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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법-역사와 은유
성경을 읽고 해석함에 있어 과거의 렌즈는 문자적-사실적(literal-factual)으로 접근합니다. 이에 반해 새로운 렌즈는 역사적-은유적(historical-metaphorical)으로 접근합니다.
1. 역사적 접근법
성경에 대한 역사적 접근법은 성경이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이에 주목합니다. 성경은 ‘지금 여기서’(now and here) 우리를 위해 씌어지지 않았고, ‘그때 거기서’(then and there) 저들을 위해 씌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본문이 그때 거기서 무슨 뜻이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지난 200여 년 동안 성경학자들은 역사비평론(historical-critical method)이라 불리는 수많은 성경연구방법론을 발전시켜 왔는데, 그 대부분이 바로 이 역사적 접근법에 속합니다.
이 역사적 접근법은 역사적 상황(historical context)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역사적 상황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말이나 행동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즉, 말이나 행동을 상황과 떼어놓을 경우, 그것은 거의 아무 의미가 없거나 모호한 것이 되고 맙니다. 같은 몸짓이라도 문화에 따라 매우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예: 고스톱과 포커, 끝내준다, 죽인다, 기도해보겠습니다 등등). Context의 접두사인 con은 “함께”(with)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text와 함께 가는 것이 바로 ‘con-text’입니다.
우리가 낮선 외국을 여행한다고 상상해봅시다. 물론 여행자는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그곳에 가서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라고 핵심을 집었듯이, 여행할 때 그 여행지에 대해 사전지식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안내자나 해설자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여행자가 보고 느끼는 것에 있어서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역사적 접근법은 성경 본문의 역사적 상황을 앎으로서 성경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고 듣는 한 방법입니다.
⑴ 역사적 접근법의 예: 마태 5:39-41의 참뜻
마태복음 5장 39c-41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새번역).
‘지금 여기서’ 이 말씀을 들으면 이건 마치 우리더러 발닦개가 되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악에 저항하지 말고, 수동적으로 남에게 무조건 짓밟힐 것을 가르치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말씀은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마 5:39b)는 예수님의 말씀 바로 다음에 이어지기에 그렇게 알아듣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습니다. 더구나 영어성경 King James Version은 마 5:39b을 정확히 “Resist not evil!”(악에 저항하지 말라)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악에 대응하는 두 가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는 저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 방법 중 예수님은 어떤 것을 지지하셨을까요? 우리는 “무저항”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러셨을까요? 마태복음 5장 39b-41절을 ‘지금 여기서’가 아니라 ‘그때 거기서’ 들어도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말로 들릴까요?
지면관계상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대어라”는 말씀만 보겠습니다. 왜 하필이면 오른쪽 뺨일까요? 당시 유대사회에서 왼손은 불결한 일을 위해서만 사용했습니다. 즉, 남을 치는 손은 결코 왼손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뺨을 때릴 수 있었을까요? 그 유일한 방법은 오른손 손등으로 치는 방법뿐입니다. 이것은 주먹다짐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동등한 신분의 사람을 절대로 손등으로 치지 못했습니다. 그랬다가는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급자에게는 마음 놓고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치욕을 주고 꼬락서니를 제대로 알라는 모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주인은 종들을, 남편은 아내를, 부모는 자녀를, 남자는 여자를,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을 손등으로 때렸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은 자살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움츠려 굴복하는 방법밖에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런 치욕을 당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왼뺨을 돌려대라고 가르칩니다. 왼뺨을 돌려대는 사람은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좋다. 오른손 주먹으로 다시 때려 보아라. 네가 처음 때린 것은 네가 의도했던 효과를 얻지 못했다. 나는 네가 나를 모욕할 힘이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나는 너와 똑같은 인간이다. 너의 지위가 높다고 해서 이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너는 나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대응하면 때린 사람은 몹시 난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더 이상 손등으로 칠 수 없습니다. 이미 아무 효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왼손으로 칠 수도 없습니다. 만약 그가 오른손으로 친다면 그는 스스로 상대방을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이처럼 손등으로 치는 것의 요점은 신분계급제도를 강화시키고 불평등을 제도화하기 위한 것인데, 왼쪽 뺨을 돌려대는 대응방법은 이것을 일시에 무력화시키면서 강자에게 도전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은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반대로 악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라는 말입니다. 단 저항하되 비폭력적인 방법(nonviolent resistance)으로 하라는 말입니다.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는 말씀 역시 전투적으로 비폭력(militant nonviolence) 저항을 하라는 말입니다.
실제적으로 마 5:39b의 기존 번역은 오역입니다. 헬라어로 이 구절 원문은 “엔티스테나이”인데, 정확한 뜻은 “Don't react violently against the one who is evil”입니다. 즉, “악한 자에게 맞서서 폭력적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악에 대해 똑같은 식으로 맞받아치지 말라!”,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보복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⑵ 역사적 접근법의 의의와 한계
앞의 예는 지금 여기에서 “악에 저항하지 말라”고 들린 말씀이 실제로 그때 거기에서는 “악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라”는 말씀이었음을 밝혀주었습니다. 이는 역사적 접근법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깨우쳐줍니다. 잘못하면 우리는 성경 말씀을 정반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그때 거기에서’ ‘저들’을 위해 쓰인 성경을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접근법이 꼭 필요합니다. 성경 구절은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서 읽을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되살아납니다. 우리 시야에 가려져있던 다른 세계의 의미들이 우리가 아는 만큼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역사적 접근법은 과거 속에 묻히고 말았을 본문의 참뜻을 발굴해 주고, 낮선 세계로부터 온 낮선 뜻을 일깨워 줍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우리 입장에서 읽지 않고, 성경 본래의 언어와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하지만 역사적 접근법은 본질적으로 성경 본문이 써졌을 당시의 의미만을 묻는다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적 접근법을 통해 본문의 참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래도 “그래서?”(so what?)라는 질문은 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본문을 과거 속에 가두어놓지 않기 위해서 다른 방법론이 추가로 필요합니다. 그 방법론이 다음에 설명할 은유적 접근법입니다.
2. 은유적 접근법
“은유”(metaphor)는 서로 같지 않은 두 가지를 비교하여 서로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A와 B는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A is B”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은유입니다. 잘 모르는 것(A)을 이해하기 위해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B)을 이용하여 “A는 B다”라고 표현하는 은유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표현법입니다.
은유적 표현법은 본질적으로 “A is B, and is not B.”를 뜻합니다. 따라서 “은유”(metaphor)는 소극적인 의미와 적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소극적으로 은유는 문자적인 것이 아니라(non-literal)는 뜻입니다. 적극적으로 은유는 그 언어의 문자적 의미 이상(more-than-literal meaning)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은유적 의미는 문자적 의미보다 열등한 것이 아니라 문자적 의미보다 더욱 풍성한 것입니다.
⑴ 은유적 접근법의 정당성
성경에 대해 은유적인 접근법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한 이유는 여럿입니다. 첫째로, 성경의 언어 가운데 상당 부분은 명백하게 은유적인 언어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흔히 하나님이 손과 발과 귀와 눈을 갖고 있는 것으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둘째로, 성경에는 역사와 은유 모두가 들어 있습니다. 성경은 역사적 기억(historical memory)과 은유적 이야기(metaphorical narrative)를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로서, 그 신앙 공동체가 그 기억을 간직해왔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심지어 본문이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는 경우조차도, 그 문자적 의미 이상의 의미가 가장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은 그 역사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전해줍니다. 그 이야기는 포로생활과 귀환에 관한 은유적 이야기가 되었는데, 이것은 (무엇엔가 포로가 되어 노예처럼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과 그 치유 과정을 보여주는 영속적인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야기들 배후에 아무런 역사적 사실성(historical factuality)이 없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 에덴동산 이야기, 아담과 이브가 추방된 이야기,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야기, 노아 홍수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 등은 “순수한 은유적 이야기”라 부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지구와 인류의 초기 역사를 보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를 기억해서 기록한 이야기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은유적 이야기들로서, 비록 문자적으로 사실은 아닐지라도, 근본적으로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일 수 있습니다.
⑵ 은유의 진리
은유적인 언어가 진실일 수 있다는 주장은 우리 시대에 특히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진리를 사실성과 똑같은 것으로 보아 은유적 언어를 가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은유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창세기 이야기로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은 이야기부터 생각해보십시다. 지난 200년 동안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런 이야기들이 문자적으로 사실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창세기와 진화론 사이에, 하나님과 과학 사이에 충돌이 빚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비록 그런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창조과학자들은 “젊은 지구”를 말하며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열정적인 이유는 진리를 사실성과 똑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들 생각에 만일 창조 이야기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진리가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조 이야기들이 진리가 아니라면 성경도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창조 이야기는 성경 전체에 대한 그들의 입장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유적 접근법은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합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창조 이야기로 간주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문화의 창조 이야기들이 문자적-사실적인 의미에서 참된 것임을 하나님이 보장하지 않는 것처럼, 성경의 창조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가 사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은유적인 이야기로 이해하면, 그 이야기들은 일종의 “신화들”입니다. 즉 사태가 전혀 그랬던 적이 없었지만, 언제나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그 이야기들은 비록 문자적으로는 진실한 것이 아니지만, 실제로는 진실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은 무슨 진리를 주장하는 것일까요? 창조 이야기들의 진리를 몇 개의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은 그 창조 이야기들 자체가 갖고 있는 풍부한 세부 묘사들과 뉘앙스, 통찰력과 우아함을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단하게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매우 좋은 세계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에덴 동쪽에서 살고 있는데, 이것은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낙원으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한다.
이것이 창조 이야기들의 은유적인 의미들입니다. 이런 의미들이 진실합니까? 이 은유적 의미들을 입증할 수는 없지만, 세계관으로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이런 의미들은 우리가 (과학을 통해) 알고 있는 세계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이 의미들은 정말로 진실한 것일 수 있으며, 창조 이야기들이 이런 진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은유적 이야기들로서 이런 창조 이야기들은 우리를 이런 진리 속으로 초대합니다. 은유적 언어는 특수한 방법으로 세계를 이해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창조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실재와 우리의 삶 모두를 이런 방식으로 보도록 초대합니다.
⑶ 은유적 접근법의 한계
은유적 접근법의 문제는 지나친 상상력으로 본문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어거스틴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은유적 접근법에는 통제가 필요합니다. 본문과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를 은유적 해석이라고 우길 수는 없습니다. 역사적 접근법은 어느 정도 이 통제의 구실을 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바로 읽고 해석함에 있어 역사적 접근과 은유적 접근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3. 후비판적 성경읽기
성경을 역사적-은유적으로 읽고 해석하고 접근한다는 말은 성경을 읽되 전비판적(pre-critical)이 아니라, 비판적(critical)으로 읽어야 하고, 더 나아가 후비판적(post- critical)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전비판적(pre-critical), 비판적(critical), 그리고 후비판적(post-critical)이란 각각 인식 능력의 발달 단계를 가리킵니다.
비판 이전의 소박함(pre-critical naivetè)이란 아동기 초기의 상태로서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권위자가 우리에게 말하는 모든 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단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린 시절에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맹신하며 자랐습니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면 북극에 사는 뚱뚱한 산타할아버지가 빨간 코를 가진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날아와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해준다는 이야기를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에는 전혀 의문을 품지 않았고, 들은 대로 그냥 천진난만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아동기 후기나 청년기 초기에) 비판적(critical) 사고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는데, 이 단계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가 어린 시절에 배운 것들을 재평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성탄 선물이 산타할아버지가 준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친척 어른들이 사서 보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이렇듯 성장한다는 것은 새로 배우는 일인 동시에 이미 배운 것을 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즉, 기존의 사고를 해체해야만 비로소 새로운 사고를 수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지적 성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도 산타클로스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는 몸집만 어른이지 지적 능력은 아직도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비판적 사고 너머에 비판 이후의 소박함(post-critical naivetè)의 단계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비판 이후의 소박함이란 우리가 들었던 이야기를 또 다시 참된(true) 이야기로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중요한 점은 비판 이후의 소박함이 비판 이전의 소박함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판적 사고를 통해 어떤 이야기가 사실적으로 참되지는 않다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 이야기의 진리(truth)가 그 사실성(factuality)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산타클로스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가 어린 시절에 들었던 것처럼, 그 이야기를 다시 참된 이야기로 들을 수 있는 능력이 비판 이후의 소박함입니다. 즉, 산타클로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간직된 관대함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인물이고, 그 이야기가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에게까지 꿈과 희망을 주고, 상상력을 자극하고, 영감을 증진시키는 참된 이야기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T. S. 엘리엇(Eliot)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의 모든 탐구의 마지막은, 우리가 출발했던 장소에 도착하여, 그 장소를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목회자로서의 내 역할이 교인들로 하여금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를 통해 비판 이전의 소박함에서부터 비판 이후의 소박함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비판 이전의 단계에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비판적 사고의 단계로 넘어와서 성경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확신을 갖지 못하고 갈등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판 이전의 소박함으로부터 비판적 사고로 나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불가피한 일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이 실제로 성경이 묘사한 대로 일어났다고 받아들였습니다. 달리 생각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판적 사고의 단계로 들어서면서 그 이야기들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그 이야기들을 믿기 위해서는 특별히 ‘신앙’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이 경우 신앙이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믿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근본주의자들과 많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하는데, “무조건 믿어라!”, “믿기 어려운 것까지 믿는 것이 참 믿음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다시 비판 이전의 단계로 후퇴합니다. 물론 이 경우, 비판 이전의 소박함의 단계로 원상 복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용어를 빌리면, “자연스러운 문자주의(natural literalism)”에서 “의식적 문자주의(conscious literalism)” 혹은 “반동적인 문자주의(reactive literalism)”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용어를 오강남 교수는 “철들기 전 문자주의”와 “알면서도 고집하는 문자주의”라고 풀어 옮긴 바 있는데, 이는 나이가 들어 철이 들면서 자주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발달되어 문자주의에서 해방되려고 하는데, 여러 이유와 이해관계 때문에 이를 의식적으로 억누르고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폴 틸리히에 따르면 이렇게 되는 주된 이유는 아직도 교회나 성경 같이 절대적인 맹종을 요구하는 “거룩한 권위”에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믿어라!”, “믿기 어려운 것까지 믿는 것이 참 믿음이다”라는 주장에 동조하면서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어져야 믿지!”, “믿고 싶은데도 믿어지지 않으니 어쩌란 말이냐”라고 항변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거나, 아니면 매주 예배당에 들어갈 때마다 이성을 잠시 문밖에 내려놓았다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것을 다시 챙겨 가는 어처구니없는 생활을 반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평생 동안 이런 비판적 사고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처음에 비판적 사고의 단계로 넘어가면 해방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이 단계에 머물게 되면 영성이 메마르게 되고, 그래서 생기 있게 신앙생활을 하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비판적 사고를 통해 비판 이전의 소박함에서부터 비판 이후의 소박함의 상태로 넘어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전통의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다시금 진정한 이야기로 듣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의 죽은 문자가 비로소 생명의 말씀이 되고, 우리 신앙의 깊이와 넓이는 놀랍도록 확대될 것이며, 이를 통해 다시 활기차게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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