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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6: 1-7
이스라엘이
모세는 야곱이 애굽을 향하여 출발하고 애굽으로 갈 때에 브엘세바에 이르러 예배하는 중에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의 권고를 들은 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서 자기 자손들과 함께 애굽으로 간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본문 1절은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입니다.
1) 이 경건한 사람 야곱은 이제 가나안 땅을 떠나 어디로 가야 했습니다.
야곱은 출발에 앞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조상에게 하셨던 계약이 자기에게서도 확실히 입증되기를 비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익숙해 있었습니다. 이번 제사에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분명히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자기 신앙이 좌절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떤 독특한 지지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약속되었던 땅을 이제는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나라의 상징과 확증이 되는 그 땅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될 판국이었습니다. 아마 이제는 자기가 여지껏 헛된 소망에 속아왔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거룩한 계약을 다시 상기해서 신앙 파멸을 막을 적절한 조치를 취하려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그 거룩한 땅 경계 지역에다가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보통 이상의 뜻이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조상들이 섬겼던 하나님께 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이제 자기 조부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고 들어갔던 바로 그 땅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곱은 자기가 지금까지 예배해야 한다고 배워왔던 그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야곱은 기근 때문에 어디론가 떠나야만 했습니다.
합법적으로 주어진 땅에서 다시는 거주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그 숨겨진 권리에 대한 희망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기 조상들이 섬겼던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모든 사람들로부터 유별나다 는 악평을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도대체 다른 모든 민족과는 구별되는 종교를 가졌다는 이 점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러나 그는 자기 조상들이 섬긴 그대로의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여전히 간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진실한 경건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는 사실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기 힘을 증진시켰습니다.
그리고 자기 신앙을 객관적으로 공표했습니다.
신앙심이란 것이 외형적인 상징에 구애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그런 상징들이 주는 도움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러한 상징들을 이용하는 것이 결코 불필요한 군더더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2) 그러니까 본문 1절에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앞으로 이루어질 온 족속의 대표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32:28, 32).
그런 점에서 그의 행보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이 공적예배이든 일상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애굽으로 가다가 "브엘세바"에 머무른 것은 그곳에서 좀 더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조상들에게는 애굽이 좋지 않은 곳이었습니다(12:10이하, 26:2).
그런 점에서 야곱이 그 때에 드린 예배란 큰 의미가 있습니다.
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높이며 그분의 뜻을 구하는 것이요,
② 그것은 그분의 뜻을 받고 그분의 뜻에 감사하며 칭송하는 것이요,
③ 그것은 그분 뜻을 수종 드는 헌신의 행위요,
④ 그런 모든 행위가 총체적으로 결집이 되는 형태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같습니다.
2. 본문 2-3절은
"②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③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입니다.
1) 본문 2절 상반은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드린 예배(제사)가 상달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계약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손길을 뻗치신 셈입니다.
밤에 보여주는 환상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높여 주었습니다.
야곱은 유순하여 하나님께 잘 복종했습니다.
따라서 강제적인 힘과 공포로 강요받을 필요가 야곱에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야곱도 육을 가진 인간인지라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에 더욱 감명을 받는 일이 필요했고, 그것은 유익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 말씀은 야곱의 마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꿰뚫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 '말씀'이 그 환상에 동반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말씀이 없는 환상은 별로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미신적인 관습은 순전히 공포에 붙잡혀 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방식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생생한 영상은 말씀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에게 '나타나실' 때는 언제나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언제나 외적 표징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엄위가 그 속에서 빛나고 있는 환상들이 말씀에 의해서 생명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의지와 그 인간들이 지도로 꾸며낸 표징들을 말하는 자들은 속된 주장의 공허한 공연을 하는 것밖에는 안됩니다.
마치 로마 카톨릭에서 소위 성례전이라 칭하는 것들이 생명력 없는 환상으로 영혼들을 참 하나님에게서 이탈시켜 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이 상관 관계를 관찰해 보십시다.
말씀에 큰 존엄성을 더해 주는 환상이 말씀에 선행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그 환상의 영혼이라도 되는 양 말씀이 곧 그 환상에 뒤따라 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시적 영광의 출현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야곱에게 더 이상 초조와 불안을 갖지 않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의심은 걷히고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어 하나님 말씀을 자신 있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2) 본문 2절 하반은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불러 주시는 음성이 반복된 것은 그에게 주의를 더욱 끌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친숙한 말로서 하나님은 보다 부드럽게 야곱의 마음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은 아주 자비롭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그분의 제자가 되기 쉽게 준비시키십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이 경건한 사람의 유순한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자 즉시 무슨 말씀이든지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또 무슨 일을 맡기든지 그대로 하겠다고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3) 본문 3절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응답하자 그 후에 한 약속이 첨부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통해서 자기 종의 신앙을 소생시키시고 굳세게 해 주십니다.
그가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비극이었기에 좋은 기분을 가지라는 격려가 필요했습니다. 여호와가 그의 보호자가 되시는 일은 하나님이 그를 번성케 하여 큰 민족이 되게 하여 그를 떠나도록 만들었던 그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려 보내신다는 뜻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사실 야곱이 위안을 받은 골자는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그가 영원히 유랑자가 된 것이 아니라 마침내는 약속된 유업을 이어받게 되리라는 언질이었습니다.
가나안을 차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령한 복, 영원한 지복(至福)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복을 빼앗긴다면 야곱은 애굽에서 부자가 되고 권세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별로 좋을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귀향 약속은(4절) 야곱 자신이 아니라 후손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지금 이 약속을 믿고 담대히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따라서 그의 본을 따라 모든 경건한 이들에게는 이런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 은총에서 강력한 힘을 얻어 하나님 명령에 순복할 용기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스스로 구별하여 붙인 호칭이 야곱이 자기 조상들에게서 전승으로 물려받은 이전 신학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왜 스스로를 창조자라 칭하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라 했겠습니까?
가나안에 대한 지배권이 야곱이 지금 인준 받은 그 옛 계약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동시에 야곱은 자기 가정의 전례를 본받을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단히 순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 이삭이나 또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큰 고생을 하게는 되었지만 어떠한 유혹에도 굴하지 아니했다는 사실을 듣고 알았을 때는 그가 같은 과정을 밟는다고 겁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임종 때에 자기 자손에게 자기들의 등불을 물려 주어 자기 가문에 신앙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각별히 배려했습니다.
야곱은 곁길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가 어려서부터 들은 하나님을 아브라함 가문의 통치자로 존중해야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가문은 신앙심을 잃어서는 안되었습니다.
더욱 우리는 아무리 영달되었더라도 이 점에 대해서 조상들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야곱이 인간에게 축복한다거나 분별 없이 조상들의 전철을 밟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종종 야곱이 조상들을 본받은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비난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은 야곱이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로 알기를 바란 것 뿐 이었습니다.
4) 본문 2-3절을 종합해 보면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희생을 드립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애굽으로 내려갈 확신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시는 말씀 내용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1) 나타나신 그분이 바로 자기 조상들이 섬긴 그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3절 상반).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그 때의 성도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자기가 계시 역사(啓示歷史)를 통하여 늘 나타나시는 계약신(契約神)이신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계시 역사를 무시하시지 않고 그것을 확증하시며 오시는 분이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3절 중간).
하나님께서 하신 이 말씀 한 마디는 야곱에게서 모든 염려를 없애 주었습니다.
(3) 야곱으로 하여금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3절 하반).
우리 본문의 "하나님"이란 성호는 히브리 원어로 (하엘)이니 "그 능력자"란 뜻입니다. 능력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일가족으로서도 큰 나라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야곱의 일족은 이방(異邦) 애굽에서 나그네였습니다.
그렇지만 후에는 과연 이 말씀과 같이 왕성하였습니다(출1:9).
3. 본문 4절은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입니다.
1)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시는 확신은 계속됩니다.
(1)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시겠다" 고 하십니다(4절 상반).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는 것 이상 더 좋은 안전보장은 없습니다.
(2)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너') 을 인도하셔서 가나안으로 올라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4절 중반). 만일 이 약속이 없다면 야곱의 애굽 행은 본래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과 모순된 듯이 생각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분의 약속에 위반되지 않도록 자기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3) 요셉의 손에 의하여 야곱의 눈을 감기도록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4절 끝).
이 말씀도 야곱에게 큰 위안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신론적 위로입니다.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계시, 혹 하나님이 내신 지도력 계승과 관련됩니다.
또 이것은 부가적 위로, 곧 인간론적 위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자를 말년에 다시 얻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자 앞에서 세상을 떠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2) 특별히 본문 4절에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라는 이 구절이 첨부된 것은 보다 큰 방증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야곱이 자기 눈이 요셉의 손으로 감겨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 같은 소망에는 육체의 어떤 약점이 곁들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유배생활의 고통을 무마해 주기 위해서 기꺼이 응해 주셨습니다.
더욱이 눈을 감기는 관습은 아주 오래된 관습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대개 혈육으로나 인정상으로 고인과 가장 가까운 사이에 있는 사람이 담당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혹 야곱은 인간적 생각으로 말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에게 신령한 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 되십니다.
4. 본문 5-7절은
"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발행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의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비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웠고
⑥ 그 생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 자손들이 다 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⑦ 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입니다.
1) 본문 5절 초두에 '일어났다'(발행했다) 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모세는 그 환상을 통해서 새로운 원기를 되찾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전 약속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최근 추억이 시기 적절하게 다시 반복된 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가슴에 품고 그 땅과 헤어져 있다는 사실을 평안히 인내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갔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의 하인들과 하녀들이 그의 가족을 데리고 함께 왔다는 사실을 뜻할 것입니다.
그러나 떠날 때는 그런 것들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아니 조금 후에 모세는 각 지파의 인수를 열거하고서 야곱이 올 때는 겨우 70명과 함께 왔다고 부언했습니다.
어떤 자는 야곱이 기근을 당하여 종들을 해방시킬 수밖에 없었거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아니한 어떤 재난을 당하여 종들을 잃어버렸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 같은 추측은 옳지 못합니다 한 집안의 근면한 가장이었고 하나님의 물질적인 복을 그렇게 풍성히 받은 야곱이 그렇게 가난해진다거나, 종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아니하는 처지로 영락해 버린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천한 역사(賤役)에 종사할 만큼 성장하고 나서는 애굽인들에게 하인들을 빼앗겼다고 보는 것이 더 그럴 듯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충분한 수효의 하인들이 남아있지 아니했기 때문에 마음놓고 무슨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저들의 여행을 언급하면서도 모세는 그들의 종들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구절에서 추측해 보건대 그들은 종들을 두고 떠났던 것 같습니다.
2) 특별히 야곱의 일족과 및 재산(牛羊)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을 총괄적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보고 취한 행동의 결과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은 그는 이제 주저하지 않고 결단성 있게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신자가 언제든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알아야 결단성 있게 행동하게 됩니다.
창 46: 8-34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
본문에서 모세는 야곱이 애굽으로 갈 때에 함께 한자들을 자세히 말합니다(8-27).
야곱과 그 자손들이 고센에 이르러 요셉을 만난 사실을 말합니다(28-30).
요셉이 아비의 권속이 고센에 거주하도록 주선한 사실을 기록합니다(31-34).
1. 본문 8-27절은
"(8)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이 이러하니 .......
(27)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 이 칠십 명이었더라" 입니다.
야곱은 수효가 차기까지 자기 아들들과 손자들 수를 다시 세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바로는 70명이라고 했습니다.
스데반(행7:14)은 75명이라고 했는데 필경 사본가들에게서 나온 잘못이라고 믿습니다.
이에 대한 어거스틴이 주는 해답은 약점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스데반이 애굽에 나중에 태어난 세 사람을 미리 알아서 가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당시에는 더 자세한 목록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것은 부당합니다.
또 그런 해석은 나중에 보겠지만 성령께서 의도하신 바를 맞추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야곱이 임종할 그 당시 자녀들의 수효가 아니라 애굽으로 내려갈 당시 야곱 집안 사람들 수효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70명을 데리고 내려갔습니다. 또 그에게서 70명의 자녀가 났다고 한 것인데 이것은 당시 적은 수와 나중에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많은 수를 비교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좀더 분명히 예증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수 차이는 필사자의 잘못으로 보아야 합니다.
헬라어 해석가들에게서 한 구절에 오류가 끼어 들었으나 그 나머지 부분에서는 히브리해석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숫자를 말로 나타냈을 그 당시에는 한 대목쯤 잘못 표기되기가 쉬었습니다.
또 이것이 성경을 다루던 사람들이 히브리말을 잘 몰랐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그 구절 히브리 원문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고 그만 성급하게 바른 숫자를 잘못 고친 것이라 봅니다.
그러나 헬라판 성경에 친숙한 사람이 이런 경우에 누가는 그 서투르고 알아보기 어려운 구절을 그대로 따랐지 않느냐고 주장한다면 그들과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모세의 말에는 아무런 애매성이 없습니다.
또 별로 중요치 않은 문제로 인해서 왈가왈부할 이유도 없습니다.
사실 그 당시 수 표기법은 알파벳을 숫자로 대신하는 것인데, 그런 상황 하에서는 글자 하나쯤 잘못 쓰인다 해서 이상할 것이 못됩니다.
오히려 문제는 왜 이렇게 적은 수효를 모세가 기록했는가에 있습니다.
그것은 짧은 기간에 70명이 많은 수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 한 사실이 분명합니다.
또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총이 그렇게 컸다는 것을 말하려 했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모세가 이 수효를 자주 언급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교회가 이와 비슷하게 확장되어 간 것도 사람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이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야 했던 것도 모두 인간적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이삭이 죽은 후 야곱만이 교회에 남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또 그가 상당한 집안을 형성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애굽의 한 구석에 칩거(蟄居)해야 했던 일도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 마른 샘에서 그렇게 놀라운 수의 사람이 샘솟아 나왔다는 것까지 이 모두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모세는 시므온의 아들 중에는 가나안 여인의 몸에서 난 사울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아들들의 어머니는 언급도 하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사울의 후손에게는 치욕이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신앙의 조상들은 가나안 민족과 통혼하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경계를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또 모세는 레아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33명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중 32명만 언급한 것은 야곱까지 합쳐서 수를 센 것이라고 봅니다.
야곱이 레아를 통해서 그렇게 많은 자식을 갖게 되었다는 말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아들들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 가정의 가장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거기에 포함된다고 보는 히브리인들의 해석은 지나친 해석입니다. 또 딸이 둘 이상이었는가 하는 문제도 제기됩니다.
디나란 이름만 나와 있는데 이것은 그녀에게서 일어난 악명 높은 사건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셀 자손 중에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있었다고 해도 그 딸은 결혼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아내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8-30절은
"(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29) 요셉이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아비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 목 을 어긋맞겨 안고 얼마동안 울매
(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 어도 가하도다" 입니다.
1) 요셉이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이 생활 할 거처로서 고센 땅을 선정했기 때문에 야곱은 자기가 가면 미리 마련된 땅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희망합니다.
모세가 사용한 말을 보면 야곱은 자기를 위해 집과 가구를 지을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무런 방해 없이 자기 천막을 치고 살 수 있기만을 바란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작은 소망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아직 살지 않는 지역이 필요했습니다.
주민들의 목초지나 밭을 차지하면 그들에게 어떤 불화의 씨앗을 주게 될까봐서였습니다.
2) 야곱이 아들 요셉을 만나는 사건에서 모세는 그들의 뜨거운 기쁨을 피력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조상들에게도 인간 천성에서 나오는 애정이 결여되지 아니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애정들이 좋은 정신에서 우러나온다 하더라도 언제나 육체의 부패된 경향성에서부터 어떤 악한 요소를 항상 수반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들에게 이같은 결함이 있기 때문에 그 같은 애정은 언제나 한도를 벗어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감정을 말살할 필요는 없지만 적당한 한도를 지켜야 합니다.
3) 특별히 29-30절 말씀을 종합해 보면 여기서는 야곱과 요셉이 대면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에 있어서도 요셉은 얼마동안 울었다고 합니다.
또 야곱은 요셉을 보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진실한 신자 야곱의 자연 생활 한 방면을 보여줍니다.
신자가 자연 생활의 노예가 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범위 안에서 활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미 늙어서 별세할 시기가 가까운 야곱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을 만나보게 된 것이 이 세상에서는 최후 만족이라고 할 만합니다. 낮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해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3. 본문 31-34절은
"(31) 요셉이 그 형들과 아비의 권속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비의 권속이 내게로 왔는데
(32) 그들은 목자라 목축으로 업을 삼으므로 그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33)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34)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 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 입니다.
요셉은 자기 아버지에게 존경을 표하는 마음으로 마중을 나갔습니다.
1) 그리고 또 요셉은 아버지에게 참으로 유용한 것을 제공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보면 요셉은 야곱에게 모든 식구는 가축을 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왕에게서 고센 땅을 거처로 허락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요셉의 중재는 권한을 사칭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칭찬할 만합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왕의 호의를 기대했습니다.
반면에 요셉이 교묘한 구실을 생각해 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왕을 회유할 구실을 찾은 것입니다. 요셉이 바랐던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압니다. 그 당시에 고센 땅은 비옥했고 그 풍성한 초원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이 같은 이점을 감안하여 요셉은 거기에 자기 아버지를 정착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바로에게는 그 땅의 비옥성이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유를 제시합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이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인들과는 별도 장소에 살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 해결은 쉽습니다. 고센 땅의 비옥성은 왕이 대단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을 차지하려고 어떤 술수를 벌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터였습니다.
바로는 주저 없이 그들 일행에게 전국에서 제일 좋은 곳을 선택하라고 제안했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이 간교로 바로에게서 이 같은 호의를 얻어낸 것은 아닙니다.
바로는 스스로 판단을 자유로이 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고센 땅에다 거처를 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정중히 처신한 것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고 또 외국인인 사람들이 먼저 자기들은 제일 좋은 곳에 유하겠다고 나선다고 생각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그런 선택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셉은 자기 겸양과 아버지의 겸양을 생각해서 다른 이유를 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애굽인들은 목축업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요셉은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 형제들에게 적합할 것 같다고 왕에게 설명했습니다.
거기에서라면 그들이 애굽인과 섞이지 않고 조용히 기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의 조상들이 그렇게 천대를 받아 배척을 당해야 했다는 것은 역경이었습니다. 전국이 그들을 싫어한 셈입니다.
반면에 바로 이 같은 질시가 본인들에게 가장 유용한 결과를 주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애굽인들과 섞여 살았더라면 더 멀리 넓게 흩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증오 대상이 되고 함께 살 자격을 갖추지 못한 존재들로 치부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차별 대우 속에서 서로간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2) 이렇게 되어서 하나님이 세상과 구별하여 세우신 교회 집단이 분산을 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곳에 정착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으시는 의지를 가지실 경우에 하나님의 사람도 같은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흩으시는 의지를 가지실 경우에 하나님의 종도 같은 선포가 있어야 합니다.
이방 왕을 섬겨야 할 경우 하나님의 백성도 그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에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① 유, 초등부 경우도 그렇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공놀이).
② 중고등부에서도 그런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신창이 된 아이를 교회가 받지 않으려는 분위기였습니다.
교회 중직자들의 도덕선생이나 가정교사 정도로 여겨주는 것이 최상의 대우라는 분위기였 습니다. 이것이 제가 전도사 생활에서 받은 상처입니다.
③ 제가 목사로 장립 받아 목회하면서 저의 동생네 가정을 친구 황상하 목사께서 시무 하는 교회에 보냈으나 거기서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그 교회 성도들이 받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안목).
그러니까 야곱의 경우에 가나안에 정착하든지, 그곳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는 일이든지, 하나님의 의지를 따라 간다면 족할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에 원수들이라도 하나님께서 모아지는 것이 그분의 뜻이고 의지라고 여겨지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실예들이 더러 있습니다. 원수라도 같이 가야 합니다.
다윗과 사울의 경우도 그렇고, 스데반과 사울이라는 바울도 그런 경우입니다.
최상의 모본이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받도록 버려 두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도 세상의 더러움에서 깨끗이 떨어져 나와 거룩히 구별되게 하십니다
결론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우리도 세상에 매여 있게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로 향할 수 있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배려입니다.
세상과 비교할 때 교회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은 자가 신령한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자기 택하신 자들을 끌어 모으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은혜로 지도자를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 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 가게 하십니다.
이런 일을 위하여 자기 택한 백성을 부르시고 모으십니다.
이렇게 하셔서 그들 안에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만족도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셔서 교회에 주시는 신령한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