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이 몹시 무겁다. 오늘 총선 투표결과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실제론 4월 들어서부터는 항상 조마조마하고 불안했다. 발표되는 여론조사 거의 모두가 거대 야당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야권의 인사와 동조자는 개헌과 대통력 탄핵을 쟁취할 수 있는 200석 이상 까지도 호언했다. 본 투표 하루 이틀 전 여당 중진들이 마지노선은 막아달라고 읍소할 만큼 절망적인 상태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가 분명 집권 2년차인 정부를 심판하는 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한편 대통령이 고집스럽고 국정을 매끄럽게 운영하지 못한 점도 있다. 그러나 다수의 힘을 믿고 야당이 대통령 취임부터 발목을 잡은 행패 역시 작지 않은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더욱 한심스러운 건 갖은 패악을 저지른 자가 야당을 이끌고 유죄 판결을 받은 자가 새로운 당을 만들어 법을 조롱하고 있는 점이다. 그들이 내놓은 몇몇 후보는 심각한 비리와 입에 담기가 힘든 막말로 보통사람들을 좌절시키고 부끄럽게 한다. 후안무치의 그들이 날뛰는 걸 보면서 우리는 절대로 선진국 대열에 설 수 없다고 한탄해본다. 사회 곳곳에 만연한 사리사욕에 눈이 먼 병폐를 몰아내고 정의롭고 밝은 세상을 우리의 후손한테 물려주는 그날은 정녕 올 수 없는 걸가...
내키지 않는 여당의 예기된 패배를 가슴에 안고 집을 나서니 쇳덩어리를 단 듯 발걸음이 대단히 무겁다. 오로지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기를 기원한다. 투표하는 걸 참작해 만나는 시간을 보통 때보다 한 시간 늦추었다. 약속한 장소에 모두 14명이 모였다. 특히 눈을 끄는 건 췌장암 때문에 무척 힘든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박재진의 천상의 파트너다. 다음 주에 2주마다 받는 8번 째 치료를 앞두고 있는 부인은 다소 얼굴이 해쓱하나 트레이마크인 맑은 웃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건강을 찾으려는 강력한 의지로 거의 네 달 만에 나타났지만 세진의 배려 깊은 무상의 치아치료에 보답하기 위해 모두한테 점심을 대접하려고 참석했다. 빨리 병마에서 벗어나 값지고 아름다운 추억의 시간들을 만들어 나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곧 바로 한강 산책길로 들어선다. 임시 공휴일이라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나와 짙어가는 봄의 향기를 한가득 품에 넣으려고 넋이 나간 상태다. 도로 옆에 심어 놓은 다양한 색깔의 활짝 핀 아름다운 튤립의 유혹에 빠져 머물고 또 머물며 길을 막는다. 그러나 마음에 멍이 들은 탓인지 감성이 일어나지 않는다. 완연한 봄이 왔다고 알려주는 응봉산을 노랗게 물들인 개나리가 죽어가고 있어 더욱 허하게 느껴진다. 감정이 메말라 버린 육신을 끌고 서울숲으로 들어선다. 입구부터 이어지는 다리가 상춘을 즐기려는 인파로 헤어나가기가 힘들다. 다리 위에서 보이는 눈망울이 큰 착한 사슴들을 보며 탐욕에 물든 우리의 삶이 밉고 서글프다. 내려가 근처의 쉼터에 앉아 커피와 스낵을 들며 여유를 찾는다. 솔솔 부는 바람에 휘날린 벚꽃 잎이 여울위에 깔아놓은 하얀 연분홍의 카펫이 닫혔던 마음을 열어준다.
숲에 빈 곳이 없을 정도로 꽉 차 있다. 걷는 사람들을 빼고는 거의 모두가 쉼터에 앉아서 또는 가지고 온 깔개를 펴놓고 맛있는 음식을 들며 소풍에 빠져있다. 오후 1시가 다 되어 숲을 나와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을 물색한다. 공휴일인 까닭에 모든 음식점이 차있다 못해 대기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14명이라는 대군단이라 적합한 장소를 찾는 것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리저리 살피다 발견한 검소한 해장국집에 들어선다. 나이가 든 주인과 다소 어정쩡한 종업원 탓에 주문하는데 애를 먹는다. 반주와 함께 정감어린 늦은 회연의 날개를 마음껏 펼친다. 한 시간 정도 지나 식당을 나와 텁텁한 입맛을 부드럽게 하려고 카페를 찾는다. 젊은이와 연인들이 들끓는 지역이라 마땅한 커피 점을 찾는 게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 보다 더 힘들다. 간신히 지하1층 지상 1층으로 꾸며진 카페에 들어간다. 워낙 작은 곳이라 지상에만 들어갈 공간이 있다. 그마저도 대여섯 손님이 있으면 허사다. 다행히 자리를 잡을 수 있어 제법 비싼 케이크를 커피와 함께 즐기며 제약받지 않는 우리들만의 시간을 갖는다. 이야기 주머니를 풀어가며 우정과 사랑의 끈을 이어간다. 3시경 카페를 나와 집으로 향한다. 소인은 아침에 왔던 길로 되돌아 가 열차에 몸을 얹는다. 집에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출구조사 발표를 시작해 투표결과 방송을 한다. 발표대로라면 여당이 마지막 선을 지킬 수 없는 상태라 좌절에 빠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사가 엉터리란 게 판명되었고 새벽 3시30분 쯤 108석이라는 걸 확신하고 지치고 지친 심신을 이불속으로 눕힌다.
함께한 친구들: 김세진, 김순화, 김승열, 김영후, 김종하, 박재진 부부, 방건영, 서규석, 이승권, 이재묵, 정학성, 정한성, 최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