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오백년!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89
정조 4 - 정조개혁의 한계
역사 전문가들은 영, 정조 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시대 였다고 한다. 영조 재위 조선 왕 중 가장 긴 52년, 정조 재위도 짧지 않은 24년 합 76년이다.
이 기간이면 역사적으로 두 왕이 원하는 대부분의 것을 바꾸고 개혁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영, 정조시대가 조선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가 꽃 피우던 르네상스시대라고 일 컷으면서 정조사후 그 찬란한 시기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가 버린 것일까?
물론 그때 시절과 상황이 다르고 비교가 불가하지만 올해가 광복 후 72년이 되었다.
그 72년 동안 상전벽해로 변화 된 대한민국을 생각해보면 그 보다 더 긴 76년을 성군이라 일 컷는 영, 정조 두 왕이 집귄했음에도 정조 사후 채 몇 년도 안되어 조선은 영, 정조 시대보다 더 암흑시대인 세도정치 나락으로 떨어지고 급기야 100년 조금 지나 일본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발생했을 까?
내가 역사를 공부하면서 항상 의문이 든 일이었다.
역사에는 정반합이 있다.
혁명이나 개혁이 있음 반드시 반동도 뒤 따른다.
요즘 투표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민주주의 사회인 현실 정치에서도 보이는 일이다.
진보정권 십년 뒤에 보수정권이, 이제 보수정권 십년의 끝자락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고 겪고 있다.
그래도 정조 사후 반동은 조선을 너무 심하게 망가뜨리며 급전락시켰고 결국은 나라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영, 정조의 개혁이 진짜 있기는 있었던 것일까?' 에 의문을 품어 볼 만하다.
사실, 영조는 균역법, 호포법등으로 몇가지 개혁을 하려고는 했지만 도로아미타불이 되었고 개혁이라고 할 만 한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정조는 정말 많은 개혁을 한다.
정조가 재위기간동안 행한 개혁들을 살펴 보자!
정조는 언정도 왕권이 안정 되자 왕이 정사를 보는 용상 뒤편에는 언제나 놓여있는 '일월오봉도' 병풍을 오랜 왕가의 전통을 깨고 책을 그린 '책가도' 병풍으로 바꾸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새롭게 지식을 앞세워 국가개혁의 강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사실, 정조는 즉위 초기부터 개혁 비전으로 새로운 지식을 내세워 국정을 주도하려 했다.
1776년 즉위하자마자 창덕궁 내에 규장각(奎章閣)을 세워 국내외의 많은 책들을 수집하고 인재를 모았다.
당시 중국에서는 서구문물 유입으로 새로운 책이 많이 발간됐다. 정조는 혜안을 갖고 4000권 넘는 방대한 분량의 '고금도서집성'도 거금을 들여 사들였다.
정약용이 화성 축조에 사용한 거중기도 정조가 '고금도서집성' 중 기중기 제작법이 실린 '기기도설'을 내려보냈기에 가능했다. 규장각은 책을 수집하고 편찬하는 곳이지만 새로운 지식과 정보의 집산지로 개혁정책과 인재의 산실이 됐다.
정조는 붕당을 깨기 위해 인적쇄신을 단행했다.
탕평책으로 노론계 외에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과 서명선 등 소론까지 두루 중용했다. 37세 이하 청년 관료들을 모아 규장각에서 왕이 직접 경서 공부를 시키고 시험을 보는 '초계문신' 제도를 운영해 정약용, 서유구 등 인재를 양성했다.
정조는 정치개혁으로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규장각을 통해 당파 구분 없이 양성된 젊은 인재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왕이 직접 관할하는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해 병권도 강화했다. 또한 지방 행정에 대해 중앙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수령의 임기를 보장하고, 정약용 등 규장각 인재들을 지방관에 임명하는 한편 수시로 암행어사를 파견해 지방관과 아전들의 부정부패를 막았다.
정조는 사회개혁, 경제개혁도 실행한다.
정조는 사회개혁으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서얼 출신들을 규장각의 검서관에 임명함으로써 차별 완화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한편 경제개혁으로 일반 소상인도 자유로운 상거래를 허용하는 '신해통공'을 실시했다. 이제까지 허가를 받은 시전상인들에게 부여했던 상행위 독점권인 '금난전권'을 폐지한 것이다. 조선후기 상업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조치였다.
이뿐만 아니라 정조는 '대전회통'이란 법전을 만들어 자신의 개혁을 제도화시켰다.
정조개혁의 백미이자 완성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그곳으로 옮기려 한 것이다. 오늘날 세종시 같은 신도시를 만들려 한 것이다.
정조는 오늘날의 수원 중심지 팔달산아래 이주민을 정착시키고 관아를 만들고 점차 도시를 확장한다.
마침내 수원읍치에서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킨다.
정조의 정치적 근거지. 직할시가 된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미려한 성곽을 쌓기 시작한다.
그 도시의 이름을 그옛날 중국의 평화시대인
요순임금의 덕이 살아있는곳이란 뜻의 "화성"이라 명명한다
말하자면 정조의 도시가 설계되고 지어지는 것이다.
이제껏 조선에 없던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정조의 꿈이 담긴 도시. 정조의 이상이 실현되는 도시.
상업이 중심이 되는 도시.
기존의기득권 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이런 원대한 목표는 정조의 급사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처럼 정조의 개혁은 당대에는 정치적 안정은 물론 문화의 번성을 가져왔다.
하지만 1800년 정조가 49세로 급작스럽게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자 마자 노론벽파 출신 정순왕후에 의해 정조의 모든 개혁은 반동을 겪고 정조 이전으로 원위치 되고 만다.
정순왕후가 대리청정에서 물러난 후에는 정조가 신임하여 죽기 직전 순조의 처가로 지명해 준 김조순가문인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등장하고 조선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이처럼 왜 정조의 개혁은 정조가 죽자마자 급전직락하고 계속 꽃피우지 못 했을까?
당시는 서구유럽은 산업화 시대가 도래했고 청도 일본도 서양문물에 눈을 뜨기 시작할 때였다.
이에 발맞춰 당시 조선상황도 세상도, 백성도 근본부터 변하고 있었다. 조선의 견고한 신분사회는 붕괴조짐을 보였고 정조의 신해통공으로 신흥자본가도 등장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정조는 개혁은 했지만 당시 시대상황을 따라 갈만큼 급박하게 변화되는 세상을 보는 안목은 없었다.
정조가 100년 전 소현세자 처럼 청에 직접 살아 봤고 조금만 더 세상 보는 안목이 넓어져 이런 세상 추세에 발 맞추어 개혁을 추진했었다면 조선은 정말 변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 우리나라 역사는 지금과 다른 역사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시대상에 발 맞추어 바뀌지 않은 것은 정조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조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혁명적인 개혁가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고루한 개혁가이었다
정조는 주자학 중심의 유학의 가치를 고수한 채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에 뿌리부터의 국가개조는 어려웠다.
정조가 꿈꾸는 이상세계는 공자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유교적 소양이 뛰어난 왕이 절대왕권을 가진 성군이 되어 통치하는 중국의 요순시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정조는 아주 심하게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든 서학이란 이름으로 들어온 천주교를 배척했다.
또 학문을 진흥하고 권장하면서도 자기 고루한 생각으로 옛 문체를 흩뜨리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문체반정'을 펼쳤다.
세상은 이미 성리학 중심의 세상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요청하고 있었는 데 정조는 정반대로 성리학의 원조를 찾아 고전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정조가 살아 온 세월이 정조를 그렇게 만들어 갔다.
정조가 사도세자처럼 조금이라도 자유분방한 성향을 띄었다면 정조도 살아 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정조는 왕에 즉위해서도 초기에는 극도의 조심을 보인다.
"역적지자, 불위군왕(逆敵之子 不爲君王)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
(역적의 아들은 왕이 될수없다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수없다)
노론벽파들은 노골적으로 공공연하게 이런 말들을 했다.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숱한 정적들 속에서 수시로 협박과 암살의 위험에 시달리던 정조였다.
끝끝내 그를 괴롭히던 팔자 흉언인 '역적지자, 불위군왕' 또는 '죄인지자 불위군왕' 은 정조 재위기간 내내 정조 발목을 잡고 있었다.
또한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힌 죽음을 목도했던 게 열한살 세상 이치를 이미 아는 나이였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친아버지 영조에게 죽음까지 당하게 된 이유를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정조는 세손시절 학문에만 열중한다. 행동도 극도로 조심한다. 그야말로 와신상담, 어린 가슴에 품은 울분을 용케도 달래며 아버지의 한을 씻을날을 기다려 온 것이다.
마침내 51년을 왕으로 군림하던 할아버지 영조는 다행히도 죽기 얼마 전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노론벽파에게 무력을 동원하면서까지 이산의 대리청정을 강행한다.
영조가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는 미웠어도 손자는 끔직히 아낀 까닭이다.
결과적으로 이 결단이 사도세자 아들 이산을 왕위에 오르게 한다.
영조가 세손 이산을 아낀 까닭은 이산이 학문에 더 없이 열중하고 특히 세손으로서 유교적 소양이 깊은 예의와 범절에 철두철미한 행동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사도'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유교라는 학문에 진저리를 내며 유교적 예의 범절보다는 무술이나 우리 토속신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어쩌든 우여고절 끝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왕위에 오르는 첫날 노론벽파인 기득권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鳴呼, 寡人思悼之子也)라고 천명한다.
이는 정조의 정치생명을 건 선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조는 그 선언을 한 후 영화 '역린'에서 보듯이 즉위 1년도 못되어 조선왕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이 잠자는 침실까지 자객이 들어오는 위험천만한 일을 당한다.
정조는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정조의 친위경호부대인 장용원을 만드는 계기로 삼는다. 그리고도 당분간은 홍국영을 앞세워 정치를 하게 하고 자신은 뒤로 숨어 학문에만 정진하는 모습을 보인다.
정조는 자신이 살아남기위해 즉위 초기에는 이처럼 왕으로서 행실에도 극도로 조심했다.
고루하고 교조적인 성리학으로 무장한 노론벽파들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정조는 성리학의 더 깊은 원천인 공자시대 이전까지 파고 들었다.
그런 정조 자신이 그 주자학 속에 파묻혀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정조의 개혁은 주자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에서만 가능했다.
이게 바로 정조개혁의 한계였다.
조선의 불행이었다.
성군의 자질을 갖춘 훌륭한 왕이 주자학이라는 사상적 이념 속에 갖혀 미완성의 개혁을 했고 그 개혁은 이어지지 못해 더 큰 반동으로 조선을 나락에 떨어뜨리고 급기야 조선의 멸망까지 이끈다.
여기까지는 내 추즉이고 내 나름 생각이다.
아래 부터는 다른 역사 전문가 분이 더 자세히 써 놓은 글이다. 참고하셔서 보시면 이해가 더 잘 될 것이다.
정조! 개혁군주...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정조가 추구한 정치는 적어도 현대적인 관점에서의 개혁과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그가 목표로 한게 조선 사회를 바꾸려는 것이기는 한데, 엄밀히 따지면 새로운 세상으로 나간다기보다는 가장 찬란했던 과거 중국 요순시절로 회귀한다는 목적이었지요. 개혁보다는 보수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릴 겁니다.
이런 정조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사건 중 하나가 ‘문체반정’입니다.
정조는 몰락해가는 구질서를 문체반정을 통해 유지시키려 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는 스스로를 조선 유학의 대통으로 여기는 전형적인 유학자였지요.
이런 연유로 김기봉 경기대 교수는 ‘유교적 절대 군주가 되고자 한 정조는 계몽 군주가 결코 아니며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밝아오고야 말 근대의 새벽을 막으려 했던 보수 반동 군주였다.’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정조에 대한 인식과 일부 역사학자들의 연구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번 내 글에는 달리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인신공격성이 아닌 건전한 논쟁과 토론은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