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화엄경 강설 34】 14
(15) 게송으로 그 뜻을 거듭 설하다
<1> 환희지에 머무는 뜻
爾時에 金剛藏菩薩이 欲重宣其義하사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금강장보살이 이 뜻을 다시 펴려고 게송으로 설하였습니다.
若人集衆善하야 具足白淨法하면
供養天人尊하야 隨順慈悲道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 가지 선행을 닦아
청정한 법[白淨法]을 구족하면
천신과 인간의 어른께 공양하여
자비의 길을 수순하리라.
▶강설 ; 제1 환희지에 대한 장문으로서의 설법은 다 끝나고 다시 게송으로 거듭 밝힌다. 청정하고 훌륭한 법을 구족하려면 여러 가지 선행을 닦아 익히는 것밖에 없다. 여러 가지 선행을 닦아 익히면 천신들에게서나 사람들에게서 가장 높으신 어른, 즉 부처님께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해서 자비의 길을 수순함이 되리라.
信解極廣大하고 志樂亦淸淨하야
爲求佛智慧하야 發此無上心이로다
믿음과 이해가 지극히 광대하고
마음에 좋아함도 또한 청정하여
부처님 지혜 구하려고
가장 높고 높은 마음 발하였도다.
▶강설 ; 환희지에 머문 보살은 믿음과 이해와 마음으로 추구하는 의지가 모두 광대하고 훌륭하다. 그것으로 궁극에는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여 부처님처럼 산다. 그것은 참으로 가장 높고 고귀한 마음이다.
淨一切智力과 及以無所畏하야
成就諸佛法하며 救攝群生衆이로다
일체 지혜의 힘과
두려움 없음을 청정하게 닦아
모든 부처님의 법 성취하며
온갖 중생들을 구제하도다.
▶강설 ; 보살이 환희지에 머물면서 일체지혜와 네 가지 두려움 없음을 청정하게 잘 닦아서 끝내는 모든 부처님의 법을 다 성취하고 나아가서 일체중생들을 모두 제도한다. 이것이 환희지보살뿐 아니라 모든 보살의 원력이며 꿈이다.
爲得大慈悲하고 及轉勝法輪하며
嚴淨佛國土하야 發此最勝心이로다
큰 자비를 얻고
수승한 법륜을 굴리며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려고
가장 수승한 마음을 내도다.
▶강설 ; 또 환희에 머문 보살은 중생을 가르치고 교화하기 위해서 큰 자비심을 일으켜 수많은 불법 중에서도 가장 수승한 법을 설해준다. 가장 수승한 법을 설해주면 설하는 사람도 큰 복이 되고, 설법을 듣는 사람도 가장 큰 혜택을 입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정직하고 선량하게 해서 살기 좋은 곳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이야말로 가장 수승한 마음이다.
一念知三世호대 而無有分別하야
種種時不同을 以示於世間이로다
한 생각에 과거 현재 비래를 알되
알면서도 아무런 분별이 없고
가지가지 시간이 같지 않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도다.
▶강설 ; 화엄경에서 시간에 대해서는 한 순간이 곧 한량없는 겁이고 한량없는 겁이 곧 한 순간이다.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도 각각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다. 그리고 앞에 나타난 일념과 같이 구세(九世)와 십세(十世)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略說求諸佛의 一切勝功德하야
發生廣大心하니 量等虛空界로다
간략히 말하면 모든 부처님의
일체 수승한 공덕을 구하려고
광대한 마음을 내었으니
그 양이 허공계와 평등하도다.
▶강설 ; 불법을 공부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본래로 갖춰져 있는 부처님의 일체 수승한 공덕을 구하기 위함이다. 부처님의 일체 수승한 공덕을 가하려면 저 허공계와 같은 광대한 마음을 내야 가능한 일이다.
悲先慧爲主하야 方便共相應하며
信解淸淨心은 如來無量力과
자비가 선도하고 지혜가 으뜸이 되어
방편들과 함께 상응하며
믿고 아는 청정한 마음은
여래의 한량없는 힘이로다.
▶강설 ; 불교는 자비와 지혜와 교화하는 방편과 믿고 이해하는 청정한 마음이 합하여 여래의 한량없는 힘이 된 것이다.
無礙智現前에 自悟不由他라
具足同如來하야 發此最勝心이로다
걸림이 없는 지혜가 앞에 나타남은
스스로 깨닫고 남을 인함이 아니로다.
본래 구족한 것이 여래와 같아
이러한 가장 수승한 마음을 내었도다.
▶강설 ; 불법을 수행하는 것은 자신에게 본래로 갖추고 있는 걸림이 없는 지혜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스스로 깨닫는 것이요 결코 다른 사람을 인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걸림 없는 지혜를 본래 구족한 것이 곧 여래가 정각을 이룬 뒤 드러난 그 지혜와 동일하다. 이러한 이해는 실로 가장 수승한 마음을 낸 것이다.
佛子始發生 如是妙寶心하면
則超凡夫位하야 入佛所行處로다
불자들이 처음으로
이와 같은 미묘한 보배마음 낼 적에
범부의 지위를 초월하여
부처의 행한 곳에 들어갔도다.
▶강설 ; 깨달음을 위하여 처음 마음을 발하였을 때에 이미 정각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그 처음 마음을 낸 것은 참으로 미묘한 마음이며 보배마음이다. 그 마음은 이미 범부의 지위를 초월하였다. 그대로가 부처님이 행하신 바로 그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화엄경에 초발심공덕에 대한 매우 장황한 설법이 있다.
生在如來家에 種族無瑕玷하며
與佛共平等하야 決成無上覺이로다
여래의 가문에 태어나서
그 종족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고
부처님과 평등하게
가장 높은 깨달음을 이루리라.
▶강설 ; 환희지에 머문 보살은 이미 여래의 가문에 태어나서 그 종족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고 부처님과 평등하게 가장 높은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 여래의 가문이란 세속적인 김 씨나 이 씨나 박 씨와 같은 그런 가문이 아니다. 불법에 의해서 불법의 마음으로 불법의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한다.
纔生如是心에 卽得入初地하야
志樂不可動이 譬如大山王이로다
이와 같은 마음을 겨우 내고는
곧 초지 중에 들어가서
그 뜻의 즐거움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비유컨대 수미산과 같도다.
▶강설 ; 환희지에 머물면 불법의 즐거움을 움직일 수 없다. 마치 저 수미산을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자라면 환희지는 모른다하더라도 화엄경과 깊은 인연을 맺어서 태산부동의 신심을 가져야 한다. 화엄경을 공부했을 때 비로소 불자가 되기 때문이다.
<2> 환희지라는 이름을 해석하다
多喜多愛樂하며 亦復多淨信과
極大勇猛心과 及以慶躍心이로다
많이 기쁘고 많이 즐거우며
또한 다시 많고 청정한 신심과
지극히 큰 용맹심과
뛸 듯이 경사스럽고 기쁜 마음이로다.
▶강설 ; 환희지를 왜 환희지라고 하는가. 환희지에 머물면 기쁨도 많고, 즐거움도 많고, 청정한 믿음도 많고, 지극하고 큰 용맹심도 많다. 그래서 뛸 듯이 경사스럽다. 실로 진리의 가르침에 대한 참다운 신심을 일으키면 그 기쁨은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다.
청량스님은 “화엄경을 만나고 보니 어찌 뛸 듯이 기뻐하지 않겠는가[豈無慶躍].”라고 하였다. 다시 그 말을 부연해서 설명하기를 “내 목숨 바쳐 그 죽을 곳을 얻었다[亡軀得其死所].”라고 하였다.
遠離於鬪諍과 惱害及瞋恚하고
慚敬而質直하야 善守護諸根이로다
다투거나 해치거나
성내는 일 멀리 여의었고
뉘우치고 공경하고 순박하고 정직하여
모든 근(根)을 잘 수호하도다.
▶강설 ; 초지에 이르러 환희하는 보살은 남과 다투고, 남을 해치고, 스스로 성내고 하는 일을 멀리 떠났다. 오직 뉘우치고, 남을 공경하고, 순박하고, 정직하여 나를 이루고 있는 6근을 잘 수호한다.
救世無等者의 所有衆智慧를
此處我當得일새 憶念生歡喜로다
세상을 구제하는 짝할 이 없는 분의
가지신 여러 가지 지혜를
이 경지에서 내가 마땅히 얻어
생각하고 환희하도다.
▶강설 ; 초지에 이른 보살은 정각을 성취하신 부처님의 지혜를 반드시 얻어 그것을 잘 기억하고 깊이 사유하며 크게 환희한다. 이것이 환희지의 뜻이다.
始得入初地에 卽超五怖畏하나니
不活死惡名과 惡趣衆威德이로다
비로소 초지에 처음 들어가
곧바로 다섯 공포 초월하나니
살 수 없고, 죽는 일과 나쁜 누명과
나쁜 갈래와 대중들의 위덕이로다.
▶강설 ; 환희지를 얻은 뜻은 다섯 가지 공포를 멀리 떠난 점이다. 그 다섯 가지 공포란 살지 못할까하는 공포와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공포와 좋지 못한 소문에 대한 공포와 악한 길에서 허덕이는 공포와 자신보다 뛰어난 대중들의 위덕에 압도당하는 공포들이다. 환희지에서는 이러한 다섯 가지 공포를 떠나서 환희하는 것이다.
以不貪着我와 及以於我所일새
是諸佛子等이 遠離諸怖畏로다
나와
내 것을 탐착하지 않으니
이와 같은 모든 불자들이
모든 공포 멀리 떠났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