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13-18 (금신상과 참 하나님)
성경본문 : 다니엘 3: 13-18
13. 느부갓네살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 온지라
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15.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
출 처| 피영민 목사
서론
설교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에 이 말씀 가운데 관통하고 일관성 있는 원리(unifying principle)가 무엇이냐를 찾고자 합니다. 관통하는 원리는 때로 반복돼 나오는 단어 중에 있기도 하고 때로 뒤에 숨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그 관통하는 원리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구절인 경우에는 관통하는 원리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본문인 다니엘 3장을 설교할 때에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불시험으로 협박 받아도 믿음을 지켰으니 우리에게 불시험이 와도 믿음을 지켜야 된다는데 원리를 두고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저는 물론 다니엘 3장은 그런 원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측면에서 다른 원리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열어 보여주기 전에는 사람이 아무리 묵상하고 연구하고 공부해도 알 수 없는 것을 가리켜 계시라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열어보여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껌을 뒤에서 보이지 않게 손에 넣고 앞으로 내밀어 어느 손에 들어 있는지 맞추어 보라고 하면 아무리 연구해도 50%의 확률 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제가 손을 열어 보이면 오른손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입니다. 계시라는 것은 열어서 보여줌으로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존재시냐? 어떤 성품을 가진 분이시냐? 이름이 무엇이냐? 몇 분이냐? 어떤 일을 행하시느냐? 와 같은 질문은 사람이 아무리 묵상하고 연구한다 해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로써 열어보여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다니엘 3장은 하나님이 주전 7세기에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을 상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계시하는 것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생각하고 있던 신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가 생각하는하나님의 개념은 다릅니다. 이 두 가지가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다니엘 3장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느브갓네살 왕이 가진 신관과 다니엘의 세 친구가 가진 하나님의 관을 비교해서 다니엘의 세 친구 손을 들어줍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7배나 뜨겁게 타는 풀무 불에서도 능히 구원하시는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어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와 다니엘서가 일관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은 유다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된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2장 3절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시기까지에 이르렀더라”고 기록되었고, 다니엘서 1장 2절 전반에도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유다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된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은 바벨론 사람들에게는 아주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사람들이 가진 신관은 전쟁에 나가서 승리를 주는 존재가 신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나가도 패배하게 하는 신은 섬겨서는 안되는 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전쟁에서도 지게 하시고 포로로 끌려가게도 하시는 신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세 친구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느브갓네살 왕이 상상해서 만들어낸 신과는 너무나 다른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다니엘 3장을 하나님이 느브갓네살에게 올바른 신관을 가르치시는 장(chapter)으로 보아야 하느냐? 다니엘 2장 47절에서 느브갓네살 왕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다니엘 2장에 보면 느브갓네살이 신상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희한한 꿈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바벨론의 박수, 술객들을 다 모아놓고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내 꿈이 무엇인지 그것 자체를 알아맞추고 그 꿈에 대한 바른 해석을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박수, 술객들이 “세상에 그런 것을 요구한 왕은 없었나이다. 꿈을 얘기해 주시면 우리가 해석해 드리지만 꿈까지 맞추라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느브갓네살 왕이 “너희는 나를 속이는 자로다. 박수 술객을 다 죽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그 소식을 듣더니 “왕의 어명이 어찌 그리 급하시뇨?”하면서 “몇일만 기다리면 내가 왕의 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꿈에 대한 해석이 무엇인지 맞혀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기도하자 하나님이 꿈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꿈에 대한 해석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상이 있는데 신상의 머리는 금이고 두 팔은 은이며 배는 놋이고 다리는 철이며 발은 철과 흙이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상이 세워져 있는데 하늘에서 돌이 하나 날아오더니 신상을 쳐 신상은 없어져도 돌은 계속해서 모이더니 태산이 되더라는 꿈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느브갓네살에게 역사가 진행되는 방향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금왕국은 바벨론을 말하고 은왕국은 바벨론 뒤에오는 영광은 떨어지지만 강도가 강한 메대 바사 즉, 페르시아를 말하며 놋왕국은 헬라 그리스를 말하고 철왕국은 로마를 말하는데 로마는 민족과 민족이 섞이지 않고 합쳐져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있는 그런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가 금왕국에서 은왕국, 놋왕국, 철왕국으로 진행되는데 이런 왕국들은 다 사라져도 돌왕국(Kingdom of stone)은 처음에 작게 시작하지만 점점 확대되어 큰 나라를 이루고 이 돌왕국은 망하지도 아니하고 국권이 남에게도 넘어가지도 않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느브갓네살이 다니엘 2장 47절에 “너의 신은 신의 신이요 모든 왕의 주재이시로다. 다니엘아 네가 섬기는 신은 은밀한 것을 나타내는 신이시로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느브갓네살이 언제나 너의 신이라고 말하지 나의 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뭘 알긴 알아도 상당히 흐릿하게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3장의 사건을 겪고 나더니 3장 29절에 가서 신앙고백이 한층 발전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찌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어느 민족이든지 다니엘과 세 친구의 하나님을 거스려서 말하면(speak against)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아라 왜냐하면 다니엘과 세 친구의 하나님 이외에는 사람을 능히 구원할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니엘 2장 47절과 3장 29절을 비교해보면 느브갓네살이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진보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 3장은 느브갓네살 왕이 올바른 하나님 관을 갖도록 하는 하나님의 교육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느브갓네살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좀 더 알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느브갓네살의 신관
느브갓네살 왕의 신관을 알 수 있는 구절은 본문 14절과 15절 두 구절입니다.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이것이 느브갓네살 왕의 신관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의 신관은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다신론(Polytheism)자였습니다.
나는 내 신이 있고 너는 네신이 있다는 말입니다. 내신이 네신보다 강하여 내가 너를 포로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네신은 은밀한 것을 나타내는 신인지는 몰라도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는 내신보다 약하여 내신이 네신과 싸워 내가 너를 포로로 장악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느브갓네살에게 신은 종류가 많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에도 신은 종류가 많다고 생각하는 다신론자들이 있습니다.
둘째, 느브갓네살은 자기의 신은 자기에게 화육(incarnation)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신은 아니지만 자기신이 자기에게 화육했으므로 자기신의 활동은 자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느브갓네살의 신관을 내재신론(Immanence of God)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느브갓네살 왕이 신의 화육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신은 느브갓네살 이외에 밖에서는 독립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화육한 느브갓네살을 통해서만 역사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느브갓네살의 신은 느브갓네살에게 얽매어 있는 신이 되는 것이고 신의 독립성과 초월성을 상실하게 되는 신입니다.
셋째, 자신에게 화육한 신을 신상으로 만들고 자신과 동일시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14절 후반에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라고 기록되었고, 15절 후반에 그러면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내 신과 금신상과 내 손이 모두 일맥상통하고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금신상은 내신이요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 것은 내게 반역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느브갓네살은 곧 신이 자기에게 화육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은 곧 자기를 통해서 역사 안에서 역사를 이루어 가고 있다는 것이고 자기를 반역하는 것은 곧 신을 반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를 반역하는 자는 풀무불에 던져 사형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을 반역하는 자는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관이 역사상 독재자들의 신관입니다.
로마황제 가이사는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프랑스 황제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이니라”며 왕권은 신이 주신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권리는 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은 내가 곧 신이라며 자기상을 여기저기 만들어 놓고 자기를 섬기라도 했습니다. 이것은 느브갓네살과 같은 신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이 14세가 짐이 곧 국가라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다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국가장으로 어마어마하게 장례를 치르고 꽃과 금가루를 왕궁에서 뿌리며 목사님이 장례를 집례햇습니다. 집례하고 나서 목사님이 “루이 14세여 그대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대가 신이 아니라. 하나님은 따로 계시고 위대한 분은 하나님이시다.”라고 혼자 중얼거린 것을 옆사람이 듣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놨습니다.
느브갓네살은 신은 여럿인데 자기신은 강하고 자기신은 자기에게 화육했으며 자기신은 자기를 통하여 역사를 지배해 가야되고 자기신은 신상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느브갓네살이 세운 금신상은 그 모양이 자기 얼굴모습인지, 바벨론의 어떤 우상인지, 다니엘 2장의 꿈에 본 신상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금신상을 만들어 바벨론 중앙에 있는 두라평지에 신상을 세워놓고서 바벨론의 모든 고위공직자를 다 불러오라 해서 그 시대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합니다.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를 동원해 연주할 때 모두 엎드려 절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느브갓네살이 만든 신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금신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꿈에 보여준 신상은 금왕국에서 은왕국, 놋왕국, 철왕국 그리고 돌왕국으로 진행되고 돌왕국이 영원한 왕국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인데 지금 느브갓네살은 그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느브갓네살은 생각이 다릅니다. 머리도팔도 배도 다리도 발가락도 온통 다 금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신에 화육된 존재요 자신의 능력으로 바벨론 왕국을 건설했고 자신이 역사를 지배하며 자신의 왕국인 금왕국은 영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금신상은 느브갓네살왕의 신관, 역사관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느브갓네살은 우상에 대한 외적인 순종(outward obedience)만을 요구했습니다.
마음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오케스트라가 연주될 때에 엎드려 절하는 행동만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든지 마호메트를 믿든지 부처를 믿든지 공자를 믿든지 아무상관 없이 모두다 인정 해주고 단지 외적으로 절만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느브갓네살 왕의 신관으로 히브리 청년들의 신관과는 정면으로 충돌되는 것입니다.
2,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신관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다니엘 덕분에 바벨론의 도지사 지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2장 49절에 “왕이 또 다니엘의 청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도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친구를 잘 만나 바벨론의 도지사가 되어 출세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 3장에는 왜 다니엘이 빠져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다니엘이 외국에 출장 갔는지 아니면 다니엘의 원수들이 다니엘은 직접 공격하기 너무 세니 다니엘의 세 친구부터 간접적으로 공격해 다니엘의 세 친구를 넘어뜨리면 다니엘을 넘어뜨리기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3장에 다니엘은 빠져있고 다니엘의 세 친구만 나와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신관을 알 수 있는 말씀은 본문 16절로 18절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들은 나이가 20살도 안되는 소년들이지만 도지사에 올랐고 이런 단호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모두 신앙이 있고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젊다고 해서 다 미련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도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없는 사람은 지혜롭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어린 청년들이 지혜가 있고 신관이 올바릅니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만이 인간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신상이든 왕의 신이든 인간의 경배를 받을 참 신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스스로 신이라고 하는 존재들이 많습니다.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8장 5절로 6절 전반에 사도바울이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늘에 영물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아닌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물들입니다. 이 영물들이 스스로 신이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악령이 되고 악신이 되어서 스스로 신인 체 합니다. 신도 아닌 것이 신인 체 해서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속에 들어가서 무당도 되고 박수도 됩니다.
대한민국 무당들이 얼마나 신령합니까? 시퍼런 작두 위에서 춤을 쳐도 발도 안빕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이라 스스로 이름 해도 이것은 악신, 귀신, 악령, 속이는 자입니다. 하늘에도 신이라 칭하는 자들이 많고 땅에도 스스로 신이라 칭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김일성, 네로, 히틀러, 루이14세, 가이사 아구스도, 모두 스스로 신이라 칭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도다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요 그분이 창조자시요 그분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귀신이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은 느브갓네살 왕이나 어떤 인간에게 화육하지 않았습니다.
독립하신 하나님이요 초월하신 하나님이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심으로 풀무불속에서도 능히 구원하시거니와 설사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금신상에는 절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과 세 친구는 살든지 죽든지 관계없이 신은 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은 독립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립(independence)하신 분이시요 자존(self-sufficiency)하신 분이시요 역사 위에계신 하나님이시요 역사의 계획을 가지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시요 피조물 위에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느브갓네살에게 화육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화육(incarnation)하신 단 한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다른 존재가 “내게 신이 와서 내가 신이 됐다.”고 하면 그는 어리석은 자로 가짜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시기 이전에도 존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면서 비로소 존재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알파요 오메가이십니다. 선재성(pre-existence)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화육하기 전에도 예수님은 존재하셨던 분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속에 들어갔을 때에, 성육신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풀무불속에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풀무불을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해도 그들을 태울 수가 없었습니다. 느브갓네살이 불속을 들여다보니 이상하게도 세 명을 결박해서 던졌는데 결박이 다 풀어지고 네 명이 불속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브갓네살이 가만히 보니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다니엘 3장 25절에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풀무불을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 하시니 그들이 걸어서 살아나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있는 것이지 느브갓네살에게 화육했다가 네로에게 화육했다가 루이 14세에게 화육했다가 김일성에게 화육했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육신(incarnation)은 단 한분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형상이나 우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형상이나 우상으로 만들었다면 이미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십계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제이 계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4절로 5절 전반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만드는 것도 죄고 절하는 것도 죄고 섬기는 것도 죄입니다. 하늘에 있는 형상이나 땅위에 있는 형상이나 물속에 있는 형상이나 아무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조상숭배를 합니다. 조상이 돌아가시면 조상사진을 갖다 놓고 그 앞에다가 음식을 차려놓고 거기서 무릎 굽혀 절합니다. 그리고 조상님 잡수시라고 음식을 차려놓습니다. 그런데 육신이 없는 돌아가신 분이 음식을 잡수신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사상입니다. 만약 조상님이 오셔서 우리의 절을 받으신다면 우리는 섬겨야 됩니다. 그러나 조상님은 이미 육신은 땅으로 가셨고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 중 한 군데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조상님은 그 자리에 오시지 못합니다. 그 자리에 와서 절을 받는 것은 바로 하늘에서 신이라 칭하는 귀신들이 받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받으시면 우리가 조상을 섬겨야 됩니다. 그러나 조상이 받지 못합니다. 귀신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
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조상님이 돌아가시면 하나님께 예배하고 조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며 조상님의 은덕을 기리고 조상님을 생각하는 것이 바른 자세 인줄로 믿습니다. 그러지 않고 하나님 아닌 존재에 무릎 꿇어 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부모님께는 절해도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부모님께는 하나님과 같은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분에게 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에게 절하라. 절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해도 절하지 못하겠다고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넷째, 하나님은 마음으로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은 외적으로 몸을 굽혀서 섬기는 외적인 순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섬기고 사랑해야 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고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본문 17절로 18절에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참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자세로 굽혀 절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참된 종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안믿는데 입은 시인하는 것은 위선(hypocrisy)입니다. 위선으로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결론
결국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 아들의 보호로 7배나 뜨거운 풀무불에서도 구원받았습니다. 그 뜨거운 풀무불속에서 살아난 것을 기적이 아니라고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느브갓네살 왕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자신의 권세에 얽매어 계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역사는 자기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초월하신 하나님, 독립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역사란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권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원래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것입니다.
역사(history)는 그분의(his) 이야기(story)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역사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빼버렸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인문과학이 되어 버렸습니다. 문리과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합니다. 하나님을 빼고 역사적인 사실(fact)만 공부합니다. 그래서 역사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다시 신학으로 와야 됩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작정(Decree of God)된 계획을 가지고 그 뜻을 펼쳐나가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저는 대학 다닐 때 우리 역사가 이렇게 가면 어떻게 하는가 생각하며 데모를 많이 했습니다.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데모를 하다 혼이 나고 역사는 내가 데모한다고 바로잡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역사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구나. 나는 그냥 살면 되는 것이고 역사를 운행하는 분은 따로 계시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역사가 얼마나 흉흉합니까? 마치 명랑대첩을 했던 진도 앞바다 같은 급물살로 역사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무엇이 바른 것인지 헷갈립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독립하시고 자존하시며 초월하시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계획을 가지고 다 운행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역사를 바르게 운행하실 줄로 믿습니다.”하고 하나님 안에서 안정을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젖 뗀 어린 아이가 안정을 누리듯이 그렇게 평안한 심정으로 역사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바벨론의 원리를 거부해야 됩니다. 다신론을 거부하고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그리고 신이 화육했다며 자기가 신이라고 하는 사람을 신처럼 높이는 일을 거부해야 됩니다. 사람을 신처럼 높이는 것은 바벨론의 원리입니다. 다신론도 바벨론의 원리입니다. 또한 우상숭배하고 섬기고 절하는 것은 바벨론의 원리입니다. 종교를 마음으로 하지 아니하고 외형적으로만 하는 것은 다 바벨론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벨론의 원리를 거절해야 됩니다. 자신을 신처럼 높이는 일은 거부해야 됩니다. 목사님은 말씀을 연구해서 전하는 주의 종이지 신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슨 권세나 지혜나 능력이 있어도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신 것이라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사는 사람은 살아도 저주되고 죽으면 더 저주되는 것입니다. 죽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사는 것이 가장 우둔하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해 내셨듯이 오늘도 죄인의 영혼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영원한 불못의 형벌에서 건져내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서서 죄인들의 죄값을 십자가 피값으로 청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십시오.” “죄인들아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지 말고 하나님과 화목하여 살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중보자는 한 분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 다른 이름은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삶이냐? 성경에 하나님이 계시하신 바로는 예수 믿고 하나님과 화목하여 살고 살든지 죽든지 마음으로 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공경하고 수종들며 사는 것이 인간이 살 수 있는 최고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우상을 멀리하고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며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