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 아니까
요즘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느낌 아니까 라는 말이 유행한다. 개그 프로이기 때문에 주인공 김지민 씨의 ‘느낌 아니까, 내가 한다’는 상황은 대개 점잖지 못하고 우스꽝스러운 연기다. 그런데 이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매력적인 말이다. ‘느낌을 안다’는 말은 경험을 해서 확실히 몸과 마음으로 느꼈고 그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느낌을 안다’는 말은 내가 ‘이미 경험 해봐서 확실히 안다’는 말과 같다. 그것을 함축하는 말이 바로 ‘느낌’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느낌과 경험보다는 지식과 말이다. 느낌은 이성에 비해 지극히 불완전한 것으로 비춰진다. 그것은 그것이 주관적 경험이기 때문에 말과 지식처럼 객관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느낌이라는 말은 경험은 물론 감각, 직관과 닿아 있는 말이다. 그것은 논리적이기 않다. 대신 직접적이다. 이성이 간접적인 반면 느낌은 감각, 직관, 경험은 직접적이다. 이 직접성의 경험이야말로 삶에서 소중한 지식이 아닐까? ‘느낌 아니까’는 우리의 삶이 이성에 따르기보다 경험 안에 담긴 감각과, 직관과 감정인 느낌에 따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느낌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오히려 우리는 생각 좀 하며 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들의 무사고적 행동에 대해 좌절하지 않는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이성적으로 대비하는 삶을 살라고 말한다. 경험보다는 지식에 의해 미리 판단하고 안전한 방식의 삶을 권유한다. 그럴 때 경험은 미리 계산된 경험이기 일쑤다. 즉 개인의 독창적인 경험이 아니라 유통가능한 경험이다. 그러므로 ‘느낌을 알고 하는 것’과 그냥 ‘알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는 앎을 경험 위에 두고 판단하고 행동하려 하지만 사실 삶은 앎이 아니라, ‘삶’이라는 말 자체가 가지고 있듯 ‘살아감’ 즉 경험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이성에 의해 느낌을 무시하며 살도록 길들여져 왔다. 그래서 내적 욕구와 직관을 애써 무시하고 외적 지식과 합리에 복종하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외적 지식과 합리란 자본주의적 지식체계 일색이 아닌가?
요즘은 도처에서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느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고, 살아 있는 느낌을 가지고 싶다. 그리고 긍정적인 느낌 곧 행복한 느낌을 가질 때 공부든 일이든 더 잘되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느낌을 복권시키는 일은 더디고 지난하다.
삶을 변혁시키는 길은 이성적 판단보다 어쩌면 자기 느낌에 대한 자각과 실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느낌이 살아 있어야 한다.
첫댓글 문화가 원래 자폐적인 성격이 있어요. 일종의 동어반복처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지나치게 구심점에 매달리면 경향이 심한 거고, 원심성이 강하면 산만하다고 하는 거고. ㅋ