가고자 했던 것이다.
가르침 :
1) 다윗이 늙었다. 그의 인생은 고생이 많았다. 그렇기에 늙어서 체온이 오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 상황에서 정상적인 통치는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아직 왕위를 솔로몬에게 물려주지 않고 있었다. 당시에 왕이 죽어야 왕위가 계승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레임덕의 상황에서 아도니야는 자신의 야욕을 성취하고자 한다. 아도니야는 압살롬과 많이 닮았다고 한다. 외모도, 성정도. 그렇기에 그는 다윗의 측근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마음을 샀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척하면서 자신의 동생들과 다윗의 신하들을 모아 얼렁뚱땅 왕이 되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은 없었고, 인간적인 야욕만 이글거렸다.
2) 나단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다윗의 왕위가 솔로몬에게로 이어지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도니야의 계략으로 대관식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되는 지경까지 그 전모를 모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대세가 이미 기운 것처럼 보였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아도니야의 편에 서는 것이 지혜로운 것처럼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급박한 상황에서도 나단은 침착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고 있다. 그렇기에 밧세바와 함께 다윗에게 나아가 다윗을 움직이고자 한 것이다. 다윗은 무기력하게 보였고, 왕으로서의 통치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지만, 다윗과 함께 하고 계신 분이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다 끝난 싸움처럼 보였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나단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 난국을 헤쳐나가고자 하고 있다. 나단은 이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적용 :
1) 하나님의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형편과 상황을 따르면 결국은 망하게 된다.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형편과 상황을 따르는 것이 옳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나단은 그런 삶을 살고자 했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아갔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음을 행하고, 우리야를 살인 교사한 사건에 대해서 직언하고 다윗의 회개를 촉구한 것도 나단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에게 다윗의 왕위가 이어지게 다윗을 촉구하는 것도 나단이었다. 나단은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한 사람이 아니다. 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소중히 여긴 믿음의 사람이었다. 나도 상황과 형편에 내 뜻을 굽히고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내 목숨을 내 놓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담대함이 요구되고, 더욱 믿음이 요구된다. 그렇기에 주님께 믿음을 달라고 간구하도록 하자. 나는 믿음이 부족하다. 믿음을 공급받아야 한다.
2) 내일 북경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오늘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병조 이름 개명하기 위해 법원에 가는 것, 또 연략해야 할 사람들과 연락하는 것, 한국에서 만난 만남들에 대해서 정리하는 것 등등.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드린다.
3) 북경비전교회의 문을 닫는 과정에서 열왕기하 말씀 묵상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말 할 수 없이 많은 유익이 있었다. 이제 열왕기상 묵상을 통해서 계속해서 인도해 주실 하나님의 이끄심을 기대한다. 나는 주님을 참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