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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틀을 밟으시는 하나님
이사야 63:1~6
우리는 지난 이사야 60장부터 62장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이방에 팔려간 시온 백성들을 다시 회복하고 무너지고 황폐해진 그 백성 공동체의 처소의 상징인 예루살렘을 다시 영광스럽게 회복한다는 약속의 말씀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여호와의 영이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자에게 임하여 그가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고 주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지극히 아름답게 하시어 세상 가운데 지극히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버림받았던 그들이 이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헵시바라 불리우고 황폐하였던 그 땅이 이제 기름진 땅으로 변하여 쁄라라는 이름 곧 결혼한 여자처럼 풍요롭게 아름답게 변화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벽 위에 파수꾼들을 세워서 하나님을 향하여 잠잠치 않고 계속하여 기도함으로 기억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이러한 약속을 이루어기 위하여 일하시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계속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 대한 구원을 예고하셨고 그의 신실한 파수꾼들에게 기도하도록 명하셨던 하나님은 마침내 그 백성들에 대한 구원 행동에 나서신다고 오늘 본문 말씀에서 시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그의 백성을 위하여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큰 승리를 거두시고 그 백성들의 원수를 갚으시는 전사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주의 백성을 위하여 친히 전쟁에 나서서 홀로 큰 승리를 거두시는 우리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에돔에서 오시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
에돔은 에서의 후손들이 살던 이스라엘 남부 건조한 지역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보스라는 에돔의 수도입니다. 그곳에서 화려한 의복을 입고 큰 능력으로 성큼 성큼 걸어서 오는 자가 누구냐고 누군가가 묻습니다. 이 질문을 하는 이는 아무래도 앞에 있는 장에서 성벽 위에 세워진 파수꾼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는 늘 하나님께 하나님의 택한 백성 시온과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 시온의 회복과 그 영광을 약속하신 말씀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늘 갈망하며 기다렸기에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놀라운 영적 광경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신 것이라 할 것입니다. 에돔과 보스라에서 붉은 옷을 입고 화려한 의복을 입고 큰 능력을 지닌 자로서 성큼 성큼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자가 눈에 보이기에, 파수꾼이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는 에돔에서 전쟁을 하고 그 에돔 백성들을 치고 보스라를 황무하게 하고 그 백성들을 멸절하는 일을 하고 오시는 중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에돔이 여기서 거론되고 왜 그 수도인 보스라가 거론되었을까요? 그것은 에돔이 하나님 백성인 유다가 이방 민족에게 침탈을 당할 때에 기뻐하며 조롱하고 그 도망치는 자들을 잡아서 종으로 파는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에돔은 가장 미워하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돔과 보스라는 하나의 대표성의 원리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수 노릇을 하는 사람들의 대표자로서 여기서 언급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34장에서도 에돔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되 그곳이 아주 혼돈과 공허의 처소가 되고 승냥이의 굴이 되고 타조의 처소가 되고 올빼미와 부엉이가 사는 파멸의 장소가 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그 심판 예언을 다시 언급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의 백성들을 박해하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서 심판을 실행하실 것을 여기서 예고한 것입니다.
2절에서도 다시 한번 파수꾼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주틀을 밟은 자 같으냐”
에돔에서 붉은 옷을 입고 큰 능력을 가지고 걷는 그 용사의 모습을 보면서 특이한 점은 그의 옷이 붉디 붉어서 마치 포도주틀을 밟는 사람이 온통 옷이 붉게 물든 것처럼 보이기에 그렇게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다시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원수들을 죽이시는 전쟁을 통하여 그 선혈로 자기 옷을 붉게 물든 장수처럼 자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마치 포도즙틀을 밟는 행위로 묘사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원수이자 하나님 백성의 원수와 싸워 그 대적들을 치시는 것을 포도즙틀을 밟는 것으로 표현한 대목이 많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말씀은 두 가지 추수에 대하여 말씀하는데, 첫 번째 추수는 금 면류관을 쓰신 우리 구주께서 예리한 낫을 휘둘러서 땅의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어서 낫을 휘둘러서 땅의 곡식을 거두는 환상이 보입니다. 그 땅의 곡식은 신앙의 열매를 잘 영글어서 주님께서 추수하시는 구원의 수확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또 하나의 추수는 예리한 낫을 가진 한 천사가 예리한 낫을 휘둘러서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게 합니다. 그 포도 송이가 익었기 때문에 낫을 휘둘러서 땅의 포도를 거두어서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집니다. 그랬더니 그 붉은 포도즙이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4:20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스타디온’은 당시 헬라와 로마의 거리 단위로서 천 육백 스타디온은 약 300km나 되는 넓은 거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그 악인들의 피가 많은 높이로 300km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 역사 속에 일어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대하여 그렇게 상징적으로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종말 심판을 위하여 영적 싸움을 싸우시는 예수님의 최후 전쟁에 대한 요한계시록 19장 11절 이하의 전쟁에서도 포도즙 틀의 묘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거기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백마를 타고 싸우시는데 그가 입은 옷은 피 뿌린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워졌습니다. 그가 하늘의 군대를 이끌었는데, 그 하늘 군대는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사령관이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와 만국을 치는데, 그 때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종말 전쟁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큰 잔치가 펼쳐지는데, 궁중의 새들이 와서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과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뜯어먹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지상에서 짐승 곧 적그리스도와 그를 추종하는 왕들과 군대들이 모여서 구주 예수님과 그의 군대 천사들과 하나님의 교회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결국 짐승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다 유황불 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영적 세계와 역사 세계 속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이러한 종말의 대 전쟁은 그렇게 해서 우리 구주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천사들과 성도들의 승리로 끝이 나고 악한 마귀와 그의 추종자들인 세상의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과 교회의 원수 노릇을 하던 세상 사람들과 세상의 대명사인 음녀 바벨론 등이 다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 포도즙 틀을 밟으시는 하나님의 모습,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과 진실한 그의 백성 공동체인 교회의 원수들을 도륙하여 대량의 피를 흘리는 이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지만 성경에서 종종 등장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강조된 것은 이러한 전쟁에 나서서 포도즙 틀을 밟을 때 하나님께서 누구와 함께 하시거나 인간 대리자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직접 홀로 이 포도즙 틀을 밟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으로 삼으실 것이라고 예고하신 바 이방 왕 고레스조차 여기서는 배제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홀로 이 전쟁에 직접 나서서 대적들을 다 멸하고 그 백성 공동체인 시온에게 약속된 모든 약속들을 다 성취하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연약하여서 그 대적들을 싸워 이길 힘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편이 되어서 직접 하나님을 도와 싸울 협력자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홀로 나서서 그 싸움을 싸워 적들을 다 멸절시키시는 것입니다. 홀로 포도즙 틀을 밟으시고 옷이 다 붉어지신 장수로서 예루살렘으로 당당하게 올라오시는 하나님, 이것이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이시요 곧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싸움을 싸우실 때에 그와 함께 기도의 짐을 나눠진 제자들도 없었고 다 도망쳐버렸고 배신했지 않습니까? 주님은 홀로 그 싸움을 싸웠고 끝내 이겼고 대적을 밟아 물리치셨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홀로 끝까지 싸우시고 이기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 할 점 하나가 그가 이렇게 포도즙 틀을 밟으시는 동기입니다. 3절에 보면, 그것은 노함과 분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악감을 가지고 괴롭힌 에돔 백성들, 모든 하나님의 교회의 대적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포도즙틀을 밟듯이 그 피를 낭자하게 흘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이렇게 무서운 대량 보복, 거대한 전쟁의 피흘림을 야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진노하심에 대하여 매우 부도덕하게 여기고 이것을 폭군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신약의 예수님과 대조하여 구약의 하나님은 거부해야 할 모습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그의 분노를 폭군의 자의적이고 통제하지 못하는 감정의 폭발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공의로우심에서 우러나온 절제된 보응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하심에 대하여 경악하며 매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지극한 거룩하심과 그의 지극한 공의로우심에 대한 무지 탓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는 부패와 부도덕성은 하나님의 지극한 성결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을 이해할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악을 차마 보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천사라도 부정하게 여깁니다. 하물며 지렁이와 같고 버러지도 같은 죄인인 우리를 어찌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완전한 빛이시고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잠깐이라도 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의 영광을 체험한 후에 한없이 울고 또 울었으며 자기가 지옥에 떨어져야 할 죄인인 것을 깊이 자각하고 자기 속에 온갖 더러움을 인하여 더 낮아지고 겸손하며 통회하며 살아가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면서 성령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고 하면서도 삶의 아무런 변화가 없고 그 심령에 자기 죄성을 인식함이 없는 자는 사실 가짜 체험을 한 것입니다. 속이는 영의 거짓된 감화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움과 그의 심판의 두려움을 알고서 우리가 지난날 범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바로 쳐서 지옥으로 데려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행한 대로 갚지 아니하신 것에 감사하면서, 그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살아가며 늘 통회하며 겸손히 살아가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자들, 하나님의 교회의 대적자들에게 보응하사 그들을 진노의 포도즙틀에 밟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구원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4절에 보면,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온전히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에돔과 세상 나라와 그 임금들과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 곧 구원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적들을 온전히 멸하는 것 없이 하나님 백성들이 안전한 시온, 성곽으로 보호받는 안전한 예루살렘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여전히 불안전하고 여전히 평안하지 못하고 언제든지 대적들이 쳐들어와서 성문을 불사르고 그 땅을 황폐하게 할 수 있고 그 농산물들을 다 빼앗아가서 그들로 하여금 힘겹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대적들을 다 멸하시는 승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인 교회의 대적이자 하나님의 대적인 마귀와 그 졸개들인 악령들의 세력과 죄와 저주와 사망을 가리킨다 할 것입니다. 이것들이 살아 있는 한 하나님 백성의 참된 안식과 평안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홀로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전하고 기적을 행하고 궁극적인 승리를 위한 싸움으로 십자가의 싸움을 홀로 싸우셨고 진리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저주를 속량하셨고 사망의 문을 차지하셨고 지옥의 권세를 꺾으셨습니다. 그래서 주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모든 원수들을 다 쳐서 이기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이제 교회는 이 완전한 승리의 복음을 가진 자로서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완전한 승리의 그날을 기다리면서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전쟁 중에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전쟁은 우리 주님께서 장차 오셔서 이 대적들을 다 불못에 던져넣을 때까지 이 땅에서 아직 잔존한 마귀와 그 악령들과 불신앙에 여전히 사로잡힌 세상 권세자들과 불신자들과의 영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이 싸움은 여전히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적들은 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 힘이 없을 때에 홀로 이 우리의 대적들을 향하여 진군하여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싸워 승리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회복된 시온, 예루살렘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이 소망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의 예루살렘 성의 시민권자입니다. 다만 이 땅에서 아직 육신이 거하기에 우리는 주님이 피 값으로 사신 교회의 성벽에서 파수꾼으로서 주님께서 이 이긴 싸움을 기억하시고 그 약속을 따라 세상에서 주의 백성들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리고 에돔을 짓밟으시고 그 선혈로 그 옷을 붉게 물들이신 주님께서 속히 사단을 그 발 아래 밟으시고 주의 백성들을 건져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저 북한에서, 저 이슬람권에서, 저 독재 정권 하에서, 저 힌두교의 늪지에서, 저 불교권에서, 저 아프리카 조상 숭배의 무서움의 영에서 지켜달라고 주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원수들을 친히 밟으사 주의 백성들의 피흘린 일에 대하여 갚아주시어 시온 백성들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심을 보여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가 역사 속에서 때로 무서운 전쟁의 재앙으로 나타난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일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실망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저 일차 대전, 이차 대전이 유럽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도 어찌 보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거룩한 분노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주의 백성들의 부패와 타락으로 인하여 온 세상에 내려지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 백성들은 세상의 죄와 싸움에서 결코 지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결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인한 선혈이 교회의 원수들에게만 쏟아지고 주의 백성들의 부패와 타락으로 인하여 세상에 임하여 교회와 세상이 함께 주의 진노 아래 있지 않도록 우리 자신도 경성하고 하나님의 교회들을 위하여 거룩한 중보의 기도도 쉬지 않는 저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