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 선물은 부채, 동지 선물은 책력(冊曆)"이란 옛말이 있습니다. 책력은 달력을 뜻하는 옛말이죠. 동지는 양력으로 12월 말이라 이 풍습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셈입니다. 새해를 앞두고 달력을 선물로 주고받으니까요. 최근에는 인기 캐릭터 펭수가 나오는 달력이 유독 인기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달력은 임금님이 하사하는 귀중품이었어요.
◇임금이 하사한 달력
조선시대 책력은 날짜와 시간을 정하는 권력의 상징이었으며 국왕의 하사품이었습니다. 인기 있는 선물 품목이기도 했지요. 우리 조상들은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역법(曆法·달력을 만드는 법)을 받아들여 책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조선 세종 때인 1442년 중국과 한반도의 위치 차이로 인한 시간 오차를 개선한 역법을 책으로 만듭니다.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인데요. 이를 바탕으로 조선만의 독자적인 책력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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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픽=김윤지
책력은 서운관, 세조 이후 관상감에서 금속활자나 나무 활자로 찍어서 선물용으로 배포했습니다. 돈을 받고 판 것이 아니라 임금이 하사하는 방식이었어요. 이를 '반사(頒賜)'라고 했습니다. 관상감에서 동짓날 새 책력을 만들어 궁중에 바치면 임금은 신하들에게 나누어 줬고, 관상감에서도 직접 각 관청에 나눠 줬어요. 그러면 관청 직원들은 동지 선물로 책력을 친지들에게 보냈지요. 조선 초기에는 매년 책력 약 1만부를 중앙 및 지방 관아와 종친에게 반사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30만부까지 크게 늘었습니다.
책력은 한 해 24절기와 날짜를 알려줍니다. 24절기는 농업이 중심 산업이었던 전통 사회에서 백성들에게 중요한 일정이었습니다. 또 책력은 농사를 언제 어떻게 지어야 할지 같은 일상에 필요한 정보도 제공했습니다. 달력을 만들어 배포하는 것은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달력 위조하면 중범죄
조선 제22대 왕 정조 때인 1777년 2월 책력을 만드는 관상감에 소속된 노복 이똥이가 관인(官印)을 위조하고 사사로이 책력을 인쇄했다는 죄로 사형당할 상황이 됩니다. 정조는 그가 책력을 사사로이 인쇄한 것은 부족한 관청 물건의 수량을 채우기 위했던 것이니 사형은 면해주고, 엄한 벌을 내리고 유배 보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처럼 책력을 함부로 하거나 사사로이 만드는 자를 엄하게 처벌했습니다. 당시 중국의 천자는 책력을 해마다 반포하고 그 책력을 이웃 나라에 보내 사용하게 해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고 했어요. 조선에서는 천자의 권위를 대신해 국왕이 책력을 만들었죠. 책력을 사사로이 만드는 것은 이런 질서에 도전하는 행위라 보고 엄하게 처벌한 것이죠.
◇아라비아숫자 들어간 달력, 1930년대 등장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처럼 양력 날짜가 적힌 달력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95년이에요. 고종이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공포하면서 음력 날짜 아래에 양력 날짜를 적어 넣게 되었지요. 이때는 아라비아숫자가 아니라 한자로 연월일을 표시했어요.
아라비아숫자가 나오는 근대식 달력은 193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 보급됐습니다. 한 장에 열두 달이 모두 나와 있는 연력(年曆), 매일 한 장씩 떼어내는 일력(日曆)과 한 달에 한 번씩 떼어내는 월력(月曆)이 이 시기 모두 등장합니다. 이후 1950년대 기업 홍보용 무료 달력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집마다 달력을 두고 생활하게 되지요.
[조선시대엔 열흘에 한번 쉬었죠]
지금처럼 한 해가 1주 7일, 총 52주로 나뉘는 방식은 서양식 달력에서 나왔습니다. 일요일에 쉰다는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요?
태종실록에 "매월 순휴(旬休)에 각 1일씩 휴무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순휴는 열흘에 한 번씩 쉬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삼가일(三暇日)이라고도 불렀어요. 음력은 한 달이 29~30일이니 한 달에 세 번꼴로 쉬었던 겁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1년에 공휴일은 3일이었습니다. 음력 기준으로 3월 3일 삼짇날, 5월 5일 단오와 9월 9일 중양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