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마카 2,15-29; 루카 19,41-44
+ 찬미 예수님
기원전 2세기에 알렉산더 대황이 세운 헬레니즘 제국은 네 개의 왕조로 분할되는데요, 그중 하나인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됩니다. 셀레우코스의 왕이 된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율법서를 불태우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을 학살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마카베오의 아버지인 마타티아스는,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려는 사람과 자신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던 왕의 신하를 죽인 후 제단을 헐어버리고 동료들과 산으로 올라가 항쟁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1독서의 내용입니다.
지난 10월 3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는 말씀으로 예루살렘 상경기가 시작되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성을 보시며 우십니다.
예수님의 이 눈물이 너무나 가슴이 아픈데요, 예루살렘은 결국 기원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함락됩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을 상대로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망하게 되는데, 로마군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헐어버리고 경고의 표시로 서쪽 벽만을 남겨 두었습니다. 아직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벽을 통곡의 벽이라 부르면서 그곳에서 기도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역사상 두 번 파괴되었는데요, 한번은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서이고, 다른 한 번은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들이 네 둘레에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의 장면이기도 하고, 기원후 70년에 또다시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요.
‘예루살렘’은 평화를 뜻하는 ‘샬롬’과 연관이 있다하여 ‘평화의 도시’라 불리기도 합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천 년이 지난 오늘도 예루살렘은 평화와는 거리가 먼 도시입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요,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살해할 정도로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다른 것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 있었기에, 그리고 그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했기에 파괴의 길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의 도시를 보시고는 어떻게 느끼실까 생각해 봅니다. 피조물과 대립이라도 하려는 듯 생태를 파괴하고, 남과 북이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자기 고집을 내세우며 이웃과 대립하고 반목하고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마타티아스는 하느님께 충실하고자 항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고집에 충실하기 위해 이웃과 대립하고 반목하며 그것이 하느님 뜻이라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때는 내 마음대로 하려는 내 나라가 가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는 때이며,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첫댓글 굿~~👍.
오늘 강론은 신부님 목소리로 대신 들었습니다. 깨끗하게 잘 들립니다^^
바쁘신 와중에 좋은 강론 올려주셔서 항상 감사드립니다.
아주 도움이 많이 됩니다.
오늘은 신부님 목소리까지 들을수있어 더 뜻깊네요^^
강론을 읽고 듣고 두 번 새기니 더 좋습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이제 동영상도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