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중이염
김분홍
어느 기지국 이야기일까
연필에
붕대를 감아 놓으면
면봉이 될 수도 있겠지만 상대의 말 펀치를 막아내기엔 어휘력이 부족하다
달팽이관에 출입문이 닫혔다는
의사의 처방전에 폭설이 내렸다
그는 내가 면봉을 들고 있으면 오른쪽 귀를 후벼 팠고, 면봉을 들고 있지 않으면 왼쪽 귀를 후벼 팠다
새로운 말을 실어 나르는 면봉, 헌 면봉을 새 면봉으로 교체해주지 못해도
면봉이 실어 나르는 적설량은 줄지 않았다
지퍼 백에 냉동했던 나의 난청이 해동되면서 사이렌 소리가 사라졌다
내가 체크무늬 셔츠에서 오목을 두는 동안, 면봉 없는 아침은 굴러온다
그는 아침을 후비다가 청력을 부러뜨렸다
먹구름 레시피
뽕잎을 만지면 몸에 뽕잎이 쌓인다 누에고치가 된 나의 입에서 실이 풀려나온다 실을 감았다 풀고 풀었다 감으면서 나는 문장을 짠다
뽕잎을 딴다 뽕잎에서 오래된 책 냄새가 난다 나는 뽕잎을 따서 푸른 피가 흐를 것 같다
피가 푸르기 때문에 얼굴까지 푸르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뽕나무에 붉은 신호등과 푸른 신호등이 매달렸다 뽕나무의 혈관에서 피를 수혈받는다 피는 거머리처럼 검다 풍경이 검게 변하는 것으로 어둠에 동조한다 고라니 발자국이 검게 익어갈 무렵, 어둠을 수확하려면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
풍경이 흘리고 간 먹구름이 바닥에 굴러다닌다
고랑에 떨어진 먹구름을 줍는다
저걸 조려 볼까? 먹구름을 뭉개기 전 흰 구름을 골라낸다 뭉툭한 쉼표 같은 먹구름을 세척해서 믹서기에 넣는다 나는 먹구름을 한 자락 한 자락 저어가면서 길지도 짧지도 않게 조린다.
달콤한 먹구름 한 자락이 곧 당신을 비 내리게 할 것이다
근작시
오데사 계단
한발 한발 스텝을 섞듯 말을 섞는다.
서먹해진 관계를 좁혀보려고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어보지만
당신의 혀는 양파 속이다.
내가 백 미터 다가가면 당신은 백 미터 후퇴한다. 당신은 수직이고, 나는 수평이기 때문에
우리의 간격은
제자리에 멈춰있다.
우리가 고층과 저층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고삐 풀린 생각이 방황하는 곳에
임시방편으로 침묵을 말뚝으로 박아 놓는다.
당신의 말과 나의 말이
부딪쳐서 찌그러지기도 하고, 계단 아래로 위태롭게 굴러 갈 때가 있다. 거기에는 당신이 쏜 총에 맞아 부상당한 나의 말도 있다.
모든 스텝에선 화약 냄새가 풍긴다.
헐은 내장처럼 장 누수가 있는 말,
오르막과 내리막이 심한 당신의 말에 변비가 있다.
시작노트
몸에 백일홍이 번진다.
띠를 두르고 뭉쳐서 피는 백일홍은 백일 동안 피는 꽃도 아니고, 백일 동안 지는 꽃도 아니고, 당신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가렵다가 흉터만 남기는 꽃이다. 밤이 가렵다. 밤은 긁어도 가렵다. 왼쪽 허벅지에 다이펜탈을 바른다. 긁은 자리에 딱지가 앉는다. 딱지 앉은 자리를 또 긁는다. 혈관을 타고 통증이 허벅지를 찌른다. 통증은 시시각각 들려오는 층간소음이다. 집의 혈관을 타고 이동하는 층간소음. 밤새 허벅지를 찌르던 통증은 새벽이 되어서야 잦아든다. 폭염이 시작될 무렵 피기 시작한 백일홍은 늦가을까지 피는 가려운 꽃이다.
외골수로 활활 타오르는 백일홍은 불이다, 불은 불속에서 멸망한다. 그을린 사랑*의 흔적처럼.
*그을린 사랑: ‘드니 빌뇌브’ 감독
김분홍 2015년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