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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아(無我)는 극장식 음악감상실 (1971년 개업 ~ 1990년대 중후반 폐업)
무아는 광복동에서 용두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5층 건물 중 4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부산시 중구 광복동 1가 12번지, 전화번호는 23에 3288. 무아 뒤쪽에는 이윤택의 가마골소극장이 있었다.
건물구조는 1층과 지하층이 신라민예사였고 2층에는 수다방, 3층이 미용실, 4층이 무아, 5층이 신라민예사 직원들 숙소, 그 위가 옥상이었다. 전체가 당시 단위로 110평정도 됐지만 한 건물이 아니라 붙여서 지은 두 건물의 4층을 터서 한 공간으로 썼다.
그래서 무아사장님은 양쪽 건물주에게 각각 집세를 주어야 했다. 같은 건물에 들어선 여러 업소들 중 무아처럼 두 건물을 터서 한 공간으로 쓴 층은 2층 수다방이 있었는데 나중에 목촌다방이 되면서 평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요즘처럼 엘리베이터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 무아까지는 그 높은 4층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야 했지만 아무도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빈자리가 없을까 봐 걱정했을 뿐.
□ 무아의 음악실(DJ박스) 구조
무아는 일반적인 음악다방처럼 차를 마시고 나가면서 계산하는 게 아니라 입구에서 돈을 내고 티켓을 받고 들어가는 입장식이었다. 입장권은 신청곡과 사연을 적는 리퀘스트 용지였으며 한쪽 귀퉁이를 찢어서 내면 음료수를 마실수 있었다.
내가 처음 무아에서 음악을 하게 된 1980년 당시에 그런 구조는 부산에서는 무아가 유일했다. 탁자를 가운데 두고 4명씩, 6명씩 둘러앉는 방식이 아니라 음악실 방향을 보고 250개가 넘는 의자가 빼곡히 놓여 있었다.
영업시간은 아침 9시부터 밤 10시 30분까지였으며 오후 서너 시가 넘어가면 그 많은 좌석이 젊은이들로 꽉 차 빈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무아는 음악실(DJ박스)이 엄청 컸다. 또 3~4만 장이나 되는 레코드를 담고 있는 판꽂이도 높고 길었다. 다른 음악다방의 DJ박스가 한두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로 좁았지만 무아는 달랐다.
음악실 안에는 큰 콘솔(음향믹서)이 있었고 피아노가 있었다. 장기자랑 프로그램인 프리스테이지 시간에는 출연자가 음악실 안에 들어와서 피아노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시낭송도 하고 또 디스코도 추었다. 그러면 손님들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그 광경을 보며 박수를 보내는 구조였다.
물론 처음 무아가 생겼던 70년대 당시에는 음악실 옆쪽에 작은 무대가 있어 연극 공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유명연출가가 된 이윤택 같은 분도 무아에서 공연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음악실을 넓히면서 무대를 없앴다. 1981년, 내가 당시 무아 사장님께 “밖에서 합시다”고 떼를 써 음악실 앞에 작은 무대를 만들기 전까지는 그랬다. 당시 사장님은 2대 전 모 사장님이었으며 오픈무대에서 '일요스페셜'이라는 장기자랑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했다.
□ “실례지만 벤소(변소)가 어디 있지 말입니다...”
그런데 음악실(DJ박스)은 영업시간 중에는 DJ들만 출입할 수 있는 일종의 성역이었다. 비록 사장일지라도 DJ를 배려해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유리창을 두고 음악실과 객석으로 분리된 공간에서 둘 사이의 소통은 음악실 유리 가장자리에 뚫어 놓은 작은 구멍 하나가 전부였다. 여기에 신청곡과 사연을 적은 메모지를 넣으면 DJ가 보고 소개도 하고 노래도 틀어주는 방식이었다.
무아는 음악실 양쪽으로 어른 키보다 더 큰 케이스에 담긴 알텍(ALTEC) 스피커가 당당하게 버티고 있었다. 객석에서 볼 때 오른쪽 정면 스피커와 음악실 사이로 음악실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커튼을 2중으로 쳐 놓아 DJ가 드나들어도 안쪽 대기실이 객석에서는 안 보이는 구조였다.
그 대기실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야 비로소 음악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대기실에는 책상과 의자, 낡은 1인용소파가 있어서 다음 시간에 진행할 DJ가 미리 와서 방송준비를 하고 휴식도 했다.
그런데 가끔 음악실 문을 열고는 화장실을 찾는 손님도 있었다. 한번은 내가 마이크를 켜놓고 머시라머시라 멘트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군인이 머리를 들이 밀고는 말했다. “DJ형님, 여기 말입니다. 실례지만 말입니다. 벤소(변소)가 어디 있는지 말입니다...”
나는 순간 당황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 멍~하고 말았다. 그러자 밖에서 이 모양을 보고 있던 손님들은 마이크를 타고 나오는 그 군인의 목소리에, 당황하는 내 모습에 웃음보를 터뜨렸다. 군인이 휴가를 나와 여자친구와 무아에 왔다가 화장실을 못 찾는 바람에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그럴 것이 무아는 음악실에만 불을 켜 놓았는데 그나마도 간접조명이라 은은했고 창을 모두 검은 커튼으로 가려 놓아 극장처럼 컴컴한 구조였다. 기둥 옆과 천장에 작은 조명등 몇 개만 켜 놓았고 화장실은 한쪽 벽에 더 작은 등으로 위치를 알리고 있어서 처음 온 사람은 찾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사진은 무아음악실 인기프로그램인 '프리스테이지' 1983년 연말결선> 왼쪽부터 가수 이진석, 무아 사장님, DJ설리진의 모습이 보인다.
프리 스테이지(Free Stage)는 1970년 대 초반부터 1880년대 중반까지 무아음악실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개최했던 아 마추어 장기자랑 프로그램의 제목이다. 노래, 무용, 시낭송, 악기연주 등 다양 한 장기로 무장한 손님들이 나와 경연을 펼쳤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부산을 대표하는 음악감상실 '무아(無我)'는 지난 1971년 7월에 광복동에서 문을 연 극장식 음악감상실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던 곳이다.
DJ 최인락 방송DJ의 등용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을 거쳐간 DJ 중에는 영화 '열애'의 실제 인물인 고 배경모 씨를 비롯해 석송, 유문규(DJ명 쌔미), 강동진, 이창주(이창환), 이영철(강민), 정인회(정진), 이상민, 박태수, 변영균, 이정혜 등이 방송 DJ로 명성을 얻었다. 작사가 지명길과 유영건, 극작가 이윤택을 비롯해 가수 최대호, 높은음자리, 도시의 그림자, 바다새, 어우러기 등 부산출신의 인기가수가 공연을 했던 곳으로, 당시 대중문화의 요람 역할을 수행했다. 행사를 기획한 최인락 씨(TBN부산교통방송 DJ)도 1980년대 초반부터 무아에서 활약한 뒤 부산MBC 별밤지기로 발탁돼 1980~1990년대 라디오 전성기를 이 끌었다.
그는 "무아음악실은 부산 7080세대들에게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당시 스튜디오 안에서 바라본 손님들은 순수함 그 자체였고, 누구나 시인이자 음악가였 다. 모두가 사는 곳과 하는 일은 달랐지만, 음악을 매개로 공감대를 형성했 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무아의 뛰어난 음질과 굉장한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할 정 도였다. 매킨토시 진공관 앰프에서 증폭시킨 소리가 대형 인클로저에 내장된 알텍 스피커를 통해 120평 넓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곳에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손님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고 울산, 대구, 마산은 물론 멀리 서울 등지에서 부산에 여행 온 음악애호가들이 꼭 들렀다 가는 '핫 플레이스'였다.
[7말 8초, 중반까지 남포동권역의 음악다방1- 최인락]
*사진은 1980년 초 필자가 진행한 무아 '프리스테이지'의 시상식
최인락 씨는 "무아에는 거의 하루 종일 큰소리로 록 음악을 트는 DJ와 손님들의 교감이 있었다. 일반 음악다방과 비교가 되지 않는 엄청난 소리였으며, 엄선한 레퍼토리는 일종의 희열을 느낄 정도였 다"며 "고급오디오에다 흔히 들을 수 없는 희귀음 반, DJ들의 개성 있는 진행과 극장식으로 배열해놓 은 좌석에서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음악에만 집중 할 수 있는 구조도 독특했다"고 설명했다. 한때 부산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무아에 다녀오거나 단골이라는 사실이 자랑거 리가 될 정도였다. 무아의 상업적인 성공은 부산에 음악다방의 전성기를 가져왔다. 무아 이전부터 존재했던 음악다방들은 앞 다퉈 오디오를 보강했고, 이름난 DJ들을 스카웃하기에 바빴다.
한창 때는 광복동, 남포동, 서면 등지에는 음악다방(또는 감상실)이 100여 곳 이 넘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무아도 세태와 매체의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경영난으로 문을 닫 고 말았다. 무아뿐만 아니라 광복동과 남포동 그리고 서면 등 부산의 중심가 에 있던 음악다방들도 1990년대를 지나면서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최인락 씨는 "오는 28일에 열리는 '7080음악다방 동창회, 무아프리스테이 지'는 그 시절 음악다방 문화를 가슴 속에 간직한 분들이 다시 모여 차 한잔 과 노래 한 곡을 나누는 자리다. 가슴 속에 남은 노래와 그 노래를 함께 들었 던 사람과 장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한 부분이다. 음악다방은 모르 더라도 라디오를 들으며 일하거나 공부한 '라디오키즈'들도 함께 했으면 좋겠 다"며 기대를 내비쳤다. 프로그램은 오후 4시부터 DJ박정환, 김현민(전 MBC경남, KNN 현 부산TBN)과 잠 바OJ(재그보컬리스트)가 DJ로 나선다. 7시부터 막을 올리는 무아 프리스테이지는 DJ최인락 씨가 MC를 맡았다.
무아프리스테이지에서는 오래 전 무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참가자들의 장기자랑을 펼 치며 최대호, 김희경 등 부산에서 활동 중인 가수들과 유현웅(마술사), 이선영(바이올린 연주가) 등이 초대손님으로 등장해 관객과 함께할 예정이다. 최인락 씨는 "그동안 무아라는 이름으로 기초단체 등이 라이브 위주의 행사 를 개최했지만, 무아는 콘서트홀이 아니라 DJ와 레코드가 중심에 있었던 음악다방문화의 상징"이라며 "앞으로 이 행사를 광복동과 남포동, 서면, 해운대, 기장 등 장소를 달리하며 매월 또는 매주 개최해 찾아가는 음악감상실로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DJ와 레코드음악을 바탕으로 가수, 무용가, 연주가 등과 콜라보를 추진해 비디오와 유튜브에 밀려 자취를 감춘 부산의 음악다방문화를 되살리는 계기를 마 련하고자 한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동참과 성원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 김옥빈 기자 obkim5153@naver.com 저작권자 © 국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19.12.27
동명극장 앞 청자다방, 동명극장 옆 종다방, 남포문고 건너편의 밀물다방, 자갈치 부산은행 건물 지하의 마차다방, 남정 맞은 편 남포극장 자리에 생긴 돌다방, 그 옆 빅보이 햄버거와 붙은 밀다방, 피닉스호텔 옆 고궁다방, 지금 씨앗호떡 앞 홍실다방, 부산극장 옆 청다방, 길 건너 국도극장 지하의 나무그늘, 맞은 편 88다방, 그 옆 성궁다방, 동그라미다방. 다시 남포동으로 돌아와 구두방(에스콰이어 제화 등) 골목 옆의 돌고래분식, 우체국 맞은 편 황금다방, 대각사 옆 쇼핑센터 지하의 00, 유나백화점 스타이라운지, 그 옆 중앙탁구장 2층의 하늘소, 하늘소 옆 외환은행 지하에 있었던 기억 안 나는 음악다방, 용두산 공원 팔각정, 다시 광복동으로 돌아오면 광복동입구 어귀의 동국다방, 용두산 계단 옆 무아, 무아 2층의 수다방, 맞은 편 건물의 둘반다방, 그 뒤쪽 골목의 백조다방, 광복동 중간쯤의 옥까야 등 , , , 최인락..서술
그 많았던 음악다방들은 뮤직비디오와 MP3를 장착한 인터넷 세대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2024년 (구)무아음악실 주변 광복로 모습, 용두산공원 올라가는 계단길에는 계단과 함께 에스칼레이트도 설치되어있다.
무아에서 1972년 신청해 들었던 Bee Gees의 Don't Forget To Remember
첫댓글 70년대 중반 동네 형들따라 첨 가보고
무아의 매력에빠져 시간 날때마다 갔었습니다
당시 DJ분은 다른 분은 생가나질않고 쌔미님이 가장기억납니다
저의 닉네임에서 아시겠지만 제가 무아 음악 감상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제가 다닌 대학의 산악회 이름이 "무아산악회" 인데 19기입니다.
초창기 선배들이 " 무아 음악감상실"에서 산악회를 만들었다는 설과
선배들이 "무아음악감상실" 죽돌이 라서 이름 그대로 사용했다는 설이 있었습니다.
둘 다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닉네임이 "무아19기"입니다. ㅋㅋㅋ
지금은 산악회가 문 닫았습니다.
90년대 말 IMF 떄 부터 신입 회원들의 가입이 없더니
급기야 동아리 연합회에 회비도 못내더니
또 통합해서 동아리는 많아지고 써클룸은 모자라고 그래서 빼앗겼지요.
2000년대 초에 없어졌습니다. ㅠ ㅠ
1990년 이맘때 무아에 자주 갔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도, 11월의 첫날도 저녁 때 간 기억이 납니다,
광복동에 무아, 서면에 랩소디 아입니꽈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